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이우성·임형택 편역 『이조한문단편집』, 창비 2018
우리가 물려받은 이야기 보물단지
성석제 成碩濟
소설가 songsokze@hanmail.net
조선시대의 인물과 그들의 행적, 일화와 이야기를 담은 『이조한문단편집』(전4권)이 45년 만에 재간되었다. 한자 원문이 담겨 있는 4권을 제외하고도 세권이나 되는 두꺼운 책을 언제 읽으랴 하고 첫장을 펼쳤는데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며칠 만에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이 책은 주로 조선시대에 간행된 『동패낙송』 『삽교별집』 『청구야담』 같은 화집에서 발굴한 작품을 부(富), 성(性)과 정(情), 세태, 민중기질, 별집으로 분류하여 싣고 말미에 연암 박지원의 소설을 넣었는데 이러한 분류는 재간본도 같다. 분류를 일별하는 것으로도 이 책이 처음 나온 1973년이나 이 책의 원전인 화집들이 발간된 17~19세기에나, 지금에나, 사람의 마음과 관심사며 인생사의 무상함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미래에까지도.
그동안 내가 읽어온 조선에 관한, 조선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은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황현의 『매천야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강효석의 『대동기문』, 그외 다종다양한 개인의 문집 같은 것들로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인데 한문으로 씌어지고 번역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즉 한문학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씌어지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읽힌 한문학은 한글로 번역이 되어야만 오늘날의 독자가 읽을 수 있다. 외국어로 쓰인 문학작품은 번역과 역자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이게 되는데 번역서를 읽을 때 늘 역자를 살펴보는 것은 이런 연유다. 『이조한문단편집』은 번역된 문장이 쉽고 자연스러우며 잘 다듬어져 어색한 곳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격조 면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이조한문단편집』이 초간된 이후 4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근대, 특히 조선에 대한 정보와 지식, 출간된 책, 학문적 축적은 몰라보리만큼 달라졌다. 1990년대에 『조선왕조실록』이 완간되어 CD롬으로 제작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조선이라는 거대한 박물적 세계에 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자료가 속속 공개되었고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학자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상황이 바뀌었다. 그간 학문적인 성과와 대중의 관심도의 변화를 『이조한문단편집』 역시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고 그러한 결과로 이번의 판본에서 훨씬 더 풍부하고도 정교한 번역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별집으로 수록된 연암 소설은 40여년 전 내가 중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것들이다. 당시에도 연암의 소설을 읽고 음미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한문 투 그대로의 표현이 있어서 어린 마음에도 거슬리는 점이 없지 않았다. 『이조한문단편집』의 번역은 초간본의 내용을 5년에 걸쳐 젊은 연구자들과 독회 방식으로 진행하여 그간의 진보된 학술정보에 도움받고 젊은 언어감각을 수용하였다 하니 지금의 중학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원저자들은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남성이며 중인 이상의 신분이고 시속과 사람의 오욕칠정, 세태에 대해 큰 관심이 있는 작가들이다. 작가의 시선은 역사가나 문사에 비해 훨씬 가치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하다. 작가는 느린 걸음으로 세상의 뒷골목을 오가며 여염 속의 세세하고 미시적인 것들에 삶과 우주를 슬쩍 유비시키는 재주를 부린다. 역사에 등장하지 않고 저명한 문사들의 붓끝에는 오르지 않던 사람들이 꿈꾸고 바라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먹고 입고 사랑하는 방식이 노천광의 광물처럼 드러나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지식인 남성들이 지닌 성적 환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알 듯 모를 듯한 단어나 개념에 대해 달려 있는 간략한 주석은 책을 읽는 속도를 늦추지 않게 하면서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본문 안에도 수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데 예컨대 「순흥 만석꾼(順興 萬石君)」에서 사냥이 취미인 주인이 “매를 팔목에 앉히고 사냥개를 몰고 5, 6인 건장한 노복들과 함께 돌아오는데, 몸집이 크고 의관이 훌륭하여 아주 위의 있어 보였다” 같은 묘사가 그런 것이다.
『이조한문단편집』에 들어 있는 작품들은 “주관적으로 소설에 대한 장르의식이 확립되지 못했지만 (…) 새로운 감각에 문제성을 담은 단편소설적인 성격을 띠게 된”(「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작품 해설) 것들이 대부분이다. 원전의 제목에 들어 있는 것처럼 야담이든 한담이든 잡기이든 잠을 쫓기 위한 것이든 이 종(種)의 생김새는 이야기(‘話集’의 話)와 현대소설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시킬 수 있는데 내용은 오늘날의 단편소설이 지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의 성패는 그것이 얼마나 사실과 여실하며 박력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좋은 작품은 당대 수많은 사람들의 감개를 대변하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박수치고 눈물을 훔치게 만들며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만이 가진 비루함과 거룩함 사이의 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조한문단편집』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한 것은 편역자들의 탁월한 안목 덕분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원전을 지은 수많은 작가들, 유무명의 선비와 여항의 작가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기꺼움이다. 박지원이나 이옥처럼 이미 널리 알려진 사람도 있고 성대중, 성현, 조수삼, 유득공, 조희룡처럼 반가운 이름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물들로, 오늘날의 원고료나 문명(文名) 같은 댓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후손과 후학들에게 엄청난 보물을 남겨놓았다. 이 어찌 눈에 보이는 탑이나 건축물, 조각만 못하다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