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천안함 사건이 일깨우는 진실
천안함 침몰사건이 일어난 지 어느덧 사십여일이 흘렀다. 깊은 슬픔과 애도 속에 영결식이 거행된 후에도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26일 밤, 백령도 근방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해군 초계함 천안함은 갑자기 통신이 끊긴 채 침몰했다. 선박이 두 동강 나면서 함미와 함수가 잇달아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고 장병들 중 마흔여섯명은 우리 곁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연인의 다정한 전화를 기다렸을, 혹은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고 잠을 청했을 장병들의 평범한 일상은 어떤 예고도 없이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천안함의 침몰은 정부의 위기대응 능력 부재가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사건 발생 초기 군과 정부의 정보독점과 부실하고 일관성 없는 발표는 의혹과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보수언론과 현정권을 포함한 기득권자들은 입증되지 않은 공격세력을 가정한 씨나리오들을 일찍부터 유포해왔다. 어떤 공상과학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기상천외한 내용들로 꾸며진 가상의 서사들이 연일 버전을 달리하여 언론의 지면을 장식했다.
사건의 원인을 덮어둔 채 위기와 안보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은 실체 없는 적을 향한 응징과 보복을 다짐한다. 진실은 저 너머로 던져두고 가해자의 존재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국민의 적개심을 북돋우는 데 모든 이야기가 집중되고 있다.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정권과 보수여론은 천안함 관련 씨나리오들을 통해 정치현실에서 부각되어야 할 뜨거운 쟁점들을 공론장에서 밀어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밀려나고 있는 정치적 현안 중 대표적 사례는 검찰 비리와 MBC 파업 그리고 4대강사업이다. 전직 총리에 대한 수사권 남용으로 시작된 검찰의 횡포는 스폰서 검사 파문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절정에 달했다. 비리를 취재하는 방송 제작진까지 협박하는 검찰의 대담한 행태는 공권력 남용과 도덕성의 마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언론탄압에 맞서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기명 성명과 장기파업을 선언하며 18년 만에 일어난 MBC 파업 역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법과 절차를 무시하면서 추진되고 있는 4대강사업은 어떠한가. 문화와 생태를 파괴하며 세금을 낭비하는 대규모 토목사업을 향해 각계각층이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이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안보 메커니즘을 동원한 각종 억측과 사실 조작은 공권력 남용과 불법의 사례들을 감추고 정치적 쟁점을 은폐하는 적극적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씨나리오들이 감추려는 정치적 현안들을 하나씩 떠올려볼수록 다가오는 지방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검찰개혁과 언론자유 및 국토환경의 보전을 포함하여 개개인의 삶이 인간답게 영위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정치적 과제에 대한 절실한 고민이 이 지점에서 요구된다. 또한 무상급식 논쟁으로 구체화된 국민복지의 문제, 전교조 교사명단 공개와 교원평가제 도입이 야기하는 교육현장의 문제는 일상의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는 정치현안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역거버넌스의 합리적 구성을 통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4대강사업 중단’과 ‘무상급식 실현’은 유권자 주도의 지역거버넌스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사안이다. 이렇듯 사회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지역거버넌스의 구성과 개혁은 실질적 민주주의와 복지 문제를 추구해나갈 수 있는 동력이다.
객관적인 정세판단을 기초로 한 유권자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더불어 이번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진보개혁세력의 정치적 진출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진보개혁세력이 실현해야 할 정치연합은 단기적인 선거전략을 넘어서 포괄적으로 구상될 필요가 있다. 진보개혁세력의 정치연합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중장기적 전망을 성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과제다. 더불어 정치연합의 문제는 한국사회를 제약하고 있는 분단체제의 인식과 그것의 극복이라는 총체적인 시야를 확보할 때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개인들이 실감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와 복지의 확장 역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당장 천안함 사건만 하더라도 분단체제의 제약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처참한 모습으로 인양된 천안함의 거대한 함미는 왜곡된 정치현실 속에서 실체를 잃어버린 우리 사회의 텅 빈 상징처럼 보인다. 사건 규명을 뒷전으로 한 현재의 기이한 상황은 우리에게 이것이 안간힘을 다해 숨기고 있는 궁극적 진실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되묻는다. 한국사회가 처한 진정한 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들이 어떻게 모색되어야 할지를 천안함 사건 이후의 정국이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번호 특집은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이다. 특집에 실린 네편의 글은 그동안 평단에서 활발히 거론되어왔던 문학과 정치에 관련된 논의들을 돌아보고 이것을 생산적인 문제제기로 심화하려는 의욕을 보여준다. 각각의 글들은 실제적인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해석을 바탕으로 문학이 현실과 맺는 관계에 대해 예각화된 논의들을 끌어내고 있다. 재작년 본지에서 시와 정치의 문제에 대한 비평적 논의를 촉발했던 진은영은 이번 글에서 김수영을 중심으로 타율성과 연관된 미학적 자율성의 의미를 새롭게 탐구한다. 문학의 자리와 정치의 자리를 뒤섞음으로써 감각적인 것들의 완강한 경계를 넘어서는 미학적 자율성의 사례가 김수영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홍수는 소설의 역사에 새겨진 리얼리즘의 지향을 환기하면서 현실과 창조적으로 교섭하는 소설의 미학적 경로를 탐색한다. 그는 쉽게 발화되지 않는 정치성, 적대와 모욕의 인간학, 반미학의 미학이라는 주제 속에서 김연수와 권여선, 공선옥의 작품이 보여주는 정치성의 층위를 세심하게 분석한다. 권희철은 촛불항쟁이 암시하는 ‘소통적 텅 빔의 가능성’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어떤 정체성으로도 귀속되지 않는 존재’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황정은과 편혜영의 작품을 평가한다. 유희석은 식민지근대의 극복을 화두로 하여 한국 근대소설 연구의 관행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를 시도한다. 식민지상황에서 서구 근대와 충돌하여 이루어진 서사양식의 변화를 탐구한 브라질의 비평가 슈바르스의 문학론과 염상섭의 『삼대』를 연결하여 논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특집과 더불어 평론들도 문학이 현실과 관여하는 지점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짚고 있다. 우선 고은의 『만인보』 완간을 기념하며 그간의 시적 행보를 자상하게 조명한 염무웅의 글이 있다. 『만인보』에 나타난 서사시적 충동에서 비롯된 독특하면서도 야심적인 실험을 주목한 이 글과 함께 고은 시인 자신이 집필의 소회를 털어놓은 진솔한 산문도 소개해드린다. 동아시아론의 창발적 구상과 실천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안중근의 사상과 작품을 세밀히 조명한 최원식의 글과, 청소년문학의 성과를 심도있게 분석한 오세란의 글도 유익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문학초점은 최승자 시집평을 포함하여 현재의 문학 흐름을 압축적으로 진단하는 비평들을 담았다.
특집과 평론에 이어 창작란의 작품들 역시 이번 계절의 풍성한 읽을거리이다. 시란에서는 김태형에서 황규관에 이르는 아홉분의 시인이 다채로운 시적 개성으로 자리를 빛내주었다. 소설란에서는 공선옥과 김애란의 장편연재와 이홍의 단편이 독자를 반긴다. 2회에 접어든 공선옥 소설은 생생한 입담과 흥미를 더해가는 서사적 전개로 시선을 붙잡는다. 이번호부터 김애란 소설 연재가 새롭게 시작되며 지면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젊은 세대의 발랄하고도 따뜻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이 작가의 첫 장편연재에 많은 격려와 관심을 부탁드린다. 연재 2회를 맞고 있는 변호사이자 영화제작자인 조광희의 산문 역시 솔직하고 흡인력있는 필치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번호 ‘대화’는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관계의 길을 모색하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일본 주류세력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테라시마 지쯔로오와 본지 편집주간 백영서가 일본과 한국의 정치현실을 넘나드는 폭넓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테라시마는 정권교체를 이룩한 일본 민주당의 지향과 한계를 날카롭게 짚으면서 본인의 독특한 발상인 ‘친미입아(親美入亞)’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들려준다. 일본의 현안인 주일미군 문제에 대한 그의 구상은 미군기지와 북핵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감대를 확보하며 동아시아 평화와 공생의 시대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논단과 현장’에서 지난호에 이어 한국사 다시 보기 연속기획으로 구성된 홍석률과 한홍구의 글은 2010년 현재 시점에서 4·19와 5·18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홍석률은 한국근대사에서 근대화론과 성장주의가 지역개발논리로 내재화되는 과정을 규명하면서 분단과 지역대결하의 민주항쟁과 한국정치를 연관시키는 폭넓은 시각을 보여준다. 한홍구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독보적인 규정력을 갖는 80년 광주체험과 그것이 남긴 죽음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광주를 기억한 사람들의 삶과 이념의 투쟁에 대한 서사를 흥미롭게 추적해간다. 일본 역사학계의 근세사 연구를 지배해온 근대화 패러다임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미야지마 히로시의 글은 대화란의 주제와 연결되어 역사문제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 함께 싣게 된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은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200여명이 1910년 체결된 ‘한국병합조약’이 원천 무효임을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이밖에도 환경전문 저술가 빌 매키븐의 글은 기후변화 과학을 거부하는 미국사회의 정치적 동향을 날카롭게 분석한 글로 눈길을 끈다.
그동안 ‘시선과 시선’에서는 문학과 사회과학 분야를 넘나들며 흥미로운 쟁점들을 산출해왔다. 이번에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을 주제로 신동면과 김대호가 각기 다른 입장에서 평한 글을 보내주었다. 인문사회 제반 분야의 중요한 신간들을 아우르는 촌평은 매번 많은 공을 들여 기획되는 난이다. 정성어린 글을 보내주신 필자들 덕분에 좋은 책들을 두루 소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독자의 목소리’에 투고하신 분들과 더불어 이번호에 참여하신 모든 필자들께 지면을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덧붙여 이번호부터 편집위원진에 도종환 시인이 합류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린다. 새로운 힘을 얻어 한층 더 활력있게 시대의 과제에 부응하겠다고 약속드린다.
白智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