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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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서사 혹은 해학

손택수 시집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사 2003

 

 

박영근 朴永根

시인

 

 

호랑이-발자국손택수(孫宅洙) 시집 『호랑이 발자국』을 읽는다. 특히 이야기와, 그것을 움직이는 극적 얼개가 도드라져 보이는 2·3부의 시들을 반복해서 읽는다. 이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그 서사의 형식과 세계, 그것이 한 시인에 의해서 생생한 몸으로 돌아오고 있거니와,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묻는 자에게 그 귀환은 매우 의미있는 물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손택수의 시들을 통하여 서사의 의미를 다시 돌이켜보려는 것은 오늘날의 시적 지형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탐닉이라 부를 만한 감각적 수사와 자폐적인 내면세계의 진술, 그것의 역설적 표현으로 보이는 절집의 언어들과 과장된 일탈의 포즈들에서 우리가 한결같이 보는 것은 고립된 개인성이며, 그에 따른 단절의 벽이다. 시와 현실세계 사이의 소통과 교감, 시와 독자 사이를 넘나드는 상호개입과 대화를 가능케 하는 열린 관계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새로운 세대의 드문 행보로서 『호랑이 발자국』이 펼쳐놓고 있는 서사의 세계를 우리가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시 「아버지의 등을 밀며」는 갈등과 반전, 화해의 극적 구조를 지닌 단편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의 전반부에 의하면 화자인 소년의 아버지는 어찌된 사정인지 목욕탕이란 곳에는 전혀 출입하지 않는 기이한 위인이다. 그로부터 목욕탕에 대한 화자의 우울한 소회가 펼쳐진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강조는 인용자)

 

이와 같은 화자의 진술에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시적 울림의 모순된 양면성이다. 소년의 비애 가득한 표정에서 우리는 유쾌하게 웃게 되는 게 아닌가. 비극적 정조가 희극적 울림으로 전이되는 해학의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 또다른 까닭은 극적 반전에 있다. 화자의 예단에 의해서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감추어진 진실이 전혀 다른 사정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이 시구에서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황의 전환과, 바로 그로부터 비롯되는 아찔한 충격은 이 시에서 서사의 백미라 할 만하다.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와 같은 시의 결구 또한 시 공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목욕탕, 병원 욕실을 중층화시킴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의 국면을 한결 두텁게 하고 있다.

“대청 뒤주에 놋물고기가 살았다. 배를 따면 아침 저녁 쌀을 내주던 요술쟁이”라는 첫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놋물고기 뱃속」은 쌀뒤주에 매달려 있는 오래된 자물통을 매개로 궁핍했던 유년을 환상적 서사로 그려내고 있다. ‘놋물고기’란 뒤주의 자물통에 새겨진 어떤 물고기의 문양을 가리키는 것일 텐데, 시의 화자는 그것을 빌려 ‘뱃속의 허기’를 잊게 되는 환상여행을 한다. “그 작은 몸속에 바다가 있는 줄은 (…) 아무도 몰랐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여행에서 화자는 ‘해초숲’과 ‘반짝이는 조개들’로 표상되는 화사한 바다의 세계를 만난다. 여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사의 또다른 겹을 이루는 외할머니의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할머니 무릎베개를 하고 누워 나는 종종 쌀뒤주 속에서 굶어죽었다는 왕자 얘기를 듣고, 옛날 어느 어부가 고래 뱃속에서 나온 씨앗을 심었더니 왕후박나무가 되었구나, 그 나무를 베어 관을 짜면 바다의 자장가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구나, 자장자장

 

텅 빈 쌀뒤주와, 놋물고기 문양으로부터 촉발된 두 편의 드라마가 화자와 관련하여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자의 경우는 자신의 궁핍한 현실과 ‘불행한 왕자’의 형편을 동일시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위로의 의미를, 후자의 경우는 왕후박나무 설화가 내비치는 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의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특히 인용된 시의 마지막 구절은 주목을 요한다. 죽음이 아주 평화롭게, 소년적 감수성으로 받아들인 세계라 보기에는 지나칠 만큼 매혹적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화자의 꿈을 배반하는 현실의 가혹함에 대응하려는 무의식의 어떤 응답인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꿈에서 깨어난 화자는 현실로 돌아와 “밥 벌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쌀벌레처럼 웅크린 어둠속”의 비참한 존재가 된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아가미에 녹꽃이 핀 물고기는 둘만의 무슨 비밀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꿈과 현실의 관계를 그럴 수 없이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외할머니의 숟가락」 「감나무 낚시에 관하여」 「대추나무 신랑」에서 나는 매우 해학적인 풍속화를 본다. 시인의 입담에 힘입어 되살아나는 풍속화 속의 옛 인물들과 그 정황은 회고담 속의 희미한 서정적 잔영이나 회한 속에 사라져가는 퇴영의 자리를 훨씬 벗어나 해학적 활기로 생동하고 있다.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외할머니의 숟가락」 부분(강조는 인용자)

 

촉촉이 젖은 그늘 속에 불쑥 꼬마신랑 잠지를 꺼내놓고

자라야, 자라야, 고개를 내놓아라

안 내놓으면 구워먹고 말겠다

가랑이가 더 잘 벌어지라고

가지 사이에 옹골찬 돌멩이도 하나 끼워주고

물오른 나뭇가지 하얀 속살에 살살 문질러주며

청상의 이모들은 남의 신혼방을 훔쳐보듯

풋, 풋, 풋, 풋대추이파리처럼 마냥 하늘거렸을까

–「대추나무 신랑」 부분(강조는 인용자)

 

손택수 시의 해학은 우리가 보아온 민중적 서사가 그렇듯이 유희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통스러운 역사적 경험과 진실이 살아 있다. 「외할머니의 숟가락」에서 외할머니의 고집은 “집이라는 것은/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생존의 덕목에 이르게 되며, 고목이 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남성의 상징인 돌멩이를 끼워넣고 탱탱한 열매를 기원하는 청상 이모들의 행위는 일탈적 풍속을 빌려 성적 소외를 달래려는 억압된 여성성의 표현이다.

『호랑이 발자국』의 상당수의 시들은 시의 구성과 성격에서 서사와는 거리가 먼 단형 서정시들이다. 「빙어가 오를 때」 「새들은 모래주머니를 품고 난다」 등은 뛰어난 서정시들로서 손택수의 시세계에서 다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박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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