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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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거짓과 위법투성이의 ‘신종 법치’

 

 

그간 이명박정부가 추진한 중요 정책이란 4대강사업을 제외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주된 정책들을 뒤집는 것이 거의 전부다. 종합부동산세의 사실상 폐지(‘부자 감세’), 남북화해정책의 실질적 폐기,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원안 백지화 등이 그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개탄하는 이 정부가 지난 2년간 주력한 것은 그 ‘잃어버린 10년’간, 아니 6월항쟁 이후 20년간 쌓아놓은 것을 무너뜨리는 일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정부가 외교적 성과로 내세우는 G20정상회담 서울 유치의 공로도 ‘잃어버린 10년’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그 10년 동안 발전된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력 덕택에 성사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20년 전에 마련되고 그 10년 동안 다져진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기반이 이 정부 출범 이후 급속히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 20년의 역진(逆進)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현 정부와 산하 기관들이 민주주의의 근본인 법치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조롱하는 관행이 아닐까 싶다. 시민들한테는 말끝마다 법치를 들먹이지만 정작 자기네들은 치외법권지대에 사는 양 행세한다. BBK사건과 각종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났듯 대통령에서부터 국무총리, 장관에 이르기까지 법을 우습게 알고 거짓말과 위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전 정부들도 정책을 과대포장하거나 거짓말을 한 사례는 많지만, 거짓과 위법이 드러날 때는 반성도 하고 당사자가 물러나기도 했다. 중대한 위법이 드러났음에도 뻔뻔하게 버티는 것이 예전에는 예외였다면 이제는 상례가 되었다.

이런 거짓과 위법투성이의 ‘신종 법치’는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와 4대강사업의 편법적인 추진에서 두드러진다. 가령 미디어법의 경우 언론인, 언론학자, 시민단체, 야당 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 법의 ‘통과’를 강행했고, 그 과정에서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 등 명백한 불법을 저질렀다. 법의 제정과정에 불법행위가 개입되었지만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황당하고 무책임하지만, 그후 한나라당에서 헌재 결정에 따라 미디어법에 대해서는 어떤 재론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도 황당하다. 불법적으로 제정된 법안이라는 것이 헌재의 엄연한 판단인데도 이를 시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뻔뻔함이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그 오만한 독선을 ‘헌재결정 존중’으로 포장하는 ‘신종 법치’를 선보이고 있다.

4대강사업의 문제점도 다르지 않다. 22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이 배정된 이 사업은 하천과 운하의 차이나 4대강 각각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생태공학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사업인데다가(『창비주간논평』 연속기획 참조) 그 졸속 추진과정에서 국가재정법, 하천법, 환경정책기본법, 수자원공사법 등의 현행법을 위반하고 있다. 이런 위법을 뻔히 알면서도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이다. 정부가 제출한 4대강사업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정부안이 그대로 통과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미리 공사에 착수하는 몰염치함도 놀랍다. 총 634km 구간에 달하는 4대강사업에 대한 환경영향평가를 4개월 만에 끝냈다는 것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졸속의 징표로 읽힌다. 위법적 절차와 정책 자체의 부실함이 결합된 이 이중의 문제를 짚기 위해서도 미디어법과 4대강사업에서의 위법성을 철저히 파헤쳐야 할 것이다.

거짓과 위법투성이의 이명박식 ‘신종 법치’는 그의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최상위 기득권층에 혜택을 주려고 위법과 편법을 행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반면 용산참사에서 보듯 보통 시민들에게는 무자비하여 사람이 죽어도 인권유린을 반성하지 않는다. 진정한 법치가 확립된 민주주의 사회라면 사법부가 이런 위법을 단죄할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판결이나 용산참사 소송에서 일방적으로 검찰 측 손을 들어준 법원의 판결에서 보듯 사법부만 믿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런 이명박식 ‘신종 법치’가 유지되는 데는 기득권층의 지지와 아울러, 정운찬 총리 같은 교수, 지식인, 전문가 집단의 자발적인 협조가 큰 몫을 한다. 역으로 말하면 민주주의를 믿는 시민들 각자가 협력을 거부하는 일상적 운동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이명박식 ‘신종 법치’를 퇴치하고 그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언어와 삶과 법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번호 특집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은 오늘날 우리 문학의 현장에서 등장하는 핵심적인 물음을 추적하고 검토하는 네편의 글로 구성된다. 각각의 글은 최근의 논쟁적 흐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기존 논의의 허실을 가리고 새로운 논점을 제시한다. 물음의 성격이나 물음을 추궁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지만 네편의 논의는 모두 추상적인 공론에 머물지 않도록 시, 소설 등의 구체적인 문학작품에 대한 비평과 결부되어 있다.

백낙청은 시의 정치성에 대한 진은영의 진솔한 고민에 공감하며 언어실험을 감행하는 새로운 어법의 시들을 간결하되 섬세한 방식으로 평한다. 가령 그는 이 실험시인들이 수행하는 ‘선승(禪僧)’과 ‘특공대’ 같은 임무의 의의를 사주는 동시에 대중의 삶과 소통하는 대승의 길이 필요함을 덧붙인다. 그 공부의 일환으로 이장욱의 모더니티 논의와 랑씨에르의 예술체제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일견 ‘쉬운’ 시들의 낯선 어법이나 실험적 측면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함돈균 역시 진은영과 이장욱의 논의를 이어받아 시의 정치성을 논하는데, 시인의 정치참여와 시의 정치성 간의 간극이 불가피한가라는 물음에서 시인의 세계 연루 없이 ‘시(의 정치성)’의 발생이 불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간다. 라깡과 바디우를 비롯한 서구 담론을 두루 참조하고 최근 한국시의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그는 세계와의 연루를 넘어서는 잉여와 초과의 자리에서 시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편다.

백지연은 최근 우리 소설에서 새 흐름을 형성하는 타자에 대한 서사에 주목한다. 그는 버틀러와 아렌트의 논의를 활용하여 전성태·공선옥 소설에 등장하는 타자적 경험과 월경(越境)의 서사를 분석하고, 그것이 민족, 인종, 성 등의 경계를 사이에 둔 연민에 그치지 않고 자기성찰의 계기로 작용하는 점을 높이 산다. 타자를 바라보는 ‘나’ 자신 역시 낯선 타자임을 인지하는 성찰의 순간, 공공적 삶의 공간이 새롭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정아는 ‘이방인’ 혹은 ‘외국인’을 ‘타자의 윤리’ 담론의 맥락에서 거론하고, 지난번 자신의 글을 비판한 서동욱의 글을 재반박하는 한편 ‘보편주의/메시아주의와 법’에 관한 바디우와 아감벤의 논의를 점검한다. 이방인, 법, 보편주의라는 3자의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관계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온전하게 제시되는데, 이 개념들을 둘러싼 기존 논의들에 대한 뼈있는 논평으로 읽힌다.

이번호에는 문학특집 외에도 주목할 만한 평론이 두편 더 있다. 평론가 정남영은 등단 40년을 맞은 이시영의 시편들을 종횡무진 훑으면서 스피노자의 ‘정동(情動)’의 시학에 바탕하여 정치한 비평적 시론을 펼친다. 이시영 시의 활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설득력있게 논하는 평문으로 최근 시 논의의 쟁점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올해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자 김영희(金伶熙)는 진은영의 시를 세심하게 읽고 자상하게 해석한다. 앞으로 더욱 알차고 당찬 비평을 기대하며 축하의 뜻을 전한다. ‘문학초점’란의 신간 시와 소설에 대한 논평 및 하루끼 장편 『1Q84』에 대한 촌평은 문학평론의 풍성함을 더해준다. 창작란도 풍요롭다. 고은 시인부터 올해 신인시인상 수상자 주하림에 이르기까지 열두분이 저마다의 감각체험으로 뽑아낸 팽팽한 시편들을 보내주었다. 김형수, 손홍규, 윤영수, 이반장, 김연수가 포진한 소설란 역시 우리 시대 서사의 개성적인 어법과 리듬, 폭넓은 주제와 문제의식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신인소설상 수상자 이반장에게 반가운 인사를, 1년간의 연재를 성공적으로 매듭지은 김연수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이번호 ‘대화’는 4·19시절부터 지금까지 40여년을 한국학연구의 중심에서 활동한 임형택 교수와 한기형 홍석률 두 학자들이 한국학의 성취와 발전과정, 앞으로의 방향을 놓고 진솔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문학과 국문학의 통합 문제,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안목 등 주요한 사안들을 두루 짚는다. 한문학과 국문학의 비전을 가다듬고 인문학적 기초를 세우는 일에 오랜 세월 고민한 그의 혜안과 통찰이 주목할 만하다.

이번호 ‘논단과 현장’은 주장이 뚜렷한 네편의 글이 실려 있다. 김석철은 4대강사업의 정책입안자와 관료집단이 한반도 공간전략이나 4대강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점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다. 4대강마다 각각 다른 풍부한 세목의 계획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더라도 4대강 각각의 특성에 대한 전문가적 탁견과 인문지리적 통찰은 귀담아들어야 마땅하다. ‘통일신라론’의 연원과 관련하여 윤선태는 지난호 김흥규의 비판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주장을 내놓았다. 두 학자간의 치열한 논쟁은 사료 해석상의 문제뿐 아니라 사관(史觀)의 문제까지 내포한다. 이 논쟁을 계기로 식민지근대성론이나 탈식민주의 담론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사까모또 요시까즈의 구상은 기본 발상에서 평화주의적이며 다른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들이 빠뜨리는 북한문제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미야 다다시는 분단체제론의 의의를 백낙청의 신간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에 대한 서평을 겸해서 자상하게 짚는다. 올해 타이완의 비판적 계간지 『대만사회연구』(74호, 2009.6)가 마련한 분단체제론 특집호와 더불어 분단체제론의 동아시아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색다른 읽을거리이다.

이제껏 문학적 쟁점이 차지하던 ‘시선과 시선’ 코너에 이번호에는 법학자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에 대한 두가지 시선을 병치시켰다. 각각 사회학자와 변호사인 윤상철과 하승수는 이 책이 지닌 기본적인 미덕을 인정하는 위에서 사법개혁의 대안을 어떻게 찾을지 열띤 토론을 벌인다. 두 논자, 그리고 분량에 비해 품이 많이 드는 ‘촌평’‘문화평’란을 알차게 꾸려주신 여러 필자들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신종 플루’와 ‘신종 법치’가 설치는 험한 세월에 독자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韓基煜

한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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