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최인훈 선생의 마지막 병상을 방문하고
정철훈 鄭喆熏
1959년 광주 출생. 전 국민일보 문학전문기자·논설위원.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모든 복은 소년에게』 등이 있음.
소설가 최인훈(崔仁勳, 1936~2018) 선생이 지하철 3호선 화정역 부근 명지병원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2018년 6월 24일 오후였다. 지난해 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왔으나 임종이 가까운 것 같다고, 선생의 서울예대 제자인 이나미 작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일주일을 꼼지락거리며 뭉개고 있다가 7월 3일, 아침도 거른 채 선생을 뵈러 갔다.
선생에게 직접 글을 배운 적이 없는 터라 딱히 사제지간도 아닌 내가 그를 정신적인 아버지로 자인하게 된 것은 그가 쓴 소설 「광장」(1960)을 읽은 이후부터다. 물론 내 생물학적 아버지도 전쟁을 겪은 전후세대이긴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처참한 현실적 상황과 이에 따른 정신적 상처와 우울 등을 인간존재의 부조리라는 측면에서 파악하고 형상화한 1950년대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경향을 일컬어 전후세대문학이라고 할 때 선생은 마지막 전후세대 작가였다.
선생이 23세이던 1959년 단편 「GREY 구락부 전말기」가 안수길의 추천을 받아 『자유문학』 10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해 같은 잡지 12월호에 「라울전」이 추천받아 문단에 나왔는데, 1959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이래 쭉 작가로 살아온 선생은 올해로 등단 60년이기도 했다.
침상 곁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을 때 1인실에 딸린 환자보호실에서 나오는 선생의 부인 원영희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사모님은 예의 문병객을 맞듯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이 양반이 요새 통 의식이 없고 저렇게 잠만 자고 있으니……
첫 대면이어서 간단하게 내 소개를 했다. 예전에 일간지 문학담당기자로 일할 때 선생님을 몇번 뵌 적이 있어요. 제 소설을 보내드렸더니 일부러 전화까지 주셨지요.
사모님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알 만한 분이시군요. 이 양반이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도 같아요. 아,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다는 작가시군요. 알다마다요.
사모님이 환자보호실로 들어가 커피를 타는 동안 병실 밖으로 나오자 대기석에 앉아 있던 노신사가 신문을 뒤적이다가 자리를 권했다. 풍채가 좋고 옷차림도 깔끔한 미남형 노신사가 의자에 착 붙어 앉은 모습에서 어쩌면 선생의 친척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외람되지만 혹시 선생과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제가 동생입니다. 바로 밑의 동생. 사흘 전, 미국에서 왔어요.
신상을 물어보는 것으로 치면 그가 나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는 게 순서일 텐데, 주객이 전도된 감이 있어 나는 얼른 통성명을 했다.
동생분이시면 선생과 마찬가지로 함북 회령 태생이십니까. 맞습니다. 회령에서 태어났지요. 형님하고는 세살 터울이에요. 그럼 1939년생이시군요. 맞아요. 회령에서 살았던 기억이 생생하지요. 아버지가 산판(山坂)을 했어요. 목재소도 갖고 있었지요. 목재를 뗏목처럼 엮어서 두만강에 흘려보내곤 했지요.
나는 러시아 블라지보스또끄에서 태어난 미국의 영화배우 율 브리너 가문도 그 시절에 두만강에서 목재상을 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선생의 병상 옆에서 율 브리너를 입에 올리는 것이 좀 뜨악한 일 같았다.
어려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재소에 가본 적이 있어요. 긴 복도가 있는 건물이었지요. 생나무 냄새가 진동하는 게, 산판을 아주 크게 하셨어요. 내 기억으로는 회령에 아버지와 친한 한국인 장교가 살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일본군이었겠지요. 1945년 해방을 맞은 직후 그 사람이 경성 가는 길에 아버지가 형을 딸려 보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해병대 사령관을 했더라고요. 그때 무슨 일로 형이 경성에 간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하지만 암튼 경성에서 한학기 정도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혈혈단신 다시 회령으로 돌아왔지요. 아마 기차를 타고 왔을 겁니다. 국민학교 4학년이나 되었을까. 회령에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네개의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형은 북국민학교 5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가 1947년 아버지가 원산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나와 함께 원산에서 자랐지요.
이 대목에서 커피를 내게 건네주던 사모님이 눈을 반짝거리며 옆자리에 앉아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왜 그 얘길 나한테 안 해줬을까? 해방 직후 경성에 갔다가 혼자 돌아왔다니.
형수도 처음 듣소? 정확히는 모르지만 1947년 여름, 아버지(최국성)가 회령에서 원산으로 이사할 때 형도 함께 갔으니까, 아마도 1946년쯤 될 거예요. 형은 경성에서 아까 말한 그 장교 집에서 학교를 다닌 거죠. 열두어살이나 되었을까.
회령은 국경지역이어서 해방 직후 소련군이 곧바로 진주해 곳곳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난리통에 아버지는 읍내에 있던 집을 떠나 산판이 있는 시골로 피신했지요. 장티푸스에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셨는데 퇴원하면서 곧바로 숨어버리셨어요. 어머니(김경숙)하고 누나하고 밤중에 밥을 해서 날라다 주곤 했지요. 보름쯤 후에 산판에서 내려오자 세상이 바뀌어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어요. 공산정권에 의해 중상류층 부르주아지로 분류된 아버지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어서 원산으로 이주했던 것이죠. 경영하던 사업장을 모두 두고 왔어요.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원산의 국영목재회사에 간부로 취직했는데 큰 사택에서 살았지요. 내 기억으로는 회령 읍내 우리 집보다 원산 사택이 더 좋았어요. 언덕 위에 돌을 쌓아올린 석재가옥인데 마당도 넓고 정원도 있고 운치가 있었어요.
그럼 형제분은 어떻게 되십니까?
형이 맏이고 나는 남자형제로는 둘째, 위로 누나가 둘이 있지요.
그럼 형제분은 모두 몇남 몇녀이십니까?
4남 2녀. 원래는 5남 2녀였는데, 우리 형 바로 밑에 인호라고 있었지요.
여기서 사모님이 얼른 말을 이었다. 그분 제사를 항상 우리가 지냈어요.
아, 그래요 형수? 오호.
형제분들이 인(仁)자 돌림이신가요?
아니요. 돌림이 좀 이상해요.
그럼 동생분 존함은?
창훈입니다. 인훈, 창훈, 인수, 창수. 내 위로 누님 두분.
동생과 누님들은 다 살아 계십니까?
다 살아 있어요. 미국에,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지요.
사모님의 눈동자가 안경 아래에서 다시 반짝였다. 우리만 여기 한국에서 살았어요.
형제분들이 다 미국에 계시는데 혼자만 한국에 떨어져 사셨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글을 써야 하니까요.
사모님의 억양은 부드러웠지만 매우 단호했다. 이 땅을 떠나면 글을 못 쓰니까요. 한때 고민하셨어요. 그때는 미국에 시아버지까지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지요. 이 양반도 1973년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세계작가프로그램’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4년 동안 체류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민 가는 문제로 온 가족이 회의도 했지만 결국은 돌아왔지요. 그런데 이 양반이 혼자 경성에서 회령으로 왔다고요? 해방 직후에요? 야, 희한한 일이네요. 지금도 그이는 혼자서는 어디를 못 가요. 내가 같이 나가야 겨우 외출을 하지요.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엘 가도 내가 나가야 가지 혼자는 못 가요. 그래서 늘 걱정이었어요. 혼자서는 어디도 못 가는 사람이 어떻게 그 나이에 경성까지 갔다가 혼자 돌아왔을까. 열두어살밖에 안 됐을 때. 그때는 위험하지 않았던가요?
아니, 아주 위험했지요, 형수.
아, 그 겁쟁이가? 혼자서 어떻게 경성에 가서 살았다지?
형이 그때 무척 고생한 것 같아요. 형을 데리고 간 사람들도 피난민인데, 그렇지 않았겠어요?
그런 이야기는 어떤 글에도 쓰지 않으셨는데.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서울예대에서 학생들 가르치다가 안식년을 받은 일년 동안 외출을 딱 세번인가 하셨어요. 한번은 제자 결혼식, 한번은 글 쓸 장소 물색하러, 한번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세번도 모두 저하고였지 혼자는 안 나가셨어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늘 꼭 붙어 다니셨다니.
아니요. 늘 그러려니 해서 힘들진 않아요. 평소에 늘 그러셨으니까. 제가 챙겨준 밥 이외엔 안 들었으니까. 어디서 내가 반찬이 맛있어서 사 가잖아요? 그럼 드시다가, 어째 당신 솜씨 아닌 것 같네, 하면서 딱 그만 먹어요.
회령에 대한 기억이 더 있는지요? 그러니까 어르신께서 큰 산판을 하셨다고요?
목재소를 했지요. 자기 산을 가지고서. 또 인천에 지사가 있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낳을 때도 아버지가 인천에 출장 가서 없었다고 하니까.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하신 분이죠.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 셋을 데리고.
두만강 유역에 회령, 종성, 부령, 온성, 경원, 경흥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회령이 가장 큰 도시라고 들었습니다만.
회령은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아주 큰 도시예요. 국경수비대도 있었고. 그때 우리 아버지가 코르도반 구두를 신고 다니셨다고 형이 가끔 말씀하셨지요. 아버지는 그 시대에 테니스도 치고 승마도 하고 그랬어요. 막냇동생, 그러니까 내 막내삼촌의 친구가 하는 건설회사가 한강철교를 놓을 때 그 회사에서도 잠깐 일을 하셨지요. 아마도 토목을 담당했던 모양이에요. 그때는 다들 그런 지인들이 남쪽에 있었어요.
한국엔 오랜만에 나오신 건가요?
예. 제가 그동안에 가끔 나왔었지요.
이 대목에서 사모님이 긴 한숨을 내쉬며 선생이 잠들어 있는 병실을 잠시 쳐다보았고, 나는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다시 말을 붙였다. 선생님이 말년에 운정, 일산 쪽에 쭉 사셨는데 모두 판문점에 가까운 곳이잖습니까. 위치를 고려하면 말년에 이 38선 가까운 지역에 사신 것도 예삿일은 아닌 것 같군요.
그때 회억에 잠긴 동생분이 뭔가 북받쳐오듯 음—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사모님께 화두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최인훈 선생님은 언제 담배를 끊으셨나요?
한 이십년은 될 겁니다. 화정에서 살 때지요. 담배를 어떻게 피운 줄 아세요? 재떨이에다 담배꽁초를 가지런히 놓아두곤 했어요. 나란히, 나란히 1센티도 안 어긋나게, 요렇게. 자로 재 것같이, 꽁초를. 요렇게. 아주 가지런히 놓았다는 게 문제적이지요. 성격이 그래요. 어지럽혀 있는 거 못 봐요. 요렇게, 요렇게. 책을 꽂아도 각이 딱 맞아야 해요.
사모님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담배꽁초를 가지런히 놓는 모습을 재연하다가 잠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말했다. 하루아침에 딱 끊으셨어요. 어쩌면 그렇게 금단현상도 없이. 그 허공을 함께 응시하고 있자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일년 전에 작고하신 소설가 박상륭 선생이 생전에 “작가란 세상의 독을 마시고 그걸 글로 내뿜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최인훈 선생님은 일제의 독, 해방의 독, 육이오의 독, 개발독재의 독, 세상의 모든 독을 다 마셨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 무수한 독을 몸으로 견디다보니 금단현상도 겪지 않고 단박에 금연을 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사모님이 말했다. 이 양반이 오랫동안 글을 못 쓰셨잖아요. 『화두』(1994) 이전에. 군사정권 시절에. 그게 안타까워요.
나는 겨우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런데 소련 붕괴 직후, 세기말의 현상이랄까, 그걸 다 지켜보시고 『화두』를 쓰셨으니까 오히려 종합적으로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세기를 전부 봤기 때문에, 소련 해체까지 다 봤기 때문에 『화두』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사모님이 말을 이었다. 회령은 아주 깨어 있는 도시라고 이 양반이 늘 말씀하셨지요. 원산보다도 오히려 더 크고 도시화되어 있고 일본인들도 많이 살고…… 회령 집은 마루 복도에 영화에서 보듯 수동식 다이얼 전화기도 달려 있고 뒷마당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 어려서 산판에는 못 가봤어요. 목재소에서 원목을 잘라 재목으로 만들었는데 산판 안으로 철도도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인 직원도 있었고. 아버지는 언젠가 조민당 간부로 동원된 적도 있는데 그때는 조민당 하면 북한에서 살아남지 못했지요. 그래서 전쟁이 터지고 아주 결사적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어요. 원산에서 미군 수송선 LST(상륙전용함선)를 탔을 때 피난민들이 선상에서 “우리는 살았구나” 하면서 만세삼창을 부르고 또 불렀는데, 안 그랬으면 다 죽고 말았을 테니까요. 상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지요. 미국에 있는 내 친구들은 형을 두고 국보(國寶)라고 불러요. 그렇게 험난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존경이랄까, 그런 거지요.
선생은 『작가세계』 1990년 봄호에 소설가 이창동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솥 같은 것도 비끄러매서 짊어지고 타고 이불도 한짝 메고 타고 가재도구 같은 것도 들고서 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것은 원래 땅 위에서 정착할 때 쓰는 거죠. 그런 식으로 조그만 읍 같으면 읍 주민 전부가 탄 셈이에요. 뿌리를 뽑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하고, 한 도시 자체의 껍질을 면도칼로 싹 잘라가지고 달랑 들어서 옮긴 것 같다고나 할까. 그 체험은 지극히 나쁜 영향을 인간에게 준다고 생각해요. 특히 어린아이들한테는 대지의 굳건함이라든지 자신의 뿌리나 생명에 대한 허무감을 주는 겁니다. 아, 인간이란 게 이런 정도의 것이구나. 유기적이라든지 전통적이라든지 생명의 연속성이라든지 하는, 인간에게 정서적으로 제일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접근법에 대해서 대단히 해체적인 상태가 되어버리는 심리적인 외상을 입게 되는 것이죠.”(50면)
LST 선상에서 받은 충격, 곧 대지를 잃어버렸다는 어마어마한 상황에 대한 충격적인 인식이 「광장」에서 이명준으로 하여금 타고르호 선상에서 남지나(남중국) 해상으로 투신하는 결말을 가져왔다고 할 때 바다는 지상에 없는 중립국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용해되고 마는 푸른 바다의 출렁거림, 그 푸른 피의 물굽이.
원산에서는 한옥에 사셨나요?
아주 한옥은 아니고 일본식 복도가 있었지요. 그때 내가 일곱살이나 되었을까. 그때 원산에 외국인주택들이 쭉 있었어요. 소련대사관 같은 건물도 있고. 우리가 살았던 사택도 아주 근사했는데 바다에서 가까운 언덕에 있었고 돌담에 정원이 아주 크고 지하실에 큰 서재가 있는 저택이에요. 거기에 김칫독도 있고. 형이 지하서재에 내려가서 책을 보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때는 거의 일본어 책이었는데, 형이 그렇게 책을 좋아할 수 없었지요. 소군정 시절이었는데, 나중에 수복 후에 우리 집에 미군들이 와서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그렇게 집이 좋았어요. 돌담이 멋지게 있는 성 같은 집이었으니까. 당시 학제로는 9월에 모든 학교가 개학을 했는데 형은 학년을 뛰어넘어 원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을 했지요. 중학교를 마친 후 원산고등학교에 들어가 1951년 월남할 때까지 고등학교 2학년을 몇개월 정도 다녔어요. 원산에서 전쟁을 맞았지요. 9·28수복이 되고 1·4후퇴 직전에 남한으로 왔어요. 우리 가족은 원산이 고향도 아니고 생활의 터전도 아니어서 기댈 만한 언덕도 없고 하니 모두 월남을 했지요. 어느날 밤중에 새벽 두세시쯤 됐는데, 아버지가 우리를 깨우는 거예요. 원산에서 미군 수송선을 탄 게 그날이지요.
흥남 철수는 1950년 12월 12일부터 15일까지의 일이고 그 서막에 해당하는 원산 철수는 자료에 따르면 12월 7일과 12월 9일에 있었다. 선생은 해방부터 월남하기까지 5년 정도 북한 초기 사회주의체제를 경험한 사람이 되었고 이것이 그의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선생님은 원산에서 소군정도 겪고 미군정도 겪으셨으니 그런 경험이 「광장」이나 『화두』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겠네요.
사모님이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광장」이 나왔고 이명준이 탄생했지요. 그런데 이 양반이 계속 고민하시는 거예요. 과연 이명준을 죽게 한 게 옳은 일인가 하고.
이 대목에서 나는 얼른 말을 거들었다. 이명준은 죽었지만 이명준의 분신은 지금도 살아 있지요. 중립국을 선택한 한국전쟁 포로들이 지금도 남미 콜롬비아나 하와이에 살고 있다는 뉴스를 최근에 본 적이 있어요. 그들과 인터뷰를 진행해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는 뉴스였어요. 이명준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지요.
사모님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아, 그래요. 지금은 모두 아흔 가까이 되었겠지요? 바로 그거예요. ‘이명준은 살아 있다’가 이 양반이 말하려던 바예요. 너무 고민을 하셨지요. 이명준을 사라지게 한 것을 두고, 병상에 누우셔서 제대로 말씀하실 수 없게 되었을 때조차 힘겹게 한마디를 하셨어요. ‘캐릭터’라고요. 아들 윤구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광장」의 각기 다른 판본을 찾아다 읽어드렸지요.
선생은 소설의 주인공마저 친자식처럼 인격을 부여해 사랑한 것은 물론 그 인과관계가 세상의 이치에서 어긋나는 것을 스스로 용인하지 못하는 어떤 순명으로 초지일관했던 게 분명하다.
이 양반이 고민한 또 하나의 대목은 「광장」에서 이명준이 같은 처지의 석방포로를 때리는 장면이에요. 왜 폭력을 쓰게 만들었을까? 왜 끝까지 인간적이지 않았을까? 그 폭력은 정당한 것이었는지, 그걸 많이 고민하셨지요. 그래서 제 생각을 말씀드렸어요. 이명준은 그때 반쯤 미쳐 있었으니까. 반쯤 미친 사람의 젊은 혈기는 아무래도 비이성적인 게 맞지 않나요, 그러니 인간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제가 말을 했는데도 이 양반은 계속 고민하셨어요. 인간적 윤리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기준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명준이 폭력을 휘두른 걸 두고두고 곱씹어본 거죠. 이 양반은 실제로 폭력이라는 걸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이명준을 통해서 폭력을 사용한 것은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더 인간적이고 더 예술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겠나 하는 내 생각을 말했지요. 그런데도 계속 고민을 하셨고요.
나는 동생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미군 LST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후에는 어디에서 사셨나요.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목포로 왔지요. 온 가족이 모두 목포에서 살았어요. 형은 목포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해 1년간 다니고 졸업을 했어요. 원산에서 2학년까지 다닐 때는 제1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웠는데 목포에서는 영어를 배웠지요. 그런데도 1년 후에는 학급에서 누구보다 영어를 잘하게 됐지요.
그때 영어와 맺은 인연은 군에서의 통역관 생활이나 나중에 그의 희곡작품이 미국에서 공연되는 등 영어문화권과 접촉하면서 그 쓰임새를 넓혀나갔다.
영어뿐 아니라 전과목 1등을 했지요. 졸업하고서 목포고 출신 서울대 입학 1호가 되었어요. 법대를 어떻게 갔냐면, 자기는 어디로 갈지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그저 이성적인 게 좋아서 선택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형은 목포에서 우리 가족과 떨어져 따로 살았어요. 장학생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방을 하나 내줬어요. 학교 배추밭에 딸린 방인데 거기서 혼자 독학을 했지요.
사모님이 말을 받았다. 제가 결혼하고 아버님 모실 때 여쭤봤어요. 아버님, 그 어려운 가운데 이 양반이 법대에 가고도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았는데 왜 야단을 안 치셨어요? 아버님은 이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하셨지요. 서울대 졸업장을 못 받은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사실은 4년 다 다니긴 했어요. 마지막 학기 남겨놓고 중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게 아니에요. 졸업시험 첫날에 시험을 치긴 쳤는데 출석률 미달자는 시험지를 내도 소용없으니 시험을 치지 말라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고 해요. 그때는 문학과 법학을 놓고 고민하던 때라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아 출석률 미달자이긴 했지만 그냥 집에 갈 수도 없고 해서 첫날엔 시험지를 냈는데, 이튿날 감독선생이 출석률 미달자는 한학기 더 다닐 생각하라고 재차 공고하는 바람에 졸업반인데 너무한다 싶어 화가 나서 남은 시험을 치르지 않았지요. 아버님은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요.
이때 병상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모님을 따라 병상으로 갔다. 사모님이 곁에 붙어 서서 손님이 왔다고 일러주었다. 선생은 눈을 떠 나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사모님이 짜주는 소독약을 손에 바른 후 선생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양지도 음지도 아닌 지상에서의 마지막 한때. 딱히 할 말은 없고 발바닥을 간질였더니 선생은 천천히 손을 머리 쪽으로 거둬들여 근사한 경례를 붙였다. 함북 회령 산판집 장남으로 태어나 소군정도 미군정도 다 겪은 마당에 경례가 무엇이더냐. 발바닥은 선생이 월남해 살았다는 목포 근방일 수 있고, 머리 부근은 고향땅 회령쯤일 수 있고, 침상은 허리 잘린 한반도의 지형일 수 있겠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모님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 인사예요. 이런 인사는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데…… 그건 지상에 대한 마지막 경례였다. 선생은 병상에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수액처럼 몸속에 넣고 분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선생의 경례를 뒤로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다시 골똘해지고 만다. 선생은 일산이며 화정이며 운정이며 혹은 무슨 신도시마다 차고 넘치는 고층 아파트에서도 난민촌 임시가옥인 바라끄 냄새를 맡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남한사회나 북한사회나 난바다를 헤쳐나가는 난파선이긴 마찬가지였고, 사랑의 시원, 생명의 시원인 바다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는지도 모른다. 일제와 식민지, 좌와 우, 남과 북이라는 이항대립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한 방편이 바다였고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산문도 「바다의 편지」(『황해문화』 2003년 겨울호)였다. 선생은 그로부터 20일 후인 7월 23일, 영원한 중립국이라 할 영원의 바다로 떠났다. 고단하고 외로웠던 문명의 탐색자여, 풍랑 치는 바다 위 고독한 항해자여, 이제 고이 안식을 취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