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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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아 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이향규 李向珪

『후아유』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저자 hyangku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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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영화 한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의 영화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다 함께, 끝까지.”(피터 베이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책은 이렇게 끝났다. 저 글을 쓸 때 저자는 “겨우 8주 앞으로 닥친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260면) 있었다. 글에 묻어 있는 절실함을 알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어린 생명이 태어나고 자란다. 그러니 이 영화의 결말이 ‘인류멸망’이나 ‘회귀 불가능한 디스토피아의 도래’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무조건 휴먼 드라마여야 한다. 지금까지 디스토피아로 향했던 여정을 멈추고, 방향을 바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로드 무비여야 한다. 이 책은 그 시나리오를 쓰는 데 참고할 만하다.

이 책의 첫번째 글인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을 쓴 황정아는 ‘머리말’에서 두가지 의미로 우리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전의 세계도 이미 정상이 아니었던 셈이니 설사 돌아간댔자 (…) 점점 나빠지는 ‘비정상’의 세계라는 의미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는 (…)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어떤 비가역적 과정에 접어들었고 팬데믹은 그 사실을 가리키는 지표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중적으로 ‘정상’과 멀어졌기에 이제 주어진 것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더 나빠지느냐 아니면 전례 없는 방식으로 더 좋아지느냐 사이의 선택인 것이다.”(5~6면)

이 책은 그 ‘선택’을 다룬다. 로드 무비로 치면 이 여행이 어디에 어떤 방법으로 갈지를 정하는 것이다. 예전 지도는 소용이 없다. 큰길일수록 위험하다. 좁은 길을 찾아야 하고, 길을 새로 내야 한다. 나침반이 필요하다. 책의 앞부분은 그 역할을 한다. ‘우애’ ‘탈성장’ ‘돌봄’ ‘생태사회’가 열쇳말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이 단어들이 절절이 새삼스럽다. 특히 백영경의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에 구구절절 공감한다.

“서로 의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돌봄 중심의 시각은 그 자체로 성장과 이윤을 지상목표로 삼는 체제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란 성장 자체에서 탈피하자는 주장이며, 어떤 새판을 짤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52면) “탈성장은 (…) 사회적 연대 속에서 검소한 풍요를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의지와 노력에 수반되는 전환이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의지와 노력을 이끌어낼 사회운동의 역할이 중요하다.”(55~56면)

산업구조의 재편과 ‘정의로운 전환’, 보편기본소득과 보편돌봄소득의 도입 등 구체적인 제안은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나는 탈성장과 돌봄을 중심으로 ‘새판’을 짜면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위기, 재난 자본주의로의 퇴행인가, 생태사회 전환의 기회인가?」를 쓴 김현우는 서두에서 영화 「인터스텔라」의 첫 부분을 소개하면서 코로나19와 기후위기의 유사성을 설파한다. 나는 밑줄을 긋고 이렇게 적었다. “무섭다.” ‘그린뉴딜’을 소개한 후, 이 운동을 “브랜드화”한 한국의 ‘그린뉴딜’이 “토건뉴딜”로 회귀할까봐 우려하는 부분(82면) 역시 두렵다. 우리가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 것은 ‘이름’이 아니라 철학임을 알려준다.

처음의 비유로 돌아가면, 이 영화는 각자의 스토리가 독립적으로 전개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일관된 주제가 개별 스토리를 관통하는 옴니버스 형식이어야 할 것 같다. 이 전례 없는 시대를 전지적 시점에서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개개인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 각각의 위기를 섬세히 살피고 알아서 해결해주는 슈퍼히어로 또한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영화의 등장인물을 보여준다. 부족한 의료자원으로 온갖 윤리적 선택 앞에 놓인, 자신도 무너지기 직전까지 지쳐 있는 의료진(최은경 「팬데믹 시기는 새로운 의료를 예비하는가」), 닫힌 학교 문 앞에서 연쇄적 혼란에 빠진, 학교를 중심으로 연결된 사람들(이하나 「코로나19 이후의 학교생태계는 어디로 가야 하나」), 농촌의 노인들과 외국인 농업노동자(정은정 「저밀도와 소멸위험, 농촌에 코로나19 ‘이후’란 없다」), 그리고 콜센터 노동자들(김관욱 「바이러스는 넘고 인권은 못 넘는 경계, 콜센터」)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그들의 삶을 하도 선명하게 그려서 이미 영화를 한편 본 것 같다. 주인공들의 미래는 앞서 말한 열쇳말에 달려 있다. 우애, 탈성장, 돌봄, 생태사회라는 방향을 놓치면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나는 지금 영국에 있다. 이곳은 지금까지(2021.1.28 현재) 누적 감염자 수가 370만명 이상이고, 사망자도 10만명이 넘는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내가 지옥에서 살고 있을까봐 걱정한다. 그렇지 않다. 영국인들이 한국인보다 70배 더 불행한 것 같지도 않다. 지난해 3월 이후 영국정부는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소득을 80퍼센트까지 보전해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 말고도 소소한 차이가 눈에 보였다.

한국에서는 아이가 있는 의료진의 경우 학교가 문을 닫자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면서 자녀도 돌봐야 하는 이중의 고충을 겪었다고 한다. 영국은 대면 수업이 중지되었어도 학교가 문을 닫지는 않았다. 필수노동자(의사, 간호사, 의료지원 인력, 사회복지사, 교사, 식료품 유통업자, 배달노동자, 돌봄노동자, 성직자, 경찰, 청소노동자, 대중교통 기사, 가스·전기·상하수도·통신 기술자 등)의 자녀들은 학교가 맡아서 돌봤다. 돌봄이 필요한 취약계층의 자녀와 장애아동도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한국은 학교뿐 아니라 도서관과 복지관 등 “시민의 생활에서 허파와 같은 역할”(이하나, 141면)을 하는 곳들도 문을 닫았다고 했다. “공공기관이 감염병 확산 국면에서 방역방법으로 택한 것은 오직 폐쇄였다.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144면) 영국은 이 와중에도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예약해서 책을 빌리고 컴퓨터를 쓸 수 있다. 어린이집도 운영된다.

혹자는 이렇게 느슨한 방역 때문에 감염 확산을 잡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말이 옳다.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한국은 그 목숨을 훨씬 더 잘 지켜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다음이 궁금하다. 모든 선택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K-방역’이 선택한 길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는 것이었을까? 앞으로는 무엇을 선택해 나갈까? 한국판 영화는 휴먼 드라마로 끝날까? 이 책은, 질문을 많이 던지고, 답을 곳곳에 숨겨두었다. 읽는 이의 몫이 크다.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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