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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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권력이 ‘통치’를 포기할 때 해야 할 일

 

 

한국은 지금 경제·사회·안보 등에서 한번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 도전에 직면해 있고 그에 따른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까지 내외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적지 않은 성취를 만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는 것은 도전 자체보다 도전에 대응하기 어렵게 하는 정치상황이다. 윤석열정부의 실정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겠는데, 그것만으로는 상황을 제대로 진단했다고 할 수 없다. 정부의 실정에 견제와 감독이 작동할 수 있고,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선거를 통한 변화도 가능하다. 지금도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문제가 단순한 실정이 아니라 권력이 ‘통치’를 포기한 데 있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민주주의에서 통치는 필수적이며 이는 지배나 통제와는 다르다. 특히 대의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 혹은 정당에 국가통치를 위한 상당한 권한을 위임한다. 이 권한은 공동체 구성원의 안전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목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권력이 항상 이러한 기준에 맞게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은 한다. 그래야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고, 그러한 정당성을 얻지 못한 권력은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주요 선거에서 패배한 정부여당은 민심을 존중한다는 뜻을 표하고 국정운영 기조를 조정하는 성의는 보여왔다.

4월 총선에서 참담히 패배한 윤석열정부에는 그런 성의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민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총선 전부터 국민 다수가 요구했던 특검법을 대통령이 여전히 대부분 거부하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 인사는 더 심각하다. 언론 공정성을 저해할 방통위원장, 남북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민주평통 사무처장, 독립운동을 사실상 부정하는 독립기념관장 등 자해 인사를 반복하고 있다. 이태원참사에 대한 책임이 있는 행안부장관과 총선 패배 이후 사퇴 의사를 밝힌 총리도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기구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민생위기에 대응하려는 어떠한 진지한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자영업이 절벽으로 내몰리고 유례없는 세수 부족이 발생하고 있지만 정부여당은 무책임한 감세만 주장하고 있다. 신뢰하기 어려운 기업의 조사를 근거로 한 유전 개발 발표, 수익성 보장도 안 되는 원자력발전 건설 수주 등 장밋빛 환상을 앞세워 민생불안에 대한 우려를 무마하려는 행태는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사실 이 점은 집권 직후 한국사회에 대한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않은 채 전 정부 탓하기로 일관할 때부터 예견된 문제이다. 총선 이후 정권의 행태는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조차 버리게 만들었고 통치를 포기한 권력이라는 속성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는 곡절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초유의 상황이다. 촛불혁명을 거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의아할 법도 하지만, 이 역시 촛불혁명이 변화시킨 상황과 연관이 있다. 보수세력은 촛불혁명을 경험한 국민을 설득할 비전과 아이디어를 내놓을 만한 능력을 상실했다. 그로 인해 보수세력의 기생성이 훨씬 강화되었다. 즉 이들은 국민이 아니라 다른 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공산전체주의’ 같은 가상의 적을 설정하거나 혐오를 조장함으로써 자기 잘못을 덮고 검찰과 언론을 활용하여 민심을 누르거나 조작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 믿음을 품고 행동하고 있다.

권력이 통치를 포기했다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더 열심이다. 이러한 상황은 외세 의존성도 증가시킨다. 그게 아니라면 윤석열정부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굴욕적 태도로 일관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며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면서도 정작 전쟁 수행능력은 없고 미국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 믿는 무책임한 행태는 기생성의 가장 극단적 양상이다. 이러한 기생성이 초래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사태는 남북대립이나 강대국 대결구도에 편승해 국내 위기를 가려버리려 하는 것이다.

민주, 민생, 그리고 평화를 파탄 지경으로 내몰고 있는 사태를 중단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하기 위해서 윤석열정부의 조기종식을 빠르게 이끌어내야 한다. 보수세력마저 윤석열정부의 작금의 행태가 지속될 수 있을지를 우려한다. 총선 전후로 보수언론이나 보수정당 내에서 조기퇴진이나 탄핵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일부인 이들이 문제해결에 앞장설 리 없다. 결국 역사의 전환점마다 저력을 발휘한 국민, 그리고 총선에서 그러한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치권이 창조적 지혜를 발휘하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 정부의 조기종식 방법으로 정치적 타협, 탄핵, 그리고 저항권 행사 등이 있다. 이는 현 정부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폭넓은 세력이 참여한 질서있는 정치전환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정치적 타협은 합의에 의해 윤석열정부의 임기단축과 개헌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협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선 윤석열정부의 본질적 문제와 조기종식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야 한다. 탄핵 여론이 증가하거나 정부 지지율 하락이 임계점을 넘어서며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될 때 정치적 타협 가능성이 생긴다. 그 과정에 통치행위의 불법성이나 심각한 부패 문제가 확인되면 국민이 직접 나서 저항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항권 행사는 정치적 불확실성을 높이고 질서있는 전환이라는 경로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어 당장 추구할 방향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권에서 최대한 폭넓은 세력이 결집해, 현 정부의 불법적 통치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작업과 탄핵을 포함한 정치적 전환을 동시에 추진하는 길을 우선 모색해야 한다. 정치적 타협이건 강제에 의한 퇴진이건 보수의 혁신이 있어야 질서있는 전환이 더 수월해진다. 이를 위해 보수는 지금과 같이 통치의 반복적 실패로 귀결되는 기생적 행태와 권력 게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 만들기 요구와 부합할 수 있는 통치철학을 만들어야 한다.

저항권 행사를 비롯해 어떤 경로로 사태가 진전되든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전환이 혼란과 폭력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과정에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또 압도적 힘으로 완수할 수 있다. 정치과정의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는 우려가 있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은 민심을 반영하는 것이지 선출된 권력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게 아니다. 선출된 권력이 민심에 반하는 길을 고집하며 국가를 심각한 위기로 내몰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시금석이다. 우리에게는 그 과정을 창조적으로, 평화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이룬 역사적 경험들이 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게 할 한국사회의 저력이다.

 

‘2기 촛불정부,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주제로 특집을 구성한 이유도 이러한 저력을 발휘하는 길을 찾고자 하는 데 있다. 시민언론 민들레 편집위원 전지윤은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는 레거시 미디어에 대해 국민적 불신이 계속 증가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동시에 촛불혁명 이후 중요한 국면마다 미디어의 영향이 강력했던 만큼 2기 촛불정부의 탄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레거시 미디어의 부정적 영향력을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레거시 미디어의 일부가 된 ‘진보언론’이 ‘기계적 중립’을 벗어나 진보적 뉴미디어들과 함께 반윤석열 전선에 함께 서야 함을 주요 과제로 제시한다. 그리고 2기 촛불정부 건설에 가장 앞장서야 할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두편의 글이 이어진다. 민병덕 민주당 의원은 윤석열정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생파탄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수권정당으로서 민주당이 추구해야 할 비전과 전략을 밝힌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 정책 제시와 민주당의 실행능력에 대한 신뢰 제고가 2기 촛불정부로 향하는 길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보협 조국혁신당 대변인은 조국혁신당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추진을 공식화한 배경과 이를 위한 전략을 설명한다. 앞으로 ‘3년은너무길다 특별위원회’(별칭 탄핵추진위원회)가 윤석열정부의 조기종식을 위한 활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요청한다. 일단 논의의 물꼬를 튼 셈이다. 상황 변화를 반영한 후속 논의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논단에는 묵직한 글 두편을 실었다. 백낙청 명예편집인은 분단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김정은 조선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국가간 관계로 규정한 것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고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방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특히 북의 새로운 노선이 분단체제 극복의 주요 방향으로 제시되어온 국가연합이라는 대전제를 수용할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면이 있으며, 핵심은 향후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기본으로 적대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를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K-담론을 모색한다’ 연속기획 세번째 글로 ‘K-문학’의 자산과 전통 속에서 황석영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가 지닌 성취와 의의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백지연의 글을 소개한다. 한국 근대 산업노동자의 삶과 역사를 ‘민담적 리얼리즘’이라는 고유한 방식으로 포착한 이 소설이 ‘나라 만들기’의 변혁적 상상력을 통해 세계서사의 활로를 새롭게 개척하는 지점을 주목한다.

대화는 백영경의 사회로 의료 부문 일선에서 활동하는 김용진 박건희 백재중이 참여해, 현재 한국의 의료 현실을 진단하고 문제해결 방향을 논한다. 의대 증원 이슈로 시작된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정작 의료공공성 확대라는 핵심은 논의되지 않는 상황을 문제화하고, 1차 의료 강화를 그 주요 방향으로 제시한다.

창작란에는 가을을 더 풍성하게 맞이할 수 있는 작품들이 실렸다. 열두 시인의 감각적인 시편들과 함께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자 김진선의 시도 소개한다. 소설란에서는 김병운 김성중 박문영 신경숙 윤성희의 신작 단편, 그리고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자 문소이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우리를 현실의 고통과 대면시키기도 하고 그 고통을 보듬어주기도 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이 다정한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

이번호 작가조명은 9년 만에 소설집 『여기는 괜찮아요』를 선보인 소설가 전성태를 문학평론가 전기화가 만난다.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와 차분한 작품 분석을 결합시켜가며,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우리 현대사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삶을 따듯하게 살피는 이 소설집의 미덕을 잘 보여준다. 문학평론란에서 나희덕은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고 신경림 시인의 70년 시력(詩歷)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시인의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 재조명하고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 나아간 시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시의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달랜다.

현장란에는 수많은 국가적 논란과 이슈들 속에서 조금은 묻혔던 10·29 이태원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과 현재의 주요 쟁점을 명료하게 설명한 이미현의 글이 실린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속에서 유일하게 통과된 쟁점법안인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취지에 맞게 운영되는 데 시민의 지속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산문 연재 ‘내가 사는 곳’의 이번호 배경은 경기도 과천이다. 송준규는 ‘오래된 신도시’ 과천을 무대로 아파트촌의 “불가피한” 변화 속에서도 남아 있는 것과 남겨야 할 것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문학초점에서 김수이가 차도하 이소연 이영광의 시집을, 남상욱이 김기태 소설집과 김이설 장편소설을, 권희철이 한영인 평론집을 각각 조명한다. 필자들의 시선이 이 계절에 주목할 작품들을 더 흥미롭고 유익하게 읽게 만드는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촌평란에는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책은 물론 우리 사회에 의미있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책을 골고루 소개하고자 노력했다.

제42회 신동엽문학상은 박세미 시인과 김기태 소설가에게 돌아갔다. 수상자들에게 축하 인사를 보낸다. 또한 이번호에는 만해문학상 최종심 대상작도 담겼다. 겨울호에 이어질 수상작 발표에도 관심을 부탁드린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무더위도 이제 지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윤석열정부의 행태를 보면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민의 섭리가 작동한다는 믿음으로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만들어 내놓는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꿈꾸며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있는 독자들에게 용기와 힘이 되기를 바란다.

이남주

이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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