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메가 프로젝트 열풍을 진단한다 ⑨] 메가 프로젝트 대응,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이헌석
“취지와 입장은 동의하는데, 논의 시간이 필요해요”
2026년 9월 22일 출범한 연대체 ‘메가특구법 저지와 3대 메가 프로젝트 규탄 공동행동’을 준비하면서 단체 활동가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지난 6월 말 정부와 재벌그룹 총수들이 메가 프로젝트를 공식화한 이후, 정부는 ‘속도전’과 ‘전격전’ 같은 군사작전 용어를 사용하며 정책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에 맞서 7월 초 13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세부적인 논의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산업은 시민사회운동 진영에 여전히 생소한 영역이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전문용어, 불확실한 시장상황이 뒤얽혀 있다. 전력과 용수 공급 논쟁을 겪었던 기후정의·환경운동 단체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의견을 모았으나, 전남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계와 시민사회 일각에서 일자리 창출과 지역 균형발전을 이유로 적극적인 ‘환영’ 입장이 나왔다. 지역 균형발전을 핵심과제로 다뤄온 단체들도 선뜻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반대와 전면 백지화 요구와 적극적인 환영 입장, 그리고 정부와 대기업 계획을 단계별로 검증하자는 신중론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이 형성되었다. 결국 연대체는 메가 프로젝트 ‘규탄’과 ‘재검토’라는 요구사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노동시간 주 52시간 예외 규정이나 환경영향평가법 간소화 등 330여개에 달하는 ‘메뉴판식 맞춤형 규제완화’를 담은 메가특구 특별법에 대해서는 단호히 맞서 저지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과거 토건사업과는 다른 메가 프로젝트
“전남광주 천년의 기회를 현실로!”
민형배 전남광주시장이 던진 이 표현은 전남광주 지역이 느끼는 갈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천년 전 고려 성종 때 전남광주가 ‘해양도’로서 바다 건너 세계와 교역했던 역사를 환기하며, 이후 천년간 곡창지대였던 이곳이 21세기 ‘산업의 쌀’인 반도체산업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2026년 반기보고서를 통해 자사 주식을 보유한 주주가 797만명에 달한다고 공시했다. 2025년 말 기준 삼성전자 전체 주주는 420만명 수준이었으므로, AI 열풍과 주가 폭등 국면을 거치면서 수백만명이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 두가지 풍경은 메가 프로젝트가 과거 전형적인 개발사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4대강사업을 비롯한 과거 토건사업은 소수의 건설자본과 정부가 계획을 밀어붙이고, 국민 대다수는 막연한 ‘낙수효과’나 국가발전을 기대하는 구조였다. 반면 지금의 메가 프로젝트 사업은 장기간 개발과 산업 배치에서 소외되었던 호남이 전면에 부각되었고, 그 배후에는 글로벌 AI 패권 경쟁을 주도하는 빅테크와 반도체 대기업이 포진해 있다. 또 최근 주가 폭등을 경험하면서 많은 이들이 현실적인 자산 증식의 이해관계를 깊게 학습한 상태이다.
산업적 고용 기반도 결코 가볍지 않다. 국가데이터처의 ‘일자리 형태별 산업별 임금 근로 일자리’ 통계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반도체 제조업 전체 일자리 숫자는 17만 4천개에 달한다. 이는 대표적인 기간산업인 조선업(선박 및 보트 건조업 11만 9천명)이나 철강업(1차 철강 제조업 10만 9천명)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이다. 지난해 반도체 수출액은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24.4%를 차지할 만큼 압도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메가 프로젝트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칫 국가경제의 핵심동력을 부정하는 목소리로 오해받곤 한다. 그러나 한 산업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산업이 요구하는 무제한 자원 배분과 막대한 공적 지원, 무차별적인 규제완화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메가 프로젝트 대응에 이전보다 훨씬 정밀하고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다.
지역 균형발전과 지산지소, 혼란을 넘어 새로운 논의 필요
“에너지 지산지소(地産地消)라는 말을 쓰기가 조심스러워요”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어느 지역 활동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도권 전력 집중을 막고 지역분산형 에너지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후정의 진영의 오랜 핵심 원칙이었다. 이를 농업·먹거리 운동의 지역순환 개념과 결합해 대중화한 표현이 ‘에너지 지산지소’였다.
그러나 최근 에너지 지산지소라는 표현을 정부가 사용하면서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반도체 공장이나 AI 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소비처가 비수도권에 건설되면서 어김없이 에너지 지산지소라는 말을 쓰고 있다. 전력수요가 옮겨간다는 측면은 긍정적이지만, 현재처럼 전력 소비 총량을 계속 늘리면서 지역에 거대 전력 소비지를 건설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역별 전력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정치권과 일부 지역에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우리 지역으로”라는 유치 경쟁을 벌이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지역 균형발전 담론도 마찬가지이다. 수도권에 집중된 공장과 산업을 지역으로 이전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메가특구 특별법과 같은 제도를 통해 해당 지역에만 주 52시간 노동시간 제한과 각종 환경·개발 규제를 풀어준다면, 이것을 동등한 지역 균형발전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메가 프로젝트 사업은 기존 진보진영이 수십년간 쌓아올린 ‘분산’ ‘지역 자립’ ‘균형발전’이란 언어를 교묘하게 흡수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있다. 낡은 원론과 선언적 구호만 반복해서는 이 정교한 프레임을 깰 수 없다. ‘지산지소’와 ‘균형발전’이 본래 지향했던 생태적 순환과 민주적 통제 의미를 복원하고 정책적·사회적 언어를 재구성해야 한다. 지역의 생태적 용량을 고려하지 않거나 노동·환경 조건 후퇴를 전제로 추진되는 생산시설 건설은 결국 지역을 또다른 형태의 ‘생산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대담론 대응과 구체적인 실천으로
메가 프로젝트는 단순한 대규모 개발사업이 아니다. 정부 기획과 대규모 자본, 지역소멸과 수도권 집중, 수백만 투자자와 거대산업의 이해관계가 촘촘하게 얽힌 21세기 정치경제 프로젝트이다. 따라서 정부와 자본의 일방적인 성장지상주의에 맞서는 거대담론 전선과 함께,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갖고 문제점을 제기하는 구체적인 투쟁과 행동이 동시에 조직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은 기업의 투자계획과 전력·용수 수요를 검증하고 공적지원과 규제완화의 실상을 드러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또 산업 성장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2040년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가 쓸 전력은 전체 전력 소비의 40%에 이를 것이다. 이는 현재 산업용 전력의 1.2배에 해당한다. 전력공급 가능 여부, 특정 산업 편중 문제, 사회적 비용 부담, 기후 목표와의 공존 여부 등 다양한 쟁점이 있지만, 이들은 논점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지역별 투쟁도 진행 중이다. 용인에선 SK 하이닉스 LNG 가스 배관 노선을 둘러싼 집회가 열렸고, 안성에선 반도체공장 폐쇄 방류 반대 삼보일배가 열리기도 했다. 전국적으론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하는 흐름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물론 이들 모두가 메가 프로젝트 반대 운동은 아니다. 하지만 ‘메가급’으로 진행되는 정부 계획의 이면에서 묻혀버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아우성이다. 메가 프로젝트 계획이 구체화될수록 이런 아우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논의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망설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운동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질책이기도 하다. 총론에서 각론까지, 담론에서 현실투쟁까지 다양한 영역에 접근하고 재구성해낼 때 메가 프로젝트에 대한 문제제기는 단편적 반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과 사회의 방향을 바꾸는 유의미한 운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헌석 /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
2026.10.14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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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주간논평에서는 기획연재 ‘메가 프로젝트 열풍을 진단한다’를 통해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메가 프로젝트 열풍의 배경과 실태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기획연재는 약 두달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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