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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영역된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 ABC의 경우

설준규
설준규

설준규

“(1)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2)우리한테는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3)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우기도 했는데, (4)우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번호는 필자가 편의상 붙인 것)

 

김위원장의 싱가포르 조미정상회담 첫머리발언이다. 이 발언을 듣는 순간, 조미관계의 역사,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 그리고 회담의 의의를 간명하면서도 함축적인 표현에 담은 의미심장한 이 두 문장이 영어로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해졌다. 이 글은 그 궁금증을 해소해가는 과정에 관한 보고서다.

 

이 발언의 북측 통역을 옮겨 적은 전사본(轉寫本, transcript)이 정상회담 진행과정과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백악관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는데, 아래와 같다.

 

“(1)Well, it was not easy to get here. (2)The past worked as fetters on our limbs, (3)and the old prejudices and practices worked as obstacles on our way forward. (4)But we overcame all of them, and we are here today.”

 

통/번역 과정에 다소 고심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 (2)와 (3)만 되도록 축자적으로 우리말로 되옮기면, “(2)과거는 우리 다리의 족쇄로 작용했고 (3)해묵은 편견과 관행은 우리 앞길에 장애로 작용했습니다” 정도가 되겠다. 이 전사본에 근거하면 북측 통역은 (2)에서 ‘발목 잡기’를 ‘족쇄로 작용하기’라고 옮김으로써 원래발언의 의미를 과장했다는 지적이 나올 법하고 (3)에서 원래발언의 은유적 함축을 온전히 살리지 않은 것도 아쉽지만, 발언의 취지를 명확히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미국의 주요매체 중 NBC는 백악관 전사본을 활용했고, CBS와 폭스(Fox)뉴스는 북측 통역을 발언의 취지에 대체로 부합하게 직접 따서 사용했으며, CNN은 김위원장 발언을 무난하게 직접 번역해서 사용했다.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와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는 백악관 전사본을 원용했다. ABC는 통역을 따서 자막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김위원장 발언을 직접 영어로 옮긴 것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자막에도 문제가 있지만 영어번역은 원래발언의 취지를 심하게 왜곡했다. (확언할 수는 없으나, ABC가 사용한 영역은 정황상 ABC의 자체 번역으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그렇게 전제한다.)

 

먼저 두 정상의 발언을 영어로 자막처리한 ABC뉴스 동영상을 보면, 김위원장 발언 중 (2) 부분의 통역을 “The past failed the world as feathers on our limbs”로 전사(轉寫)한 것이 특이하다.(https://twitter.com/ABC/status/1006346804949127168) 이것을 우리말로 되옮기면 ‘과거는 우리 팔다리에 난 깃털처럼 세계에 실망을 안겨주었다’ 정도가 되겠는데, 무슨 심오한 은유적 함축이 실린 듯도 하지만 뜻이 영 알쏭달쏭하다. 이렇게 된 데는 족쇄(fetters)를 깃털(feathers)로 잘못 들은 탓도 있지만, 북측 통역의 발음이 주변소음 때문에 알아듣기 어려웠던 탓이 커 보인다. (폭스뉴스의 자막은 이 부분을 “The past”만 표시하고 나머지는 ”들리지 않음”으로 처리했다.) 아무튼 이 동영상은 아리송한 자막을 단 채로 조회수가 13만이 넘고 천번 이상 리트윗되었으니, 김위원장은 속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인물이라는 첫인상을 영어권 사람들이 갖게 하는 데 일조했을 법하다.

 

ABC는 온라인의 별도 기사에서는 이 자막을 재활용하는 대신 김위원장의 발언을 따로 영역해서 썼다. 아래는 정상회담 얼마 뒤에 나온 ABC의 어느 기명기사에 실린 영역 중 일부분.

 

“(2)There’s a history of holding onto our ankles, (3)and it appeared there were times that there were unfortunate practices where they were trying to block our eyes and our ears”

(https://abcnews.go.com/Politics/alongside-kim-jong-trump-predicts-tremendous-success-historic/story?id=55819494)

 

우리말로 되옮기면, “(2)[우리 자신 또는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발목을 잡아온 역사가 있고, (3)그들이 우리의 눈과 우리의 귀를 막으려고 시도했던 불행한 관행이 있었던 시기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여러모로 난감한 영어번역인데, 먼저 (2)를 보자. 영어에서 “holding onto our ankles”는 발목을 잡는 신체적 동작 그 자체만을 뜻할 뿐, 우리말 ‘발목 잡기’에 담긴 은유적 의미 즉 ‘부담 주기’ ‘방해하기’라는 뜻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holding onto our ankles”는 상당히 ‘은밀한’ 동작으로 해석될 소지도 있다. ‘ankle grabbing’(발목 움켜잡기)과 마찬가지로 이 표현도 허리를 바짝 굽혀 발목을 잡고 엉덩이를 치켜드는 항문성교 자세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번역이 제시된 SNS 게시물에 바로 그런 연상작용에서 비롯된 조롱 섞인 댓글이 실제로 달리기도 했다.(가령 https://twitter.com/freedom_moates/status/1006348035952140289) 이런 문제를 의식했는지 ABC는 다른 기명기사에서 “holding onto our ankles”가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뒤로 잡아당기거나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려고 시도한다는 뜻을 지닌 구절”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https://abcnews.go.com/Politics/live-updates-us-north-korea-summit/story?id=55780978)

 

하지만 ‘발목 잡기’ 즉 “holding onto our ankles”의 뜻을 이렇게 부연설명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모두 해소되지는 않는다. 이 번역이 김위원장 발언의 근본취지를 크게 왜곡했기 때문이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라는 원래발언의 핵심은 과거가 우리 발목을 잡는 주체라는 것이다. 과거 자체가 무거운 짐이나 장해물이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과거란 기본적으로 한국전쟁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어번역은 과거에 ‘발목 잡기’가 일어났다, 즉 누가 우리 ‘발목을 잡아온’ 과거가 존재한다고 읽히게 만듦으로써 ‘발목 잡기’의 주체를 과거가 아닌 미지의 ‘그 누구’로 바꾸어버렸다. 그리하여 과거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아닌 (‘발목 잡기’가 진행된) 불특정한 시간적 연속을 뜻하게 됐다. 그렇다면 영어번역이 암시하는 (‘우리 발목을 잡아온’) ‘그 누구’는 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미국이 결국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There’s a history of holding onto our ankles”는 ‘미국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온 역사가 있다’라는 뜻으로 새겨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게 해석하는 미국사람이라면, 미국과 잘해보자고 만난 자리에서 김위원장이 첫밗에 미국을 원망하는 꼴이니 김위원장 첫인상이 그다지 고울 리 없겠다.

 

ABC 번역의 (3)도 원래발언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 중요한 함축을 지닌 “편견”이 번역에서 누락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릇된 (…)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우기도 했는데”라는 간명한 언술이, 희한하게도, 세겹의 복문으로 구성된 복잡하고 장황한 영문으로 둔갑해버렸다. 더구나 이 번역은 심각한 의미상 왜곡을 담고 있기도 하다. 원래발언은 “우리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 “그릇된 편견과 관행”이라고 못 박았음에 반해 번역문은 (원래발언에 없는) ‘그들이’ 우리 눈과 귀를 ‘막으려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 ‘그들’은 또 누구인가? 이 영어번역을 제시한 트위터 게시물에 “그들이 대체 누구? 우리겠지?”라는 댓글이 실제로 달린 데서 보듯, ‘그들’이 특정한 미국인들 또는 미국세력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소지는 충분해 보인다. 그렇게 되면 김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미국을 원망 또는 비방하는 셈이 되고, 이 또한 김위원장의 첫인상에 적잖이 흠집을 내는 효과를 낳기 십상이다.

 

다른 여러 매체들이 백악관 홈페이지의 전사본을 활용하는 추세를 보였던 반면, ABC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조미정상회담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질문으로 트럼프를 닦달하던, ABC의 백악관 수석 특파원으로서 백악관 전사본의 존재를 익히 알 만한 (근 20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조너선 칼(Jonathan Karl)도 “김정은이 말한 것”이라는 (실상과 사뭇 다른) 제목을 붙여 문제의 오역을 (아직도 그대로!) 트위터에 올려놓았다.(https://twitter.com/jonkarl/status/1006347614562861057) (이 게시물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우리겠지?”라는 댓글과 아울러 오역이 유발한 것으로 보이는 비아냥 섞인 댓글들이 달려 있기도 하다.) 정상회담 몇시간 뒤 트럼프와 단독인터뷰를 성사시킬 정도로 북미관계 보도에서 ABC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라는 사실에 비추면, 이처럼 터무니없는 오역을 연이어 내보낸 데 따른 여론왜곡은 만만치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더군다나 『뉴스위크』(Newsweek), 『뉴욕매거진』(New York Magazine) 등 여러 다른 매체가 ABC의 오역을 한때 원용했던 사실까지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 보인다.

 

끝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뜸 ‘가짜뉴스’라고 일갈하지는 않을까? 고심 끝에 나온 자신의 발언이 힐난 섞인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김위원장이 알게 된다면? 잘못된 편견에 여전히 사로잡혀 눈과 귀가 먼 언론이라고 질타하지 않을까? 외신을 악의적으로 오역, 편집,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려 들기 일쑤인 일부 국내언론의 행태와 마찬가지로, 주요 미국매체의 우리말 영역 실태도 지속적, 조직적으로 추적, 점검해서, 필요하다면 비판과 아울러 시정을 촉구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설준규 / 한신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2018.6.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