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2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현단계 소설비평의 쟁점과 과제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들어가며
시간표상으로 ‘2000년대 문학’이 끝난 것은 확실하지만, ‘2010년대 문학’이라 부름직한 것이 시작됐는지는 미지수다. 2000년대 시는 기존 서정시의 익숙한 어법으로부터의 탈피를 과제로 삼아 예술적 갱신을 활발히 도모했거니와 후반기에는 ‘문학과 정치’ 논의를 주도하면서 창의적인 활력을 얻기도 했다. 소설 역시 시 장르와 비슷한 자기쇄신 노력은 있었지만 시대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주도하면서 구체적 삶에서 힘을 얻는 소설 장르 특유의 활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본다. 설령 ‘2000년대 소설’보다 활달한 새로운 성향의 소설이 지금 생산되고 있다 해도 한국소설의 앞날을 회의하는 거센 목소리들에 묻혀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듯하다. ‘2010년대 문학’을 논하기에 앞서 한국소설에 대한 저간의 어두운 전망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런 전망이 얼마나 타당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문학을 어둡게 생각할 이유는 여럿 있을 수 있다. 사실 1990년대 이래 한국문학은 위기가 아닌 적이 드물었다. 이른바 ‘본격문학’은 텔레비전과 영화,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의 대중매체 발달로 말미암아 존재기반을 잃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득세하기도 했고, 장르문학과 대중소설에 독자를 빼앗겨 결국 소수 마니아의 관심사로 전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돌기도 했다. 전자책(e-book)의 등장으로 종이책 인쇄 기반의 문학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대중문화의 확산과 매체환경의 변화가 큰 영향을 끼치면서 문학의 사회적 위치가 예전보다 불안정하고 그 존재방식이 유동적으로 변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학 외부에서 도래하는 이런 위기들이 한국문학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위기들이 대체로 과장되기도 했거니와 한국문학의 대응력도 만만찮았던 것이다.
더 본질적인 위기는 문학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문학 특유의 방식으로 우리시대 삶의 새로운 면모와 핵심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라고 물을 때 맞닥뜨릴 수 있는 위기가 그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휩쓸고 간 이래 적잖은 비평가들이 이 물음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그런 물음을 자기 과제로 여기던 ‘근대문학’이란 것 자체가 끝났고 전혀 다른 종류의 문학—‘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그런 과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장편소설의 장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비평가들이 이런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2000년대 소설비평에서 뚜렷한 주장을 펼친 김영찬(金永贊)과 김형중(金亨中)을 포함한 상당수의 비평가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판단된다.
근대문학 종언론 이후 한국문학은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화 요구에 점점 노골적으로 내몰리는 한편 문학 내적으로도 심각한 변화와 혼란을 겪고 있으니 섣불리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을 계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다수의 소설가와 시인이 예술적 자기쇄신의 분투를 멈추지 않고 있으며 그 덕분에 한국문학이 만만찮은 성과와 활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영찬과 김형중의 평문을 중심으로 한국소설에 대한 어두운 전망이 지닌 허실을 짚어보려는 이 글의 취지는 그러므로 그들의 비관적인 전망을 낙관적인 전망으로 대응하겠다는 뜻이라기보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국문학의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비평적인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뜻에 가깝다.
단절론적 문학사 인식의 문제
김영찬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확신하고 자신이 확신한 바를 분명히해둘 필요가 있다는 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대문학을 향한 우울의 태도를 가슴 한켠에서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 이후 계속되어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모색하는 것”1)이라고 역설한다. ‘근대문학’이란 것이 죽었다면 그의 주장대로 정중하게 애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되 살아있다면 산 사람 앞에서 곡을 하는 격이 아닐까. 어쨌거나 일차적으로 따져볼 것은 ‘근대문학’이라는 것이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있는지를 판별하는 일인 듯하다.
골치 아픈 것은 ‘근대문학’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문학전통에 따라, 그리고 개별 평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김영찬의 준거는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 개념인데, 종언론을 받아들이는 다른 평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구도를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한국문학에 거의 그대로 적용한다.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의 근대경험이 다른 만큼 그들이 이룩한 ‘근대문학’도 상당히 다를 터인데, 그 차이에 대한 고려는 없다.2) 김영찬의 논법에 남다른 점이 있다면 ‘애도’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느껴지듯이 ‘근대문학’의 죽음을 얼른 기정사실화하고 ‘근대문학’과 ‘그 이후의 문학’을 단절시키려는 의지가 유난히 강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근대문학’과 ‘그 이후의 문학’의 분기점에 대해 다른 평자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가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가령 그는 ‘근대문학 종언’의 사회경제적 배경으로 “IMF 외환위기 이후 급속하게 신자유주의적 시장전체주의 체제로 재편된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화”(22면)를 지목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세기 내내 근대문학의 활력을 보증해주고 그것의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불완전한 근대화였다. 따라서 ‘저개발의 근대’가 종언을 고했을 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IMF 외환위기 이후 시장전체주의 체제가 대중의식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을 식민화함으로써 ‘불완전한 근대화’의 종식을 알렸을 때, 한국사회에서 근대문학의 가능성의 조건은 이미 (문학(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의 내부에서 소진되어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31면)
김영찬은 여기서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일종의 거대담론을 펼치고 있다. 한국 근대화의 시발점에서 지금에 이르는 기간 중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이 1997년 IMF 외환위기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이른바 ‘97년체제론’ 치고도 특별히 과격한 형태에 해당한다. IMF 외환위기를 전후해서 한국의 사회경제적인 토대와 문학의 가능성의 조건이 본질적으로 바뀐다는 것, 즉 “‘종언’으로 이름 지어진 한국문학사의 단절과 문학적 형질 변화”(19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단절론은 근대문학의 끝을 카라따니가 염두에 둔 ‘리얼리즘의 종언’이 아니라 “근대에 대한 미적 반응으로서 (광의의) 모더니즘의 종언”(23면)으로 제시하면서, 70~80년대 문학은 물론 90년대 문학까지를 ‘근대문학’으로 묶고 그것과 ‘그 이후의 문학’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IMF 외환위기를 분기점으로 삼는 이 단절론은 2000년대 문학을 유일무이한 주인공으로 내세우기에는 안성맞춤일지 몰라도 무리한 단절로 말미암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우선 97년체제론이 그렇듯이 IMF 외환위기 이후의 변화—김영찬의 표현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전체주의 체제’—를 전일화・절대화함으로써 빚어지는 무리가 있다. 가령 “IMF 외환위기 이후 시장전체주의 체제가 대중의식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을 식민화”한 것이 사실이라면 향후에는 뜻깊은 사회운동이나 문학운동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연이은 구절에서 김영찬은 “근대문학이 자라나왔던 토대로서 사회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는 상실되었다”(32~33면)고 진단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여러달 동안 수백만 시민이 온・오프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2008년의 촛불시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수 없다. 식민화의 진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IMF 외환위기 이후에도 “대중의식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이 식민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패배주의 담론이 아닌 이상 식민화에 맞서는 주체들의 행위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IMF 외환위기가 민생에 직격탄을 날렸고 이를 계기로 한국사의 흐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로 치자면 87년 민주항쟁 이후의 변화를 더 근본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시대인식이다. 이런 ‘87년체제’론의 관점에서는 IMF 외환위기 이후의 시대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간의 힘의 균형이 그런대로 유지된 김대중・노무현시대와 민주주의가 급속히 무너지면서 시장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법과 상식이 짓밟히고 농락당하는 이명박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명박시대가 ‘87년체제’의 말기국면에 해당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87년체제’를 극복하는 변혁의 로드맵이 가능해지는 만큼 IMF 이후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마땅하다.3)
이처럼 김영찬의 단절론은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을 옳게 설정했는가의 문제도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따른 단 하나의 결정적인 ‘단절’과 그로 말미암은 ‘구조적 변화’만 강조할 뿐 주체의 행위와 결합되어 생겨나는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시민사회의 변화와 리듬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영찬 자신이 2000년대 소설의 특징으로 일관되게 강조해온 ‘탈내면의 상상력’과 ‘왜소하고 체념적인 주체’란 것도 이런 고착적인 시대인식과 구조주의 문학관의 반영인 면이 있다. 그 결과는 자승자박의 곤경으로 나타난다. 70~80년대 민주화투쟁기의 문학은 물론 87년 민주항쟁 이후의 90년대 문학도 ‘근대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의 선고를 받으며, 신경숙(申京淑)과 공선옥(孔善玉)을 비롯한 중견작가들의 빼어난 근작들도 2000년대의 ‘살아있는’ 문학의 목록에서 제외해야 하며, 2000년대에 등단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 역시 김영찬 자신이 규정한 특징에 들어맞지 않는 한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단절을 고집하면 할수록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가용자산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김영찬 비평의 ‘우울’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김영찬의 주장대로 2000년대의 적잖은 소설이 ‘탈내면의 상상력’과 ‘체념적인 주체’라는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특징을 2000년대 소설문학의 진정한 정체를 검증하는 인식표처럼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2000년대에 생산된 여러 경향의 소설들 중에 그런 특징을 지니지 않은 작품도 많을뿐더러 오히려 그런 특징이 약하기 때문에 뛰어난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게다가 그런 특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부분적이고 가변적인 특징에 입각해서 2000년 이후의 소설과 이전의 소설을 확연히 구분하는 ‘단절’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새로운 문학의 단초를 찾는 일은 이런 ‘단절’의 경계를 걷어내고 사심없이 작품을 대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근대문학’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차원에 매이지 말고 작품 하나하나의 진가를 사주는 일에 초점을 두자는 것이다. “박민규 소설을 보고 보통 정통문학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문학이라고 말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뒤집어서 거꾸로 그거야말로 정통에 더 가까운 문학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스타일로 한곳에 머물지 않고 실험을 멈추지 않는 태도나 정신의 측면에서요. 정통은 고여 있는 게 아니거든요”4)라고 말할 때 김영찬 자신이 이미 그런 비평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장편소설의 미래는 없는가
대다수 비평가들은 장편소설의 활성화 여부가 한국문학의 미래를 조건짓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자에 따라서는 이를 결정적인 변수로 꼽기도 한다. 사실 2007년 여름 『창작과비평』의 특집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가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은 장편소설 장르의 ‘저개발’ 상태가 한국문학의 발전을 제약하는 중대 요인이라는 폭넓은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논의들을 계기로 단편 위주의 문학 제도와 관행이 많이 개선되고 문학잡지의 장편연재가 늘어났을 뿐더러 웹진과 블로그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에 연재 기회가 생겨나면서 장편소설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몇몇 중견작가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신예작가도 장편을 연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외형상의 팽창과 호황이 내실있는 발전으로 귀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창조적 장편소설의 시대’를 실현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그것이 성공할 경우에는 한국문학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리라는 것이다.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에 대한 김영찬과 김형중의 회의적인 전망을 검토하면서 희망의 근거는 과연 없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상식적인 사안부터 짚어보자. 최근 몇해 사이에 장편소설은 부쩍 늘어났지만 좋은 작품의 편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있다. 냉정하게 사태를 분석하면 의외의 결과는 아니다. 문학 제도와 환경이 단편 위주에서 장편 위주로 바뀌었다고 해서 소설가들의 장편 쓰는 능력이 불과 몇년 안에 비약적으로 나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편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작가들까지 연재에 꺼둘리면서 장편소설의 평균적인 질적 수준은 오히려 낮아졌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한국문학이 바라마지 않았던 근사한 장편소설은 여전히 그 행방이 묘연하다”는 김형중의 발언5)은 외형적인 호황 이면의 여전한 빈곤을 꼬집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딱히 시의적절한 논평은 아니다. 현재 비평의 과제는 양적 팽창의 허실을 짚으면서 장편소설의 내실있는 발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일이 아닐까. 그러자면 ‘한국문학이 바라마지 않았던 근사한 장편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현재의 장편소설 활성화가 문학 내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출판시장의 요구에 추동되었다는 시각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가령 김영찬은 “장편소설의 활성화가 바깥에 의해 강제된 인위적인 활성화”라고 단언하며 “지금 한국소설은 장편의 활성화를 대가로 시장전체주의 시스템의 한가운데로 내몰리는 중”이라고 논평한다.6) 김형중 역시 비슷한 견해를 에둘러 표한다.7) 그런데 장편소설의 활성화야말로 한국문학의 오랜 숙제였다는 것, 그렇기에 2007년 창작과비평 특집에서 다수 작가들이 소설문학을 장편 위주로 재편할 필요성을 피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작금의 장편소설 붐은 한국문학의 ‘안’(작가와 비평가와 독자)과 ‘바깥’(출판시장)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에 가깝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출판시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비평가, 독자에게도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비평가의 책임이 중하다. 장편소설 활성화를 계기로 시장의 영향력이 확대된 만큼 문학의 상품화를 경계하고 그 예술성을 지켜내는 비평의 일이 더없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 근대문학 최고의 장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지만, 문제는 이때의 ‘근대문학’ 개념이 평자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영찬의 경우 ‘근대문학’이란 ‘불완전한 근대화’를 조건으로 하며 그 토대는 “사회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이다. 그의 단절론은 IMF 외환위기 이후 그런 ‘근대문학’의 조건과 토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는 “지금의 한국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근대적 노블(novel)에 요구되는 자질 자체를 애당초 그 자신의 유전자로 갖고 있지 않은, 차라리 처음부터 외면하고 거부했던 문학”(38면)이라고 단언한다. 부연하면 장편의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로서 대결의 자의식”인데, “2000년대 문학은, 세계와 대결하지 않는 문학”이라는 것이다(39면). 비슷한 맥락에서 ‘문학과 정치’ 논의와 관련해서도 “바로 지금 한국소설에 정치는 없다”(44면)고 결론짓는다. 문학의 정치성이 논의될 수 있으려면 “주체를 위협하는 외부현실에 대한 강렬한 대타의식”이 필요한데 2000년대 한국소설은 그런 의식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45면).8)
김영찬에 따르면 2000년대 한국소설의 난경(難境)은 그것이 자기 내부에 장편 서사와 정치성에 필수적인 요건들을 철저히 결여한 상태에서 ‘바깥에 의해’ 장편 활성화를 강요받을 때 발생한다. 이런 난경에서 도저히 낙관적인 전망이 나올 것 같지 않지만 그는 하나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장편의 길에 들어선 한국소설이 자기 내부의 ‘결여’를 배반하고 넘어서는 길이다.
소설이 애초부터 시장바닥의 장르였다는 것은 그것이 시장과 자본의 아들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공공적인 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 속에서 구르고 충돌하며 저 자신을 실현해왔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소란스런 장편의 시대가 어쩌면 한국소설이 그 바깥과의 의미있는 교통과 충돌을 통해 저간의 왜소한 ‘문학성’을 넘어서 문학성의 실천적 재구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망외의 기회를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 김연수를 비롯해 우리가 익히 아는 몇몇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최근 부각되고 있는 신인들의 소설에서도 아직은 거칠고 미숙하나마 포스트-IMF시대 한국소설이 잊어왔던 불화와 대결의 자의식이 조금씩 구조적・의식적 제약을 거슬러 힘겹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장편의 길 앞에 선 한국소설에 대한 조심스런 낙관을 그래도 놓지 않아야 할 이유다.(49면)
시종일관 단언조의 부정적인 논의에 비해 결론은 의외로 낙관적이다. 하지만 이 결론이 미덥지 않은 것은 앞서 그의 단절론과 2000년대 소설의 ‘결여’—그리고 그것과 떼놓을 수 없는 ‘탈내면의 상상력’과 ‘왜소하고 체념적인 주체’라는 규정—의 근거에 대한 반성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는 IMF 외환위기 이후 “근대문학이 자라나왔던 토대로서 사회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는 상실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네트워크가 살아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진술하고 있다. 혹시 이런 네트워크가 회복되면서 포스트-IMF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쨌든 ‘조심스런 낙관’은 그가 제시한 논의에서 그 근거를 찾기가 힘든데다 “우리가 익히 아는 몇몇 작가들”이나 “최근 부각되고 있는 신인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은 터라서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장편소설의 미래에 대한 김영찬의 ‘조심스런 낙관’이 얼마나 설득력있는가는 최근 소설에 대한 그의 논의의 적실성과 직결된다. 이기호(李起昊)와 편혜영(片惠英) 장편을 포함하여 최근의 많은 소설들이 “추상적인 알레고리에 갇혀 있다”(41면)는 평은 너무 단정적인 비판이지만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단편에서 “설정만 바꿔 계속되는 발상과 문법의 반복”의 기제를 ‘자기소비적・자기충족적 자율성’이라고 비판한다든지 한유주(韓裕周)의 소설이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최근 소설의 경향에 대해서 “상호텍스트성의 반복적 유희 속에서, 현실과의 긴장과 불화는 하나의 ‘포즈’나 언어 내부에서 관습적으로 소비되는 발화로써 해소되어버린다”(47면)고 평할 때의 과단성은 섬세하고 날카롭다. 하지만 유감스럽거나 미덥지 못한 점도 적지않다. 우선, 장편소설의 가능성 여부를 논하는 글에서 최근 작품 가운데 비평적 쟁점이 되었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와 박민규(朴玟奎)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2009)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렇다. 전자는 ‘근대문학’으로 분류되어 아예 제외한 것인지 모르겠으되 후자는 자신이 2000년대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는 작가의 신작 장편이니만큼 필히 거론해야 할 텍스트가 아닌가?
다른 글에서 박민규의 『핑퐁』(2006)을 다루는데 중요한 장편소설로 대하기보다는 SF를 활용한 소설의 예로서, 그리고 ‘무력한 비관의 추상화 전략’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다룰 뿐이다. 그는 뜬금없이 우주를 들먹이는 박민규식 화법을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무력한 비관의 표현”으로 간주하면서 “『핑퐁』의 저 우주론적 전략에서 암시되는 그러한 무력한 비관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지구를 아예 ‘언인스톨’ 한다는 결말의 발상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스스로 차단해버리는 극단적인 수동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비관에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9) 그런데 그가 논거로 인용한 대목과,10) 나아가 작품 전체에서 ‘못’과 ‘모아이’의 ‘무력한 비관’만을 강조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무력한 비관’을 계기로 삼아 일종의 선문답식 수련—자기를 한없이 낮추는, 불교의 ‘하심(下心)’에 해당하는 수행—을 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요컨대, 그가 2000년대 소설의 ‘체념적인 주체’라는 상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장편소설과 장르문학
김형중의 논의는 최근의 장편소설 활성화에 대한 재치있는 보고로 시작되지만 점차 “장편소설은 아직 가능한가?”(256면)라는 물음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찾아내는 답은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거론하는 서구 작가와 학자—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등—의 견해는 장편소설을 논할 때 참조할 만한 것이지만, 결정적인 전거는 될 수 없다. 가령 ‘장편소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의미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존재 이유를 지닐 수 있는 장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카버는 20세기 후반 미국 단편소설의 간판급 작가였고, 그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장편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대 작가 중에는 카버와 달리 뛰어난 장편을 쓰고 미국문학에 큰 성취를 안겨준 소설가—생존 작가만 꼽아도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코먹 매카시(Cormac McCarthy), 돈 드릴로(Don DeLillo),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조이스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 필립 로스(Philip Roth) 등—가 수두룩하다. 그러므로 카버의 문제의 발언은 그 자신이 장편을 쓰지 않은 이유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의 당대에 장편소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카버 당대 작가들의 장편에 대해 김형중은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장편소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고집할 수는 있다.11) 사실 그는 모레띠의 ‘브리꼴라주’ 논의를 빌려와 모더니즘의 대표적 장편으로 꼽히는 프루스뜨(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혹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씨즈』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유기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장르라기보다는 일종의 ‘브리콜라주’”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세계가 더이상 유기적이고 인과적인 인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사회의 총체적 조망은 더이상 불가능할 만큼 모호하고 파편적일 때,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브리콜라주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총체성을 세계에 투사하는 가망 없는 작업이 되고 만다”(256면)고 주장한다.
김형중의 이런 주장이 무리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가령 그가 거론하는 버지니아 울프나 프루스뜨와 조이스의 소설이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과 판이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장편을 ‘브리꼴라주’라는 별개의 장르로 취급하여 진정한 장편소설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장편소설의 남다른 신축성과 소화력을 무시하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자끄와 디킨즈, 똘스또이 같은 서구 19세기 소설가들의 장편소설이 이른바 ‘19세기 사실주의’라는 통념에 부합되지 않는 면이 많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즉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암시하듯 그들의 소설이 투명하게 주어지는 객관세계를 충실히 재현하는 순진한 방식에 머물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모더니즘 시대에 비해 정도는 덜하겠지만 모호하고 파편적인 양상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인 세계와 자아의 진실을 묻는 일에 사실주의를 유용하게 활용하되 그 한계도 이미 의식하고 있었다. 요컨대 흔히 ‘19세기 사실주의’라는 딱지가 붙는 19세기 장편소설의 최상의 작품들은 이미 근대의 벼랑까지 간, 혹은 그 너머를 본 예술이다.12)
김형중이 이런 주장을 하는 데는 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주체들이 경험하는 지각방식의 변화나 감수성의 변화”가 있었고 그런 변화와 더불어 “어떤 새로운 글쓰기 양식의 등장 혹은 어떤 장르의 탄생이나 단절적 진화”라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58면). 이를테면 장편소설이 모더니즘 시기에 브리꼴라주로 진화하는 ‘단절’이 일어난다는 발상인데, 흥미로운 것은 김영찬에게 한국문학사의 단절의 순간이 (광의의) 모더니즘 뒤에 온다면 김형중에게 세계문학사—사실은 ‘서구문학사’—의 단절의 순간은 (협의의) 모더니즘의 도래와 더불어 온다는 것이다.
김형중식 단절론의 문제를 근본에서 따지자면 서구 근대문학예술에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대결구도를 재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단절론이 한국문학의 지형에 적용될 때 김영찬의 경우와 비슷하게 자승자박의 곤경을 자초한다는 점만 지적하기로 한다. 그의 구도에 따르면, 서구 모더니즘 소설처럼 “사회의 총체적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모호하고 파편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은 장편소설이라기보다 일종의 ‘브리꼴라주’가 되고 그 반대로 사회의 총체적인 조망이 가능할 정도로 유기적이고 인과적인 경우에는 예술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구시대의 낡은—가령 19세기 사실주의 소설 같은—장편소설이 되어버리니, 우리시대에 장편다운 장편이 생존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니 김형중이 최근의 장편 가운데 딱히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꼽는 게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김형중은 장편소설의 예라기보다 장편 분량이되 ‘장편답지 않은 장편’의 예로 이장욱(李章旭)의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2005)과 윤성희(尹成姬)의 『구경꾼들』(2010)을 거론한다. 이장욱의 소설에 대해 사건이 “총 여섯개의 면을 가진 입방체의 형상”으로 구성된 “일종의 입체파 소설”(259면)이라고 평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추리소설의 요소를 활용하되 그렇다고 기존의 추리소설 ‘장르’와는 달리 선형적 이야기 구성과 평면적 세계관을 해체하는 효과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상(李箱)의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 비슷한 발상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전 한국소설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라고 할 만한다. 이로써 ‘입체파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발명된 것인지는 좀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장욱의 장편에 이어 최근 출간된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2011)도 ‘입체파 소설’로 분류됨직하다. 그는 윤성희의 구경꾼들에 대해서도 ‘무한소설’ 혹은 ‘퀼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명칭을 제안하는데, 작품의 서사방식에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다.
이처럼 이장욱과 윤성희의 장편에 대한 김형중의 논평에서 그의 영민한 비평감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두 작품을 “장편과 단편이 분량의 차이 이외에 다른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 예로 몰아가는 것은 유감이다. 가령 『구경꾼들』 같은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이 “이야기의 무한증식, 이야기의 영원한 브리콜라주가 가능하다는 점”(260면)이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의 무한증식’ 원리를 미학적으로 제대로 보여주려면 단편으로는 한계가 있고 장편이라야 하지 않을까. 다른 한편 이 작품들이 ‘장르화된 장편’이기 때문에 ‘총체적 장르를 지향하는 장편’—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본격 장편소설’—에서만큼 꼭 장편이라야 할 필연성은 덜하다.13) 미묘한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장르화’될 경우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느냐이다. 두 작가의 장편은 그 경계에 가깝긴 하지만 장르문학 쪽이라고 판단한다. 다만 그들의 다양한 단편들은 그 작가의 장르적 상상력과 관련이 있되, 별도로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토론해볼 만한 문제들이 많은데 김형중이 “단편소설은 무엇이고, 장편소설은 무엇인가? 아니 3D와 스마트폰 시대에 소설은 무엇인가? 원점에서 다시 물어야 할 질문들이다”(261면)라고 결론지을 때는 허탈한 느낌마저 든다.
장・단편의 장르소설의 부상은 2000년대 문학이 거둔 중요한 성과였다. 점차 다양해지는 장르문학의 활기는 장편소설의 상대적인 부진과 대비되는 면이 없진 않다. 또한 앞서 거론된 이장욱과 윤성희 소설처럼 장르문학의 수준작들은 장편소설과 장르소설의 경계에 대한 미학적 질문을 내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르문학의 발전이 장편소설의 ‘결여’나 ‘불가능’의 댓가로 이뤄지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김영찬이 장르문학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 그러하듯 김형중이 ‘무한소설’ 혹은 ‘퀼트소설’이라는 새 장르의 초입에 김연수(金衍洙)의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2007)을 포함시킨 것(259면)도 그런 발상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이 역사적 혹은 시대적 진실에 대한 총체적 조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장편소설이라기보다 브리꼴라주로, 그리고 ‘모호하고 파편적’인 조각난 현실들이 이어져 있기에 ‘퀼트소설’로 보는 것이다. 이런 분류를 유발한 데는 모호하고 파편화된 세계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내다보이면서 진실 추구의 힘이 떨어지고 예술적 긴장이 이완되는 면도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14) 그렇지만 파편화된 현실들과 그 복잡한 연관을 탐사하는 가운데서도 역사적 진실의 문제를 전면에 내건 작품을 ‘장르’소설로 분류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다.
한국소설에 열린 미래를
앞서 검토한 대로 한국소설의 가능성에 대한 김영찬과 김형중의 회의적인 전망은 상당부분 단절론적인 문학사 인식에서 비롯된다. 카라따니의 개념을 빌려서 말하자면 ‘근대문학’의 끝을 전자는 ‘(광의의) 모더니즘의 종언’에 후자는 ‘리얼리즘의 종언’에 설정하는 차이는 있지만 실제비평에서는 유사한 입장으로 나타난다. 두 종언 ‘이후의 문학’은 서구문학 논의에서 각각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에 해당하지만 양자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큰 흐름 속의 주목할 만한 변화에 가깝기 때문에 두 비평가가 공유하는 바가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단절론적 인식으로는 2010년대 한국소설의 가능성을 실제 이상으로 회의할 수밖에 없을 뿐더러 2000년대 문학의 성취도 균형있게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가령 그들은 모두 장편소설 붐 이후에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논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데, 이런 셈법으로는 2000년대 한국소설의 성적표가 실제보다 훨씬 초라할 수밖에 없다. 2010년대 소설의 논의에서 이런 단절론이란 불필요한 규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들의 단절론은 우리시대에는 장편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의도된 주장을 입증하지는 못해도 어떻게 하면 단절의 위협을 넘어설 수 있을까에 대한 풍부한 암시를 준다. 김영찬은 ‘근대문학’(그리고 그것의 전형적 형식으로서의 장편소설)의 사회적 토대를 “사회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로 제시했는데, ‘사회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는’이라는 모호한 어구를 동원해가며 이것이 상실되면 근대문학도 끝나고 장편소설도 불가능해진다는 식의 논의는 지나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한 사회를 연결해주는 최소한의 ‘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 없이 장편다운 장편을 기대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비평가라면 이런 네트워크를 지키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마땅하다.
김형중의 논의에서 암시를 받는 것은 시대적 진실 추구의 문제와 장편소설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근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전문화가 심화됨에 따라 과학적·실증적 인식은 높아지지만 세계가 점점 더 ‘모호하고 파편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사실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근대세계의 핵심적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사실적 인식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장편소설은 태동할 때부터, 가령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떼부터, 근대세계의 핵심적 진실의 추구를 주된 예술적 동력으로 삼아왔고 19세기의 리얼리즘을 거치면서 사실주의적 인식을 우군으로 삼아 그런 진실의 추구를 계속해왔다. 과학기술은 놀랍도록 발전했지만 전문화와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지배력이 한층 강화된 결과 한 사회의 역사든 한 개인의 삶이든 극심하게 파편화된 현대에 이르러서도 근대세계의 핵심적 진실을 포착하려는 장편소설의 노력은 이어져왔다.15)
역으로 말하면 그 문제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을 놓는 순간 좋은 장편소설 쓰기가 어렵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이 말을 장편소설이 그런 진실 추구를 통해 올바른 답을 찾고 그 답을 통해서 ‘사회의 총체적 조망’ 같은 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런 진실 추구의 결과로서 정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장편소설로서의 매력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백낙청(白樂晴)의 용어를 빌리면, 장편소설이야말로 ‘정답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최고의 문학형식이다.16) 온갖 종류의 ‘정답주의’가 오늘날 장편 쓰기를 힘들게 만들고 그 매력을 앗아가지만 ‘정답주의’의 최신판이자 완결판은 시대적 진실/진리 같은 것은 없다는 예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정답은 시대현실과 개인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진실이 무엇인지 아예 묻지도 않게 하기 때문이다.
시대현실의 문제를 언급하면 거대담론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여기서 장편소설이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들의 구체적 삶이 먼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유일무이한 단독자로서 그 개인의 삶, 그 개인이 타자와 맺는 관계, 주위의 자연이나 사물과 맺는 관계의 진실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밀고나가면 그것이 시대현실에 대한 물음에 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출발점은 한 개인의 삶의 진실을 다루는 ‘작은 이야기’지만 어느덧 그것은 세계와 시대현실의 ‘큰 이야기’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장편소설은 역사와 잠시 별거할 수는 있어도 아주 이혼할 수는 없는 형식이며, 이 형식에 문학의 역사적・인식론적 기능이 크게 의존한다.
가령 신경숙의 외딴 방(1995)이 1970~80년대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웬만한 역사・사회과학 서적보다 더 유용할 뿐더러 그런 서적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그 시대 특유의 면모와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자가 그 시대의 ‘큰 이야기’를 먼저 염두에 두고 ‘작은 이야기’를 구성하고 배치하는 식으로 글을 썼다면 이런 장편이 가능했을까? 글쓰기에 대한 성찰과 한 개인의 삶의 진실을 묻는 물음을 원동력으로 삼아 밀고나간 결과 ‘작은 이야기들’이 어느새 시대의 핵심적인 진실을 묻는 질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비록 『외딴 방』의 경우보다 덜하지만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17) 단절론적 입장에 빠지지 않는다면 스타일과 화법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장편이 공유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구체적인 개인들의 진실된 관계를 추구하는 열정이 시대의 성격 자체를 문제삼는 장편소설 특유의 면모를 공유하고 있기에 두 작품 모두 우리시대의 장편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외에도 여기서 논하지는 못하나 공선옥 같은 중견작가들과 황정은(黃貞殷)과 김애란(金愛爛) 같은 신예작가들의 장편도 만만찮은 성취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다 장르소설의 성공작들과 다수의 빼어난 단편들을 보태면 한국소설의 현재 자산은 한결 넉넉해진다. 2010년대에는 단편과 장편이 적절히 어우러지면서 시대의 리듬과 활력이 배어든 창의적인 소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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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찬 「끝에서 바라본 한국근대문학」, 『비평의 우울』, 문예중앙 2011, 33면. 앞으로 이 글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2) 필자는 카라따니의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프레임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이 “‘분단체제극복’으로서의 통일을 비롯한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가 남아 있는 우리의 상황에는 명백히 맞지 않는다. 우리 문학을 ‘근대적’ 문학과 ‘탈근대적’ 문학이라는 두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양자는 카라따니가 설정한 것과는 성격이 다르거니와 그렇게 단절적일 수도 없다. 많은 뛰어난 작품들이 양자의 경계에 놓이거나 양자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이다”고 논평한 바 있다. 졸고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47면.
3)97년체제론은 한반도 차원의 중대한 변화를 논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도 지적해둬야 한다. 즉 97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차원에서 획기적인 6・15시대가 열렸지만, 이명박정부가 들어서고 그 성취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면서 천안함사건 이후 위기국면을 맞이했으며 그것이 87년체제의 말기국면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할 수 없다. 여기서 ‘6・15시대’를 거론한다고 해서 ‘6・15시대의 문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필자는 ‘6・15시대의 문학’이라는 발상을 제시했다가(졸고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읽기」,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1절 ‘새로운 현실과 시기구분의 문제’) 자기비판을 통해 입장을 수정했는데(졸고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 3절 ‘문학과 시대적 과제’), 그후에도 평자들이 필자를 호명하며 ‘6・15시대의 문학’을 비판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김영찬, 앞의 글 17면; 오창은 「분단 디아스포라와 민족문학」, 『실천문학』 2010년 겨울호 77면 참조.
4) 권여선・박민규 대담 중 김영찬의 발언, 「장인의 정신으로 모험가의 에너지로」, 『문예중앙』 2011년 봄호 506면.
5) 김형중 「장편소설의 적: 최근 장편소설에 관한 단상들」,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253면. 앞으로 이 글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6) 김영찬 「문학 뒤에 오는 것」, 『비평의 우울』, 35면. 앞으로 이 글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7) 김형중은 허윤진(許允溍)의 글에서 특정 대목을 인용한 후에 “장편소설의 르네상스는 사실에 있어서는 출판자본의 요구에 부응했던 것이지 한국문학의 창조적 활성화에 이바지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허윤진의 진단”(251~52면)이라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에는 자신의 진단도 실린 듯하다. 허윤진 「신뢰와 영원: 한국 장편소설의 가능성」, 『자음과모음』 2010년 겨울호 862면 참조.
8)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새로운 남녀관계에 초점을 맞춰 소설의 정치성을 논한 졸고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황정은 김사과 박민규의 사랑이야기」,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참조.
9) 김영찬 「한국소설의 장르문학적 상상력」, 『비평의 우울』, 55면.
10) “어쩌라는 걸까?//그런데 요는, 그런 은하가 또 천억개 정도 모여 있다는 거야. 이 우주에는 말이지. 어때,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뭐가? 지구 같은 거 말이야… 거기서 어떻게 살든… 아니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 걸까? 이 지구나… 말하자면… 우리 같은 거 말이야//정말… 어쩌라는 걸까?” 박민규 『핑퐁』, 창비 2006, 169~70면.
11)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특집 ‘21세기 장편소설의 현주소’에 김형중의 글과 함께 실린 임경규의 「역사의 종언 그리고 지시대상체의 귀환: 21세기 미국소설과 파국의 내러티브」는 김형중 글의 논지와 대조적이다. 2000년 이후 로스, 드릴로, 매카시 등의 미국 장편소설이 우리시대의 핵심 쟁점에 대한 소설적 탐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이 글의 전체적인 논지에는 동감하지만, 필자는 현재 미국문학의 활력의 상당부분은 소수자문학으로 옮겨갔다고 판단한다. 이와 관련된 논의로는 졸고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참조.
12) 미국문학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Moby-Dick, 1851)은 ‘19세기 사실주의’라는 좁은 범주로는 도저히 불감당이지만 다른 한편 그 빼어난 사실주의를 빼놓고는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세계는 모더니즘 소설의 경우 못지않게 모호하고 파편화되어 있지만, 그 예술적 힘은 그런 현실세계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한편 근대세계 체제의 어두운 진실과 불가사의한 지점들을 온갖 서사양식을 동원하여 끝까지 추적하는 데서 나온다. 이 소설의 양식에 대한 평자들의 견해는 사실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지만 그것이 셰익스피어 문학의 풍부한 유산과 미국적 삶에 대한 날카로운 경험적 감각 및 깊이있는 성찰이 결합된 산물이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한다. 우리시대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매카시의 『피의 자오선』(Blood Meridian, 1985)은 멜빌의 『모비 딕』(그리고 셰익스피어 문학)과 미국 모더니즘의 대표작가인 포크너의 문학적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Harold Bloom, Ed., Cormac McCarthy: Bloom’s Modern Critical Views, New Edition, New York: Bloom’s Literary Criticism 2009, 1~8면 참조. 요컨대 미국 장편소설의 역사에서는 김형중식의 ‘단절’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3) ‘본격문학 대 장르문학’의 대비보다 ‘총체적 장르를 지향하는 장편소설과 장르화된 장편소설’의 대비가 한결 생산적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33면 참조.
14) ‘역사소설’ 장르에 좀더 가까운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2008)도 비슷한 한계를 안고 있다. 신형철은 장편의 본질을 ‘윤리학적 상상력’에서 찾고 그에 입각하여 이 소설을 2000년대 최고의 장편 가운데 하나로 다룬 바 있는데, 그의 글 가운데서는 드물게 공감하기 힘든 논의라고 생각된다. 신형철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 장편소설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단상」, 『문학동네』 2010년 봄호 참조.
15) 임경규가 ‘역사의 종언’ 담론과 관련된 21세기 미국소설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 “처음부터 소설에 부여된 사회적 과제가 ‘진리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280면)을 지적하는 것도 장편소설의 본질에 대한 지적에 다름아니다. 임경규, 앞의 글 참조.
16)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특징을 ‘정답주의’에 대한 경계로 보고 그의 리얼리즘을 구성하는 요목들을 치밀하게 논한 글로는 류준필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현재성과 문제성」,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참조.
17) 이 작품에 대한 논의로는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35~45면 및 졸고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409~10면 참조. 필자가 반전을 내장한 ‘Writer’s Cut’을 언급하지 않은 것의 문제점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만큼 높이 평가하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