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 소수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본다 ④
‘탈북자’를 넘어서
이향규 李向珪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공저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비전향장기수 김석형 구술기록』 『북한교육 60년: 형성과 발전전망』 등이 있음. hyangkue@hanmail.net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는데도 밖에 나가면 괜히 위축된다. 그래서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서도 가볍게 화장을 하고 향수도 조금 뿌린다. 이곳에 온 후 식구들 모두 체중이 줄었다. 혹시 몰라 약국에 구충제를 사러 갔다. 진열대에 약이 많은데 구충제를 찾기가 어려웠다. 점원에게 물어보면 되련만 입이 안 떨어졌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 가끔씩 괜히 마음이 작아질 때가 있다. 나는 이곳이 아직 낯설고, 나를 바라보든 그러지 않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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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학교 갔다 집으로 돌아오면 잠들 때까지 우리말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우리 노래를 부르고 우리글을 읽고, 저녁은 우리 음식을 먹는다. 아이들보다 뒤늦게 이곳에 도착한 나는 아이들이 여기 생활에 잘 적응해 있기를 희망했었다. 친구도 사귀고, 학교공부도 잘 따라가고, 여기 음식도 잘 먹고, 여기 사람들과 말도 잘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친구가 없었고, 우리 음식을 먹고 싶어했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집 밖에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내심 걱정하면서, 오늘도 아이들과 우리 음악을 듣고, 우리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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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작은 것도 신용카드로 산다. 내 이름 석자를 서명하는 그 순간이 좋기 때문이다. 이름을 쓰는 순간, 내 앞에 있는 점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기분이 든다. ‘당신이 보고 있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랍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당신이 모르는 많은 경험을 했고, 지금은 내 삶의 한순간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큽니다.’ 그렇게 우리말로 내 이름을 쓰고 나면 장바구니를 든 손에 힘이 생기고 발걸음이 당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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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에서 벌어진 참담한 인권침해에 대해 쓴 글을 뒤늦게 읽었다. 무고하게 죽은 생명, 충분히 애도받지 못한 젊은 영혼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무거웠다. 집 밖을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저마다 살고 있는 이곳 사람들은 삶의 비통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풍요롭고 여유있게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과 나는 아무런 공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이 즐기는 풍요와 여유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사회가 멋있긴 하지만, 내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지난여름에 영국의 작은 바닷가 도시로 이주해왔다. 남편과 아이들이 두달 전에 먼저 와 있었고, 나는 한국에서의 일과 집을 정리하고 합류했다. 2002년에 런던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의 고향인 이곳에서 잘 정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불과 2년 후에 두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도망치듯 영국을 떠났다. 한국에서 우린 나름 열심히 살았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비록 학교에서는 ‘다문화학생’으로 불렸지만, 한국 아이로 잘 자라주었다. 그리고 12년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나는 내내 이른바 ‘탈북청소년’과 ‘다문화청소년’의 교육과 사회적응을 돕는 일을 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다른 문화에 살다가 이주해온 사람들을 다양한 이름으로 분류하고 구별짓는다. 이제 나와 아이들은, 한국의 정책용어를 빌리자면, ‘결혼이주여성’과 ‘중도입국청소년’이 되어 남편과 아버지의 나라로 이주해온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한국에서 내가 ‘그들을 위해’ 했던 일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이야기—시선
내가 타인의 시선에 움츠러들 때, 그건 실제로 타인이 나를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타인이 나를 그렇게 볼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인가? 나는 이 점이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여기선 아무도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그 막연한 ‘타인’이 누구인지, 그 시선이 혹시 내가 만들어낸 것이나 내가 증폭시킨 것이 아닌지 의혹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여기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길거리에는 오만가지 특이한 복장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특별히 불편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 짧은 치마에 깃털 모자를 쓴 할머니, 스키니진을 입은 게이 커플, 공원에 누워 입 맞추는 연인……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수많은 종족이 거리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뒤돌아보거나, 조롱하거나,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는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묘한 편안함을 주었다. 그 편안함이 내게 일으킨 소심한 변화는, 한여름 내내 민소매옷과 반바지를 입고 길거리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건 한국에서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내 나이에, 내 몸매에 그렇게 입으면 ‘민폐’라고 사람들이 여길 것 같았다. 옷 입는 게 대체 뭐라고, 한국에 있을 때는 그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번도 햇빛을 보지 못했던 어깨가 검게 그을었다. 그 사소한 자유가 내 몸의 긴장을 풀게 했다.
그러면서 혐의가 짙어졌다. 내가 이곳에 와서 느꼈던 타인의 시선은 실제 이곳 사람들이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학습한, 그래서 결국 이곳에까지 가져온 내 마음속에 있는 타인의 렌즈일지 모른다는. 적어도 그 렌즈가 나의 위축감을 증폭시켰을 수 있다는 것을. 한국사회는 내게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하도록 가르쳤고, 나는 그것이 내 생각인 양 성실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추면서 다수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동안 정작 ‘나’는 위축되어 있었다.
남편은 이곳에서 어학연수를 온 여러 나라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 유럽, 남미, 중동에서 온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난 12년 동안 가르쳤던 한국 학생들이 얼마나 겸손하고 성실했는지를 새삼 깨닫는단다. 열심히 안한다고 불평했던 예체능대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국에 오래 살면서 성실함의 기준이 너무 높아졌나보다고 반성한다. 그러곤 한국 사람들은 좀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도 한국에서는 전혀 뽐낼 일이 아닌데, 여기 아이들은 엄청 자랑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내가 한 작은 성취를 충분히 자랑하거나 축하하기도 전에 다음 목표를 세우는, 그러곤 그 까마득한 결승점 앞에서 다시 작아지는 경험을 너무 오랫동안 반복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자랑하는 게,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게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결승점 앞에서 늘 ‘좀더 열심히 해야 할’ 존재다. 비극은, 그 결승점을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끊임없이 착취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억압하던 시선으로 똑같이 타인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억압함으로써 그 착취의 기제에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참가해왔던 게 아닐까.
영국에는 북한 난민들이 많이 산다. 뉴몰든(New Malden)이라는 한인밀집 거주지역에는 남한 사람, 북한 사람, 조선족이 섞여 산다. 그야말로 코리아타운이다. 북한 사람만 1000명가량 있다고 한다. 뉴몰든에 사는 북한 사람을 몇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한국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비슷한 처지의 북한 남성과 결혼해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은 슈퍼마켓에서 일하는데, 부지런하다고 인정받아 곧 매니저가 된다고 했다. 시리아, 아프간, 소말리아, 수단 난민에 비하면 북한 난민은 엄청나게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지역사회의 환영을 받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북한 사람들, 특히 북한 남성들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국가의 배급체제에 길들여져 열심히 일하는 대신 복지시스템에 빌붙어 살려 한다거나, 직장에서 분란을 일으켜 잘리기 일쑤에, 보험사기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파렴치한으로 종종 회자된다. 이주민은 그들이 어떤 토양에 정착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적응해갈 텐데, 이런 모습이 정말 한국에 사는 북한이주민의 전형이라면 그 발현에 한국사회가 져야 할 책임은 없을까? 아니, 언제나 근면성실하라고, 복지시스템에 의존하지 말라고, 직장에 순응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 우리가 높은 기준의 근면성실을 그들에게 요구하면서 비난하는 순간, 우리 자신도 그 굴레 안에 더 깊숙이 속박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난 십여년 동안 백명이 넘는 북한이주민을 만났다. 주로 청소년과 여성 들이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인의 ‘시선’이다. 한국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묘한 눈. 옷차림과 말투, 혹은 스스로의 고백으로 북한 사람임이 밝혀진 후에 받게 되는 관심, 동정, 우월감, 무시, 교화, 조언, 경멸, 배려의 시선과 태도를 이야기해주었다. 처음에는 그게 환대인지 경계인지, 친절인지 억압인지 헷갈리다가 곧 그 모든 것이 합쳐진 복잡한 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보는 이상, 자신은 결코 한국 사람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다. 그러면 북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을 후회하거나,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쓴다. 한국 사람처럼 말하고, 먹고, 옷 입고, 화장하려고 한다. 나를 ‘북한 사람’이라는 범주로 확 밀어넣는 그 시선을 피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타인의 시선에 움츠러들 때, 그건 실제로 타인이 나를 그렇게 보기 때문인가, 아니면 타인이 나를 그렇게 볼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 답은 사회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영국에 사는 내가 느끼는 타인의 시선은 나 스스로 증폭시킨 바가 크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건 한국사회가 내게 사회화시킨 태도이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북한이주민이 느끼는 한국 사람들의 시선은, 비록 자신의 내면에서 증강된 면이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말과 행위로 표현되는 실재에 가깝다. 그런데 이 시선은 사실 그들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아무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연고도, 배경도, 고급취향도, 돈도, 자격증도, 노동영웅다운 근면성실함도 없이 한국 땅에 온 북한이주민을 보는 시선, 그게 무엇인지, 그 시선을 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우리 모두 조금씩은 알지 않는가, 우리 기억 저편에 묻어둔 모멸감을 들추어보면.
두번째 이야기—적응
“이제 좀 적응이 됐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잠깐 생각하게 된다. 시차적응도 되었고, 동네 지리도 웬만큼 알고, 삼시세끼를 잘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밤에 잘 자고 아침에 잘 일어난다. 아이들도 별 탈 없이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다. 적응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다른 한편 생각해보면, 아이들과 나는 아직 영국 친구가 거의 없고, 한국 노래를 듣고, 한국 음식을 먹고, 인터넷으로 한국 방송을 본다. 내가 가족 이외에 이야기하는 사람 대부분은 ‘카톡’과 인터넷 전화로 소통하는,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다. 삶이 이곳에 오기 전과 너무나 연속되어 있어서, 나는 때때로 한국에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이곳에 적응을 한 걸까.
한국의 무지개청소년센터에서 이주청소년 지원사업을 할 때나 한국교육개발원에서 탈북청소년 지원 관련 연구와 실천 사업을 할 때, 우리는 이 지원을 통해 이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했다. 이를 위해 적응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를 만들고, 적응을 돕는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들의 적응을 도와주라고 교사연수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 적응이 이들을 일방적으로 한국사회에 ‘동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나는 사실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적응과 동화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 것을 ‘강요’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북한적인 것’을 얼마나 ‘인정’하는지에 달려 있음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S장학재단은 ‘배움터 지원사업’을 한다. 여기서 나는 지원받는 배움터를 도와주는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특히 탈북청소년을 위한 교육기관을 컨설팅해주는 게 주업무였다. 이런 기관 중에는 아이들의 공동생활시설들이 있다. 아이들은 이 시설에 살면서 인근 학교에 다니고, 방과 후에는 이곳에서 여러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탈북한 여성들이 정작 한국에 와서는 돈을 벌러 외지에 나가면서 어린아이들을 이런 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형제 많은 집안의 애들처럼 법석대며 밝게 지내는 것 같았다. 이런 시설 중에는 북한 사람들이 설립해서 운영하는 곳들이 있다. 나는, 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기관에 가면, 겉으로는 웃으며 수고한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혹시 아이들이 방치되지는 않는지 가혹하게 훈육되지는 않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북한 교사들이 이 아이들의 사회적응을 더 더디게 할 것 같아서 남한 교사를 채용할 계획이 있는지, 지역사회와의 교류현황은 어떤지 꼭 물어보았다. 그후 몇년 동안 곁에서 보면서 이들이 가진 진정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분들을 교육자로 존중하는 나는 나름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지난해 A학교에서 혼란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A학교가 배움터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집체무용’을 신청했을 때, 우린 약간 망설이긴 했지만 그 시도를 존중하고 예산을 지원했다. 이미 다문화학생에 대한 정책은 이주해온 어머니의 본국문화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에 북한적인 것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포용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중간점검 및 사업운영 컨설팅을 위해 기관을 방문했을 때, 그곳 교사들은 아이들의 실력을 보여줄 생각에 들떠 있었다. 아이들은 「어린이 행진곡」에 맞춰 집체무용을 절도 있게 해냈다. 비록 노래는 “자유대한 길이 빛낼 새싹이라네”로 끝났지만, 아이들의 동작과 시선은 마치 TV 프로그램 「남북의 창」에 나오는 북한 학생들 같아서 나는 크게 당황했다. 이 마음속의 불편함이 너무 커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재미있어요?” 아이들은 큰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이거 하니까 어떤 점이 좋아요?” 아이들은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학교 가서 발표도 잘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 춤도 출 줄 알아요?” 아이들은 씨스타의 「셰이크 잇」 춤을 출 줄 안다고 했다. 나는 얼른 인터넷에서 그 노래를 찾아서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집체무용의 절도 있는 동작을 하던 그 아이들이 허리를 돌리며 “좀더 핫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 교사들은 마음이 불편해졌고, 나는 안심이 되었다. 초등학생의 선정적인 율동을 보는 불편함보다, 이 아이들이 남한 춤을 출 줄 안다는 것을 확인한 안도감이 더 크다는 사실에 당황해하면서도.
내가 사는 이스트본(Eastbourne)은 작은 도시임에도 ‘케이팝’(K-Pop)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좋은 편이다. 작은딸 학년의 한 아이는 한글을 독학해서 딸아이에게 카톡을 보내고, 큰애 반의 한 아이는 한국 사람들은 다 이렇게 피부가 좋으냐며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좋겠다고 했단다. 이곳 어디서나 삼성과 엘지의 휴대폰과 가전제품, 현대와 기아의 자동차를 볼 수 있다. 우린 이곳에서 한국인이라는 것을 조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 음악을 듣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배운 것, 익숙한 것, 좋아하는 것을 버릴 필요가 없다. 한국적인 것을 하려면 영국적인 것도 똑같이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아무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A학교 학생들에게 요구했던 그것을.
캐나다의 심리학자 존 베리( John W. Berry)의 모형에 따르면, 이주민이 이주해온 지역의 문화와 자신의 원래 문화 양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는 동화(Assimilation, +-), 분리(Separation, -+), 통합(Integration, ++), 주변화(Marginalization, --)라는 4사분면 중 하나에 위치하게 된다. 두 문화를 모두 긍정적으로 여기는 ‘통합’이야말로 가장 건강한 상태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북한이주민들이 자신이 성장한 문화를 한국에서 얼마나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그건 그가 어떻게 주관적으로 느끼는가 하는 것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북한사회의 일상적 경험을 얼마나 용인하는지에 달려 있다.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약 십년 전에 중학생 대상 통일교육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두 학교에서 모인 학생 800여명을 대상으로 큰 무대에서 탈북 대학생 네명이 자신의 북한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발표자들에게는 북한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솔직하게 이야기해달라고 미리 부탁했다. 부정적인 면뿐 아니라 좋은 기억들을 이야기해도 된다고 했다. 한 남학생은 북한의 깨끗한 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을 앞 강물을 손으로 받아 마셨는데, 여기 와서 물을 사 먹는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고 했다. 여학생은 고향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다 알고 지내며 어려운 일은 다 같이 도와주었다고 했다. 여기 오니 이웃이 누군지 모르고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인사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고 했다. 청중이 너무 많아서 질문은 관중석에서 날리는 종이비행기로 받기로 했다. 질문시간에 중학생들이 날리는 색색의 종이비행기가 무대 위로 떨어졌다. 그중 하나를 받아 읽은 여대생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렇게 좋으면 다시 북한으로 가지그래.”
한국에 와 있는 북한이주민에게 적응이란 무엇일까?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자신이 자란 사회를 부정해야 한다면, 적응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일까? 이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가? 만약 영국사회가 내게 그러한 적응을 요구한다면,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내 삶을 부정해야 한다면, 나는 아마 자발적으로 부적응을 선택할 것 같다.
세번째 이야기—이름
2009년 12월 어느 저녁, 북한에서 교사였던 이들 십여명을 만났다. 당시 나는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 연구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새로 시작하는 ‘NK교사아카데미’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우리 팀의 일이었다. NK교사아카데미는 탈북한 북한 교사에게 소정의 재교육 기회를 제공해 탈북 학생들이 재학하는 남한 학교의 보조교사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실험적 사업이었다. 교육부와 협의해 시작하긴 했지만, 과연 어떤 사람들이 모이게 될지, 재교육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수료 후에 일선 학교가 이 사람들을 받아줄지 다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모든 것을 유연하게 열어놓고, 인연이 닿는 사람들과 과정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북한에서 ‘직업적 혁명가’라고 불리는 교사의 위신은 높은 편이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중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한명의 교사가 계속 담임을 맡는 제도는 교사가 학생의 성장에 책임을 지도록 책무성을 강제한다. 남한처럼 한 학생이 학교 안팎에서 수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탓에 결국 교육이 실패했을 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기 어려운 구조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도 공부 잘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교사가 되는 것이나, 이 규범적인 교사들이 난세에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점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비슷한 것 같다. 한국에 온 북한의 교사들은 다른 북한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식당에서 일하거나, 무얼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고 자기 자녀의 교육에 대해서조차 자신없어했다.
사업설명을 하면서, 이 과정이 ‘자격증’이나 ‘취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몇차례나 강조했다. 나중에 이들을 실망시킬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여러분이 교육현장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취업을 약속할 수는 없고, 대신 한국의 교육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교육제도, 교과내용, 교수방법, 학생지도, 그리고 탈북학생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강의하고 토론하고 실습할 것이라고 했다.
겨울밤이었음에도 방 안이 더웠다. 사람들은 상기되었고, 그 기회에 감사했다. 아무도 취업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얼마나 이런 기회를 열망해왔는지를 고백했다. 한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 근처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담장 밖에 한참씩 서 있었노라고. 교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눈총이 느껴지면 자리를 뜨곤 했다고. 학교를 생각하면 그리움과 아픔이 동시에 솟아난다고 했다. 한때 북한에서 동료교사였을 그분들은 다들 눈물을 글썽였고, 서로 만난 것만으로도 감격해했다.
이 사업은 그후로도 많은 이야기를 남기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몇해 전부터 사업이 통일부로 이관되었고, 지금도 20여명의 NK교사들이 탈북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여전히 ‘ NK(North Korea)’ 두 글자를 조건처럼 붙이고 있긴 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들에게 ‘교사’의 이름을 돌려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들을 한 무리의 ‘탈북자’로 보지 않고, 이곳에 오기 전에 해 온 일을 존중하고 개개인의 경험과 열망에 주목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시도했던 점에서 나는 우리 사회가 부족하나마 한발짝은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정책용어 사용이 불가피할 때가 있다. ‘북한이탈주민’ ‘결혼이주여성’ ‘이주배경청소년’ ‘중도입국청소년’ 등 정책용어는 지원이 필요한 대상을 분명히하고 그들이 경험하는 공통의 어려움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집단의 이름이 나의 전(全)존재를 규정하게 되는 순간, 나는 그 이름 속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분명 나의 일부이긴 하지만 결코 전체가 아닌데 사람들은 그 규정 안에서만 나를 본다. 더욱이 그 이름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붙여지는 경우가 많기에 타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상 나는 계속 그 이미지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 경우 그 이름을 부정하지 않으면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포박감을 느끼는 순간이 오게 된다.
북한이주민은 ‘탈북자’라고 불리는 한, 폭정과 굶주림에 고통받다가 사선을 넘어 힘겹게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 이곳에 와서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서 남한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얼 할 수 있는지는 이차적이다. 캐나다에 갔다가 난민신청이 거부되어 다시 돌아온 청년을 만난 적 있다. 그 청년은 그곳에 가니 자기를 탈북자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난 것이 너무나 홀가분했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말이 그리워서 한인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교민사회는 이 ‘탈북자 청년’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처음에는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점차 혼자 힘으로도 잘할 수 있었단다. 영어도 웬만큼 되고, 다른 나라에서 온 청년들과 친구가 되면서 한인회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자신을 계속 도움이 필요한 탈북자로 바라보았고, 도움을 사양할 때마다 언짢아했다. 자신이 이들을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괴로워하다가 점차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그 시선은 한국에서 살 때 자신이 느꼈던 시선과 다르지 않았다. 탈북자는 탈북자다워야 했다.
나는 영국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한글로 서명하는 것이 좋다. 그건 남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존재를 적고 있는 느낌을 준다. 나에게 내 이름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수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한국에 와서 개명하는 북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영실이, 옥이가 한국에 와서 서빈, 태희가 된다. ‘탈북자’라는 이름을 벗어나려면, 자신의 고유한 이름도 같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북한스러운’ 이름이 낙인이 되는 것, 그래서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는 것, 그건 그들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그 결별을 선택하기까지 겪었을 마음의 부서짐이 느껴진다. 북한이주민에 대한 진정한 ‘환대’는 아직 요원하다.*
네번째 이야기—관계
한강(韓江)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읽었다. 1980년 5월 광주를 이렇게 그릴 수 있다니. 책을 읽은 사람들은 다들 며칠을 힘들게 보낸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소년들을 애도하며, 내 슬픈 마음도 위로받고 싶었다. 그런데 휴양지 바닷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나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는 전혀 연결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인문지리학에서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 공간은 그야말로 추상적인 삼차원의 세계다. 이 공간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거기에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장소가 된다. 의미있는 공간이 장소인 셈이다. 내 것이 아니라고 느낀 바닷가는 그저 내가 서 있는 공간일 뿐이었다. 이곳의 평화로움은 그림 속의 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공간이 내게 의미있는 장소가 될까? 그때 나는 이곳이 내 것이 아닌 이유가, 내가 이 사회의 풍요와 평화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가 건드린 나의 원죄의식이 나를 위축시켰기 때문이었을 거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내게 좀더 관대해졌을 때,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은 ‘기여’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내가 이곳에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갖는 것은 사실, 내가 이곳과 아직 ‘관계’를 맺지 못해서 그런 거다. 그때 바닷가에서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서 내가 이런 책을 읽었는데 마음이 너무 무겁다고 이야기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공감을 얻었다면 그곳은 그렇게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것은 ‘관계’인 것 같다.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타인과 관계 맺기 쉬운 곳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별로 말을 섞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아이는 ‘이웃’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웃은 상자다. 열 수 있지만 아무도 열지 않는다.” 한국의 아파트는 그랬다. 한국에서 몇해 전에 만난 한 여학생은 자기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늘 아버지 친구들로 집 안이 북적이고 유쾌했는데, 여기서는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어느날 아버지가 우두커니 있다가 이렇게 말했단다. “도둑이라도 좋으니 누가 좀 왔으면 좋겠다……” 한국사회는 어느덧 고독한 개개인이 상자 속에 들어가 혼자 사는 사회가 되었다. 외로운 것은 북한이주민만이 아닐 거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다. 단지 그 상자 밖으로 나가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더 어려운 것뿐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나는 그를 온전하고 고유한 한 사람으로 알게 된다. 그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그에게 일방적으로 적응하라고 했던 부당한 요구, 그를 집단 속에 가두는 이름은 모두 그를 알기 전의 일이다. 한 사람을 개인으로 알게 되면, 그가 어느 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운 좋게도 살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탈북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생각나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나는 이들에게 그런 이름 너머 여러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다양한 배경의 고등학생들이 둘러앉아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통일 한국’에서 자신의 삶을 그려보는 1박2일 캠프를 기획하고 진행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른바 ‘탈북학생’과 ‘다문화학생’ 들도 있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각자 20분 정도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다른 이들은 판단하거나 평가하거나 조언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영혼이 안전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풀어내는 스토리와 그를 통한 소통의 다이내믹은 예술과 기적 사이 어디쯤 있는 것 같다. 모든 아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해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건 고작 20분이었다. 얼마 전 그 캠프에 참여했던 한 여학생이 그때의 경험이 가져온 변화에 대해 말한 것을 전해 들었다. 그때 온전히 이해받고 나서 더이상 자기가 북한에서 살다가 왔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그걸 감추지 않는다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것을 잘 듣는 것은 의외로 힘이 세다. 말하지 못하면 한이 된다.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살아서는 화병이 생기고 죽으면 원귀가 된다. 전래이야기에 이런 원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린 대대로 묻혀버린 아픔이 많은가보다. 『소년이 온다』를 보고 왜 그리 마음이 아팠는가를 생각해보면, 80년 5월 광주를 살았던 소년들과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익명의 희생자를 내 이웃으로 다시 바라보게 했기 때문이다. 그걸 이제야 이렇게 듣고 있는 내가 미안했기 때문이기도, 우리가 여전히 말 못하게 하는 사회, 말해도 듣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좌절감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스트본 도서관은 장서가 그리 많지 않은데, 역사책 코너는 제법 잘되어 있다. 특히 1,2차 세계대전 당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책이 꽤 많은 게 인상적이다. 격동기를 산 보통사람들의 삶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 역사는 암기과목이 아니라 아직도 읽히고 재현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점에 가도 역사책이 소설책이나 요리책만큼 많다. 커뮤니티센터에는 지역주민의 생애사 이야기가 팸플릿처럼 꽂혀 있다. 펍이라고 불리는 술집에서도 스토리텔링 모임 광고를 볼 수 있다. 광고를 보고 있는 내게, 한 남자가 지나가면서 누구든 와서 그냥 듣기만 해도 된다고, 사람들이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데 흥미진진하고 놀랍다고, 자기는 매달 참가한다고, 한번 와보라고 권했다.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든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라는 자기검열을 해왔다. 80년대에는 ‘잡혀가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그후에는 이 말이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선 것인지’를 먼저 계산해야 했다. 일상적으로는 ‘너무 잘난 척해서도, 너무 튀어서도 안되고, 내게 기대되는 것 이상 말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대화가 다 논쟁적이고 이념적이고 또 계층적인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예능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 말고는 안전한 영역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는 꼭 해야 할 말이란 없는 듯했고, 결국 나도 나만의 상자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 각자가 느끼는 삶의 억압은 많은 부분 해소되지 않을까. 그런 사회라면 북한에서 온 사람들도 쉽게 상자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아픔을 가슴에 묻고 마음의 병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줄어들고, 우리의 고독도 견딜 만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마무리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이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이야기를 다 마친 후에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써야 하는데, 방향을 못 잡고 여러 상념을 썼다 지웠다 몇주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다른 이야기를 만났다.
지난주에,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이 도착했다. 이삿짐을 나르는 인부가 셋이었는데 그중 둘이 북한 사람이었다. 둘 다 체구가 나보다도 작았는데,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어 옮기며 싫은 내색 하나 없었다. 짐이 많아 죄송하다고 하니, 이건 일도 아니라며 웃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하루 종일 짐을 옮기는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영국에 온 후에 처음 봤다. 한국에서는 남북한 사람들의 다른 점이 그렇게도 눈에 보이더니, 여기서 억양은 문제도 아니었다. 말이 이리도 잘 통할 수가 없다. 반가움에 겨워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거는 내 입에서 ‘동포’라는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우리가 새로 산 집은 약간 수리가 필요했다. 집수리하는 영국 사람 여러명에게 견적을 요청했는데, 2주가 지나도록 도무지 응답이 없었다. 이 속도라면 언제 공사가 가능할지 기약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삿짐을 옮겨준 K씨가 집수리도 한다고 해서 연락해보았더니 다음날 친구와 아들을 데리고 두시간 차를 몰아 우리 집을 방문했다. 고쳐야 할 곳을 살핀 후에, 이 일을 그들이 맡기로 했다. 뉴몰든에서 이스트본까지 너무 멀어서 아예 우리 집에서 일주일 동안 기거하면서 공사를 하기로 했다. 내일 이들은 연장과 함께 쌀, 김치, 전기밥솥, 이불을 싣고 우리 집으로 온다. 여기 이웃들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 될 거다.
K씨를 만난 후 나는 안도했고 감사했고 듬직했다. 이건 지금까지 북한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면서 한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왜일까? 문득 그건 K씨가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북한이주민을 만났던 상황 자체가 매우 기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껏 나는 그들과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로, 연구자와 연구대상자의 관계로, 지원해주는 사람과 지원받는 사람의 관계로 만났다. 생각해보니 한 사람도 대등하게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늘 관찰자 아니면 시혜자였기에 지금같이 동등한 관계의 상호의존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나의 판단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한 채, 지금까지 내가 북한이주민들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앞으로 내가 이곳에서 이들과 맺을 관계는 달라질 것 같다. 제3지대에서 피차 이민자로 살고 있는 북한 출신 이주민과 남한 출신 이주민의 관계는, 내가 남한 사람으로서의 우월감을 굳이 들이밀지 않는다면, 조금은 더 평등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이들이 함께 사는 이웃으로 다시 보이게 되지 않을까. 더욱이 우리는 모두가 모두에게 강퍅한 한국사회를 벗어나 있으니 말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아직 어떤 ‘결론’을 내릴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아직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좀더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듣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에게 이 글의 마무리는 또다른 이야기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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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시만큼 이주민을 잘 표현한 글이 없다고 생각한다. 잘 알려진, 정현종의 시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 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정현종 「방문객」 전문,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