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강영숙 소설집 『날마다 축제』, 창비 2004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임홍배 林洪培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교수 limhb059@snu.ac.kr
강영숙(姜英淑)의 소설은 낯설고 기괴하다. 집단으로 자살여행을 떠나온 파산자들의 강강술래, 그 윤무(輪舞)의 가락에 섞여드는 상여꾼의 노랫소리, 불을 지른 자동차에 갇혀 있는 일가족의 동반자살 장면들이 어지럽게 포개진다. 「태국풍의 상아색 쌘들」에 어른거리는 이 환청과 환시는 ‘탯줄 썩는 냄새’의 환취(幻臭)로 변주되기도 하거니와(「날마다 축제」), 그의 소설에서는 평범한 일상의 디테일마저도 그런 분위기에 감염되어 까닭 없는 헛증을 유발하기 일쑤다. 황사와 스모그로 뒤덮인 도시의 미로를 오가는 등장인물들 역시 감정과 개성이 탈색된 토우(土偶) 군상처럼 느껴진다. 작품의 도처에서 예외 없이 독자의 기대지평을 허물고 마는 이 모든 것이 연출하는 분위기는 한마디로 그로테스크하다. 그런데 그로테스크 미학의 발견이 근대 휴머니즘의 탄생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을 첫인상과 달리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르네쌍스의 절정기인 16세기 초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고대 고분에서 사람과 동식물이 한몸으로 조합된 기괴한 부장품들을 발굴했는데, 그처럼 기괴한 형상을 규정할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해 결국 궁여지책으로 부장품의 출처인 ‘동굴무덤 같다’는 뜻으로 ‘그로테스크’란 말을 썼다고 한다. 요컨대 그로테스크는 의미를 규정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들의 부정적 총칭인 셈이다. 르네쌍스 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이 과학적으로 상상한 인류진화의 계보학에 도저히 편입시킬 수 없었던 그 충격적 퇴행의 위기감이 항구적 불안의 시대인 오늘날 일상의 현실로 체감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위기의 일상화는 위기에 대한 둔감함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강영숙 소설의 기괴한 낯섦은 일차적으로 그러한 둔감의 외피를 벗겨내는 서술전략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친숙하던 일상이 왜 일순간 기괴하게 일그러지는지 의문을 유도한다.
강영숙의 소설에 출몰하는 헛것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텍스트의 공동(空洞)이자 의미의 함정들이다. 하지만 예의 환영들이 초현실적 몽환과 달리 독자를 숨가쁜 긴장과 혼란에 빠뜨리는 구체적 실감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첫 소설집에 수록된 「불빛과 침묵」의 비유를 빌리면 우주를 지탱하는 동시에 한순간 집어삼킬 수도 있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불빛과 침묵」, 『흔들리다』, 문학동네 2002,174면)의 가시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씨티투어버스」의 들소가 그렇다. 주인공은 도시가 불시에 정전사태를 맞자 “겁에 질려서 무엇에 쫓기는 줄도 모르는 채 앞으로만 달리”(15면)는 들소떼의 환영을 본다. 그러다가 다시 전기가 공급되자 “제어할 수 없는 자동인형들처럼”(같은 곳) 분주하게 어딘가로 움직이는 거리의 사람들. 그들의 생생한 현실과 들소의 환영은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모종의 ‘자동기계장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이 불안감을 일찍이 프로이트는 친숙하던 것이 섬뜩하게 낯설어지는 공포심의 진원지로 지목한 바 있지만, 강영숙 소설의 괴기는 그러한 일상의 균열이 예외적 병리상태가 아니라 삶의 기본조건임을 환기함으로써 뜻밖의 사실적 효과를 얻는다. 버스와 들소의 충돌, 그리고 들소의 죽음은 생존본능에 충실한 맹목적 욕구가 예기치 않던 순간에 몰고 올 파국을 다름아닌 환영과 현실의 교착을 통해 더욱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힘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힘은 “이 도시에서 안전한 곳은 도심을 뱅글뱅글 도는 씨티투어버스밖에는 없다는 듯”(22면) 동일한 삶을 반복하는 일상에서는 분간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 무한질주는 정지된 시간과 동일한 사태의 표현이 된다.
강영숙 소설의 독특한 몰개성의 인물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갈라놓는 그 동일한 사태의 경계선에 끼여서 신음하는 존재들이다. 「날마다 축제」의 여주인공이 모성의 본능에 이끌려 아이를 찾아가는 길에는 아이를 빼앗아간 남자의 다른 분신이―환영이 아닌 현실로!―그녀를 따라다닌다. 모성적 본능의 그리움과 추적망상의 공포심이 하나로 뒤엉켜 있는 것이다.막상 아이를 찾고 나서는 자기 아이인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젖을 물리는 “맨땅 위에 드러누워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행복한 인디언 여자”(99면) 같은 모습에서 독자는 겨우 안도감을 느끼지만, 다음날 홍수가 휩쓸고 간 텅 빈 집에서 그녀가 깨어나는 장면에 이르면 과연 어디까지가 악몽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이 시작되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 빈집을 나서는 여자의 시야에 무수한 새끼거미들이 바람에 날려 허공에 흩어지는 광경이 목격되는데, 아주 드물게만 허용되는 이런 장면의 카타르시스적 효과를 과연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강영숙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로서는 자문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온갖 환영의 현실성을 ‘내’가 배제했던 ‘나’의 현실 또는 현실적 가능성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독자에겐 그러한 결말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진지하게 사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영숙의 소설을 압도하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화자의 분산(分散)을 전제로 하는만큼 소설적으로 다양한 분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봄밤」에 등장하는 남편은 경계선의 양쪽을 필요에 따라 넘나드는 다중적인 역할을 관찰자인 아내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은연중 해학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까지의 강영숙 소설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이러한 인간형에 환상과 다른 차원의 현실적 질감을 입힌다면 훨씬 풍부한 소재에 접근하는 또다른 영역을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의 작품에 비추어볼 때 그런 가능성보다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쪽은 지금의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더 진지하게 계속 밀고 가는 것이다. 이런 선택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따를 것이다. 「별빛은, 별빛은」 같은 작품에서 보듯이 무엇보다 과도한 우의화(寓意化)는 현실감을 희석시킬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댐」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지만 성장소설의 틀을 통해 그런 문제점을 비켜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빙고의 계절」은 어린시절 헤어진 친구에 대한 기억의 환영을 지우고 읽으면 한편의 세태묘사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위기의 일상화가 둔감함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지금의 신선한 충격이 어느 순간에는 친숙한 것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작가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