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지금, 어떤 불평등인가
불평등의 재현과 ‘리얼리즘’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역서 『패니와 애니』(공역) 『도둑맞은 세계화』,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문명적’ 사건으로서의 불평등
불평등이라는 주제를 놓고 새삼스레 중요성을 입증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도 불평등은 나날이 심해져간다고 이야기되고 불평등 해소가 좀처럼 사회적 의제나 정책의 우선순위가 되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토록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은 문제처럼 살아가는 것 중의 하나가 불평등이다. 사실 불평등에 관해 생각하면 종종 기후변화 같은 주제를 떠올릴 때와 비슷한 기분에 잠긴다. 기후변화처럼 불평등에 관해서도 상황의 악화를 보여주는 온갖 진단과 지표들이 나온 지 오래고, 구태여 그런 자료를 참조하지 않아도, 또 사실 별달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사태의 심각성이 충분히 감각된다. 그런데, 역시 기후변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렇듯 악화되고 있음에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미 어찌해볼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무기력한 의문이 생긴다. 요컨대 긴급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경각심과 무엇인들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 이 두가지 통약 불가능한 느낌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말 그대로 ‘느낌적’일 뿐 둘 사이의 유비란 터무니없어 보일지 모르겠다.1 해결에 얼마나 적극적인가 여부를 떠나 기후변화가 인류의 미래라거나 인간문명의 존속 가능성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라는 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할 법하다. 그런데 불평등도 그런 문제일까. 양극화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오늘날의 불평등한 상황이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전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게 사실이라 해도 인류는 노예제도 시행한 바 있는 독한 종족이 아니던가. 그러니 설사 역사의 진보라는 환상이 좀 깨진다 한들 세상의 종말은 고사하고 문명의 파탄도 이야기할 계제는 아니지 않을까.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에 따르면 불평등이 적어도 ‘문명적’ 차원의 문제이긴 하다. ‘평등’이라는 제목의 에세이2에서 그는 인간이 인간다움(humanity)을 더 많이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인간화(humanization), 곧 문명화(civilization)에는 몇가지 핵심 요소가 있고 민족이나 나라마다 그 요소 중 어떤 것에서 탁월함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 도정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영국이 행실(conduct)에서 강점을 갖는다면, 이딸리아는 미적 감각과 판단에서, 그리고 독일은 지식에서 탁월하다. 전형적으로 민족성 운운하는 이야기인가 싶은 그의 에세이를 좀더 따라 읽으면, 프랑스의 강점이라는 “사회생활과 예절”(social life and manners)이 아널드의 진짜 초점임을 알게 된다. 얼핏 적절히 예를 갖추며 쉽게 친교한다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이 강점은 실은 명백히 계급적인 문맥을 갖는다. 영국에서는 상류층의 누군가가 하층계급이나 심지어 중간계급의 사람과 이야기할 때 “분리의 벽”(a wall of partition)과 함께 “두개의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느낌을 갖는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런 “양립 불가능함”이 없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만나더라도 이질감이나 혐오 대신 “사람들이 삶에 대해 똑같은 것들을 요구하는 하나의 세계”에 더불어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를 “사회의 정신”(the spirit of society) 혹은 “사회성”(social spirit)으로 해석한 점에 아널드의 독특함이 있는데, 그는 심지어 이것이야말로 프랑스혁명의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서로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하며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평등을 촉진한다. 인간이 평등한 것은 다름 아니라 예절의 인간다움에 의해서다. “‘그로브’(grob), 즉 거칠고 상스럽게 굴어서 자신을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와 동등한 게 아니라 상스럽게 보일 따름이다”라고 괴테는 말한다. 인간다운 예절이 있는 공동체는 평등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그런 공동체에서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이란 완벽히 편안한 사회적 교류를 위협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 프랑스인들을 혁명으로 이끈 주된 동력은 박애정신이 아니며, 질시도,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애호도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영향은 미쳤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사회의 정신이다.
이 대목은 사회성에 대한 설명인 동시에 글의 제목인 평등에 대한 해석으로, 여기서 평등이란 인간다움의 완성을 지향하는 사회성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평등 역시 여러 사회문제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회의 정신 자체의 위기이고 다름 아닌 문명화를 향한 도정의 좌초를 뜻한다. 아널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평등을 앞세우면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이 바람직한 삶을 저열하고 물질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라 본다. “인류에게 있는 지배적인 힘(master-power)”, 그러니까 인간화와 문명화의 완성을 추동하는 힘은 그런 낮은 물질적 기준에 언제나 반발하기 마련이므로 낮은 물질적 수준의 평등마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평등은 우리가 너무 낮은 곳을 겨냥하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너무 적게 바라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해석의 함의는 다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아널드가 평등론을 개진한 실질적인 목적이 당시 영국의 거대한 계급적 불평등을 비판하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해두자. 그가 보기에 영국이 가진 “불평등 애호”란 “실제로는 우리 안에 있는 천박함(vulgarity)이고 야만성(brutality)이며 휘황찬란한 물질성의 찬양이자 숭배”3나 다름없는 것으로서, 영국의 문명화를 가로막는 주된 요인이다. 그렇다면 ‘불평등 애호’가 이제 전세계적인 사정이 되었으니 거기서 기후변화급의 위기를 읽는다 해도 과민반응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평등을 감도는 ‘종말적’ 정동에는 또다른 근거가 있다.
2. 불평등과 정당성의 위기
유사 이래 인류는 늘 불평등한 세계에서 살아왔다고들 하지만 몇년 사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불평등은 늘 우리 곁에 있어온 것과는 다른 무엇이 되었고 따라서 이제 불평등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논자 중 한 사람인 바우만(Z. Bauman)은 현재의 세계가 매우 심각하게 점점 더 불평등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각종 증거를 상세히 나열한 다음, 사태를 이렇게 요약한다.
(…)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4
여기서 말하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에 “개인의 재능과 능력들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이 포함된 점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이 무리 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였는데, 역설적이게도 불평등의 확대를 제어하는 역할도 동시에 해왔다. 자연스러운 불평등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아니든 “불평등의 ‘부자연스러운’(실제로는 ‘지나친’) 정도, 즉 부정의한 정도를 탐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제공했고” 그럼으로써 불평등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심화될 경우 “수정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자연스러움’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고도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방법들을 찾아”낸 점이 불평등을 새롭게 고찰해야 할 이유 중의 하나라고 바우만은 말한다.5
그런데 불평등을 일정하게 완화함으로써 불평등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기제는 실상 월러스틴(I. Wallerstein)이 설명한 자유주의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이 체제의 간부집단뿐 아니라 상당 정도까지는 대다수 사람들, 이른바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이 체제의 제도들이 정당하다고 보이게 해줄 지구문화를 제공”해준6 것이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연스러운’ 불평등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기에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그만큼 더 어려움을 갖지만 특유의 유연한 전략을 통해 이 어려움을 우회한다. 자유주의의 주된 전략은 성장과 개혁을 원리로 삼아, “몇몇 근본적인 변화를 당장 제공해주면서 이후 더욱 근본적인 변화가 있으리란 희망과 기대를 결코 없애지 않”7는 방식으로 진짜 근본적인 변화를 봉쇄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변화 일체를 누르려는 보수주의와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급진주의를 적절히 활용하고 포섭하며 자유주의는 프랑스혁명 이후 근 이백년 동안 사실상 유일한 패권 이데올로기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유혹적인 낙관주의와 결합된 제한된 타협”8이라는 자유주의의 패키지는 이미 효력을 잃었다. 체제의 수혜자는 근본적 변화의 몇몇 일부만이라도 더는 제공할 여력이 없고 뒤처진 사람들은 미래의 약속이 애초에 지켜질 예정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불평등을 일부라도 완화해준다는 개혁과 성장이 점점 여의치 않아졌을 뿐 아니라 설사 가능하더라도 이제 그것들 자체가 불평등을 강화한다는 환멸이 퍼지고 있다. 그렇듯 불평등한 체제의 정당화를 담당해온 자유주의가 끝났다면 이제 체제와 그것이 야기하는 불평등이 다시금 정당성의 위기에 처하게 된 셈이다.
월러스틴은 자유주의적 약속의 소멸과 더불어 오직 두가지 이데올로기의 가능성만 남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적자생존’ 집단들의 미덕과 정당성”을 내세우는 것, 다시 말해 “약탈품을 소유하고 자기네 요새 지역 안에서 지키는 강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9 다른 하나는 모든 집단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그 집단 각각을 배타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으로, 이는 자유주의에 과부하를 거는 전략과 이어진다.10 그렇다면 이제 체제 정당화의 임무는 사회진화론의 부활에 방불한 전자의 몫인데, 자유주의가 현재의 일정한 양보를 통해 미래를 약속하는 방식이었다면 자유주의 이후의 강자 이데올로기는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 표어가 함축하듯) 미래의 어떤 약속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 현재를 옹호한다.
다시 말해 이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방식은 자유주의적 약속의 실패를 그런 약속 자체의 불가능으로 해석하고 체제 정당성의 위기를 정당성이라는 관념 자체의 위기로 전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평등이야말로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유일한 ‘현실’이므로 정당성 여부는 관계없는 질문이라고 말하는 한편, 불평등의 극심함 자체를 부인할 수 없이 강렬한 ‘현실성’의 증거로 활용하면서 일종의 자기완결적 ‘현실주의’를 구축한다.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내적 근거가 강화되는 ‘도착적’ 인과율을 장착한 점에서 이 기제 또한 ‘영구기관’을 닮았다. 이런 종류의 영구기관이 자력갱생한다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갱생 불능이자 미래의 종말을 뜻하므로 그로부터 어떤 종말적 정동이 발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현실주의’가 불평등에 관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불평등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다시 고민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이다. 장차 불평등이 개선되리라던 자유주의적 약속의 기만성을 지적하는 일은 당장의 개선에 대한 급진적 요구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불평등은 결코 개선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상식을 벗어난 극심한 불평등을 폭로하는 일은 그것을 바로잡자는 호소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거의 초월적이며 존재론적인 질서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불평등의 ‘현실주의’는 불평등한 현실을 ‘불평등이 결코 해결되지 않는 현실’로 느끼게 만들려 한다. 바우만은 ‘영구기관’이라는 말로 불평등에 대한 개탄과 경계를 의도했지만 어쩌면 불평등을 ‘영구기관’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불평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바인지도 모른다.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흔히 문제를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불평등이 가시화를 통해 스스로를 강화할 수도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불평등의 가시화, 또는 불평등의 재현이 불평등의 ‘현실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방식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3. 불평등 재현의 아이러니
평등이 곧 정의이고 정의가 곧 평등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견해가 있겠지만 불평등이 대표적인 불의라는 사실은 분명하고 이제 정당성의 부담마저 떨쳐버리려 함으로써 한층 문제적인 불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정의에 대하여: 플라톤, 롤스, 이시구로의 교훈」11도 불평등에 관한 텍스트로 전유하기에 무리가 없다. 이 글이 플라톤과 롤스의 교훈으로 제시하는 바, 즉 정의가 공동체의 모든 다른 미덕을 규제하는 “주인 미덕”(master virtue)이라거나 사회적 장치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미덕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견해는 평등을 사회의 정신 자체와 연결한 아널드의 견해와도 공명한다. 그런데 불평등 재현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은 이 글이 다룬 세번째 인물, 카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12에 대한 독법이다.
먼저 이 소설에 대한 짧은 소개가 필요하겠다. 『나를 보내지 마』는 장기이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인간을 다룬 디스토피아 소설이지만 몇가지 독특한 면이 있다. 예컨대 구현되지 않은 기술이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면 대개 미래를 배경으로 삼기 쉬운데,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현실의 역사적 시간대와 겹치고 그 때문에 더더욱 현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고 싶게 한다. 또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우리가 아는 세계와 어떻게 다른지 환기시키며 독자의 주의를 끄는 대신, 주요 인물의 학창시절을 다루는 이 소설의 전반부는 여느 성장소설 같은 외양을 최대한 유지하는 가운데 드문드문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이질적인 요소들을 던져둔다. 이런 전개는 인물들이 장기이식 도구라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는 방식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어릴 적부터 헤일셤(Hailsham)이라는 학교에 수용되어온 이들은 운명에 대해 “들었으되 듣지 못한”(118면) 상태로 자라난다. 그들을 가르치는 가디언(guardian)들은 ‘기증’(donation)이라는 단어로 장기이식의 미래를 어쨌든 일러주지만, 토론과 예술적 창조성을 강조하는 이 학교의 멀쩡하다 못해 바람직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인문교육’ 시스템은 기증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듯 굴러가기 때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운명을 주입받아온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곧장 기증자가 되느냐 아니면 (죽지 않고 최대한 많은 횟수의 장기기증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증자를 보살피는 간병사(carer) 생활을 거치느냐 하는, 별반 다르지 않는 두 진로 중 하나를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화자인 캐시는 남달리 오랜 시간 충실한 간병사로 지내지만 친구였던 루스를 떠나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맺어진 연인 토미의 ‘종결’(completion)마저 겪으면서 마침내 더는 간병사로서의 생활을 지속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캐시와 토미는 헤일셤 학생들 사이에 퍼져 있던 루머, 곧 ‘진정한’ 연인에게는 삼년간 기증을 유예해준다는 소문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학교 관계자를 찾아가기도 하는데, 그들로부터 이는 사실이 아니며 헤일셤은 복제인간도 ‘내면’, 곧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함으로써 사육장과 다름없던 수용시설을 인간화하려던 ‘진보적’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으나 결국 지원이 끊겨 종결되었)음을 알게 된다.
프레이저도 지적하듯이 이 소설을 유전자 복제기술의 위험을 경고하는 미래소설이나 색다른 성장소설이라는 틀로 읽을 여지는 충분하고, 특히 근래 자주 언급된 생명정치담론과 관련지어 여기서의 복제인간을 처분 가능한 생명인 ‘호모 사케르’의 전형으로 논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소설의 핵심을 “정의에 관한 고찰, 곧 불의한 세계와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받는 깊은 고통에 관한 통렬한 비전”(43면)으로 보고, 복제인간이 원본인간과 “절대적 동일성”을 갖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재론적 타자”로 분류함으로써 착취를 정당화하는 구조에 주목한다. 정의의 혜택을 받는 일부 집단과 사회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더 큰 집단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줌으로써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공동의 기본 규칙에 구애되는 모든 사람들은 공동의 도덕적 세계에도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 정의임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44~45면).
그런데 프레이저가 보기에 이 소설의 세계에서 “진짜 끔찍한” 것은 “주인공들이 그 세계를 우리처럼 인식하지 않는” 점이다(45면). 앞서 언급했다시피, 헤일셤의 아이들에게 장기보관기구로 길러지고 있다는 진실은 마치 무시해도 좋은 디테일처럼 맥락 없이 던져지기에 이들은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어느새 거기에 익숙해지고, 따라서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에서 기대할 법한 집단적 분노나 저항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반발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프레이저는 불의로 고통받는 이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불의라고 해석할 수단을 갖지 못”(45면)한 상태, 다시 말해 “자신들의 경험을 적절히 전달할 말을 갖지 못하고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들의 이해를 분명히 표현할 방법은 더욱 없는”(46면) 상태를 불의의 또다른 층위로서 보여준 점이 이시구로의 남다른 통찰이라 본다.
물론 헤일셤 프로젝트의 기만성을 의식하며 아이들에게 현실을 더 분명히 각인시키려 한 가디언도 있고, 이 온화한 수용소의 위화감에 본능적으로 반발하는 토미 같은 학생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반발들은 결코 일정 수위를 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상쇄하며 잦아든다. 그런 점에서 소설 속의 세계는 불평등 자체가 매우 극단적일 뿐 아니라 그것을 더는 불평등으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 성공적으로 ‘영구기관’이 된 불평등의 세계라고 할 만하다. 프레이저도 지적하다시피 그런 세계가 만들어내는 감정은 “불의에 가장 어울리는 반응”(46면)인 분노가 아니라 “슬픔의 흔적”(45면)이다. 슬픔은 때로 ‘양심적인’ 원본인간이 복제인간들을 향해 갖는 감정으로, 또 때로는 복제인간들이 의식하지 않은 채 발산하는 감정으로 작품의 갈피마다 등장한다. 소설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장면이면서 프레이저도 특별한 감동을 표한 마지막 대목에서 이 감정은 최고조에 달한다. 여기서 캐시는 바람에 날린 온갖 쓰레기들이 철조망에 걸려 있는 더없이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며 죽은 토미가 그렇게 걸려 떠오르는 것을 상상한다. 자신의 삶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쓰레기뿐이었으나 그마저도 모두 잃어버렸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들이 자신에게는 너무도 소중했다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이시구로는 특유의 담담한 서술로 삶의 모든 가능성을 박탈당한 존재에게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여실하고 처연하게 전달한다.
프레이저는 이 장면을 “가슴이 미어지게 만드는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들의 뒤섞임”으로 묘사하고, 이를 복제인간들이 오로지 무지하고 무력한 삶을 살아간 게 아니라 극히 제한된 삶의 반경에서나마 “번번이 자신을 무시해온 이 사회의 면전에 대고 어떤 위엄을 주장”하며 “사회의 근본구조가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을 때조차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지속”한 증거로 읽는다(50면). 그런데 프레이저의 이런 반응은 아이러니하게도 헤일셤 프로젝트가 지향한 ‘복제인간도 내면과 영혼을 가졌다’는 증명을 상기시킨다. 헤일셤 프로젝트는 그들도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그때의 인간이란 여하한 사회적 규정을 갖지 않는 ‘순수’ 범주이며 그래야만 사회 속에서의 극단적 불평등이라는 그들 삶의 핵심 진실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새삼 인간적인 감정과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확인하는 읽기란 여전히 헤일셤의 ‘휴머니즘’ 구도에 머물러 있는 셈이 아닌가. ‘순수’ 인간이나 ‘쓰레기지만 쓰레기가 아닌’ 인간이라는 한계 범주는 곧 생명정치 담론에서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일 것인데, 이 소설의 인물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각인하는 지점은 그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인간의 ‘영도(零度)’라는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대목에서다. 캐시와 토미는 자신들의 내면과 영혼이 증명 대상이 되었다는 데 충격을 받지만 그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슬픔의 진정성 역시 (내면을 갖고 평등을 누리는 인간과 내면을 가졌으나 불평등을 겪는 인간 사이가 아니라) ‘쓰레기’와 ‘인간’ 사이의 ‘문턱’을 매개로 발생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불평등의 정동이기보다 ‘결코 해소되지 않을 불평등’의 정동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그리고 프레이저의 비평)은 스스로 폭로하고자 한 휴머니즘의 한계를 수행적으로 반복한다.
4. ‘부정의 부정’과 주체화 문제
프레이저가 『나를 보내지 마』를 정의에 관한 중요한 교훈으로 읽는 데는, “정의란 결코 직접적으로 경험되지 않는”(43면) 것이며 따라서 “불의를 통해 부정적으로(negatively) 접근하는 전략이 강력하고 생산적”이라는, “오직 그런 부정적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만 정의 개념을 활성화할 수 있고 그것을 추상의 영역에서 복원하여 구체화하고 풍요롭게 하고 세계를 위해 유익하게 만들 수 있다”(50면)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가장 디스토피아적 현실이 정의와 평등의 가장 월등한 텍스트가 될 법도 하다. 하지만 불평등이 스스로를 과시함으로써 자신을 강화하는 ‘되먹임’을 전략으로 한다면, ‘부정적 사유’란 불평등에 대한 윤리적·정서적 개탄을 매우 ‘진정성’ 있게 만들지언정 불평등한 현실을 전복하는 정치적 기획으로서 강력하고 생산적일지 의문이다.
이 점은 프레이저가 가진 또다른 전제와도 관련된다. 프레이저는 롤스의 정의론에 기대어 “정의에 관한 고찰의 초점은 사회의 근본구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차적으로 이 명제는 사회의 이런저런 양상이 아니라 근저에 깔린 “심층 문법”과 “제도화된 기본 규칙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42면). 그런데 『나를 보내지 마』를 읽는 과정에서 드러나듯 사회의 근본구조에 관한 해석과 재현 역시 근본구조의 한 양상으로서 심층 문법에 포함된다. 해석과 재현은 곧 주관성(subjectivity), 더 나아가 ‘주체화’(subjectivation)의 핵심 요소이다. 이 소설에서 불평등의 주관성은 결국 불평등의 객관적 심층 문법이 (휴머니즘적 또는 정서적으로) 자기를 반영하는 거울과 다르지 않으며, 그렇듯 불평등과 불평등의 재현은 일종의 미장아빔(mise-en-abyme, 문자 그대로는 ‘심연 안에 넣는다’는 뜻으로, 이미지 안에 그 이미지의 작은 복사본을 넣음으로써 해당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게 만드는 반영 효과)으로 끝없이 서로를 되비춤으로써 말 그대로 심연을 만들어낸다. 소설 속의 복제인간들이 자아내는 깊은 슬픔 역시 이 심연의 효과이자 일부이다. 프레이저가 이런 상호심화를 문제화하지 않은 것이 문제임은 앞서 지적했거니와, 이는 사회의 근본구조를 고찰하는 정의의 주체를 그 구조에 영향받지 않는 어떤 초월적 위치에 있다고 암암리에 전제한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정의와 평등을 다룬 발리바르(É. Balibar)의 글13에서는 ‘부정을 통한 접근’과 ‘주관성’ 문제가 좀더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여기서 불가피한 참조대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역시 플라톤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플라톤은 정의와 평등의 사유에서 하나의 강력한 지평을 형성하기 때문에 (특히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정치론의 관점에서는)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든가 아니면 그냥 플라톤주의가 되든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적 지평을 구성하는 요소로는 우선 평등이 정의를 파괴한다는 발상이 있고 이는 그의 반(反)민주주의와 통한다. 그밖에도 정의와 불의를 질서와 무질서의 틀로 보면서 갈등으로 대표되는 무질서가 야기한 고통이 곧 불의라는 관점, 또 정의를 하나의 이데아, 즉 끊임없이 다가가야 할 모델로 보는 것도 그의 영향력의 중요한 일부다. 발리바르는 플라톤적 지평에 속하는 이런 주요 발상들을 전복한 사례가 맑스라고 본다. 맑스와 더불어 질서나 합의로서의 정의 개념은 갈등으로서의 정의 개념, 곧 평등을 향한 갈등 또는 대결과 적대를 통한 평등화가 정의라는 생각으로 역전되었고, 그로써 모델이 아니라 경험과 실천이 우위에 놓이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정의의 우선성에서 불의의 우선성으로의 핵심적 역전”(23면)이 일어난다. 프레이저가 말한 대로 이제 정의는 특정한 불의에 대한 특정한 경험을 통해 사유되며, ‘부정의 부정’, 곧 잘못을 바로잡고 고통을 보상한다는 견지에서 조명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플라톤의 논의가 함축하는 문제들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본다. 정의와 평등에 관한 사유가 플라톤에게 특히 빚지고 있는 핵심 질문은 바로 ‘주관성’과 관련된 것으로, “정의에 관한, 정의의 정의(definition)나 본질(essence)에 관한 이해는 정의의 내재적 일부이자 정의 실현의 조건을 이루는 주체화 과정에 관한 이해에서 분리될 수 없”(20면)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플라톤에게 “정의를 구성하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을 구성하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정의로운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정의로운 질서가 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사회구조로서의 정의와 주체화로서의 정의” 사이에는 “내재적 상응관계”가 존재한다(21면). 주체화 문제는 정의를 갈등으로 본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갈등, 곧 불평등에 저항하는 싸움은 불평등의 경험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이를 갈등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갈등의 도식”(a scheme of conflict, 27면), 다시 말해 갈등으로서의 재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재현에 어떤 (사실상 특정한) 주관성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정의의 우선성이 아니라 불의의 우선성이라는 구도에서는 사회구조로서의 불의와 주체화로서의 불의, 다시 말해 불의의 경험과 불의의 피해자 사이의 상응관계라면 모를까, 사회구조로서의 ‘불의’와 주체화로서의 ‘불의의 부정’이라는 별도의 관계는 내재되어 있지 않다.
발리바르 자신은 이런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내적 공백’(internal void)의 출현을 통한 내재성과 초월성의 절합”(28면)으로 수렴하면서, 갈등 그 자체가 오직 피해자들이 매끈한 전체로 보이는 사회구조 내부에서 만들거나 수행하는 ‘공백’을 통해서만 가시화된다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하지만 ‘내적 공백’이라는 표현은 앞서 아널드가 말한 사회성의 실패나 마찬가지로 불의나 불평등의 다른 이름일 뿐 그것을 갈등으로 전화하는 주체화 기제를 대체해주지는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한 더 본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는 점은 발리바르 자신도 인정하는 바인데, 그가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정의는 노력일 뿐 아니라 항구적인 발명”이며 “〔불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면서 사실상 정의의 형식과 내용, 제도들을 추구하는 것”(28면)이라 할 때는 이미 정의의 우선성과 불의의 우선성 사이의 구분은 사실상 폐기된 게 아닐까. 맑스적이면서 동시에 플라톤적이어선 안 되는 것일까. 불평등이 정당성을 비웃고 불의라는 비난을 더는 개의치 않을 때, 갈등과 적대를 발생시키기에도 불평등이 야기한 극심한 피해의 재현보다 오히려 정의로서의 평등의 상상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직접적으로 경험된 평등이나 실현해야 할 모델로서의 평등을 두고 쏟아져 나올 예상 가능한 비판들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이 문제를 ‘안전한’ 도덕담론 영역에 머물게 만드는지 모른다.
5. 불평등과 ‘리얼리즘 ’
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기생충」(봉준호 연출, 2019)은 표면적으로 『나를 보내지 마』와는 확연히 다른 정서를 불러일으키지만 불평등 텍스트로서 어떤 연결된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이시구로의 소설이 디스토피아 소설 형식을 취함으로써 현실의 ‘알레고리’로 위치를 잡는다면 「기생충」은 ‘알레고리화’된 현실을 전달한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하지만 두 텍스트 모두에서 알레고리의 측면은 비현실적일 만큼 극단적인 불평등을 현실로 인정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소설의 인물들과 달리 영화에서 기철(송강호)의 가족은 사태를 가만히 받아들이는 순응의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음모나 심지어 가해의 주체지만, 캐시나 토미에게 장기를 하나하나 ‘기증’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이 없는 것처럼, 이 가족의 음모와 가해야말로 사실상 생존 말고 다른 삶의 의제를 지워버리는 설정이다. 또 소설의 복제인간이 원본인간과 하나의 세계에서 불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다기보다 마치 존재론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그려졌듯이, 기철의 가족 역시 박사장(이선균) 가족과 물리적으로 다른 서식처에 소속된 종족처럼 그려진다. 소설의 복제인간이 불평등의 극단적 심화를 깊은 슬픔으로 되비춘다면, ‘인간복제’를 지향하는 기철의 가족은 불평등의 야만성이 자아내는 혐오를 고스란히 증폭한다.
프레이저가 『나를 보내지 마』를 두고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진짜 끔찍한’ 점은 인물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 물론 기철 가족은 불평등의 격차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심지어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평등을 내면화한 주체들이다. 소설의 복제인간들이 장기를 탈취당하면서도 이를 ‘기증’으로 인식하듯이, 기철 가족은 모두 노동하는 주체들이면서도 자신들의 노동을 ‘기생’으로 인식하며 그런 점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이 주창한 ‘낙수효과’(trickle down)의 충실한 신봉자들이다. 그들은 고통의 이유를 구조적 불평등이 아니라 번번이 실패하는 계획 때문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발생하는 충돌은 갈등으로 전화되는 대신 범죄(와 유폐)가 된다. 「기생충」에 어떤 도발성이 있다면 『나를 보내지 마』 같은 불평등 텍스트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불평등의 재현이 더는 불평등 비판이 되지 않는 한계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두 텍스트의 불평등 재현이 갖는 문제적 지점들은 평등이 ‘인간다움의 완성’이자 ‘문명’과 관련된 문제라는 아널드의 평등론을 다시금 환기한다. 하지만 그때의 인간다움은 ‘쓰레기 아님’이나 ‘기생충 아님’이라는 층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존재일 수도 있는가 하는 질문을 소급적으로 정당화할 위험을 동반하며, 아널드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한 ‘너무 낮은 기준’의 또다른 사례가 된다. 불평등의 부정으로서의 평등이라는 발상, 불평등의 재현을 통해 평등을 구현하는 프로젝트 역시 불평등한 현실의 끝없는 자기반영이 될 위험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현실 재현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문학에서는 오래전부터 ‘리얼리즘’이 이야기된 바 있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하자는 요청으로, “‘있는 현실’과 함께 ‘있어야 할 현실’ 및 ‘상상의 현실’”을 “각기 따로 떼어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다시 말해 “현실은 언제나 ‘있어야 할 것’을 일부라도 배태한 ‘있음’이요 ‘없는 것’들의 ‘흔적으로 있음’”이라는 인식이며, 그런 의미에서 ‘온전하게 눈앞에 있음’이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이다.14 불평등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리얼리즘 아닐까.
불평등의 재현이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느낌을 강화하는 데 그친다면, 리얼리즘은 ‘모두가 삶에 대해 똑같은 것들을 요구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음’을 긍정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공동영역(혹은 커먼즈 commons)의 ‘있음’을 긍정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또 그런 ‘있음’에 내재적으로 상응하는 주체화 과정을 발견하고 또 발명하도록 추동한다.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평등이 불평등의 부정으로 환원되지 않듯 평등의 부정이 아닌 불평등을 상상하는 것조차 가능할지 모른다. 그럴 때 비로소 구체적인 불평등 하나하나가 제대로 정당성의 시험대에 세워지고 불평등의 재현도 알레고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평등은 물론 불평등조차 ‘인간다움의 실현’에 비추어 재배치하는 것, 거기까지가 평등의 리얼리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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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관계와는 별도로 지구온난화와 불평등 사이에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구온난화의 결과가 불평등하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실상 불평등을 강화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
- Matthew Arnold, “Equality,” Selections from the Prose Works of Matthew Arnold, Cambridge: Riverside Press 1913(www. gutenberg.org/cache/epub/12628/pg12628-images.html). 이 에세이는 1878년 3월 Fortnightly Review에 처음 발표되었다. ↩
- 더 구체적으로 아널드는 영국의 “불평등이라는 종교”가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로 “상류계급은 물질주의적으로 되고, 중간계급은 천박해지며, 하층계급은 야만적으로 되는” 상황이 빚어진다고 말한다. ↩
-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안규남 옮김, 동녘 2013, 21면. ↩
- 같은 책 94~95면. ↩
- Immanuel Wallerstein, “The Agonies of Liberalism: What Hope Progress?” The Essential Wallerstein, New York: The New Press 2000, 418면. 월러스틴의 자유주의론에 관한 상세하고 비판적인 검토로는 김종엽 「변혁적 중도주의와 자유주의」,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참조. ↩
- Wallerstein, 앞의 글 420면. ↩
- 같은 글 428면. ↩
- Immanuel Wallerstein, “The Collapse of Liberalism,” The Socialist Register 28, 1992, 107면. ↩
- 이 전략에 관해서는 김종엽, 앞의 글 참조. 김종엽은 이를 “어두운 이면이 없는 진정한 자유주의자, 무의식 없는 자유주의자”(307면)의 전략으로 지칭하고 변혁적 중도주의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
- Nancy Fraser, “On Justice: Lessons from Plato, Rawls and Ishiguro,” New Left Review 74, 2012. ↩
-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김남주 옮김, 민음사 2009. ↩
- Étienne Balibar, “Justice and Equality: A Political Dilemma? Pascal, Plato, Marx,” The Borders of Justice, ed. Étienne Balibar, Sandro Mezzadra, and Ranabir Samaddar,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2012. ↩
- 백낙청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2~43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