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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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클라이스트 단편선 『미하엘 콜하스』, 창비 2013

근대소설의 원근법을 넘어서는 걸작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donnard@hanmail.net

 

 

160_새책_세계문학-14미하엘콜하스-표1_fmt독일문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이름을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다. 19세기초 독일에서 활동했던 극작가이자 단편소설가, 낭만주의자도 고전주의자도 아닌 독특한 유형의 천재적인 작가,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많은 불화를 일으켰고 서른셋의 나이에 유부녀와 권총 자살한 불운한 인물, 당대에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해 잊혔다가 20세기초에 새삼 발굴되었고, 카프카가 동질감을 느끼고 몇번씩이나 탐독했다는 작가라고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전에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혹시 독일단편선 같은 책에서 그의 소설을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미하엘 콜하스」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빈약한 독서량에 대한 부끄러움도 이 소설을 발견한 환희에 비하면 사소해진다.

클라이스트의 소설은 일반적인 근대소설의 틀에 맞지 않는다. 뭔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른 것이 풍요롭고 매혹적이다. 누군가 클라이스트가 사실주의의 선구자라고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동의하겠다. 클라이스트에게는 주관적인 감정토로나 심리분석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소설은 빠르게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주인공의 심리는 그의 몸짓과 발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누군가 클라이스트가 카프카에 앞선 부조리 소설의 선구자였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동의하겠다. 클라이스트는 안정된 일상이 무너지는 재앙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현실세계는 갑자기 낯설고 적대적인 얼굴을 드러낸다. 누군가 클라이스트가 미숙한 소설가라고 규정한다면, 나는 마지못해 동의할 것이다. 확실히 그의 어떤 소설들에는 절제되지 않은 감상주의가 있고, 동기화되지 않은 우연의 개입이 있고, 그로테스크한 폭력이 있다. 19세기의 중반에 정착된 소설의 일반적 기준에 따르자면 말이다. 독일에서 유행했던 노벨레(novelle)라는 단편소설의 전통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탄복했던 클라이스트 소설의 매력은 많은 부분 이 노벨레의 장르적 특징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노벨레는 “역설적인 어조로 끝나는 짧고 독립된 줄거리, 세련되고 부드러운 문체, 감정의 억제, 주관적인 표현보다 객관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클라이스트의 작품에 장르적 특징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클라이스트의 이야기들은 꽤 단순한 출발점을 가진다. 뭔가 기상천외하고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두가지 예만 들어보자. 「미하엘 콜하스」에서 “선량한 백성의 귀감”으로 삼을 만했던 미하엘 콜하스가 독일제국을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도적의 괴수가 되어 나타난다. 「O. 후작 부인」에서는 “바른 행실로 이름 높은 귀부인”이 신문에 황당한 광고를 낸다. “저도 모르는 새에 아이를 가졌으니,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는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진기하고 기괴한 ‘얘깃거리’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클라이스트는 이 소재를 인간정신에 대한 탐구로 이어내는 출중한 재능을 지녔다.

클라이스트의 인물들은 파토스로 충만해 있다. 이 말은 그들이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미하엘 콜하스는 융커에게서 부당한 횡포를 당했음에도 흥분하지 않는다. 그는 차근차근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당국에 시정조치를 청원한다. 후작 부인은 이성을 잃고 충동적으로 신문에 광고를 낸 게 아니다. 그녀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심사숙고했다. 감정에 휘둘려 딸에게 폭언을 퍼붓고 뒤늦게 후회하는 것은 차라리 그녀의 아버지다. 그런데 일단 하나의 판단이 섰을 때, 그들의 행동은 단호하고 거침없다. 콜하스는 그가 더이상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결연히 법에 맞서서 스스로 정의를 실현하는 반도(叛徒)가 되기로 작정한다. 후작 부인은 자신을 범한 남자가 누구일지라도, 심지어 그것이 비천한 하인일지라도 그와 결혼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 김수영(金洙暎)은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한 바 있는데, 클라이스트의 인물들이 그렇다.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에 따른 것도 아니고 이해관계나 사유에 의한 것도 아니며, 마치 자신의 존재이유가 거기에 달려 있는 듯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의지하는 바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법의 심판을 당당하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주워온 자식」을 보자. 애지중지 키웠지만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양아들을 살해한 아버지가 순순히 체포되어 법정에 선다. 정작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진다. 사형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인 그가 일반적인 사죄의식을 한사코 거부한 것이다. 이유가 걸작이다. “나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소. 지옥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떨어지고 싶소. 니꼴로는 천국에 가지 못할 테니, 나는 지옥에서 그놈을 다시 찾아내 이승에서 못다 한 복수를 마저 다할 거요!”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주인공들의 강인한 의지는 소진되는 법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범죄자나 광인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인물의 행동,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들의 의지는 당연하지만 개인과 사회의 대립을 극단적으로 만든다. 그 덕분에 사회는 자신의 수치스럽고 약한 이면을 내보인다. 「미하엘 콜하스」에서는 한명의 성실한 말장수가 끈질기게 요구한 정의 앞에서 제국의 사법제도가 갖는 약점이 드러난다. 법질서는 사실상 정의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클라이스트는 고결한 개인과 타락한 사회라는 낭만적 이분법에 만족하지 않는다. 콜하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선의에서 그를 도우려는 제후가 있고 그에게 유리한 제국의 관행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좌절될수록 신성로마제국 법체계의 관대하면서도 불합리하고 치밀하면서도 부패한 속살이 더욱 섬세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지나치게 격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의 성격은 이로써 현실을 비판하는 탁월한 소설적 장치가 된다. 골드만(L. Goldmann)이 루카치(G. Lukács)에 기대어 “소설이란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형태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말했을 때 클라이스트만큼 그 정의에 부합하는 소설가도 드물 것이다.

클라이스트의 소설에는 기이한 리듬이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대화를 인용하는 그의 수법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의 대화는 통상 소설에서 그러하듯이 따옴표로 처리되기도 하지만 화자의 서술 속에 간접화법으로 나열되기도 한다. 마치 우리의 판소리에서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구분이 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에 대한 화자의 평가도 리듬에 따라 이루어진다. 콜하스는 그를 질타하는 법과 교회의 관점에서 어느 순간 “잔인무도한 놈”이나 “화적”이 된다. 이것은 근대소설의 원근법과는 다른 종류의 서술방식이다. 근대소설이 화자의 통일성이라는 기점에서 수학적 정밀성을 가지고 대상을 포착함으로써 근대적 주체를 요청한다면, 클라이스트는 사건들의 도도한 진행과 유장한 언어 속에서 전혀 다른 생산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미하엘 콜하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도 이 리듬 속에서는 넉넉하게 수용되고 통합된다. 그것이 벤야민(W. Benjamin)이 소설가와 이야기꾼을 대조할 때 염두에 둔 ‘이야기’의 전통에 속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비견할 수 있으리라. 미술에서처럼 근대 원근법에 의해 묻혔다가 입체파에 의해 재발견된 어떤 위대한 소설전통이 있었노라고.

마지막으로 번역(황종민 옮김)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클라이스트의 단편집이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말의 묘미를 맛깔스럽게 살려낸 예는 없을 것이다. 특히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 삼백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일까, 옮긴이는 의도적으로 구수한 우리말을 동원하여 ‘이야기’의 어감을 되살린다. 예를 들어 “이 굽도 젖도 할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63면) 따위의 표현이 그렇다. 그리고 내가 손에 닿는 대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옮긴이는 독일어 문장을 풀어 약간의 의미 손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의 리듬이 살아나도록 번역해놓았다. 나는 이러한 번역이 훌륭한 선택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하엘 콜하스」에 그토록 매료되었던 것은 상당부분 우리말 번역의 유장한 리듬감 덕분이었다.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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