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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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헨리 제임스 『한 여인의 초상』(전2권), 창비 2013

사랑스런 이저벨은 어떻게 실패했는가

 

 

권여선 權汝宣

소설가 puruntm@empas.com

 

 

164_467『한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 유명숙·유희석 옮김)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도 잃은 이저벨이 보호자인 리디아 이모의 초청으로 영국에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진취적인 미국 여성답게 자유와 독립을 중시하고, 세상을 겪지 못한 청춘답게 삶의 경험, 즉 인생에 직면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사촌오빠의 친구인 워버턴 경의 구혼과 미국에서 그녀를 따라온 굿우드 씨의 청혼을 차례로 거절한다. 이모부가 죽고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 이저벨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겠다는 목표 아래 이모와 함께 프랑스와 이딸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행운은 곧 불운의 씨앗이 되는데, 부유한 그녀를 이용하려는 마담 멀과 오즈먼드의 협잡으로 마침내 그녀는 오즈먼드와 결혼하고 그로 인해 끝없는 괴로움을 겪게 된다.

요약하자면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 이런저런 구혼과 연애 과정을 거쳐 불행한 결혼에 빠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이 매우 범속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줄지 모르겠다. 이러한 줄거리 요약이 틀린 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소설이 범속하거나 고리타분한 것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19세기 소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라는 사실이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혀놓았듯이 이 소설은 이저벨 아처라는 매력적인 인물로부터 탄생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저절로 ‘오, 이저벨!’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그녀는 우리의 자매나 누이처럼 생동하는 친밀성을 가진 캐릭터이다. 독자는 이저벨의 웃음과 활기와 자신감, 자가당착과 우매와 비탄의 행보를 낱낱이 함께하게 된다. 자신의 판단과 행위에 언제나 당당히 주관적 이론을 제시하던 그녀가 오즈먼드와 결혼하는 과정에서는 뭔가 석연치 않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 대목에서 독자는 그녀의 어리석음과 밉살스러움을 내 가족의 경우처럼 동시적으로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의 공유는 인물의 생동성 외에도 작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독특한 내면묘사 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1881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시기상으로, 제임스를 일약 인기작가로 만든 『데이지 밀러』(Daisy Miller, 1878)와 환상소설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 1898) 사이에 놓여 있는데, 미국 여성의 유럽 진출기이자 ‘국제주제’(international theme)라는 내용 면에서는 전자와 공유하는 지점이 크고, 내면과 의식의 선명한 장면화라는 기법 면에서는 후자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제임스는 기나긴 장편의 유장한 흐름 속에, 흡사 달리던 마차도 멈추게 할 만큼 놀라운 문체의 힘으로 명경(明鏡)처럼 빛나는 장면을 곳곳에 구축해놓았다. 작가가 서문에서 대표적으로 언급한, 이저벨이 처음 마담 멀을 만나 매혹되는 장면이라든가, 남편과 마담 멀의 불길한 눈빛 때문에 번민에 빠지는 ‘철야(徹夜) 장면’은 그 탁월한 예가 될 것이다. 이저벨의 오판과 그에 따른 결과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같은 아기자기한 수준의 오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쓰라리고 지독한 것인데, 제임스는 그러한 이저벨의 비극적인 상황을 오로지 그녀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위험천만하고 주도면밀한 방식으로 장면화한다.

이 불길한 장면의 비밀은 이저벨이 자기 자신 속의 어둠을, 여성 내부에 도사린 치명적인 덫을 통렬하게 인식한다는 데 있다. 앞서 그녀가 워버턴과 굿우드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오즈먼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오즈먼드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편협하고 무자비한 남성이기에 그녀는 그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존재감이 없는 척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녀가 이토록 멍청해질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은 영리함과 멍청함의 문제가 아니며 그래서 더 문제적이다.

이저벨의 불행은 사랑에 내재한 기만적인 환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국 귀족이자 재산가인 워버턴 경과 미국 부르주아 신사인 굿우드 씨는 나름대로 결핍이 없는 완벽한 신랑감들이다. 이저벨이 그들의 구혼을 거절한 까닭은, 겉으로 내세운 자유와 독립 때문이라기보다 돈도 없는 자신이 그들과 결혼하면 그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한낱 귀여운 장식품 정도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자존심의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담 멀의 감언이설에 속아 오즈먼드 씨를 더없이 훌륭한 인격자로 믿게 된 이저벨은, 그가 재산도 없고 혼자서 딸을 키우는 상처한 홀아비이므로 이제는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자신이 그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는 헌신과 희생의 환상에 고무된다. “그를 위해 배를 띄우”고 “그의 수호신이 되리라”(2권, 189면)라는 모성적인 관념은, 평소에 그녀가 주장하던 자유나 독립과 대척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런 자립적 환상에 봉사한다. 집요하고 유구한 퇴락적 환상이 건강하고 소박한 진보적 환상을 좀먹고 변질시킨다. 사실 모든 사랑의 기저에는 이토록 기형적인 모순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특히 현실에 어두운 채 이론만을 신봉해온 똑똑하고 순진한 여성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기제이다. 이저벨은 비로소 자기 손으로 “자신의 삶을 내던졌다”(2권, 199면)라는, 자신을 빠뜨릴 함정을 스스로가 파놓았다는 깨달음에 직면한다. 촛불이 다 타서 녹아내릴 때까지 번민에 사로잡혀 자기를 철저히 해부하는 이저벨의 ‘철야 장면’은 문학사에서 가장 어둡게 빛나며 가장 심오하고 투명한 ‘여인의 내면적 초상’이다.

헨리 제임스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나 마르셀 프루스뜨(Marcel Proust)에 앞서 심리묘사와 의식의 흐름을 선구적으로 도입한 작가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심리묘사나 의식의 흐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인물의 내면 속에서 서로 충돌하고 길항하는 현실적인 이데올로기들의 각축을 보여주는 데 있다. 번민하는 이저벨의 내면에는 거침없는 에너지로 충만한 미국식 이데올로기의 조야함과 소박함, 여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추상적 기치 아래 은폐된 유구한 모성적 환상과 허위의식, 낡았으나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유럽식 미적 취향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와 모방욕 등 당시 미국과 유럽 사이에 걸쳐 있던 각종 모순적 이데올로기의 편린들이 날카롭게 모자이크되어 있다.

이저벨의 오판은 한 개인의 실수나 착각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신대륙과 구대륙의 문화적 전통 및 사회적 변화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난 경계선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실패인 것처럼 보인다. 종종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인물들을 통해 ‘국제주제’를 자신의 테마로 선보인 바 있는 제임스는 그 경계선의 미묘하게 겹치고 어긋나는 지점들을 주인공의 경험적 지반으로 만듦으로써, 양 대륙의 문명과 세계관의 단애(斷崖)가 그들의 내면에 고스란히 새겨지도록 하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심리묘사를 성취한다. 하물며 그것을 ‘초상’이라는 제목에 값하는 치밀하고 자재(自在)한 필치로 그림처럼 그려놓았음에랴.

고전적인 구성과 현대적인 심리의 장면화에 영국식 유머까지 곁들여지면서 독자들은 기꺼이 이저벨 아처 양과 더불어 19세기 미국과 유럽으로 초청된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면서 마치 은밀한 내실(內室)을 엿보듯, 현실의 시험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져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망가뜨린 한 여성의 불행한 내면세계를 두 손 놓고 목도하게 된다. 어떤 비밀의 누설이나 플롯의 기교에 기대지 않고 이토록 무시무시한 의식의 흐름을 ‘한 여인의 초상’으로 제시한 제임스는 『안나 까레니나』(Anna Karenina)의 똘스또이(L. N. Tolstoy)에 비견될 만한 진정한 내면묘사의 대가이자 비정한 리얼리스트임에 틀림없다.

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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