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삶을 돌보는 사회를 위하여
돌봄의 시민성과 문학의 공동영역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1. 돌봄의 정치, 돌봄의 시민성
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며 전염병으로 인한 격리와 단절의 기억은 어느새 삶의 새로운 위기감각으로 익숙해진 반면 팬데믹 초기 예고되었던 경기침체는 물가 폭등으로 이어져 우리 일상을 나날이 위협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경제위기와 기후위기, 전쟁의 위기가 심화되고 국내정치 역시 건전성을 명분 삼아 긴축재정을 내세우면서 시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지는 상황이다.
재난과 안전에 대한 방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정부는 재정 측면에서도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라는 탄식이 나올 만큼 민생과 돌봄 영역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얼마 전 대통령이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하여 “돌봄과 육아에 확실히 재정을 투입해 여성의 사회진출을 제약하는 요소를 걷어내겠다”1라고 발언한 것 역시 민생을 돌보려는 의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멀쩡한 공공예산을 삭감하고 모든 사업을 민영화하겠다는 각오만이 느껴질 따름이다. 실제로 정부가 최근 발표한 2024년 예산안에서 약자복지와 공공서비스 부문은 무시무시한 규모로 줄어들었다. 노인요양시설과 장애인시설 지원, 아동 돌봄서비스, 취약계층 고용 장려 등 국민에게 마땅히 써야 할 모든 비용들이 모조리 삭감된 것이다.2
구성원들의 삶을 돌보는 일에 소홀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 역시 생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생을 살피는 제대로 된 정치가 펼쳐지려면 돌봄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 복지를 살뜰히 돌보고, 그들이 꿈꾸는 가치를 반영할 때 민주주의의 정치는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미국 정치학자 조운 C. 트론토(Joan C. Tronto)는 민주주의와 돌봄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민주주의의 결핍은 돌봄을 받아들일 때 해결될 수 있으며, 돌봄의 결핍 역시 돌봄이 좀더 민주적으로 수행되었을 때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한다.3
돌봄을 개인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공적 가치이자 공적 실천의 장으로 인식할 때 우리가 원하는 바람직한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문학이라는 공동영역에서 도모할 수 있는 협동과 창조의 작업 또한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시민적 덕성에서 생성될 수 있다. 더블린대학교의 캐슬린 린치(Kathleen Lynch)와 모린 라이언스(Maureen Lyons)는 돌봄과 관련지어 시민성을 사유할 때 기존의 시민모델이 지닌 한계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4 특히 신자유주의에서는 진취적이며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립적 개인을 이상적으로 여긴다. 이러한 ‘돌봄 없는 시민’ 모형은 경제와 정치, 문화 등 삶의 공정영역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는 왕성한 ‘활동력’을 강조하는데, 이렇듯 자립적 개인이 시민의 보편적 모델이 되면서 돌봄을 수행하는 관계적 자아는 상대적으로 무시되어왔다. 하지만 돌봄의 맥락에서 새롭게 참고해야 할 시민성은 관계에 참여하는 자아 개념이다. 돌봄의 시민성은 취약성과 의존성, 상호의존성을 새롭게 사유하기를 권유하며, 그 실천은 구체적인 일상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좋은 삶’에 대한 적극적 탐색을 가능케 한다.
2. ‘좋은 삶’과 ‘좋은 이웃’
: 김애란 「좋은 이웃」과 금희 「무한오리부위집」
영국의 저술가 매들린 번팅(Madeleine Bunting)은 돌봄이라는 말이 타인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인 동시에 타인에 대한 공감과 관심, 마음을 쓰는 ‘의도’를 아우르고 있다고 말한다.5 그는 “돌봄 자체가 윤리, 구체적인 행위, 정서적인 반응과 생각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에, 돌봄이라는 단어에도 이러한 모호함이 담길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6 돌봄의 관계적 특성이 강조되는 것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해 있으며 상호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관계적 가치로서의 돌봄은 개인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이루는 세계를 바탕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돌봄의 시민성 역시 자율과 평등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상호적 관계망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체제의 경쟁적 현실에서 ‘좋은 이웃’이란 어떤 시민을 뜻하는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동시에 누군가의 곤경을 들여다보고 고민하며 돕는 일은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김애란의 「좋은 이웃」(『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이 그려내는 돌봄의 곤경 역시 그런 점에서 생생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코로나19 발생 이후의 경기침체와 부동산 가격 폭등, 주거불안, 양극화 현실의 세태를 담은 이 작품은 자본주의체제가 생산하는 박탈과 초조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하며,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려는 욕망이 좋은 시민의 덕성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돌봄의 관점에서 깊고 진지하게 탐색한다.
이야기는 윗집에 새로 이사 오는 신혼부부가 인테리어 공사 소음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집에서 아이들의 독서수업을 지도하는 ‘나’에게 수업시간에 들려올 공사 소음은 큰 걱정거리로 다가온다. 집값이 이렇게 오르는 시기에 신혼부부가 자가로 집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미묘한 위축감을 느낀 ‘나’는 현재 살고 있는 전셋집으로 이사 올 새 집주인 역시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의 부부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윗집 부부는 ‘좋은 이웃’이 되겠다며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지만 실제 공사가 진행되면서는 약속과 달리 공사 소음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4년 전 전세를 들어왔을 때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샀어야 했다는 후회는 ‘나’와 남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부동산 가격의 폭등 앞에서 이들 부부가 느낀 좌절과 무기력은 “신문에 연일 갱신되는 숫자와 그래프를 보고 불안해하다가 종내 입을 다물지 못한 몇몇 순간”(168면)으로 묘사된다. 결혼 초기 유니세프를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베풂의 삶을 꿈꾸던 남편은 여러차례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내 집 장만의 희망을 잃고 무력해진 상태다. “내가 탐욕을 부리거나 투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저 좀 생존하겠다는 건데. 가진 사람들은 세금 몇푼에도 펄쩍 뛰고 피해자가 되지 못해 안달인데, 정작 사다리에서 튕겨나간 나는 좀 속상해하면 안 돼?”(179면)라는 남편의 하소연은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좌절감과 박탈감을 고스란히 표출한다.
소설은 생계압박과 주거불안 문제를 세심히 묘파하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을 보듬으려는 주인공의 절박한 고민과 사유를 부각한다. ‘나’가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모아 과외교습을 하는 일은 생계를 잇는 직업인 동시에 “육아와 돌봄에 지친 부모들이 숨 쉴 시간을 찾”(172면)게 도와주는 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장애로 바깥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시우를 위해 개인적으로 방문지도를 계속하는 일은 나에게 가르침의 보람과 돌봄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재활과정에서 좌절하고 세상의 차별에 마음의 문을 닫은 시우는 나와의 독서수업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생각을 토로한다. 공동체, 이웃, 연대 등과 같은 말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는 시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독서토론을 이끌어가면서 ‘나’는 “교양팔이나 입시장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173~74면)의 가치와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돌봄의 연대와 자기성취가 이루어진 시우와의 수업은 뜻밖의 계기로 좌절을 맞는다. 소설은 자신과 엇비슷한 형편인 듯 보였던 시우네가 신축 아파트를 장만해 이사한다는 소식을 듣자 느끼는 ‘나’의 놀라움과 허탈함의 정체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앞으로 시우를 가르치러 갈 수 있을지 확신을 잃은 ‘나’는 자신이 느끼는 이유 모를 공허함이 마주 보던, 혹은 동정하던 대상이 더 좋은 위치로 이동한 데서 오는 허탈인지 곰곰 생각한다. 이 공허함은 남들과 ‘가치’와 ‘속도’를 공유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잘산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나’의 질문은 만약 부동산 가격이 이렇게 오르지 않고 노동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자신도 윗집 부부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보일 수 있을까,로 구체화된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193~94면) 이러한 고민은 화자가 경쟁과 비교 속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 자신이 잃어버린 가치가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과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싶은 시절에 대해 묻자 남편은 집값이 오르기 전이라고 무심하게 대답한다. 허덕이는 삶에서 두번의 유산을 경험했던 ‘나’가 남편과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만 아는 그때, 우리 아이를 구할 수 있었던 때”(194면)에 대한 위로와 이야기다. 어느덧 일상에 묻힌 그 기억은 진짜 잃어버린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절감하게 한다. 고단한 이웃을 돌보고 타인의 삶을 염려하는 마음의 세계는 남편이 버리려고 내놓은 소설책의 한 페이지에도 스며 있는 듯하다.
이십여년 전 남편이 연필로 약하게 밑줄 그어놓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부분을 확인하려는 순간 센서등이 꺼지며 마치 누군가 입김으로 초를 불어 끈 것처럼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허공에 팔을 저으며 센서등이 켜지길 기다렸다. 잠시 후 주위에 노란 불빛이 비쳤다. 나는 그 빛에 의지해 남편이 밑줄 그은 문장을 눈으로 천천히 따라 읽었다.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193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이 현관에 내놓은 것은 비단 소설책만이 아니라 한때 꿈꾸었던 가치이기도 하다. 철거와 개발의 폭력적 현실을 겨냥했던 소설 속 ‘난장이’ 가족이라는 상징은 수십년이 흐른 후에도 상대적 빈곤과 양극화의 심화 속에서 또다른 난장이들의 삶으로 이어진다.7 ‘나’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도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배달을 서두르다 사고를 당한다. 소설은 ‘나’의 말을 통해 ‘사람’이 아니라 ‘재산’을 지키고 싶어하는 삶을 들여다보며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같은 면)지는 삶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상대적 박탈감과 그로 인한 수치심을 응시하는 과정이 이웃을 돌보는 시민의 마음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팬데믹이 불러온 경제위기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은 금희의 「무한오리부위집」(『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감염병으로 인한 봉쇄와 격리, 코로나19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중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소설에서도 돌봄 문제는 여성들의 시각을 통해 묘파된다. 3500년이나 된 역사의 도시 ‘무한’은 어느 영화에 나온 오리 요리로 유명해졌으나, 감염병의 발원지로 지목된다. 그 책임은 ‘무한오리부위집’ 간판을 단 소상공인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지는데, 이러한 과정은 소설에서 “말 그대로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76일(2020년 1월 23일~4월 8일) 뒤에 무한오리는 부활을 시도했지만 한때 고속열차 터미널처럼 퍼져나가던 전국 수많은 도시의 무한오리 간판은 이번 재난에서 얼마 살아남지 못했다”(145면)라는 서술로 간략하게 소개된다.
이 작품은 도시 중산층의 자녀 소홍과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나’의 만남을 통해 1980년대에 태어난 ‘바링허우’세대의 정체성 찾기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나’는 공무원 부모의 아낌없는 경제적 지원과 육아돌봄을 받으며 풍요롭게 생활해온 소홍이 부럽다. 그러나 코로나 경기침체로 인해 소홍의 가족도 다른 사람들처럼 경제위기를 겪게 되고 이는 가정불화로 이어진다. ‘나’ 역시 반찬값이라도 벌기 위해 운영하던 방과 후 과외 ‘숙제반’이 무기한 휴업하고 남편 직장도 어려워져 스스로도 버거운 형편이지만 소홍의 고민과 곤경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식당 창업과 좌충우돌을 지켜보며 도움을 준다.
소설이 보여주는 활력과 생동감은 평생 제대로 된 독립을 해본 적이 없는 소홍을 따뜻하고도 예리한 시선으로 품평하고 형상화하는 시선에서 기인한다. 소홍은 요리 실력이 형편없고 체력이 약해 허덕이면서도 적자만 느는 식당을 쉽게 접지 못한다. “나 말이지, 사는 게 엉망이야. 이 나이 되도록 뭔가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애도 혼자 못 키웠고 돈도 못 벌었고 부부 사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지금 나한텐 이 가게밖에 없어. 어떻게든 해나가야 내가 살 거 같아”(144~45면)라는 그녀의 고백은 진솔하게 다가온다. 한평생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과 뒷받침에서 자유롭지 못한 소홍은 어떻게든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며 스스로 삶을 도모하고자 한다. 소설은 소홍의 모습을 통해 중국의 개혁개방 흐름 속에서 부모 세대와 달리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성장한 인물들이 부딪히는 자립에 대한 고민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화자가 소홍에게 품는 우정과 관심 역시 계층과 지역의 차이를 넘어 동세대로서 갖는 이해다.
소홍이 권위주의적 아버지에게 느끼는 압박은 경비원 풍아저씨의 에피소드와 연결되면서 코로나 시기 중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방역과 봉쇄로 인해 한층 위압적으로 작동하는 감시체제와 관료주의는 아파트 입구에서 풍아저씨와 배달 소년이 한바탕 벌이는 싸움으로 그려진다. 풍아저씨는 당당한 권위와 지도력으로 한때 아파트의 방역을 책임지는 영웅으로 불렸지만 관료적인 지시 명령에만 익숙한 인물로 주민들의 곤경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소홍이 풍아저씨에게 갖는 반감 역시 그가 자신의 아버지, 나아가 가부장체제의 권위주의적 모습과 유사하다는 데서 기인한다.
“넌 혹시 그런 느낌 아니? 도무지 허리에 힘을 줄 수 없는 무력감, 아무리 버둥대도 헤어나올 수 없는 물컹한 진흙탕, 진은 계속 빠지는데 어디서도 채울 수 없는 막연함. 아버지는 목소리가 너무 컸어. 나는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도 소리를 질러본 적도 없었어. 아버지는 내가 마냥 착한 딸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은혜만 아는 사람이기를 바랐지.” 이 말을 하고 소홍은 심호흡을 한번 했다. 우리는 그냥 평범한 중국인이었다.(148면)
소홍은 경제적 지원과 돌봄노동을 도맡아주는 부모가 있음에도 부모의 그 통제적인 뒷받침이 자신을 더욱 숨 막히게 했음을 토로한다. 아파트와 차와 가게와 직장과 결혼 등 모든 것을 지원한 소홍의 아버지는 친절과 안전을 내세우지만 감시통제체제 속에서 위압적으로 굴 뿐인 풍아저씨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나’가 소홍에게 공감한 것도 위계적 구도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그녀의 의지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가 소홍에게 보내는 마음은 전염병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의 삶에 대한 동료 시민으로서의 공감적 이해와 맞물려 있다. ‘나’는 소홍의 의존적인 면모와 게으름, 부족한 체력을 알지만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에서 그녀의 자립을 돕는다. 이러한 ‘나’의 우정은 관찰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식당 메뉴를 함께 고민하고 때로는 밑반찬을 가져다주거나 설거지를 도와주지만 ‘나’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소홍만의 특별한 메뉴를 만드는 일이다. 이 소설에서 이웃과 일구는 돌봄의 삶은 팬데믹이 흔들고 간 체제적 위기와 곤경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반으로 하며 소홍이 자신만의 삶을 찾고 부녀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마음은 동료 시민으로서 ‘나’가 지니는 진실한 보살핌에서 나온다. 이렇듯 금희 소설이 보여주는 ‘이웃’에 대한 염려와 배려는 돌봄이 시민적 덕성과 만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너른 시선과 연결되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3. 돌봄의 시간성과 취약한 존재의 이해: 백온유 『페퍼민트』
백온유의 소설은 돌봄의 시민성과 관련해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풍부한 문제제기를 해오고 있다. 십대 청소년 화자의 관점과 감정을 세심하게 부각하는 그의 작품은 재난과 참사 이후의 회복과 성장을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화재사고 생존자가 고백하는 트라우마와 성장의 시간을 기록한 『유원』(창비 2020)과 ‘영 케어러’(가족돌봄청년)의 돌봄 현실을 담은 『페퍼민트』(창비 2022), 그리고 가출청소년의 현실을 다룬 『경우 없는 세계』(창비 2023)까지 그의 소설세계는 한국사회가 처한 돌봄 현실의 곤경을 총체적으로 탐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8
『페퍼민트』는 최근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는 ‘영 케어러’ 문제를 전면화한 작품이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학업 또는 취업을 포기한 채 부모 간병에만 시간을 쏟아붓는 가족돌봄청년의 삶은 돌봄 현실의 위기를 압축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9 열아홉살 시안은 평소 가깝게 왕래하던 해원의 가족으로부터 치명적인 프록시모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 중인 엄마를 6년간 간병해왔다. 해원의 가족은 지역사회에서 슈퍼 전파자로 낙인찍혀 지방으로 이사 간 후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는데, 시안이 해원을 오랜만에 찾아가면서 다시 만남이 시작된다. 소설 속 두 가족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코로나19 초기 발생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적인 인간을 돌보는 일과 식물을 기르는 일은 어느 정도 닮아 있다”(10면)라는 시안의 고백에서도 감지되듯이 이 작품은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하는 가족 간병의 어려움을 곡진하게 담아낸다.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의 미각을 깨우기 위해 매일 페퍼민트차를 우리는 것처럼 시안이 엄마와 온 힘을 다해 감각적인 교류를 시도하는 일상은 간병 과정의 세밀한 형상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한편 이 소설이 돌봄을 받는 시안 엄마를 대상화하지 않고 살아 있는 존재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점도 주목된다. 소설은 시안이 상상하는 건강한 시절의 엄마와 병실에 누워 있는 엄마의 모습을 교차하며 취약한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한다. 때맞춰 기저귀를 갈지 않으면 악취를 풍기고, 잠시라도 시선을 돌리면 생존의 위험에 처하는 엄마의 몸은 절대적인 보살핌과 헌신, 그리고 사랑을 요구한다. 시안은 식물인간인 엄마를 그 누구보다도 존엄하게 대하는 간병인 ‘최 선생’을 통해 간병 지식을 얻는 것은 물론 조금씩 마음의 성장도 이루게 된다.
가족돌봄청소년의 삶을 서사의 중심에 둔 이 작품의 흐름이 ‘돌봄의 시간성’을 잘 드러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변화무쌍한 성장을 거듭하는 십대의 나이에 엄마를 간병해야 하는 상황은 학교와 친구로부터 시안을 고립시킨다. 간병을 포함해 육아, 가사 등 일정한 반복노동을 요구하는 돌봄의 시계는 일반적 사회생활과는 다르게 흐른다. 매들린 번팅은 돌봄의 시간이 “사회가 시간을 이해하고 묘사하는 방식과 매우 상충되는 상황”에 돌봄주체를 밀어넣고 있음을 강조한다.10 그에 따르면 돌봄제공자들은 예측 가능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반복적인 노동을 요구받는다. ‘즉각성’과 ‘통제 가능성’을 중요시하는 성취 중심의 세계에서는 돌봄에 필요한 ‘함께 있어주기’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살피기’의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이렇듯 돌봄의 시간이 요구하는 반복적이고 헌신적인 노동은 급변하는 성장의 시간을 거치는 청소년의 삶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어제와 오늘의 다른 점을 하나라도 기록해야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헷갈린다. 내가 열셋인지 열일곱인지 헤아려 보다가 열아홉인 걸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72면) 이온음료로 엄마의 혀를 자극하고 피딩을 하고 손톱을 깎고 배변을 체크하는 시안의 일정은 간병에 집중되어 그야말로 순환적으로 흘러간다. 그 자신이 사회와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대상임에도 오히려 보호자가 되어 병자의 취약성을 인내하고 헌신하는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시안은 어머니의 생명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데 두려움과 압박을 느낀다.
이렇듯 시안과 시안의 아빠가 반복적인 간병의 시간을 통과한다면 해원과 가족들은 전염병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자책의 시간을 통과한다. 이 소설이 포착하는 돌봄위기가 돌봄제공자의 척박한 현실에 대한 주목 못지않게 재난과 위기에 대응하는 국가와 시민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하는 지점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해원의 엄마는 “따지고 보면 우리한테 법적인 책임 같은 건 없었어. 엄마 직장 동료들이랑 너희 학원 학부모들이 건 구상권 청구소송도 기각됐고. 아빠는 반대했지만 엄마가 우겨서 시안이네만큼은 목돈 만들어 줬어.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니?”(203면)라고 상황을 애써 합리화하지만 해원은 “마음을 추스르고 최선을 다해, 과거의 잘못을 뒤늦게나마 수습하기 위한 어떤 조치를”(206면) 엄마에게 요구한다. 재난의 복구와 일상 회복 과정에서 실질적인 제도적 지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마음과 마음의 교류이다. 어른들이 하지 못하거나 안 하고 있는 공동성의 회복과 화해는 오히려 아이들에 의해 시도된다. 시안은 해원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직접 학교로 찾아가고, 해원은 시안 엄마의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된 후 나름의 책임을 다하려 애쓴다.
결국 작품 속 돌봄의 서사는 긴 간병생활에 피폐해진 시안이 해원에게 엄마의 산소통 밸브를 잠가달라는 참혹한 부탁을 건네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랜 간병에 지친 시안의 아빠가 아내의 목숨을 먼저 위협하는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간병 기간 동안 불안정한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충동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시안 아빠의 모습은 돌봄의 삶이 개인의 윤리적 결단만으로 가능하지 않은 공동의 실천적 문제임을 잘 보여준다. 일상적인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안이 그나마 엄마의 간병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안정적으로 지원해주는 간병인 최 선생 덕분이었지만 그녀 역시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는 처지이기에 제한적인 도움밖에 줄 수 없었다.
『페퍼민트』는 감정적 교류의 대상으로 엄마를 대하는 시안의 정성스러운 간병 과정을 그리면서도 이야기를 선뜻 희망의 서사로만 이끌어가지 않는다. 결국 요양병원에 가게 된 엄마를 걱정하는 시안에게 최 선생은 ‘선의를 믿는 마음’을 불어넣어주지만 해원은 ‘세상의 선의’를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해 유보적이다. 해원과 시안은 서로의 상처를 더 들추지 않기 위하여 더이상 만나지 않기로 한다. 이들이 나누는 마지막 대화는 인상적이다. “사실 모든 책임을 너한테 떠넘기는 게 억지라는 거 나도 알았어. 네가 아빠를 말려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엄마를 그렇게 보냈으면 영원히 죄인으로 살았을 거래”(264면)라는 시안의 말은 각자 상처 입은 마음의 자리를 당분간 보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더불어 이러한 결말은 이야기가 끝나도 지속되는 영 케어러의 삶이 국가제도, 가족, 학교, 친구 등에 걸쳐 다양하게 제기하는 돌봄의 문제를 우리로 하여금 숙고하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11
문학이 그리는 돌봄의 시민성은 인간 존재의 본성이나 유대를 상호의존적으로 보면서도 주체의 역량을 고려하는 실천적인 가능성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한다. 앞서 살펴본 김애란의 소설은 ‘잘살기’의 욕망이 이끄는 박탈과 수치의 정동을 정직하게 투시하며 자신의 삶을 참답게 돌보는 동시에 이웃의 곤경을 살피는 시민의 마음이 어떻게 가능할지 조심스럽게 모색한다. 소설이 꿈꾸는 진정한 ‘좋은 이웃’은 획일화된 가치를 경쟁적으로 탐닉하는 세계가 아니라 ‘함께 돌봄’이 만드는 세계에서 가능할 것이다.
금희의 소설은 재난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바탕으로 위압적으로 작동하는 세대의식과 가부장제의 권위가 스며든 일상을 형상화한다. 소설에서 여성들 사이에 발생하는 이웃으로서의 우정과 연대는 시민의 덕목과 국가체제에 대한 성찰 역시 도모한다. 서툴고 부족하며 누군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한 여성이 자립을 시도하는 과정에 용기를 불어넣는 시민적 덕성이 충만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팬데믹의 현실에서 사회가 삶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방치되는 돌봄 문제를 다각도로 짚는 백온유의 소설은 돌봄위기의 극복이 사회적으로 촉구되어야 함을 여러번 강조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도모하는 국가의 제도적 지원, 사회와 시민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삶의 가치를 돌보고 회복하는 이야기까지 모든 돌봄의 연결망이 필요하다. 소설 속 두 친구는 상처와 죄책감을 각자의 가슴에 품은 채 헤어지지만 이러한 맺음은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기도 한다. 위기와 재난 속에서 국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공공적 돌봄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을 넘어 모든 시민들이 공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돌봄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이러한 서사는 취약한 존재의 고통을 서사로 끌어들이면서도 그것을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두지 않는 깊은 책임감을 담고 있다. 돌봄의 시민성에 대한 문학의 모색 역시 삶을 참답게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축적되는 ‘좋은 삶’과 ‘좋은 이웃’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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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尹 “여성 역량 활용해야 … 돌봄·육아에 확실히 재정 투입”」, 연합뉴스 2023.11.1.↩
- 「“나라 곳간에 돈이 없다” 돌봄·교육 사회서비스 축소 아우성」, 국민일보 2023.11.9.↩
-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 2014, 63~65면.↩
- 캐슬린 린치·모린 라이언스 「돌봄 없는 시민성? 공적 평가절하와 사적 가치인정」, 캐슬린 린치 외 『정동적 평등』, 강순원 옮김, 한울 2016, 143~46면.↩
- 매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 김승진 옮김, 반비 2022, 67~68면.↩
- 같은 책 68면.↩
- 작가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발간 30주년을 맞아 이 책이 이토록 오랫동안 읽힐 줄 몰랐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난쏘공’ 안 읽히는 사회 오길 그토록 바라건만 …」, 한겨레 2008.11.13.↩
- 문학적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백온유의 작품은 ‘사건 이후의 시간’을 주요한 플롯으로 활용한다.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마음과 성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이하나가 명명한 대로 ‘애도의 서사’보다는 ‘생존자 서사’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이하나 「죽음에서 삶으로 상전이(相轉移)를 추동하는 힘」, 『창비어린이』 2021년 겨울호, 205면.↩
- “가족돌봄청년(만 13~34세)은 질병, 장애, 정신건강, 알코올중독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을 직접 부양하는 상황에 놓인 청소년 또는 청년을 말한다. 전국에 10만명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족돌봄청년의 주당 평균 돌봄시간은 21.6시간이다. 평균 돌봄기간은 46.1개월이었다.” 「돌봄의 부담 … 가족돌봄청년, 여전히 복지 사각」, 머니투데이 2023.11.2.↩
- 매들린 번팅, 앞의 책 84면.↩
- 이후 발표된 단편 「의탁과 위탁 사이」(『릿터』 2022년 8-9월호)에서 영 케어러가 겪는 고민을 심층적으로 진전시킨 작가는 돌봄 주체와 돌봄 대상의 관계를 ‘의탁’과 ‘위탁’이라는 낱말의 관계 속에 포착하고자 한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상처 입은 할머니와 할머니의 손에 자라 어느덧 그녀를 간병하는 손녀가 서로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과정은 진정한 돌봄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촉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