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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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

대화 「기후위기와 체제전환」을 읽고

 

 

백낙청 白樂晴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공저) 등이 있음.

paiknc@snu.ac.kr

 

 

창비 기후위기 담론의 중간결산

 

기후위기를 주제로 강경석·김선철·정건화·채효정이 참여한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190호)의 대화는 이 분야에 과문한 나 같은 독자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내용이었다. 나아가 ‘창비’로서도 작년 내내 제법 집중적으로 벌여온 논의에 일종의 중간결산을 제시한 꼴이다.

계간 『창작과비평』은 2020년 봄호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특집에 백영경 「기후위기 해결, 어디에서 시작할까」와 김상현 「그린뉴딜 다시 쓰기: 녹색성장을 넘어」를 선보인 데 이어, 여름호에는 피터 베이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번역해서 실었고 가을호에 다시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가 게재되었다. 그사이 세교연구소에서는 ’한국의 기후위기 대응’을 주제로 김선철 발제, 조효제 토론의 제155차 세교포럼(2020.9.18.)이 있었다. 이들 일련의 논의를 거치면서 점차 기후위기가 결국 기후정의의 문제며 체제전환을 요하는 문제라는 의식이 강화되었다. 물론 내부적인 합의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체제전환론이 대세를 이루어가자 기후위기를 논할 때 ‘체제전환’이라는 표현을 큰 저항 없이 넘기던 상태에서 다른 의견도 더러 나오는 상태로 바뀐 듯하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좌담의 사회자 강경석(姜敬錫) 문학평론가가 자평했듯이 아직 “전환의 ‘청사진’ 같은 것은 충분히 논하지 못한”(『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247면, 이하 이 대화에서의 인용은 발언자와 면수만 밝힘) 듯하다. 하지만 자세한 청사진이 지금 나올 수도 없고 애써 내놓으려고 할 일도 아니려니와, 현 단계에서 나옴직한 청사진 논의조차 미흡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좌담에—그리고 이전의 여러 논의에—담긴 값진 지적과 통찰을 외면할 이유는 못 된다. 예컨대 “로컬이 대안”(225면)이라는 정건화(鄭建和) 교수의 주장과 여러 사례 소개(231, 246면 등), 미국에서 사회운동을 가르치다가 “데모를 하자”는 생각으로 귀국했다는(226면) 김선철(金善哲) 기후위기비상행동 집행위원의 현장 경험들, 농촌과 노동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228면 등) 최근 한 노조에서 “공장의 전기 낭비를 줄이고 어떻게 에너지를 절약할지 논의하더니 탄소 배출을 줄이는 협약안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야간노동 금지를 제안”(244면)한 인상적인 장면을 소개한 채효정(蔡孝姃) 정치학자의 발언 들이 모두 경청할 만하다.

참여자 간에 흥미로운 견해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컨대 정건화의 ‘로컬’ 중시에 대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간과하게 만드는 ‘착시효과’를 경계해야 한다든가(김 231~32면), “결국 노동자 민중이 주도하지 못하는 그린뉴딜이라면 지역에서 시작하든 중앙에서 시작하든 시장에 종속된다는 문제가 비슷하게 나타날 거라고 봐요. 오히려 불투명성과 비계획성은 지역이 더 높다고도 할 수 있죠”(채 232~33면)라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또한 채효정이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데(238면) 대해, 강경석은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를 인용하여 ‘도시 생활의 평등주의적 측면’과 ‘도시의 잠재적 효율성 제고’를 상기시키며 (반박이라기보다) 보완을 시도한다(247면).

여러 다른 견해와 관점에 관한 나의 원론적 입장은, 현 지점에서는 가능하고 다소나마 효과가 있는 그 어느 것도 배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은 어떤 큰 그림 내지 ‘청사진’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이고, 다양한 실험과 성과를 최대한으로 수용하고 참고해야 할 단계며, 설혹 어떤 ‘청사진’이 나오더라도 기후위기 극복은 수많은 작은 행동들을 빼놓고 성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케인즈주의적 그린뉴딜이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 못한다 해도 정부나 기업들 또는 사회운동이 그거나마 해보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말릴 이유는 없다. 다만 어째서 그것이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되는지를 집요하게 검토하고 마치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온 것 같은 ‘착시효과’를 경계하면서, 한층 설득력 있는 장기대책의 맥락에서 케인즈주의 전략이 어떤 중·단기적 기여를 할 수 있을지도 계속 연마해야 할 것이다.

 

 

성장주의 극복의 걸림돌들

 

우리 사회에서 생태전환이 안 되는 큰 원인이 “경제적 성장주의라는 담론이 압도적”(정 230면)인 데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당연히 그런 담론의 극복이 시급한데,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고 어째서 그것이 쉽게 바뀌지 않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요긴하다.

좌담에서 사회자는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사안으로 두가지를 제기한다. 하나가 “분단체제라는 걸림돌”(234면)이고 다른 하나는 “적정성장이라는 개념”(239면)에 대한 대다수 논자들의 무관심이다.

그중 분단체제 개념은 동석자들이 쉽게 받아들여서 화기애애한 논의가 이어지는데 다만 이때 분단체제는 주로 생태문제와 북한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억압하는 정치적 요인 정도로만 이해되는 것 같다. 이는 사회자의 문제제기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기후위기를 논의할 때 가장 자주 누락되는 지역은 아마도 휴전선 북쪽일 겁니다. 한국형 그린뉴딜도 남한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죠. 체제전환을 이야기하는 마당에서는 결국 성장주의나 자본주의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데, 그 순간 분단체제가 그러한 토론의 진전을 정치적으로 가로막습니다. 남한의 기후위기 대응은 궁극적으로 체제전환을 요청하는 대다수 사회적·담론적 실천들이 그렇듯 분단체제라는 걸림돌에 언젠가는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강 234면)

 

지역문제와 연계시킨 이런 제기방식이 참석자들의 호응을 쉽게 얻어내는 효과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단순한 ‘분단문제’와 ‘분단체제’의 차이가 흐려지기 십상이다. 분단체제는 한국전쟁 이후 복구된 남북의 분단이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로 장기화하면서 일종의 체제를 형성하여 한반도 주민의 삶을 속속들이 규정하는 현실인데—물론 궁극적인 규정요인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국지적 현실 내지 그 ‘하위체제’이다—따라서 체제전환의 담론과 실천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개혁적 변화에도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그동안 한국 민중의 피어린 투쟁을 통해 그나마 상당부분 완화되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우리의 사고와 실천 그리고 상상력의 활발한 전개를 가로막고 있다. 분단체제에 대한 이런 총체적 인식이 결여되다보면 북한에 대한 논의도 ‘언젠가 북한이 열릴 때’ 남한의 악성 자본이 진출할 것을 염려한다거나 북한 지역의 낙후성에서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결코 무의미하진 않지만 현실적인 ‘청사진’과 거리가 먼 담론에 그치기 쉽다.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의 당면 현실이 그런 ‘언젠가’와는 판이한 실정인데다가 이는 결코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전문적 활동가에게, 또는 외국의 힘있는 세력에 맡겨둬도 될 일이 아니며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절박한 문제라는 점이 간과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특별한 관심과 전문성을 살리며 행동할 일이지만, 남북 간의 결합을 어떻게 점진적·단계적으로 높여가며 그러는 동안 남한 자체의 ‘악성’ 요소를 어떻게 줄여나가고 분단체제를 해소 또는 완화하는 남북의 경제·사회·문화적 협력을 어떤 정치적·군사적 합의로 뒷받침할지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안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찌 보면 분단체제의 전방위적 영향과 그 심각성을 젖혀두고 사고하며 생활하게 만드는 것, 한마디로 분단체제의 존재마저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 분단체제의 위력이라 할 수 있다.

강경석의 또다른 문제제기는 탈성장을 실현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적정성장’론이다. “생산력의 증대를 당장에 전면적으로 포기할 경우 탈성장은 고사하고 오히려 ‘약탈적 축적’의 표적이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각국의 현실에서 탈성장의 목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적정성장의 단계를 배치하는 양상도 달라질 테지요.”(239면)

이에 대한 동석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김선철은 “‘탈성장’을 생산력의 양적인 증감 관리 문제로 볼지 아니면 질적인 전환의 문제로 볼지에 따라 몇가지 구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령 ‘적정성장’ ‘적정발전’이라는 용어는 전자에 해당하겠죠”(240면)라며 “철학적인 차원에서 지금의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기초한 경제체제를 벗어나자는”(같은 면) 좌담의 주제와는 무관한 개념으로 치부한다. 채효정도 “적정성장이나 적정발전은 ‘지속 가능한 발전’ 같은 일종의 타협적 용어”(241면)라고 규정한다. 정건화 역시, “새로운 지표”의 개발 필요성과 더불어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은 경제에 대한 관념을 전환하는 것”(243면)이라며 강경석의 문제제기가 당면과제인 사고방식의 전환에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본다.

사회자가 이런 괄시에 직면한 데에는 ‘적정성장’이라는 단어 선택도 일조한 것 같다. 나 자신이 사용해온 표현은 ‘적당한 성장’인데, ‘적당’이라는 말이 무슨 일을 적당적당히 또는 대충대충 해낸다는 느낌을 주어 피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당’이라고 하면 ‘무엇을 위해 적당한가’라는 질문이 뒤따르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쉽게 일축하기 힘든 이점이 있다. 실제로 ‘적정성장’은 경제학에서 이른바 optimal growth 곧 잠재성장능력을 감안했을 때 가장 적절한 성장률을 달리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하기에, “‘지속 가능한 발전’ 같은 일종의 타협적 용어”(채 241면)로 취급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강경석의 ‘적정성장’이나 나의 ‘적당한 성장’ 내지 ‘방어적·수세적 성장’은 모두 탈성장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이는 “생산력의 양적인 증감 관리 문제”(김 240면)를 당연히 포함하지만, 그것은 이 문제를 외면한 탈성장론은 탁상공론에 그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만 하더라도—한국보다도 가난한 나라와 지역은 더 말할 나위 없으려니와—전체 세계가 탈성장에 합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양적 성장을 아예 멈추면 “탈성장은 고사하고 오히려 ‘약탈적 축적’의 표적이 되는 사태”(강 239면)가 예견되며 더구나 가장 취약한 계층이 가장 혹독하게 당하게 마련인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의 발전은 잠정적으로라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좌담에서도 나왔지만—“‘탈성장’한다며 ‘가난한 나라도 발전하지 마’라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거죠”(김 240면)—더 중요한 점은 이것이 가난한 나라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와 한국처럼 이미 빈국으로 안 꼽히는 나라 또는 한국보다도 더 잘사는 나라를 막론하고 체제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 탈성장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얼마만큼의 성장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지를 연마하자는, 경제성장 문제를 반체제운동 전략 차원으로 바꾸는 ‘경제에 대한 관념의 전환’을 이룩하려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정치적 구성물에 해당하는 열국체제(또는 국가간체제 interstate system)에 연루되어 있는 국가와 정부가 주동하기는 힘들고 “아래에서 올라온 담론”(김 245면)으로 출발하여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나갈 수밖에 없다. 이때 “좋은 담론도 정부가 그걸 흡수해서 뭔가 다른 것으로 바꿔온”(같은 면) 것이 문제인데, 탈성장을 부르짖는 논자와 활동가마저 ‘적당한 성장’ 담론을 체제수호 담론으로 오해하여 외면한다면, 탈성장운동 자체의 대중적 소구력을 제약하기 마련이다. 탈성장이 인류생존에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도 그것이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한 당위론에 머문다면 대중은 탈성장론을 일부 ‘잘난 사람들의 거룩한 말씀’ 정도로 들을 뿐 적극적으로 함께할 마음이 안 생길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말하건대 탈성장을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자본주의가 나쁜 건 알지만 자본주의 무서운 건 덜 실감하는 경우도 흔한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기차”와 같아서,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는다는 걸 알아도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위력을 가진 것이다.

 

달리는 기차를 본다 멈추지 않는 기차를

멈추지 않아 아무나 탈 수 없는 기차를

내릴 수도 없다 그만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기차

기차의 속도로 달려야만 탈 수 있는 기차

내리고 싶을 때 내리는 자는 치명상을 입는다

 

세워주지 않는 저 기차에 우리 모두가 이미 타고 있다

악몽 때문이다 탈 수 없는 기차를

이미 타고 있는 것은 악몽에서나 허용된다

기차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우리는

몸을 던져 연료가 되는 자들이다

 

기차를 세울 수 없는 것은

기차의 목적지는 기차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기차를 탈 권리가 없다

기차의 목적지는 달리는 속도에 있다

저 기차가 왜 우리에게 있을까 아무도 묻지 않을 만큼

우리는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있다

—백무산 「기차에 대해서」 전문(『신생』 2020년 가을호)

 

물론 시인이 이 기차를 멈추고 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그 기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봐서도 안 될 것이다.

 

 

고 김종철과의 미완의 토론

 

사실 ‘적당한 성장’ 이야기는 2008년 김종철(金鍾哲) 당시 『녹색평론』 발행인과 나 사이의 논쟁에서 거의 다 나온 내용이다. 그의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기고문 「민주주의, 성장논리, 농적(農的) 순환사회」는 아직껏 나의 ‘적당한 성장’론에 대한 유일한 본격적 비판이지 싶은데, 나는 이어진 여름호에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이라는 제목의 답변을 발표했고 두 글과 나의 ‘덧글’(2009.3)이 이듬해 나온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창비 2009, 이하 이남주 외 2009)에 수록되었다. 직접적인 논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종철 생태사상론집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녹색평론사 2019, 이하 김종철 2019) 첫머리에 같은 제목으로 재수록된 글을 보더라도, 대선 직후인 2008년의 시점에서 시국에 관해 피력했던 이런저런 감상을 삭제하여 한층 밀도 높은 글이 되었지만 기본적인 논지에는 변화가 없음이 확인된다.

내가 김종철의 비판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정면으로 진지하게 대응해준 드문 사례일 뿐 아니라, 내 답변의 서두에 밝혔듯이 그의 생태주의가 자본주의 근대문명에 대한 본질적 문제제기와 민중자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에 근거한 담론이며 더구나 헌신적 실천활동으로 뒷받침된 것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성장’론에 대해서도 그는 기존의 성장주의와 결별하려는 나의 취지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과연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전략인지 분명치 않다”(『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82면; 이남주 외 2009, 161면; 김종철 2019, 25면)라고 비판한다. 또한 ‘적당한 성장’ 논의가 이른바 ‘이중과제론’과 직결됨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이것은 마치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말이 추상적인 언술로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개념이면서도 정작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그 실천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지극히 모호한 것으로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같은 면들) 이는 이중과제론에 동조하다가도 정작 성장문제에 가면 원론적 탈성장 논의에 멈추고 마는 논자들의 자기모순적 태도와 대조된다. 무작정 근대극복을 외친다고 극복이 이뤄지는 게 아니고 극복노력을 지속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그에 꼭 필요한 만큼의 적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중과제론이라면, 그러한 적응 겸 극복의 노력에서 경제성장 문제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종철의 비판에 대한 나의 반론을 여기서 길게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그때의 논지를 바꾸지 않았는데, 요점만 말한다면 이중과제론이 일상생활의 차원에서는 일종의 상식임을 상기시키면서 다른 한편 그의 입장에는 지구생태계 차원의 담론과 한반도에서의 현장 실천을 효율적으로 연결해줄 매개항으로서 분단체제 개념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창작과비평』 2008년 여름호 450~51면 및 452~54면; 이남주 외 181면 및 182~86면). 특히 비판의 초점이 된 ‘적당한 성장’과 관련해서는 약간의 개인적 술회를 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으로 이런 개념에 따라 살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개인이건 국가건 자본주의의 무한축적 원리에 충실하여 최대한의 돈벌이에 목을 매고 사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적어도 개인이나 한정된 집단 차원에서는 그런 세태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고 나아가 이런 기막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돈벌이를 하고 경쟁에서 탈락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에 나 자신과 김종철을 이런 개인들 틈에 포함시켜도 되지 않을까.)(이남주 외 181면)

 

이어서 나는, “아무튼 ‘적당’ 여부는 무엇을 위한 적당이냐에 따라 판별하는 것이지 만사에 두루 해당되는 ‘적당’이란 없다. 특정 상황에서 특정 주체가 ‘극복을 위한 생존 내지 적응’을 위해 도모하는 ‘방어적인 경쟁력 노선’이 과연 그 목적에 비추어 적당한지, 아니면 말로만 ‘방어’지 공세적인 추수주의(追隨主義)와 하등 다를 바 없는지, 또는 ‘방어’를 꾀하다가 방어마저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낙오하게 마련인 전략인지, 이런 문제는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판단할 일인 것이다”(같은 면)라고 했다. 아쉽게도 그런 구체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김종철 나름으로 이미 판단을 마쳤기 때문일지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스스로 돌이켜보건대 내 논의 자체의 미흡한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적당한 성장’과 함께 내가 제기한 ‘생명지속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다는 점은 답변 당시에도 인정했다(같은 책 191면). 나의 발상이 생태주의·생명사상과 일치함을 그런 식으로 부각시키려 하기보다 차라리 ‘적당한 성장’이라는 개념만으로 정면돌파하는 것이 나았겠다는 것이 지금 생각이다. ‘발전’이라는 단어를 내놓은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정면돌파를 회피한 면이 있다. 물론 발전이 (경제)성장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며 탈성장이 성취된 뒤에도 가능하고 필요한 인간생활의 발전 내지 향상과 이를 가늠할 GDP와는 다른 지표들의 개발(정 242~43면) 노력은 지금부터라도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탈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눈앞의 성장문제, “생산력의 양적인 증감”(김 240면) 문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며, ‘성장’을 언급하기만 해도 생태전환에 미온적이라는 혐의에 몰릴까봐 움츠러드는 지식인의 소심증을 벗어나야 한다.

내 답변의 더 중요한 문제점은, 김종철의 소농중심 사회와 ‘농적 순환사회’ 주장을 논평하면서 그의 맑스 인용이 부정확하다거나 ‘고도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소농공동체 기반 사회’로의 이행과정에 대한 현실적 구상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농업과 소농공동체의 세계사적 중요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소농 혹은 소생산자 연합”(김종철 2019, 31면; 이남주 외 2009, 168면)이라는 표현의 모호성이나—전통적 소농사회와 맑스적 소생산자 연합을 구별할 필요는 엄연하니까—미래의 소농공동체 기반 사회로 이행할 때 과학과 기술공학이 어떤 위상을 가질 것인가 등은 지금도 논의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다. 나 자신은 (뒤에 다시 논할) 하이데거적 의미의 ‘기술시대’를 거쳐서야 오히려 노자(老子)가 말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제대로 실현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다만 장래의 ‘작은 나라’는 어디까지나 전지구적 인류공동체의 일부이지 옛날식의 고립된 공동체와는 달라야 하고, ‘적은 수의 백성들’ 역시 세계시민으로서의 식견과 저항력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서 첫째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해야 하고, 둘째로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과학기술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변화 내지는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겠죠.(「논평: 민족문학, 문명전환, IMF사태」, 졸저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46면; 이남주 외 2009, 193~94면에 인용)

 

이런저런 쟁점들과 관련해서 이후에라도 김종철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컨대 동학농민군의 ‘보국안민(輔國安民)’ 구호가 제국주의 침탈에 맞선 무장봉기의 명분이면서도 근대와는 다른 세상을 지향한 것이었고 조선의 유교정치 역시 무한경쟁과 근대적 부국강병주의를 피하는 선에서 경제력을 향상해가는, 말하자면 ‘적당히’ 성장하는 소국주의를 지향했다는 김종철의 인식(「소국주의 사상의 흐름」[2014], 김종철 2019, 142~43면)은 이중과제론과 상통할 여지를 보여준다. 더구나 ‘이중과제’가 제1장(‘『무지개』와 근대의 이중과제’)의 열쇳말이고 제2장(‘『연애하는 여인들』과 기술시대’)에서는 ‘기술시대’를 주제로 삼은 나의 최근 저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창비 2020)를 두고 그가 마지막 선물처럼 써준 추천의 글(같은 책 622~23면; 글을 받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나의 회고담 「고 김종철과 나」, 『녹색평론』 2020년 9·10월호 107~108면 참조)을 보면 견해의 접근 가능성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비록 논쟁 자체는 평행선을 달렸지만 그것을 ‘미완의 토론’이라 규정하며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상식에서 한걸음 더

 

일상의 삶에서 이중과제론이 일종의 상식에 해당하며 그렇기 때문에 굳이 현학적으로 그런 표현을 쓸 필요조차 없지만, ‘근대문명’이라든가 ‘기후위기’ 같은 큰 이야기가 끼어드는 순간 상식만으로는 감당 못할 문제들이 대두한다. 알다시피 기후위기 논의가 어려운 것은 위기가 너무도 절박하고 그 규모가 엄청나서 해법을 찾기가 그만큼 난감하기 때문이다.

물론 “속도를 줄이고, 규모를 줄이고, 욕망의 크기를 지구가 수용 가능한 용량 안으로 줄이는 것 말고 대안은 없습니다”(정 248면)라는 지적은 누구나 수긍함직한 상식이다. 이 작업이 개개인의 작은 실천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또한 상식이다. 그러나 각자가 줄이고 아끼는 일에 몰두하다보면 또다른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 ‘데모를 하자’고 귀국했다는 김선철의 발언이 시사하듯이,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개인의 친환경적 실천이 아무리 성실하더라도 가령 데모를 해서 석탄발전소 하나를 폐쇄하거나 새로 못 짓게 만드는 데 비하면 그 성과가 미미한 게 엄연한 사실이다. 나아가 한국인으로서는 직접적인 참여가 불가능한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의 재선을 막아낸 일이 석탄발전소 몇기를 줄이는 행동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 또한 분명하다.

실은 미국이 빠리기후협정에 복귀하고 반환경정책을 대폭 줄이더라도 인류가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런 판국에 효과가 미미한 개인적 실천에 몰두하다보면 허탈감에 빠져 중도에 포기하거나,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만큼 열심히 안 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불교 용어로 진심(瞋心)—에 차서 설득해야 할 이웃들로부터 오히려 멀어질 수 있다. 아니면 자신이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불교의 치심(癡心)—에 빠져 정작 중요한 공부와 사업을 게을리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실행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 개인적 실천이 부실한 사람이 큰 이야기를 해보았자 대중의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후위기라는 전지구적 문제 앞에서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지극한 마음공부를 요한다. 아니, 그것 자체가 큰 마음공부인 것이다. 이를 미국의 불교학자 데이비드 로이(David Loy)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에코 보살행’을 통한 통찰과 평정심은 불교적 행동주의의 가장 훌륭한 면을 강화해준다. 즉, 행동의 결과에 매달림이 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즉흥적인 행동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실은 그런 행동이야말로 가장 불교도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아니, 실은 우리의 노력으로 변화가 초래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한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데이비드 로이 「불교는 기후위기에 맞설 수 있을까」, 『녹색평론』 2020년 3·4월호 152면)

 

그런데 “우리의 노력으로 변화가 초래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혹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그걸 해낼지를 끊임없이 연마하는 공부를 포함한다. ‘더 중요한 일’ 가운데 데모나 투표가 있다면 어떻게 참여할지도 그런 사례에 속할 것이다. 나아가 창비 지면이나 세교포럼 발제에서 김상현, 백영경, 김선철, 그리고 이번 좌담의 참석자들이 일관되게 강조했고 김종철이 선구적으로 주장했던 자본주의로부터의 체제전환도 당연히 탐구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기후변화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보편적인 위협이기에 자본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초점을 흐리는 일로 비칠 수 있다. 기후변화가 더 심각해지면 자본가와 노동자,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심지어 수많은 동·식물까지 결국 멸종하는 재앙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앙의 규모나 무차별성에 대한 인식과 재앙의 원인규명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고 김용균 씨 등 산업현장 노동자의 사망 중 많은 부분은 불평등의 결과일지언정 기후위기와 직접 연관 짓기 힘든 데 반해, 기후위기의 진행이 불평등을 먹고 사는 사회체제와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라는 구호가 세계의 활동가 사이에 보편화하다시피 되었고,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학생 활동가들이 2020년 7월 유럽연합(EU) 및 전세계 지도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도 “우리의 현 체제는 망가진 것이 아니라 이 체제가 디자인되었던 대로 정확히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건 고쳐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합니다”라고 못박았던 것이다(김선철, 앞의 세교포럼 발제에서 재인용).

자본주의 체제가 어째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나와 있어 편견 없이 현실을 분석하려는 사람이라면 숙고할 자료는 넘쳐난다. 다만 자본주의를 곧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의 산업사회와 동일시하는 시각은, 이윤의 극대화를 작동원리로 삼는 사회체제가 16세기의 자본주의적 농업을 통해 이미 자리 잡고 세계제패를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는 핵심적인 사실을 은폐할 수 있다. 산업사회 비판론은, 구소련의 이른바 현실사회주의도 자본주의 못지않게 환경파괴를 자행했다는 (한때 유행하던) 담론에 대해 양자가 모두 ‘산업사회’라서 그랬다고 해명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지만, 현실사회주의라는 변종마저 포섭했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잡식성을 간과하고 체제전환을 위한 다양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상상하기 힘들게 만든다.

사실 오늘날에는 기후위기가 곧 자본주의체제의 문제라는 점이 어느 정도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상식을 넘어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한반도는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기 전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한층 완곡한 표현으로 그 위력이 회자되던 무렵 ‘후천개벽(後天開闢)’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운동을 탄생시켰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자신은 ‘다시 개벽’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후속 사상가들은 ‘후천개벽’이라는 표현을 공유하기에 이르렀고, 천도교의 이돈화(李敦化)는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의 3대 개벽을 주창하기도 했다(허남진 「강증산의 신인조화사상과 상생문명」,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엮음 『근대한국 개벽운동을 다시 읽다』, 모시는사람들 2020, 70면). 이는 후천개벽이 단순한 개인적 수양이나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자주, 계급타파 등의 시대적 현안을 감당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원불교의 개교표어에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고 인류의 과제를 ‘정신개벽’ 한 단어로 집약했는데, 여기서 물질개벽이라는 시대적 현실에 대한 진단을 기반으로 그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을 뜻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나는 일찍부터 강조해왔다(물질개벽에 대한 나의 최초의 논의로는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 졸저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비평사 1994, 195~207면; 박윤철 엮음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모시는사람들 2016, 34~48면에 재수록). 물질개벽이라는 화두를 생략하고 정신개벽만을 이야기하면 이돈화의 3대 개벽 중의 하나로 왜소화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원불교의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물질개벽시대로 진단하고 이돈화 같은 천도교 인사가 ‘민족개벽’ ‘사회개벽’을 내걸며 맞서고자 했던 세상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세상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맑스 등이 수행한 자본주의 비판을 외면한 채 후천개벽을 실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오늘의 기후위기를 물질개벽의 한 양상으로 보더라도 그 점은 분명하다. 다만 위기의 해결을 정신개벽에서 찾는다는 것은, 아무리 엄격하고 정밀한 자본주의 분석도 그 자체로 충분하지는 못하고 맑스가 강조한 혁명적 실천 의지가 더해지더라도 ‘개벽’에 값하는 개인들의 마음공부를 내포하지 않고서는 문명의 대전환을 이뤄내기 어려움을 뜻한다. 돌이켜볼 때 구소련 등의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도 비록 볼셰비끼혁명이 공산당원의 헌신, 사회주의자의 윤리 같은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긴 했지만 결국 근대 특유의 세속주의와 그에 따른 ‘영성’ 개념 배제로 인해 후천개벽·정신개벽을 향한 공부법을 발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하이데거의 ‘기술시대’ 개념은 후천개벽 사상과 소통할 여지가 훨씬 넓다. 그는 현대 과학기술의 파괴성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비판했지만 ‘기술의 본질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일견 아리송한 명제를 내놓으면서 기술시대의 문제들을 기술적 또는 인간적 차원에서—다시 말해 본질상 근대주의적인 방식으로—해결하려는 온갖 시도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보았다(이에 대해 앞의 졸저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제2장 및 내 학위논문의 번역본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 설준규·김영희·정남영·강미숙 옮김, 창비 2020, 제3장 참조). 쉽게 말해 근대의 공학기술을 포함한 기술도 그 본질 내지 참뜻은 진리가 드러나는 한 형태인데 근대기술의 엄청난 위력과 그 좋든 싫든 눈부신 성과가 사람들이 진리를 사유하는 능력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표현을 바꾸면 물질개벽으로 인한 정신의 쇠약이 진짜 위기이고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 요구되는 형국이다.

연원이 판다르고 내용도 똑같지는 않은 하이데거 사상과 후천개벽론을 병치하는 것이 논의를 더 난해하게 만들 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자본주의로 인한 기술문명의 발달과 그 파괴성을 물질개벽으로 이해하는 일은 하이데거의 기술시대론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세계사적 전개도 진리가 드러나는 한 방식으로 보며, 다만 그 참뜻을 제대로 읽고 원만히 대응할 정신개벽을 달성한 인류만이 진리에 근거한 새 문명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이는 근대문명을 단지 규탄하고 대안적 체제를 주창하는 데 그치기보다 근대가 안겨준 시련을 감당하고 버텨내는 가운데 각성해가는 대중과 더불어 현 체제의 실질적인 극복을 이루어나가려는 ‘이중과제론’으로 이어진다. 그렇더라도 각자가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를 결연히 촉구하면서 당장에 가능한 개인의 실천과 공부에 성의를 다하는 일이 여전히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백낙청白樂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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