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소설에서 현실 만나기
염상섭의 작가정신과 한국 근대
『삼대』를 중심으로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저서로 『이조시대 서사시』(전2권) 『한문서사의 영토』(전2권) 『실사구시의 한국학』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 등이 있음. lim1767@skku.edu
1. 『삼대』에 대한 평가 문제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의 『삼대(三代)』는 조선일보 지상에 연재(1931.1.1~ 9.17)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삼대』가 어느 시점에서 근대소설의 대표작 반열에 올라섰는지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으나, 현재 남한학계에서 『삼대』의 위상은 확고한 편이다. 반면 북조선의 문학사에서 『삼대』에 대한 평가는 남한과 전혀 딴판이다. 『삼대』는 문학사에서 거명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염상섭이란 작가 자체가 배제된 상태다. 북측의 주체사관으로 설계된 문학사 구도에서 『삼대』와 염상섭은 놓일 자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체사관으로 진입하기 이전에도 좌파적 문학논리에서 염상섭은 경원시되었고 『삼대』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좌파의 문학이론을 주도했던 임화(林和)에서부터 확인되는 사실이다.
임화는 1930년대 당시에 염상섭을 두고 “오래된 지나간 시절의 존속자”1)로 규정지었다.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취급한 논법이다. 임화가 이렇게 본 이론적 근거는 염상섭문학이 “소부르주아지의 부정적 리얼리즘—자연주의가 그 주요한 성격을 이루고 있”2)는 것으로 판정한 것이다. 그는 근대문학사의 구도를, 3·1운동 이후 출발한 신문학이 1925년을 전환점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주도로 넘어가서 부르주아적인 문학은 이미 그 역사적 수명을 다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 시기(1925년 이후—인용자)에 있어 문학적 진보와 민족해방의 정신이 계급문학의 형식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다는 것이 임화가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제시한 주장이었다.3)
남과 북은 『삼대』에 대한 평가에 당해서도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분단적 문학사인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남북 양쪽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학사를 다시 세울 수 없는 일일까? 『삼대』에 대한 평가는 바로 이 과제와 직결된 사안에 속한다.
필자는 오래전에 「신문학운동과 민족현실의 발견」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4) 그때 나는 한국문학에 입문한 초학자로서 비록 고전문학, 그중에도 한문학을 전공하지만 문학사 전체를 통관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문학은 3·1운동의 여파로 일어난 신문학으로 출발했다고 나름의 인식논리를 제시했다. 당시 식민지적 현실에서 젊은 지식층이 주도한 문화활동은 왜곡될밖에 없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로부터 “3·1운동 이래 가장 현저히 발달된 자 문예운동인데 (…) 강토의 전부를 주고라도 재미있는 몇줄의 신소설을 바꿈”이라고 여지없이 매도를 당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투쟁노선을 견지했던 신채호의 눈에 그렇게 비쳐질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하지만 신문학의 자기발전과정에서 민족현실을 발견함에 따라 초창기의 취약점을 극복해나갔다. 요컨대 신문학은 ‘민족현실의 발견’에 의해 근대문학〓민족문학으로서의 내실을 채워갔다는 관점이다. 염상섭의 『만세전』(1924)은 이 관점을 입증하는 데 적합한 사례이다. 그런데 필자는 『만세전』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소시민적 트리비얼리즘에 작가적 역량을 많이 소모하였”다는 투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게 간주할 면이 꼭 없지 않지만, 염상섭문학 전체로 볼 때 나의 이 판단은 소견 부족에서 나온 것이고 스스로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 『삼대』 읽기를 다시 시도하는 것은 나 자신 염상섭에 대한 해묵은 부채를 청산하자는 데 일차적인 뜻이 있다. 『삼대』는 『만세전』과 시차가 크지 않아도 문학사의 단계가 달라진 시기의 작품이다. 3·1운동으로 출발한 신문학은 1925년을 분수령으로 사회주의사상에 기초한 좌파문학이 등장함에 따라 소위 민족문학과 계급문학이 대립하는 양상이 빚어진 것이다. 이 시기 좌우의 대립은 우리 역사상 초유의 사태인데 남북분단이 이념적 대결로 굳어진 내재적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염상섭은 이 단계에서 사상적 대립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거니와, 『삼대』는 바로 이 시기를 소설적으로 대변한 것이다. 식민지시대를 거쳐 분단시대에 도착한 한국근대는 분단체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삼대』 읽기가 한국근대 읽기로 통하기를 기대한다.
최근에 『염상섭 문장전집』5)(이하 『문장전집』으로 지칭)이 발간되었다. 염상섭이 일생 동안 산문형식으로 발표한 글들을 수집, 정리한 내용으로 3책 2000면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문장전집』은 소설가로서의 염상섭의 사상적 독백이자 그가 실천한 문학의 논리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작가정신을 폭넓게 접하면서 『삼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염상섭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근거가 되었던 그의 자연주의에 관해서 유의해볼까 한다. 염상섭과 『삼대』에 관련해서 많은 연구와 논의가 제출된 줄 아는데 방금 밝혔듯 필자 자신의 문제의식에 집중하다보니 거론할 겨를이 없게 되었다. 이 점 양해를 구한다.
2. 염상섭의 사상적·문학적 입장
폭수(暴手)가 두려워 이에 굴종하기에는 너무나 자유의 존엄을 지나치게 깨달았다. 주저할 바 있겠는가! 마땅히 한 목숨을 걸어 독립을 선언하는 바이다.
염상섭이 한국근대사에 최초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1919년 당시 일본유학시절에 오오사까의 텐노오지(天王寺)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거행하려던 일인데, 위는 당시 선언서에 담긴 구절이다. 먹지에 써서 돌리려 한 선언서를 사전에 압수당하고 말았다 한다. 여기서 그는 ‘자유의 존엄’을 우리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대당위로 내세운다. 근대주체로서의 자아각성이 자유란 개념으로 표출되는바 개아(個我)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즉 해방적 의미를 확고히 한 것이다. 이듬해 『동아일보』에 정론적인 산문을 발표하는데 제목이 「노동운동의 경향과 노동의 진의(眞義)」(1920.4.20~26)다. 젊은 염상섭의 사상적 지향은 이 제목만으로도 엿보기에 어렵지 않다. 후일에 “나 역시 그 노동운동, 즉 그때의 술어로 제3계급 해방운동에 공명하였고, 또 그것을 실천하려 하였었다. 적어도 그러한 이념을 가지게 되었었다. 민족해방운동은 노동쟁의를 통한 무산자해방운동으로 우회하는 작전이라 할까”6)라고 술회했다.
근대적 자아를 각성한 염상섭의 사상경향을 짐작게 한다. 젊은 염상섭의 사상적 입장은, 마치 지난 1970~80년대 운동권학생처럼 급진적이었다. 이 입장을 자신의 전 생애에서 그대로 견지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청년기에 취했던 신념을 포기하고 사상적 전환을 했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염상섭에게 있어서 필생의 사업은 물론 소설이었다. 근대인으로 각성한 염상섭은 직업작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설가로서 그는 대단히 생산적이다. 자신의 작가생활 40년에 “써온 작품 수를 따져본다면, 소위 중편(중편이란 분량으로 측정하는 말인지 모호하거니와)이라고 할 듯한 것 2편을 제쳐놓으면, 장편이 18편이요, 그 나머지 95편이 단편”7)이라고 결산한 바 있다.
『문장전집』은 그의 작가적 진지성·성실성을 증언하는 문건이다. 물론 그의 작가적 진지성·성실성이라면 다른 어디보다도 그가 남긴 장편·단편의 소설이 실증하고 있다. 염상섭에게 있어서 소설은 자신의 문학에 대한 근대적 자각의 표명이요, 실천의 장이다. 먼저 『문장전집』을 통해서 그가 실천한 문학의 논리와 함께 방법론을 청취해보자.
문학에 대한 근대적 각성, 소설정신
염상섭은 자신의 문학활동을 신문학이란 개념으로 표현하면서 3·1운동에 연계시킨 발언을 누차 하였다. 사례 하나만 들어본다.
신문예운동은 이조(李朝) 최말기부터 싹이라고 하겠으나 조선의 현대적 저널리즘의 획기(劃期)라 할 기미(己未, 1919년) 전후로써 봉우리가 앉졌거나 한두송이 꽃이 피었더니라고 볼 수 있는 정도요, ‘울연(鬱然)’이라든지 ‘찬연(燦然)’이라는 형용사는 당치 않을 것이다.8)
신문학운동에 대한 염상섭의 견해는, 활발한 상태가 되지 못했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20세기초를 그 맹아기로 상정하고 3·1운동이 계기가 되어 꽃이 핀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적 저널리즘’이란 신문·잡지를 가리키는바 신문학을 가능케 한 조건으로 이를 중시한 것은 신문, 잡지의 지면이 새로운 시와 소설의 발표장이 되었기 때문일 터다. 이런 대목에서도 문제를 실제 현실에 입각해서 관찰하는 염상섭다운 사고방식을 느끼게 한다.
당시 신문학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현진건(玄鎭健)의 「빈처(貧妻)」(『개벽』 1921년 1월호)는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작품이다. “그 잘난 언문 섞어서 무어라고 끼적거려놓고 제 주제에 무슨 조선에 유명한 문학가가 된다니! 시럽에 아들놈!” 이런 빈정거림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작가라는 존재였다. 염상섭 역시 이런 분위기에 저항하면서 창작을 했다. 그가 문학에 관한 원론적 견해를 종종 표명하는가 하면 문학현장에 비평적 개입을 한 것은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이, 조선사회가 예술가라거나 문사라면 조소와 빈축으로 맞는 것은 예술이나 문학이라는 것은 유희요, 오락이라고 생각하는 근본적 오류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옥돌’이 아니다. 문학은 붓장난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문학가라면 세책(貰冊)집으로 알고, 문인이라면 둥근 목침 베고 누워서 흥타령이나 부르고 앉았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에 사회적 이단자거나 생명의 유희자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9)
염상섭이 조선문인회(朝鮮文人會)를 위해 발표한 글의 한 대목이다. 조선문인회는 1922년말에 결성된 단체로 뚜렷한 성과를 남기진 못했지만, 『창조(創造)』 『폐허(廢墟)』 같은 동인 형태를 넘어서 문학운동을 전개하려는 취지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위에서 “예술은 옥돌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옥을 다듬듯 세공을 부리는 이상의 심오한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문학가라면 세책집”으로 오인한다는 말은 문학가를 세책가처럼 저속한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곳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다분히 희화적인 어조이다. 문학은 한낱 세공적인 기교나 유희가 결코 아니라는, 문학에 대한 고도의 각성을 담은 내용이다. 그는 작가란 “내적 생활의 백병전에 종군하는 투사”(274면)라고 일갈한다. 문학하는 자를 ‘백병전의 투사’에 비유한 것은 창작에 심혈을 쏟아야 한다는 취지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도 말한다. “진순(眞純)과 진지(眞摯)로써 볼 때에 생명이 연소하고 영혼의 화염이 번쩍거릴 따름이다”(273면). 고도의 수사적 강조인데 작가적 특성으로 지적한 그의 진지성·성실성의 원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전력투구를 역설한 신문예에서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소설이었다. “제다(諸多) 사정을 고찰하여 조선의 예술운동을 생각하면 결국에 소설 이외에는 진로가 또다시 없다 할 것이다”10)라고 그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여기서도 그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의 특성이 드러난다. 연극과 영화도 고려했지만, 연극운동은 전통의 뿌리가 취약한데다가 열악한 경제형편으로 발전하기 어려우며, 영화운동도 연극이 부진한 마당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밖에 길이 없다는 결론이다. 소설이라면 과연 어떤 소설이 되어야 할까?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위에도 말하였거니와 읽은 뒤에 생각게 하는 것, 불의·부정에 대하여 의분·증오의 염(念)을 환기케 하는 것, 자기의 감정을 순화하고 자성케 하는 것, 지금까지 모르던 깊고 넓은 인생의 형용을 깨닫게 하는 것, 자기의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체득하면서 이상의 세계에 비약할 용기를 주는 것…… 이러한 모든 점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같은 글 721면)
염상섭에게 있어서 문학에 대한 근대적 각성은 오직 소설로 집약되었다. 위 글에 강렬하게 표명된바 진정한 소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것이고, 인간을 고양시키고 이상세계로 비약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성격의 것이었다. 소설은 오락물과는 다른 차원으로, 사회서사에서 그치지 않고 인생서사의 의미를 갖는 것인데 그것은 종교적 심성에 깊숙이 다가서 있다. 그의 소설정신은 자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계급문학 진영과의 대결 논리
신문학은 1925년으로 오면 계급문학(프롤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의 등장에 따라, 이른바 민족문학과 계급문학의 대립구도가 형성, 좌우의 갈등이 치열하게 된다. 문단에서뿐 아니라 사상적·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전면에서 일어났다. 신간회운동은 좌우의 분열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문단에서는 신간회운동에 동참하는 기류가 미미했다. 좌파적 문학운동이 강경하여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까닭이다. 염상섭은 계급문학에 맞서 고군역전(孤軍力戰)을 사양하지 않았다.
당시 사상문화 운동을 주도하던 잡지 『개벽』은 1925년 2월호에 계급문학의 시비를 가리는 문제를 제출하고 작가들에게 답을 구하는 지면을 설정한다. 문단의 주요 작가들이 출동하여 계급문학에 대한 각기 견해를 표명했는데, 염상섭은 계급문학이라고 따로 들고 나설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계급문학이 출현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아니요, 또 그 출현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아니나, 다만 일종의 적극적 운동으로 무리하게 형성시키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필요가 없다는 것보다도, 그리함은 문학의 근본의(根本義)에 어그러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대상의 필연적 경향, 혹은 물산(物産), 또는 어떠한 작가의 소질로 인하여 소위 계급문학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출현된다 하면 그는 문학계의 자연한 일 현상으로 용인할 따름일 것이다.11)
계급문학을 딱히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요청이나 작가의 취향으로 출현하게 된다면 ‘당연’ 혹은 ‘자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고 본다. 여기에 방점을 찍어 ‘문학의 근본의(根本義)’에 위배된다고 단언한다. 문학주의로 규정해도 좋을 것 같다. 염상섭이 문학주의를 취했다는 면에서는 이광수(李光洙), 김동인(金東仁)과 일치한다. 그러나 계급문학을 거부하지 않고 용납한다는 면에서는 같지 않다.
그 이듬해 염상섭은 「계급문학을 논하여 소위 신경향파에 여(與)함」으로 계급문학 진영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비판의 초점은 “고정된 계급관념에 사로잡혀서” 문학을 “계급해방의 수단방편”으로 삼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의무는 결코 목전의 계급전(階級戰)의 일 보조무기로써 사용되려는 고식적(姑息的) 사업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문학, 완전히 해방된 프롤레타리아로 탄생된 프롤레타리아가 잃었던 인간성을 찾는 거룩한 운동과 그 정신에서 나오는 문학이어야 할 것이요, 구체화한 인류애와 모든 음영이 걷히고, 가장 자유롭게 흐르는 위대한 생명을 예찬하기 위하여 건전한 정신과 사상에서 성장하는 문학이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사회관, 새로운 예술관…… 이러한 인류가 이때까지 가져보지 못하던 모든 아름다운 사상을 길러주고, 풍윤(豊潤)하고 순진한 정서로 생명의 미와 생활의 유열(愉悅)을 한층 더 꾸미고 맛보게 하기 위하여 존재할 문학이다.12)
프롤레타리아문학을 부정하고 거부했다기보다는 그것이 가야 할 이상적 지점을 제시한 셈이다. 그는 자기 논지를 다시 요약하여 “프롤레타리아문학은 신인도주의요, 신인생주의며, 신로맨티시즘일 것”(같은 면)이라고 한다. 그가 제시한 프롤레타리아문학은 인도주의적이요, 인류적 이상을 담지하고 있는데 다분히 추상적이고 현실성을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가적 태도는 앞서 지적한 대로 답답할 정도로 현실주의적이었다. 계급문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929년 당시 원산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이 사태에 직면해서 염상섭은 “조선의 초유할 만한 일대 쟁의가 조선의 무산문예운동에 대하여 얼만한 자극과 공효(功效)와 또는 실수(實收)를 주겠느냐”고 기대반 회의반 하고 있다. 조선현실의 변화에 작가적 촉감으로 “예술적 가치로나 공리적 견지로나 장래 조선문학, 적어도 조선무산문학을 위하여 만장(萬丈)의 기염(氣焰)을 토(吐)”해야 할 계제라면서 오직 대망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웅혼한 필봉’이라고 역설한 것이다.13) 청년시절 ‘제3계급 해방운동에 공감’하였다는 그 작가의식이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삼대』의 작법상의 특징적 면모
필자는 ‘소설에서 근대어문의 실현’이란 주제로 염상섭의 『만세전』을 루쉰(魯迅)의 『아큐정전(阿Q正傳)』(1921)에 비견해 논한 바 있다.14) 한자를 공용함으로 해서 형성되었던 ‘동아시아세계’는 서구 주도의 근대세계로 합류함에 따라 급격히 전통적인 문명권의 해체 단계로 들어갔다. 중국에 인접하여 한자문화, 유교사회를 지켜왔던 한국은 해체과정에서도 중국과 유사한 경로를 통과하게 된다. 근대문학이 신문학운동으로 성취된 점 또한 같은 모양새였다.
5·4운동의 문학적 대변자가 『아큐정전』이라면 3·1운동의 문학적 대변자는 『만세전』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근대소설 형성기의 대표작으로 『아큐정전』을 손꼽는 데 대해서 『만세전』을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루쉰과 『아큐정전』이 중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정도의 위상을 염상섭과 『만세전』이 누리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변이 궁색해진다. 턱없는 소리라는 반응이 나올 것 같다. 중국문학사에서 루쉰처럼 확고부동한 위치에 선 존재가 한국문학사에는 부재한 형편이다. 실은 이런 문제를 판정할 공론의 장이 아직 열리지 못했다. 남북의 분단으로 이념적 대립을 겪어온데다가 내부에서 이념적 갈등이 겹쳐 공정한 평가로 합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기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공청병관(公廳倂觀)이 무한히 아쉽다.
때문에 필자는 염상섭을 중국 근대의 루쉰에 비견하는 논의를 제기하면서도 사견임을 전제했다. 지금 논의를 좀더 끌고 가자면 루쉰은 『아큐정전』 이후로 치중한 방향이 달라서 소설창작에서는 진전된 경지를 내놓지 못했던 데 비해서 염상섭은 필생을 소설창작에 바쳐 수많은 장·단편을 쏟아냈다. 김동인은 신문학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춘원(春園, 이광수)이 쓰기는 먼저 썼지만 근대적인 장편소설을 쓴 것은 횡보(橫步, 염상섭)”15)라고 말한다. 김동인의 이 발언은 정론으로 인정할 수 있다.
『삼대』는 설정된 배경이 『만세전』과 유사한데, 말하자면 『만세전』 이후 1920년대말의 조선 현실을 그린 내용이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조덕기로 이름을 바꾸어 재출연한 꼴이다. 『삼대』는 『만세전』의 후속편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염상섭에게 있어서 『만세전』이 근대소설 성립기의 성과에 해당한다면 『삼대』는 거기서 진전한, 장편소설 완성단계의 성과이다. 물론 그의 개성적 필치의 소산인데, 근대어의 소설적 실현이란 측면에서 몇가지 점을 적출해본다.
『삼대』의 문체와 서사방식
일찍이 김동인은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하여 “작풍은? 문체는? 수없는 ‘?’가 우리 앞에 있었다”고 말한다. 근대문학 ‘개척자의 고통’ 그것이었다. 국문으로, 구어로 글을 쓴다는 자체가 처음 부딪친 당면한 어려움이었다. 직전까지 보편적 글쓰기는 한문이었고 국문 글쓰기는 여성에 국한된 일이었다. 그래도 소설장르에서는 선례가 있었다. 염상섭이 지적했듯 명색 소설이란 안방마님이나 아씨들의 심심풀이 독물이었는데 문장도 문어체여서 반면교사의 의미를 가졌을 뿐이다. 염상섭의 소설은 서울말을 문학어로 탁월하게 구사한 성공사례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문체는 ‘염상섭표’라 할 정도로 개성적이었다. 그는 그 자신의 문체를 거론한 글의 제목을 ‘고삽(苦澁)·난삽(難澁)·치밀(緻密)’이라고 붙여놓았다. 염상섭을 읽을 때 얼른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대체로 만연체여서 부정적으로 말하면 선명치 못하고 자연히 모호성도 따른다. 그의 기질적인 면과 관련되지만 작가적 성실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생래(生來)의 기벽이라 할지, 매사에 무심히,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않고 천착하는 버릇이 있어, 그것이 작품에 묘사로 나타날 때 독자를 머릿살 아프게 하는 모양이기도 하다. (…) 소설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소설에 한가롭게 잔말을 늘어놓을 여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가는 탈이다. 소설작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마는, 치수가 들어맞고 빈틈없이 앞뒤가 꼭 째인 기구(機構)를,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가진 것이 소설인데, 거기에 군소리나 잔말이 넌출지게 끼일 여유를 허락할 리 없다.16)
위 인용문에서 “치수가 들어맞고 빈틈없이 앞뒤가 꼭 째인 기구(機構)를,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가진 것이 소설”임을 강조했듯 염상섭은 구성의 치밀성을 소설 작법의 제1요건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삼대』는 정치한 짜임의 전범으로 그 특유의 서사방식을 구사한 것이다.
『삼대』는 조씨가(家) 3대를 중심으로 삶의 일상을 그려나간 가운데 사회적 의미가 심대하다. 그런데 기조를 일상성에 두고 있지만, 서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극적인 장면이 종종 끼어든다. 예컨대 ‘봉욕’ ‘피 묻은 입술’ 같은 장이나 조상훈이 가짜 형사를 대동하고 가서 자기 집 금고를 터는 등 장면은 극적이고도 엽기적인 느낌마저 든다. 구구각색의 인물이 등장해서 사건이 얽히고설켜 복잡한 가운데 ‘검거선풍’(신문연재본에서는 ‘용의자의 떼’)에서 위기의 정점에 이른다.
지금 사건은 두군데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병화, 장훈이를 중심으로 필순이 경애 모녀들은 고등계에 불린 것이요, 지주사, 한방의(漢方醫), 최참봉 들은 사법계다. 덕기와 원삼이 내외는 두군데 다 걸쳐 있다.17)
좌익사범의 고등계와 파렴치범의 사법계로 사건이 얽혀진 이야기다. 한쪽은 사상적인 문제이고 다른 한쪽은 물질적인 문제이지만 양쪽 다 식민지 권력의 사법적 처리에 운명이 맡겨진 상태이다. 여기 올 때까지 극적인 사건뿐 아니라 음모와 의혹이 서사의 과정에 곧잘 삽입된다. 작자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의문을 제공하며(예컨대 첫 대목에서 홍경애의 존재), 의도적으로 의혹을 일으키게도 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의문과 의혹이 풀려나가는 방식을 쓰고 있다. 추리적 성격이 농후하다. 물론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합리적으로 전개되면서 독자의 흥미를 유도하는 서사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작자의 해설적 개입
『삼대』는 책을 펼쳐들면 첫장부터 주인공 덕기가 쿄오또로 떠나기 위해 행랑아범을 시켜 짐을 꾸리는 옆에 서 있는데 “애, 누가 찾어왔나보다. 그 누구냐? 대가리 꼴 하고……”18) 하며 조부가 사랑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누구’란 덕기의 상대역인 병화이다. 작품은 극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장면제시적인 수법을 쓴 것이다.
극적인 전개에서 등장인물의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밖에 없다. 위 장면은 덕기와 병화가 만나는 장면으로 넘어가서 두 친구가 서로 비꼬는 투의 대화로 나아간다. 작중에서 대화는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고 서사가 발전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지만 작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게도 하는 것이다. 그런 한편 작중에 작자의 개입이 빈번하다. 등장인물 각각의 심리를 설명하고 내심을 드러내는가 하면 어떤 사건의 맥락이나 은밀한 사실을 알려주는 등등 작자의 개입이 서사의 진행상에서 갖는 의미 또한 긴요하다. 원론적으로 소설은 해설을 위주로 하는 문학양식이 아니다. 작자의 부단한 해설적 개입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해답은 작자 자신의 소설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염상섭에게 문학 하는 행위는 ‘내적 백병전의 투사’가 되는 일이기에, 진정한 소설은 사회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인간을 고양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장면중심적 수법을 구사하면서도 작자의 해설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뚜르게네프(I. S. Turgenev)의 『아버지와 아들』(1862)은 『삼대』와 비교해봄직한 작품이다. 세대갈등이 서사의 중심에 놓인 점이 유사하거니와, 신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르까디와 바자로프를 설정한 데 대해 『삼대』는 덕기와 병화가 대칭을 이룬다.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세대갈등이나 입장차가 토론에 의해 표출되곤 하는데 『삼대』에서는 토론의 장이 펼쳐지지 않는다. 병화의 부자처럼 갈등이 심각해도 아예 등을 돌리며, 병화와 덕기의 입장차도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려진다. 전래적으로 토론문화가 결여되었던 때문이지 싶다. 『삼대』의 작자가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고뇌를 파고들자면 해설적 개입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4. 3세대 서사의 의미
삼대가 사는 중산계급의 한 가정을 그려보려 합니다. 한 집안에서 살건마는 삼대의 호흡하는 공기는 다릅니다. 즉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세가지 시대를 각각 대표합니다.19)
『삼대』의 신문연재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온 「작자의 말」이다. 작중의 조씨가(家) 삼대에서 조부 조의관은 3·1운동 이전 시대, 부친 조상훈은 3·1운동 직후 시대, 손자 조덕기는 눈앞의 오늘을 대변하고 있다. 작중 현재가 언젠지 딱히 명시되지 않았으나, 『삼대』를 쓰는 당시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염상섭은 당대 현실을 배경으로 포착해서 소설을 꾸며내는 특성을 보였다. 말하자면 신문(新聞)이 그때그때의 기사를 내보내듯 시선을 철저히 목전에 둔다. 『삼대』의 자매편 『무화과』(1931~32)는 만주사변(1931)이 터져서 호외가 뿌려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시사성이 더욱 강열하다. 염상섭은 참으로 ‘따끈따끈한’ 소설의 작가다.
조씨 삼대를 각기 시대의 대표자로 설정하고 있으나, 공간적으로 동일한 무대에 출연시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정황을 소설적으로 꾸며낸 것이 곧 『삼대』다. 조씨 삼대는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호흡하는 공기’가 다르다 할 만큼 세대차가 있다.
세대간 층차와 가문의 위기
조부는 갈데없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그의 의관(議官)이란 관직이 이른바 ‘개화벼슬’이므로 구한국의 시대변화를 경험했겠으나 봉건적 구태에서 한치도 탈피하지 못한 위인이다. 가문의식에 집착하지만 실은 제대로 된 양반이 아니어서 자기 집에 대동보소(大同譜所)를 차리고 족보간행 사업을 벌인다. 가짜로 양반이 되려는 수작이다. 매관(賣官)에 2만냥을 들였거니와, ‘덤붙이’로 양반 족보에 편입하는 데는 무려 20만냥이나 들어갔다 한다. 차세대인 조상훈은 “돈 주고 양반 사!” 하고 그 처사를 ‘일종의 굴욕’으로 치부하고 있다.
차세대 조상훈은 굉장히 개화한 사람이다. 그는 “이태 동안 미국을 다녀온” 극히 희소가치를 누린 인물인데다가, “도도한 웅변으로 설교(說敎)”를 하는 교회 사업가였다. 명망가로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조상훈이 위선자에서 그치지 않고 타락자로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든 것이다. 3세대의 조덕기는 부친에 대해 “봉건시대에서 지금 시대로 건너오는 외나무다리의 중턱에 선 것 같다고 생각”(상권 45면)한다. 조부에서 손자 사이의 다리인데 이 다리가 위태위태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작중에서 조씨가를 위기로 떨어드린 장본인이 다름 아닌 상훈이다.
원인은 돈이다. 조씨가의 몰락위기는 요컨대 1세대가 축적해놓은 부의 행방에 있었다.
돈? 돈 때문에? 돈 동록 냄새가 욕기의 입김에 서려서 쉬고 썩고 하여 나오는 냄새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돈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고? …… 생각하면 뉘 집에서나 열쇠 임자의 숨이 깔딱깔딱할 때가 닥쳐오면 한번은 겪고 마는 풍파가 이 집에서도 일어나려고 뭉싯뭉싯 검부잿불처럼 보이지 않는 데서 타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덕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하권 58면)
덕기의 독백에 해당하는 서술이다. ‘열쇠 임자’인 조의관의 죽음이 다가오자 조씨가에는 중량급 태풍이 닥친다. 음모와 작란(作亂)이 난무하여 마침내 ‘검거선풍’이 일어나는데, 큰 피해를 입긴 하지만 파산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가문의 위기를 그런대로 선방한 꼴이다. 이 과정에서 놀았던 삼대 각자의 역할을 구분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중산계급으로 규정된 조씨가의 부가 어떻게 이루어졌던지는 알 수 없고 나아가서 재산을 자본으로 활용한 측면도 보이지 않으나, 어쨌건 조의관은 부를 잘 유지·관리하였다. 그가 작성해서 남긴 분재기록을 보면 합리적이고 적절한 조처로 평가할 수 있다. 조부는 청산되어 마땅한 구시대 유물임에도 자기 세대의 역할을 잘 수행한 셈이다. 조부에 의해 취해진 가산의 분배 과정에서 부친은 약간 배려를 받는 정도에 그치고 손자에게로 승계된다. 1세대에서 차세대를 건너뛰어 3세대로 넘어간 것이다. 차세대 상훈은 가독상속자(家督相續者)로서의 권리를 상실하고 말았다. 세대갈등이 원인을 제공하였지만 자초한 면이 컸다. 가짜 형사를 대동하고 제집 금고문을 여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한 것은, 그의 입장으로서는 가산분배에서 소외된 데 대한 나름의 대응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중간을 건너뛰어 손자를 선택한 조부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한 셈이지만.
조부는 손자에게 열쇠를 맡기면서 “그 열쇠 하나에 네 평생의 운명이 달렸고 이 집안 가운이 달렸다. 너는 그 열쇠를 붙들고 사당을 지켜야 한다”(하권 64면)는 유언을 남긴다. 덕기는 자신이 일생에 할 일이 금고문지기와 사당지기 이 두가지 일밖에 없단 말이냐고 고민한다. 덕기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돈에 집착하는 행태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에 나와 있듯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리하여 취한 행동양태는 금고문지기의 역은 정신 차려 접수하면서 사당지기 역에는 소극적이다. 그는 복잡하게 얽혀든 위기상황을 신중하고도 명민하게 대응, 마침내 가문을 파산위기에서 구해낸다. ‘돈 있는 덕기’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덕기는 깨닫고 있었다. 작자가 “손주의 대에 와서 비로소 새 길을 찾아들”게 된다고 밝힌 그대로 ‘새 길’로 갈 동력을 확보했다. 근대적응을 가능케 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겠다.
씸퍼사이저(sympathizer)
삼대서사를 통해서 작자가 전하려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손자의 대에 와서 비로소 새 길을 찾아들려고 허덕이다가 손에 잡힌 것이 그 이른바 ‘씸퍼사이저’라고 하는, 즉 좌익에의 동조자 혹은 동정자라는 것이었다.”20) 염상섭이 후일에 밝힌 말이다. 작중에서도 금천이란 일제 관헌이 조덕기를 “소위 심퍼사이저일 것”(하권 256면)이라고 지목한다.
씸퍼사이저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는 『삼대』는 물론 염상섭문학을 읽는 데 중요한 사안이다. 연구자들은 당연히 이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바 염상섭문학의 한계점을 드러낸 것으로 보는 관점이 주류였다. ‘이념적 결핍’을 돈으로 보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비판적 견해로 식민지하에서 자본의 특성과 연계지은 해석이 제기되었다. 필자는 이 신해석이 문제를 보는 각도를 잘 잡은 것으로 보면서 씸퍼사이저를 일종의 필터로 상정한 것은 적절치 않다고 여겼다.21) 무엇보다도 작중에서 씸퍼사이저를 중시한 작가의식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살펴는 것이 필요하다.
『삼대』는 “구차한 사람, 고생하는 사람은 그 구차, 그 고생만으로도 인생의 큰 노역(勞役)이니까, 그 노역에 대한 당연한 보수(報酬)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독백하며, “이런 도의적 이념이 머리에 떠오르는 덕기는 필순이 모녀를 자기가 맡는 것이 당연한 의무나 책임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는 다짐으로 전편(全篇)이 끝난다.22) 덕기는 좌파 운동가의 딸 이필순을 후원할 것인가의 여부로 계속 고민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부친 조상훈이 말로가 비참하게 된 어떤 애국지사를 후원하고 유족을 보살피다가 그 집 딸을 농락하게 되는데 바로 홍경애다. 덕기는 동정심이란 위선에 가깝고 나쁜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는 점을 십분 고려했다. 다른 누가 아닌, 자기 부친이 저지른 과오는 그에게 뼈저린 교훈이 아닐 수 없었다. 백번 주저하며 깊이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 위의 도의적 결단이었다.
『삼대』의 마지막에서 덕기의 머리에 떠오른 ‘도의적 이념’이란 씸퍼시(sympathy)에 해당하는 것이다. 씸퍼사이저의 정신 그것이다. 씸퍼시는 대개 동정심이라고 풀이되지만 이 경우 인간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삼대』의 끝에 표명된 취지가 그렇다. 계급문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공감하면서 휴머니즘을 주문했던 작가정신과 기맥이 닿는 것이다.
당시 조선 현실은 엄혹한 식민지배하에 있었다. 1930년대로 오면서 세계적인 대공황이 닥치자 식민지배자들은 억압을 가중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동포가 인간답게 살자면 식민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급선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의 애국사상과 이에 따르는 모든 행동을 좌익에 동조하는 길로 돌”렸으며, “독립운동을 잠행적(潛行的)으로 실천하는 길”23)이라는 생각을 그는 하게 된 것이리라.
지면은 다르지만 『삼대』에 바로 이어 신문연재한 『무화과』는 세 세대의 서사가 재현된 모양새다. 『무화과』에서 3세대로 등장하는 이원영은 『삼대』의 조덕기처럼 씸퍼시의 구현자다. 『무화과』라는 제목부터 상징적이다. 우리 선조는 비록 “비틀어졌으나마 꽃 속에서 나고 꽃 속에서 길”러졌지만, 지금 우리는 꽃 없이 태어났다. 곧 ‘무화과(無花果)’인데, 앞으로는 우리 자손은 꽃 속에서 기르고 싶다고 한다. 무화과로 식민지의 뿌리 뽑히고 황폐한 삶을 암시하고 있음이 물론이다. 작자 자신 그 간절한 소망을 “축원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그려낸 작품은 『삼대』보다도 훨씬 암울하다.24) 주인공 이원영이 신문 경영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관헌에게 재차 연행당하는 장면에서 막이 내린다. 전체적으로도 서사의 진행이 잘 풀리지 못해 지리멸렬한 느낌도 없지 않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작자의 개인적인 역량 문제로만 돌릴 일은 아니지 싶다. 『삼대』에서 『무화과』로 이어진 1931~32년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군국주의로 치닫는 상황이었다. ‘인간적 이상’을 향한 소망이 간절한 데 반비례로 아이들이 ‘꽃 속에서 자라는 세상’을 그려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리얼리스트로 철저한 작가적 기질로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 염상섭문학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염상섭에 대해 박종화(朴鍾和)는 ‘자연주의문학의 거목’이라고, 임화는 ‘자연주의의 챔피언’이라고 일컬었다. 양쪽 말이 같지만 취지는 딴판이다. 박종화는 극구 찬양임에 반해 임화는 깎아내린 논조다. 어쨌건 염상섭문학을 자연주의로 규정한 것은 통설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년쯤 지난 1970년대로 와서 리얼리즘으로 평가하는 논의들이 나왔던 것 같다.
염상섭문학이 자연주의냐 사실주의냐, 혹은 양자를 관련지어 보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염상섭은 1963년 3월 14일 영면하는데, 그 2년 전에 이 문제를 해명한 글을 발표한다. “한번은 이야기하여둘 필요가 있겠기로 초보적인 창작론 같으나 쓴 것이다”로 끝맺은 글이다. 작가 자신이 후인에게 공개적으로 남기고 싶었던, 마치 유언처럼 들린다.
나 보기에는 ‘자연주의’라는 것은 문학이 근대로 넘어오는 데에 겪어야 할 면역성 홍역 같아서, 나도 그 영향을 받고 그 고비를 넘겼지마는 내가 생각하여도 실제의 작품에 나타난 것으로 ‘자연주의적’이라는 것은 우연한 일치일 것이다. 성격이란다든지, 사회환경이나 민족적 처지가 더욱이 자연주의문학의 색채를 띠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25)
이렇듯 자기 문학의 성격을 자연주의로 규정짓는 데 동의하지 않고 다분히 유보적이다. 자연주의를 ‘면역성 홍역’에 빗댄 말이 묘하다. 홍역은 이미 사라진 질병이지만 예전에는 누구나 앓게 되는 인생의 필수코스였다. 자연주의는 홍역처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창작의 코스였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은 근대의 여명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자연주의는 현대문학의 새로운 발족점이었던 것”으로 그는 보았다.26) 근대 지식인들이 과학(science)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까닭이다. 자연주의의 기반은 과학에 있었다. 그런데 염상섭은 홍역을 한번 앓고 나면 면역이 생기듯 자연주의도 일단 통과하고 나서는 거기서 벗어나야 할 것으로 사고했다. 이 지점에 염상섭문학의 입지가 있다.
그는 “‘무해결(無解決)’이라는 것, 즉 결론을 내리지 않거나 해결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이요, 따라서 객관적이어야 할 자연주의문학의 태도로서는 당연한 것인데 나는 언제나 무해결을 노리기보다는, 좁은 주관으로라도 어디까지나 자기 유(流)의 해결을 짓고자 애를 써왔었다”고 고백한다. 탈자연주의적인 문학정신이 선명하다. “나는 자연주의적 제약을 무시하면서도 그 테 안에서 돌던 자기 작품을 끌어내서 ‘사실주의’라는 자유로운 경지에 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연주의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까.”27) 문학을 자연주의로 입문했던 염상섭 스스로 그 틀에서 탈피, ‘사실주의 경지’로 올라섰다는 것이다. 이 발언을 액면대로 접수해도 좋을지 따져볼 필요가 있겠으나, 염상섭의 문학적 논리 및 『삼대』를 분석한 본고의 내용이 입증하고도 남는다.27)
문학상의 자연주의는 학문상의 실증주의와 상통하는 것이다. 근대에 풍미했던 과학주의의 문학적 반영이 자연주의이고, 학문적 반영이 실증주의이기 때문이다. 염상섭문학에 대한 자연주의적 평가는 작가정신 및 작품이 구현한 리얼리즘을 간과한 소치이다. 자연주의로 찬양한 것은 과학주의〓근대주의에 매몰된 태도이다. 반면 자연주의로 폄훼한 것은 근대극복이란 주관적 의지로 앞서 나간 것인데 당시 처한 현실에 비추어 역사적 비약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 점을 지적해서 지식인이 범하기 쉬운 ‘역사적 조급증’이라고 비판한 바도 있다.28)
『삼대』 서사의 리얼리즘은 식민지배의 억압 속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길을 물은 내용이다. 식민지 자체가 자본주의체제에서 배태된 것이므로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의 뜻도 담겨 있다. 그뿐 아니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공감하면서도 추종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리얼리즘은 본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미학인데 진정한 리얼리즘이라면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까지 요망한다. 그런 점에서 김병화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저자의 거리두기는 그가 자본주의적 근대에 매몰되어서라기보다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한층 원만하게 수행하려는 자세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염상섭은 1930년대 당시 문학은 ‘중정(中正)의 길’을 가야할 것으로 주장한다. “우로 후퇴하지도 않고 좌로 편의(偏倚)하지도 않은” 길이다. “자본주의가 발달 안된 조선”에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29) 염상섭 사실주의가 입각한 지점인데 계급문학 진영이 표방했던 사실주의와는 입지가 다를 뿐 아니라 방법론도 같을 수 없었다. 식민지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지만 자본주의가 미발달한 조선의 현실로서는 건너뛸 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염상섭 사실주의에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란 문제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의식 때문에 『삼대』는 좌우·남북으로 갈등대립한 한국근대에 한편에서는 위상이 불확실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문학사적 미아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삼대』 서사의 리얼리즘과 염상섭의 작가정신은 절실한 현재성을 지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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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화 「조선의 현대문학」, 경성일보 1939.2.23(『임화문학예술전집』 5, 소명출판 2009, 483면).
2) 임화 「1933년의 조선문학의 제경향과 전망」, 조선일보 1934.1.1~14(『임화문학예술전집』 4, 370면).
3) 임화 「조선민족문학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 『건설기의 조선문학』, 1946(『임화문학예술전집』 5, 420면).
4) 『창작과비평』 1973년 봄호에 실린 것으로, ‘1920년대에 있어서 현진건·이상화·염상섭의 문학활동’이란 부제를 달았다. 이 논문은 필자의 『한국문학사의 시각』(창작과비평사 1984)에 수록되어 있다. 뒤에 인용한 대목은 이 책의 317면과 350면이다.
5) 한기형·이혜령 엮음 『염상섭 문장전집』, 소명출판. Ⅰ권과 Ⅱ권은 2013년, Ⅲ권은 2014년에 발간됨.
6) 「횡보문단회상기(橫步文壇回想記)」, 『사상계』 1962년 11월호(『문장전집』 Ⅲ, 592면).
7) 같은 글, 『문장전집』 Ⅲ, 602면.
8) 「문예연두어(文藝年頭語)」, 매일신보 1934.1.5(『문장전집』 Ⅱ, 364면).
9) 「문인회 조직에 관하여」, 동아일보 1923.1.1(『문장전집』 Ⅰ, 273면).
10) 「소설과 민중」, 동아일보 1928.5.31(같은 책 713면).
11) 「계급문학시비론: 작가로서는 무의미한 말」, 『개벽』 1925년 2월호(같은 책 331면).
12) 「계급문학을 논하여 소위 新傾向派에 與함」, 조선일보 1926.2.1(같은 책 469면).
13) 「노쟁(勞爭)과 문학」, 동아일보 1929.2.15(『문장전집』 Ⅱ, 40~41면).
14) 졸고 「소설에서 근대어문의 실현경로: 동아시아 보편문어에서 민족어문으로 이행하기까지」, 『흔들리는 언어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8.
15) 「신문학운동의 회고와 전망: 김동인, 염상섭 양씨에게 문학을 듣는 좌담회」, 『중앙신문』 1947.11.1~2 (『문장전집』 Ⅲ, 58면).
16) 「고삽·난삽·치밀」, 『현대문학』 1961년 5월호(『문장전집』 Ⅲ, 574~75면).
17) 『삼대』 하(이하 ‘하권’), 창작과비평사 1993, 260면.
『삼대』는 두 계열의 이본이 통행하고 있다. 하나는 당초 『조선일보』 연재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47·8년에 을유문화사에서 2책으로 간행한 단행본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을유본은 작자의 손에서 수정·보완이 되었다. 창작과비평사의 교양문고본은 을유본을 기초로 한 것인데 본고는 이를 주 자료로 삼았다.
18) 『삼대』 상(이하 ‘상권’), 창작과비평사 1993, 5면.
19) 조선일보 1930.12.27(『문장전집』 Ⅱ, 281면).
20) 「횡보문단회상기」, 앞의 책 605면.
21) 박헌호 「소모로서의 식민지, (不姙)資本의 운명—염상섭의 『무화과』를 중심으로」, 『외국문학연구』 48집, 한국외대 외국문학연구소 2012; 오혜진 「‘심퍼사이저’라는 필터: 저항의 자원과 그 양식들—1920~1930년대 염상섭의 소설과 평문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38집, 2013.
22) 하권 322면. 『삼대』의 이 끝 부분은 해방 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하면서 새로 들어간 것이다. 신문 연재본에서는 그앞에서 작품이 끝나고 있다.
23) 「횡보문단회상기」, 앞의 책 606면.
24) 『무화과』 「작자의 말」(매일신보 1931.11.10; 『문장전집』Ⅱ 326~27면)
25) 「나의 창작 여담: 사실주의에 대한 일언」, 앞의 책 570면.
26) 「토구(討究), 비판’ 3제(三題): 무산문예·양식문제·기타」, 동아일보 1929.5.9(『문장전집』 Ⅱ, 60면).
27) 「나의 창작 여담: 사실주의에 대한 일언」, 앞의 책 570~71면.
28) 졸고 「임화의 문학사 인식논리」,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졸저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 창비 2014, 322면).
29) 「문예연두어」, 매일신보 1934.1.9~10(『문장전집』 Ⅱ, 368면, 3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