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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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코끼리를 이야기할 시간

먼 곳에서 느끼는 남북정상회담

 

 

이향규 李向珪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 연구원 객원연구위원. 저서 『후아유』 『북한교육 60년: 형성과 발전, 전망』(공저)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비전향장기수 김석형 구술기록』(공저) 등이 있음. hyangkue@hanmail.net

 

 

고향을 떠난 소년

 

생전에 무심하게 하신 말이 유언이 되었다.

 

“내가 죽거든 재산을 팔아서 다섯등분을 했으면 좋겠다. 너희 네 형제가 하나씩 갖고 하나는 작은아버지를 찾아서 줬으면 한다. 혹시 죽었으면 그 자손에게 주거라.”

 

2018년 2월 26일, 아버지는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기침감기가 잘 낫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병원에 가셨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가 마지막 집을 떠날 때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혼자 사는 아버지 집 식탁을 보고 알았다. 그걸 알았다면, 그의 성품에, 그렇게 반찬그릇을 남겨놓지는 않았을 거다. 마지막은 예고 없이 온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지금은 신포시)이다. 그는 1950년 12월에 어머니와 남동생을 집에 두고 고향을 떠났다. 그해 여름 전쟁이 시작되고 곧이어 연합군이 참전하자 북한지역에는 ‘원자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했다. 불과 5년 전에 나가사끼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끝난 것을 본 조선 사람으로서는 능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전세를 살피고 싶었다.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읜 이 큰아들은 가족을 지키는 가장의 책무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머니께 일주일만 다녀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있었다면 같이 가자고 했을 텐데, 너는 그 말을 안 하는구나”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그 마지막 말이 그의 가슴에 평생 사무쳤다. 그래서 그는 여든이 넘도록 술이 과한 날에는 그 이야기를 했다. 그후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고향을 떠날 때 그는 겨우 열다섯살이었다.

그는 부산항에서 부두노동을 하면서 전쟁을 넘겼다. 가난한 이에게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모질게 공부했고, 온전히 혼자 힘으로 훗날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많은 일을 겪었고, 그 고생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평생 애썼다.

 

중환자실에 있었던 그 한달 넘는 시간에 그를 만나러 온 친구, 동료, 제자, 가깝고 먼 친척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그분의 모습이 조각조각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그의 삶이 비로소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보였다. 말이 없는, 온화한, 성실한, 공정한, 친절한, 겸손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 그 사람은 천안함이나 세월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피하고 싶어했던 그 노인이 아니었다.

 

겨우 이년 전에 눈치를 챘다. 그에게 무슨무슨 교회에서, 무슨무슨 단체에서 보내는 카톡 알림음이 끊임없이 울린다는 것을. 알림음이 나고 몇초 후에는 늘 대한민국을 빨갱이들로부터 구하자는 날선 웅변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때마다 슬그머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화난 목소리가 잠잠해진 후에 부엌으로 나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점심상을 차렸다. 잠깐 머무르는 친정집에서의 시간은 보통 그렇게 지나갔다.

아버지가 의식 없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의 핸드폰을 열어봤다. 그에게 지난 몇년간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던 것이 그들이었음을 알았다. 간간히 내 안부 메시지가 있었으나 단정하고 공손한 짧은 문안인사에서는 바쁘다는 것을 자랑 삼아 말하고 빨리 도망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빤히 읽혔다. 나는 아버지 삶의 마지막 시간이 그들의 생경한 목소리로 채워진 것이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 그런데 그들에게 화가 나는 건지 나에게 화가 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생전에 남북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여기고 언제부터인가 설과 추석 때 차례를 지냈다. 명민했던 남동생이 그후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지만 찾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쪽에 형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 ‘월남자의 가족’으로 불이익을 당할까봐 걱정해서였다. 20년 전쯤 한 신문사에서 발간한 『북한인명사전』에서 동생 이름을 찾아냈다. 함경남도 검덕광업연합기업소 소장이었다. 그냥 그 사람을 동생이라고 믿기로 했다. 똑똑했던 동생이 연합기업소 소장으로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서 더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아닐까봐.

장례식에서 아버지를 운구한 젊은이들은 함경도에서 온 청년들이었다. 그 젊은이들은 몇년 전에 목사인 형부와 언니네 집에서 가족처럼 같이 살았던 ‘탈북청년’들이었다. 아버지가 그래도 고향 청년들 손에 들려 마지막 길을 떠나게 되어 마음이 좋았다. 몸을 떠난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키 작고 다부진 그 청년들을 볼 수 있었을까, 신포에는 다녀왔을까, 당신 어머니는 만났을까, 어릴 때 헤어진 동생은 알아볼 수 있었을까.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다. 너무 오래 걸렸다. 70년 세월, 그건 정말 한평생이다. 많은 이들이 그 시간을 다 기다리지 못했다.

 

 

서먹한 소녀들

 

애린이는 자기를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도 다 그걸 알고 있다. 훗날 누가 “어디 출신이냐?”(Where are you from?)라고 물어보면 자기는 “나는 한국 사람인데 영국에서 살았다”(Im from Korea but I lived in England)라고 답할 거라고 했다. 그게 우리 딸이 한국인 엄마와 영국인 아빠 사이에서 찾아낸 가장 자기다운 답인가보다.

 

애린이가 올해 Y와 한 반이 되었다고 했을 때 이런 우연도 참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Y의 엄마는 ‘탈북자’로 한국에서 살다가 오래전에 영국으로 왔다. 엄마가 남한 사람인 애린이와 북한 사람인 Y가 영국에서 같은 반이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인구 10만명이 안 되는 이 작은 도시에 정착해서 사는 코리언은 손가락으로 셀 만큼밖에 안 되는데.

애린이 말이, 같은 반이 되자 선생님들이 자꾸 둘 이름을 바꿔 부른단다. 검은색 긴 머리의 동양인 얼굴은 다 똑같아 보이는 걸까. 사람들은 둘을 헷갈리는데, 정작 둘은 서먹하다.

Y는 사람들이 자신을 코리언이나 아시안으로 보는 것을 몹시 싫어한단다. 누군가 아시안을 언급하는 말을 했을 때 Y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애린이는 Y가 영국인으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Y는 이미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영국식 악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Y의 마음을 읽자 애린이는 Y를 대하는 게 불편해졌다. 한국어로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둘은 몇달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하루는 과학시간에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애린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건 완전 ‘방 안에 있는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야.”

묵직하고 커다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문제가 있는데 이를 언급하거나 다루지 않고 모르는 척하는 상태, 그걸 영어로 ‘방 안에 있는 코끼리’라고 표현한다. 큰 코끼리가 방 안에 들어와 있는데 그게 안 보이는 척하는 것, 그게 얼마나 불편한지 나도 짐작할 수 있다. 돌이켜보니 아버지와 내가 같이 있었던 공간에도 내가 애써 무시했던 답답하게 큰 코끼리가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어디서 왔냐?”이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열에 아홉이 “북이냐 남이냐?”를 묻는다.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단다. 남한에서 왔다고 해도, 자꾸 김정은 얘기를 해서 짜증 났다고 했다.(‘김정은’ 발음을 못하는 아이들은 그냥 킴가이 The Kim guy라고 부른단다.) 그러고 보면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코리언은 김정은인 것 같다.

나는 그 질문을 받으면 “물론 남에서 왔다”(Of course, Im from South)고 대답하곤 했다. ‘물론’이라는 말을 쓰면서, 북한 사람과 나를 구별하는 선을 확실히 긋고 싶었나보다. 궁금해졌다. 영국에 사는 천명 가까이 된다는 북한 사람들은 이 질문에 뭐라고 답할까? 어쩐지 그들도 ‘싸우스’라고 말할 것만 같다.

지금까지 바깥세상에 알려진 북한은 자신이 거기서 왔다고 굳이 내세울 만한 곳이 아니다. 핵개발과 미사일발사로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고, 고도비만에 우스꽝스러운 머리스타일을 가진 젊은 독재자가 있는 나라다. 그래서 어른들은 북한을 위협적으로 여기고, 아이들은 지도자의 스타일을 희화화한다. Y가 굳이 영국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은, 혹시 그가 ‘노스’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그 아이도 하필이면 애린이와 한 반이 된 게 참 불편하겠다. 잊고 살고 싶었는데 바로 곁에 싸우스에서 온 애가 있으니. 게다가 선생님들은 둘을 자꾸 혼동하기까지 하니.

 

 

기도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느낌이 좋았다. 그래도 혹시라도 회담 전에 부정을 탈까봐 정화수 떠놓고 비는 심정으로 매일 성당에 가서 촛불을 켜고 기도했다. 아는 사람들에게도 ‘곧 남북정상회담이 있을 텐데 이게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회담 전날에는 왠지 기도의 힘이 더 셀 것 같은 분들께 긴 이메일을 보냈다. 라글란 신부님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네, 우리도 이 회담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중요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이 만나게 되고, 평화를 향한 문이 열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스 목사님은 이렇게 답신했다. “우리는 이미 한국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기도가 먹혔나보다. 정상회담 12시간은 마치 기적 같았다.

 

남북정상회담 소식은 그날 하루 종일 헤드라인 뉴스였다. 나는 이미 한국 뉴스로 몇번이나 본 장면을 BBC 뉴스로도 시간마다 보고 또 봤다. 이건 이곳에서도 놀랍고 유쾌하고 역사적인 회담이었다. 화면에 나오는 두 지도자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문재인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김정은 위원장의 스타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친구를 만났다. 일흔이 넘은 수전은 나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들떠 있었다. 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해달라는 나의 부탁에 그녀는 며칠 동안 한반도 문제에 대해 제법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녀는 회담이 잘된 것 같아서 너무 좋다면서 이산가족 이야기를 했다. TV에서 봤는데, 한 노인이 살아생전 북한 땅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거기가 내 고향’이라고 말했단다. 그 할아버지 말을 전하면서 홈타운(hometown)이라는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평생 고향에 가볼 수도 없고, 가족을 만날 수도 없는 상황. 그건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비극이다. 그녀의 울컥함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우리 아버지의 고통에조차 충분히 함께하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세상에서 살아서인지 나는 그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게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다.

 

일요일 미사에서 사람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지난 일년 동안 미사 중에 한반도를 기억해주는 것이 벌써 세번째다. 미사가 끝나고 나오는데 신부님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회담이 성공적이어서 너무 기쁘다고. 나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 한반도 평화를 이야기한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다시 과거로 회귀하거나 이 움직임이 멈추지 않기를 우리가 얼마나 바라는지, 남한 내의 이념갈등·세대갈등 때문에 이 과정이 힘겹게 진행될까봐 얼마나 걱정되는지, 그리고 평화로 가는 이 길에서 내가 내 몫의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가면 좋겠어요. 상처가 치유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그래, 만리마의 속도로 가야 할 일이 있고, 달팽이처럼 가야 할 일이 있겠다. 만리마의 속도로 달려간 정치적 변화를 지탱하고 작동하게 하는 것은, 적어도 멈추거나 되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은, 어쩌면 천천히 제 몸으로 땅을 보듬으면서 정직하게 만들어낸 우리 일상의 변화일 수도 있겠다.

 

 

잔치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누가 “열일하는 대통령”이라고 썼다. 지난 일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면 그 평가가 과하지 않다. 나도 내 몫의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게 뭘까?

나는 한국에 있었다면 ‘이야기모임’에 힘을 보탰을 것 같다. 통일 이후 독일에서 이루어졌던 ‘동서포럼’이 동서독 주민 간의 상호이해와 사회통합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 경로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여러 곳에서 이런 ‘삶의 이야기’ 모임을 하고 있다. 이런 시간은 참 특별하고 때때로 신비스럽기도 하다. 내가 진행한 어떤 이야기모임에 참여했던 지역사회 활동가 한분은 이 시간을 이렇게 평했다. “이승과 저승 중간 어디에 다녀온 것 같아요.” 사람들은 그만큼 깊은 체험을 한다. 이야기만으로.

평화로운 장소, 영혼이 안전한 공간에서 자기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다보면 어느덧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어진다. 그리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듣다보면 내 안에 숨겨두었던 오해와 편견, 미움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고요히 흐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우리 마음이 화해의 강기슭에 닿기도 한다. 세대갈등, 이념갈등, 그리고 남북한 사람들 사이의 서먹함도 이렇게 이야기모임을 하면서 조금씩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방 안에 있는 코끼리’가 그렇게 답답한 것은, 사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니. 한국에 이런 이야기모임이 더 많이 생기면 좋겠다, 나도 그곳에 있으면 좋겠다, 한국에 가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수전에게 했더니, 그녀는 여기에서 하면 안 되냐고 했다. 여기서? 여기 사는 코리언은 열명도 안 되는데? 그러다가, ‘맞아, 왜 안 되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야기모임을 뭔가 멋진 곳에서 근사하게 매뉴얼에 따라 진행하는, 형식을 잘 갖춘 프로그램으로 생각했나보다. 그런데 사실 그건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하고 듣는 ‘태도’일 수 있겠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 그건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저 멀리 있는 멋진 일을 꿈꾸면서 정작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상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것,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그래,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고도 뭔가가 허전했다. 내 생애에 다시 올까 말까 하는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뭔가 가슴 벅찬 일을 해보고 싶은 열망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잔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상이 시작되었다.

‘7월 27일이 좋겠다. 아무래도 그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지 않을까? 성당 홀을 빌리면 족히 백명은 모일 수 있겠다. 한국전쟁 참전군인도 초대하면 좋겠다. 이제 다들 아흔이 넘었을 테니 차량으로 모시고 와야겠지. 먼 곳에서 벌어진 ‘잊힌 전쟁’(여기서는 한국전쟁을 Forgotten War라고 부른다)에 참전한 그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좋겠네. 잔치음식은 무료로 제공하고 그날 뭔가 기부금을 받아서, 다른 분쟁지역의 평화를 위해 기부하면 멋지겠다. 한국대사관에 연락하면 행사 지원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BBC에 연락하면 올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한반도 문제로 뉴스가 넘쳐날 테니. 나는 한복을 입어야 할까?’

이런 상상을 한참 하다가, 내 결심을 못 박고 싶어서 신부님한테 이런 잔치를 하고 싶은데 성당 홀을 빌릴 수 있을지 물었다. 좋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 혼자서!’ 지금 내 주변에는 도와줄 사람도 거의 없는데 혼자 국가행사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집채만 한 부담감이 몰려왔다. 그 끝에 우울감도 따라왔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를 막내딸 린아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더니 ‘엄마, 아무래도 일단 푹 자고 내일 생각하는 게 좋겠어’라고 했다. 내일이 되자 애린이는 내 핸드폰에 3분 명상 앱을 깔아놓았다. 아이들 눈에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보다.

명상 앱 덕분인지, 차분하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널을 뛰었던 것은 정상회담 즈음해서 한 보름 동안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서로 엉켰기 때문이다. 기다림, 설렘, 조바심, 희망, 놀라움, 감탄, 기쁨, 감격, 자부심, 자신감, 그리움, 슬픔, 미안함, 답답함, 불안, 걱정, 무기력까지. 한반도의 지각변동이 내 마음도 이렇게 흔들어놓았다. 그 복잡한 마음의 근원을 짚어보니, 나는 지금 기쁜 거다. 진창에 빠져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았던 남북관계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니 감격스럽고, 살아생전에 한반도 통일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설레는 거다. 내가 이 역사적인 순간에 뭐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에 좀 과한 상상을 했을 뿐이다. 마음의 격랑이 잦아들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좀더 분명해졌다. 당장 하고 싶은 일, 기다릴 일, 천천히 할 일.

 

우선 나는 잔치를 할 거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7월 27일이 아니라 어느 햇볕 좋은 날도 좋겠다. 성당 홀이 아니라 우리 집 마당이 될지도 모르겠다. 백명을 부르는 행사가 아니라 서너명이 모여 같이 밥을 먹어도 좋다. 새로 사귄 친구들, 한반도를 위해 기도해주었던 이웃들이 오면 좋겠다. 나는 그날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열다섯 소년이 집을 떠나 전황을 살피려고 했던 그 전쟁이, 그가 여든셋 나이로 돌아가신 이후에야 비로소 끝났다고. 그게 ‘끝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잔칫날에 나는 애린이 옷을 입어야겠다. 11학년인 애린이는 얼마 전에 학교에서 졸업기념 후드티를 맞췄다. 등에 각자 새기고 싶은 글귀를 넣었단다. 애린이는 옷 뒤에 이렇게 썼다. 머지않아 사라질 질문, “North or South?”

 

2018년 여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새로운 계절. 나는 내 자리에서 내 몫의 일을 하고 있을 거다. 천천히 정직하게.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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