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오늘, 세계문학을 다시 읽다
괴테가 예감한 근대의 이중과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파우스트』 2부를 중심으로
임홍배 林洪培
서울대 독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주요 논문으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타난 사회의식」 「루카치의 괴테 수용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이, 역서로 『젊은 베르터의 고뇌』 『루카치 미학』(공역)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이 있음. limhb059@snu.ac.kr
1. 머리말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살던 시대의 독일은 전근대적 봉건체제가 온존하는 가운데 근대화의 초입에 들어선 역사적 과도기를 맞고 있었다. 인구 1퍼센트의 귀족층이 국토의 대부분을 분할 소유한 채 조세면제 등의 독점적 특권을 누리며 지배층으로 군림했고, 그들을 먹여살리는 국민의 40퍼센트는 자기 땅을 갖지 못한 농노상태로 평생 노예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국부를 뒷받침할 산업기반도 취약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세의 낡은 지붕 아래 300여개의 군소 영방(領邦)국가가 난립하는 혼란상을 면치 못했다. 이런 시대를 산 괴테의 문학을 두고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논한다는 것은 일견 시대착오처럼 보인다. 근대의 이중과제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압박을 감당해내면서도 국가와 지역 및 지구적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여 근대극복의 가능성을 탐색하자는 취지에서 제기된 것이라면,1) 괴테 당대의 독일은 봉건성의 극복과 근대화 자체를 절박한 시대적 과제로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이 19세기 후반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열강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비롯한 근대적 가치의 핵심은 부국강병론에 파묻혀서 실종되었고 그 파국적 결과가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이처럼 맹목적 근대주의가 초래한 독일사의 참화는 근대화와 근대극복이 결코 단계적 과제가 아님은 물론이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 역시 ‘두개의 동시적 과제들’이 아니라 ‘양면적 성격을 지닌 단일과제’2)임을 되새기게 해준다. 그런 맥락에서 괴테의 문학은 독일의 봉건적 낙후성을 직시하고 근대화의 시대적 과제를 수용하면서도 결코 근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근대세계의 복합적 모순을 동시에 천착했다는 점에서 이중과제론과 연결될 법한 맹아적 단서를 함축한다. 예컨대 괴테의 출세작 『젊은 베르터의 고뇌』(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1774)는 전인적 자아실현을 꿈꾸는 젊은이를 자살로 몰아가는 봉건적 질곡의 시대상을 증언하는 동시에, 단지 봉건성의 극복에만 한정되지 않는 인간해방의 열망을 보여준다. 베르터의 비극적 좌절과 더불어 미완의 과제로 이월되는 근대적 이행의 문제는 중년기의 대표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 1796, 이하 『수업시대』)에서 핵심주제로 부상한다. 서구문학사에서 교양소설의 전범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에서 괴테는 개개인의 온전한 인간적 완성과 평등한 사회공동체의 실현이 과연 어떻게 합치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제와 씨름한다. 이 소설의 집필시기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괴테의 역사관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는데, 다음 발언에서 보듯이 괴테는 폭력혁명에는 단호히 반대하고 점진적 개혁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프랑스혁명의 벗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혁명의 만행에 소름이 끼쳤고 매일같이 격분했으며, 당시에는 아직 혁명의 유익한 결과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는 프랑스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필연의 결과로 일어난 것과 비슷한 광경을 독일인들이 인위적으로 도모하려는 것을 보고 모른 체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내가 지배자들의 전횡을 두둔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떠한 대혁명도 백성의 잘못이 아니라 위정자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그 어떤 폭력적 전복도 증오합니다. 그러면 좋은 것을 얻는 만큼이나 파괴하게 마련이니까요. (…) 우리에게 미래의 전망을 틔워줄 그런 개선이라면 어떤 것이든 대환영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폭력적인 것, 단숨에 뛰어넘으려는 것은 무엇이든 내 영혼에 거슬립니다. 그런 것은 자연의 이치에 합당치 않기 때문이지요.3) (강조는 원문에 따름)
프랑스에서 혁명과 구체제의 붕괴가 역사적 필연이었다면 독일에서는 그럴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을뿐더러 역사에서 폭력을 수반하는 급격한 도약은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의 순리’란 단순히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신분차별과 온갖 악습을 정당화하는 실정법에 맞서 모든 인간의 타고난 존엄을 ‘천부인권’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자연법(Naturrecht)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발상이라는 것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런 복합적 맥락에서 괴테는 일관되게 중도적 개혁노선을 견지했지만 그 ‘중도’가 신구의 적당한 절충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괴테 특유의 고전적 성취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본고에서는 괴테의 그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면서 『수업시대』와 『파우스트』(Faust, 1831) 2부를 중심으로 괴테가 근대적 이행의 과제에 수반되는 복합적 모순을 어떻게 천착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교양소설과 근대적 이행의 문제
발자끄(H. Balzac)의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 1843)에는 고위귀족과 국왕까지도 우롱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언론의 활극상이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데, 이를 지켜보는 빠리 주재 독일공사가 독일에는 이런 신문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30년대까지도 독일에는 여론을 주도할 공론장이 부재했다는 후진성을 꼬집는 대목이다. 『수업시대』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주인공 빌헬름이 평범한 시민의 삶에서 절감하는 열패감은 독일에서는 공론장이 여전히 궁정의 밀실에 갇혀 시민계급에겐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는 착잡한 현실인식의 소산이다. 빌헬름이 보기에 귀족은 ‘공인’의 지위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시민(Bürger, 중산층 시민)으로 태어난 자는 협소한 전문직능에 매몰되어, 타고난 소양을 조화롭게 완성하여 ‘보편적 교양’에 도달할 가능성이 가로막혀 있다. 그러기에 시민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인격적 ‘존재’의 척도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갖고 있는가’ 하는 ‘소유’의 측면에서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4) 빌헬름은 그런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고 더 넓은 사회에서 공인으로 활동하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구를 느끼며, 바로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교양의 이상이다. 공인으로서의 활동을 온전한 인간적 도야의 전제조건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적 활동은 귀족층의 전유물이므로 귀족과 평민의 신분차별이 극복되지 않는 한 전인적 교양의 욕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빌헬름은 신분차별이 귀족의 오만이나 시민의 순종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올바르게 인식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며 스스로의 한계를 토로한다. 이것은 당연히 개인적 한계이기 전에 시민혁명을 넘볼 처지가 못되는 독일 시민계급의 역사적 한계이자, 폭력혁명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려는 작가의 생각도 작용한 결과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품에는 귀족과 평민의 충돌 가능성을 가상 씨나리오처럼 제시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가업을 승계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유랑극단의 배우로 떠돌아다니는 빌헬름이 어느 백작부인과 잠시 사랑에 빠져서 부인의 남편을 광신자로 개종시키는 기이한 사건이 그것이다. 빌헬름과 백작부인이 피차 연정을 품고 있음을 눈치챈 남작부인은 백작이 멀리 출장한 사이에 빌헬름에게 백작의 잠옷을 입혀서 대역을 맡기는 해괴한 음모를 꾸미는데, 침실에서 백작부인을 기다리는 빌헬름은 예정에 없이 일찍 귀가한 백작과 맞닥뜨린다. 그런데 백작은 거울에 비친 빌헬름의 모습을 자신의 분신이라 착각하며, 이를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죽음의 전조로 받아들이는 망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속세를 등지고 광적인 신앙인이 된다. 작품 말미에 다시 등장하는 백작은 전재산을 헌납하여 새로운 교단의 개척에 열을 올리고 ‘순교’의 각오까지 하면서 ‘성자’의 반열에 오르기를 꿈꾸며, 오랜만에 재회한 빌헬름을 엉뚱하게도 ‘영국 후작’이라고 오인한다.
이 짤막한 에피소드는 허울뿐인 무능한 귀족층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되는 불가역의 시대적 변화를 압축해서 보여주거니와, 백작의 침실이 어전회의 장소를 겸했던 루이 14세의 침실을 연상케 하는 환유라고 보면 봉건적 구체제의 몰락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필연임을 시사하며, 나아가서 평범한 시민계급 출신의 빌헬름을 영국 후작으로 올려다보는 것도 장차 도래할 새 시대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환기하는 바 있다.5) 다른 한편 백작의 광신적 몰입은 괴테 다음 세대의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계산적 이성이 판치는 근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세를 황금시대로 예찬했던 시대착오적 퇴행을 예견하는 측면도 있는데, 그런 식으로 근대주의에 대한 낭만적 저항이 복고적 퇴행으로 귀결되는 양상도 독일식 근대이행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수업시대』에서 근대적 이행의 과제는 빌헬름의 교육자 역할을 하는 ‘탑의 결사’라는 비밀단체와 그 중심에 있는 ‘로타리오’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된다. 로타리오는 비록 귀족이지만 지식의 증대와 시대의 진보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두루 공유해야 한다는 진취적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자영농에겐 세금을 부과하면서 귀족의 영지에는 면세특권을 주는 것은 부당하며, 그런 특권을 폐지해야 귀족도 소유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제대로 공민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또한 영지 내의 농민에게도 영주의 허가 없이 자유결혼을 허용해야 그들이 더 행복해질 것이고, 그래야 국가도 더 훌륭한 국민을 얻을 테니 국익에도 보탬이 된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공리주의적 평등 지향은 시민권이 확립된 후대의 관점에서 보면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온건한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일찍이 쉴러(F. Schiller)가 로타리오를 가리켜 ‘쌍뀔로뜨적’이라 했을 만큼 괴테 당대에는 실현가망이 희박한 급진적 발상이었다. 진취적인 계몽주의자들의 모임인 ‘탑의 결사’가 비밀리에 활동하는 것도 (괴테가 모델로 삼았던 프리메이슨의 활동방식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지만) 그처럼 온건한 사회개혁의 구상조차도 거의 반향을 얻지 못한 독일적 후진성을 반증한다. 아울러 독일에서의 근대적 개혁은 19세기 독일사가 입증하듯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시민계급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위로부터의 개혁만이 현실적 대안임을 확인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한편 로타리오의 개혁노선이 현실에서는 이미 부르주아적 전망에 흡수되고 있다는 것도 유의할 대목이다. 당시 귀족의 영지 가운데 왕이 하사한 세습봉토는 자유매매가 금지되었다. 로타리오는 귀족의 특권을 뒷받침해온 그런 봉토가 오히려 부의 증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토지매매의 자유화를 주장하는데, 실제로 베르너라는 투기꾼과 합작하여 차압당한 농지를 사들여서 되파는 토지투기 사업에 뛰어든다. 빌헬름의 여동생과 결혼한 베르너는 빌헬름이 상속으로 물려받은 재산을 몇배로 불려줄 만큼 수완 좋은 사업가지만 복식부기(複式簿記)를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여기는6) 그는 인척지간인 빌헬름이 보기에도 사람을 ‘상품’과 ‘투자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철저한 자본가적 속물이자 ‘열심히 일만 하는 우울증 환자’로 묘사된다. 괴테 다음 시대에 승승장구하는 부르주아지의 전형을 선취하고 있는 베르너의 일그러진 인간상은 그의 사업 파트너로 변신하는 로타리오의 개혁노선이 장차 현실화되어 도래할 자본의 시대가 과연 진정한 인간적 가치 및 행복과 양립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신분을 뛰어넘는 결혼’은 그런 의문과 결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빌헬름과 결혼하는 나탈리에는 로타리오의 여동생으로 엄연히 귀족신분이다. 당시 평민과 결혼하는 귀족은 남녀 불문하고 상속권이 박탈되었던 현실적 제약을 감안하면 다분히 추상적 담론의 수준에 머무는 사회개혁 논의보다도 이런 결혼이야말로 오히려 더 급진적인 사회계약의 실험이라 할 만하다. 나탈리에의 성격에서 주목할 점은 어릴 적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전으로는 적선을 베풀지 않고 대신 헌옷을 수선해서 주는 식으로 ‘화폐’라는 개념을 모르고 자랐으며, 그런 선행을 삶의 유일한 기쁨으로 알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빌헬름과 나탈리에의 결합에서 귀족적 특권의 자발적 포기보다 더 무게가 실리는 전언은, 참된 인간적 행복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가치를 상품가격으로 환산하는 화폐의 교환가치를 초극하는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부의 증식만을 유일한 행복으로 아는 베르너 류(類)의 물신주의에 대척되는 나탈리에의 ‘아름다운 영혼’은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관계를 이윤동기로 환원해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극복을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인간상의 본보기라 할 수 있으며, 빌헬름이 보편적 교양의 요건이라 여기는 공인의 역할만으로는 담보되지 않을 전인적 덕목을 체현하고 있다.
빌헬름이 선망하는 공인의 지위가 온전한 인간됨과는 딴판으로 어긋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표본적 사례가 다름 아닌 로타리오의 어지러운 애정행각이다. 그는 시대의 추이를 훤히 꿰뚫어보는 진취적 개혁사상의 소유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작인의 딸, 미천한 연극배우, 귀족부인 등과 애정행각을 벌인 끝에 나탈리에 못지않게 빼어난 성품의 소유자인 테레제라는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마침내 결혼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한때 사귀던 귀부인이 하필이면 테레제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결혼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며, 그러는 중에도 또다른 유부녀와 정분이 나서 그 남편과의 결투로 부상을 입기까지 한다. 로타리오의 이 위태로운 곡예는 비록 머리로는 진보적 시대정신을 깨쳤지만 타고난 체질만큼은 여전히 구체제의 귀족티를 조금도 벗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마음속이 광석 찌꺼기로 가득 차 있다면 좋은 철을 생산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내가 나 자신과 합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농지를 정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수업시대』 402면)라는 빌헬름의 자문은 누구보다 로타리오에 적중하는 말이다. 한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독립전쟁에 미국 편으로 참전했다가 그로 인해 큰 빚을 지고 있는 로타리오의 개인적 처지는, 프랑스 부르봉왕조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느라 떠안은 막대한 부채의 해결을 호소하고자 소집했던 삼부회의가 결국 왕조를 무너뜨리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겹쳐져 미묘한 상징성을 갖는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로타리오의 위태로운 귀족적 모험주의는 굳이 자진해서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귀족신분과 구체제의 자멸을 불러올 태생적 요인인 셈이다. 하지만 나탈리에가 빌헬름에게 청혼함으로써 그를 구원하는 것과는 또다른 양상으로 로타리오는 테레제에 의해 구제된다. 테레제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밝혀지면서 결국 테레제와의 결혼이 성사되는 것이다. 테레제의 아버지는 부인이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에 부인의 허락을 얻어 집안 하녀를 대리모로 삼아 테레제를 얻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부인은 공공연히 문란한 생활을 하면서 남편에게 수모를 주는가 하면 테레제 몫의 유산마저 독차지하는 유언장을 남편에게서 받아냈고, 그로 인해 적빈의 처지가 된 테레제는 부모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반면교사로 삼아 굳건한 여성으로 성장한 것이다. 나탈리에와 더불어 그녀가 ‘아마존’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두 여성이 남성(주의)적 편벽과 결함 그리고 인습적인 여성상까지 모두 넘어서는 인간적 완성의 경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도 『수업시대』에서 기억함직한 대목이다. 『파우스트』 2부의 결어인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우리를 이끌어올린다”는 말은 두 여성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테레제의 출생내력이 반전을 거듭하면서 밝혀지는 과정은 루카치가 발자끄의 리얼리즘 소설에서 만개하는 서사양식이라 지목했던 ‘극적’ 요소에 해당된다.7) 그런데 괴테의 교양소설에서 발자끄의 사회소설로 이행하는 과정을 단지 서사적 진화의 관점으로만 보기에는 양자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잃어버린 환상』에서 두드러진 극적 반전은 벼락출세를 노리는 인물들 사이의 냉혹한 경쟁에서 어김없이 부와 권력의 논리에 좌우되며, 그런 만큼은 어느정도 예측가능한 면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러한 무한경쟁은 결코 충족을 모르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악마적 역동성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에 마치 거대한 도박판에 휘말리는 듯한 예측불허의 항구적 불안정성이 끝없이 증폭되며, 그러한 혼돈의 극적 반전으로 이어지는 플롯이 일체의 비판적 성찰을 무효화하면서 흡인하는 양상을 보인다.8) 예컨대 주인공 뤼씨앙은 오로지 출세를 위해 한때의 열렬한 자유주의자에서 ‘진성’ 왕당파로 하루아침에 변신하지만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그런가 하면 흡사 『수업시대』에 나오는 ‘탑의 결사’를 떠올리게 하는 급진적 공화주의자 그룹 다르떼즈 일행이 피력하는 고답적 담론은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작품 속의 온갖 추문의 써스펜스에 비하면 차라리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수업시대』의 극적 요소는 대부분 등장인물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자신과 주변인물들의 과거사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과거와 현재를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하는 이러한 기억술에 힘입어 자신과 세상을 부단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내면적 성찰의 공간이 생겨나며, 다양한 세상경험을 발자끄 소설에서의 환멸이 아닌 인간적 성숙의 과정으로 소화해낼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수업시대』가 교양소설이면서도 후대의 사회소설에서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사회적 총체성을 구현하는 비결은 그처럼 서로 환치될 수 없는 다양한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 서로를 되비추며 어우러져서 개인적 시야를 넘어 사회 전체에 대한 입체적 조망을 가능하게 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한편 온갖 선진적 교육이념을 설파하는 ‘탑의 결사’가 모든 인물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서 교육의 교재로 삼는 계몽의 방식은 근대적 계몽의 훈육이 체계적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역전될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이른바 ‘계몽의 변증법’을 예견한 것도 괴테의 탁견이다.9) 발자끄 소설에서 다르떼즈 일행은 ‘독일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범신론자’ 괴테에 대항하여 ‘정밀한 분석과학’을 주장하기도 하지만,10)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괴테의 범신론은 시대착오적 신정(神政)복귀론이 아니라 인간사와 자연사를 아울러 천지간 만물의 유기적 상관성, 개체와 전체 사이의 총체적인 연관성을 강조하는 발상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미시적인 개인사와 거시적 시대사를 조밀하게 결합시켜 생동하는 인간상으로 조형해내는 괴테적 상상력은 바로 그런 사유에 힘입은 것이다. 괴테적 서사가 동일한 형태로 반복될 수는 없겠지만, 원자화된 개인을 관리감독하는 고도의 억압체계가 감각적 쇄말주의를 부추기는 지금 시대야말로 결코 ‘정밀한 분석과학’으로 대체될 수 없는 그런 창작태도가 절실히 요청되는 것도 사실이다.
3. 파우스트의 백야
『수업시대』 결말부에는 ‘탑의 결사’가 세계 도처에 인력을 분산시켜 만약의 ‘혁명’에 대비하여 안전을 도모하자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즘은 재산을 한군데로 몰아 가지고 있거나 돈을 한곳에만 투자하는 것은 결코 능사가 아닐세. 그렇다고 재산을 여기저기 분산시켜 관리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도를 생각해냈다네. 그러니까 우리의 옛날의 탑으로부터 한 단체가 세상으로 나가서 세계 각처에 퍼지고 또 그 단체에 세계 각지의 누구나가 가입할 수 있게 하자는 거야.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어느 한 나라의 혁명이 누군가의 재산을 송두리째 강탈할 경우에 대비하여 피차간에 우리의 생계를 보험에 들어두자는 것이지. 나는 이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의 친구 로타리오씨가 그곳에 머물던 동안에 개척해놓은 좋은 환경을 이용할 생각이네.(『수업시대』 812~13면)
이런 취지에서 ‘세계동맹’을 결성하자는 이들의 구상은 작중인물의 의도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를 추동하는 자본의 세계화를 암시한다. 『수업시대』에서는 아직 모호한 형태로 제시된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가 결국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성립으로 귀결될 것임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바로 『파우스트』 2부의 역사적 비전이다. 1부 초입에서 이미 파우스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경구절을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새롭게 번역함으로써 천지창조의 신적 권능을 참칭하며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재창조하겠다는 포부를 피력하거니와 “나 자신의 자아를 전 인류의 자아로 확대하려”(1774행)11)는 그의 야심은 이 세계사적 개인의 운명이 곧 인류사적 드라마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
2부 1막에는 부(富)의 신 플루토스로 분장한 파우스트가 목양신(牧羊神) 파운으로 분장한 황제를 ‘피처럼 끓어오르며 솟구치는 황금의 불’로 태워 죽이고 황제의 부귀영화를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드는 ‘가장무도회’가 펼쳐진다. 메피스토가 연출하는 이 환상극은 결코 악마의 마법이 아니라 구시대의 낡은 권력을 무너뜨리고 권좌에 오르는 현대의 새로운 군주가 다름 아닌 자본권력임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이다. 여기서 ‘유행’ ‘시인’ ‘지혜’ ‘희망’ ‘두려움’ 등이 가면을 쓰고 배역으로 등장하는 알레고리적 기호들의 난무(亂舞)는 자본의 위력에 휩쓸려가는 모든 가치의 몰락과 무정부상태를 암시한다. 그리고 2부 전체의 독특한 구성원리로 신화와 현실, 고대 그리스와 현대의 유럽, 지상과 지하, 심산유곡과 세계의 대양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겹겹이 뒤엉키는 시공간의 압축 역시 고정된 전통적 세계를 일거에 허물어뜨리고 지리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본주의의 지구적 확산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우스트가 “자본의 지구적 야망을 보여주는 부동의 원형”12)이라는 것은 폭압적 자본가 겸 식민지 정복자로 등장하는 파우스트의 면모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2부 후반부에서 파우스트는 해안의 광대한 늪지대를 육지로 바꾸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항구를 건설하여 해상진출을 통해 부의 축적을 시도하는데, 현장 지휘관으로 앞장서는 메피스토는 단 두척의 배로 출항하여 여러 이국땅에서 생산된 다채로운 산물을 가득 싣고 스무척의 거대한 선단으로 귀항한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바다는 정신도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니”(11177행) 막대한 재화를 어떻게 긁어모았는지 그 수단은 따질 필요도 없으며 ‘힘이 있으면 권리도 있는 법’이니 힘이 곧 정의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그뿐 아니라 ‘전쟁과 무역, 해적질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데, ‘삼위일체’라는 키워드가 암시하듯 이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과 수탈을 ‘황량한 해안의 보기 흉한 지역들’로 표상되는 야만적 미개지에 대한 서구적 문명화의 소명으로 미화하는 궤변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러한 식민지 수탈을 통해 ‘온 세계를 품안에 거머쥐는’ 파우스트는 자본의 세계화를 통해 구축되는 새로운 세계제국의 주인인 셈이다.
파우스트의 간척사업은 비록 백성을 위해 살기 좋은 땅을 마련해주겠다는 거창한 명분을 앞세우지만 정작 사업이 추진되는 구체적 실상은 인명의 희생도 불사하는 가혹한 노동착취에 기반한 자본축적과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다. 간척사업을 지켜보는 필레몬과 바우키스라는 노부부의 증언이 그 점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사람을 피의 제물로 바친 것이 틀림없어요.
밤마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렸거든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바다 쪽으로 흘러가면
다음날 아침이면 운하 하나가 생겨났지요.(11127~30행)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 초고속으로 추진되는 이 공사를 ‘인간정신의 걸작품’이라 여기는 파우스트는 노부부가 사는 작은 동산마저도 차지하지 못해 안달한다. “내 눈앞의 제국은 무한히 넓은데”(11153행) 그 동산의 보리수 몇그루가 “나의 세계소유를 망치고 있다”(11226행)며 분통을 터트리는 파우스트의 끝 모를 탐욕은 자본의 포식성에는 그 어떤 한계도 없음을 보여준다. 결국 파우스트의 욕망충족을 위해 메피스토는 노부부의 오두막과 저항하는 노부부까지도 함께 불태워버린다. 개발지상주의에 희생된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에 이어서 여인네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근심’이라는 알레고리는 파우스트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일단 내 수중에 들어온 자에겐
온 세상이 쓸모없게 되지요.
영원한 어둠이 드리워서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고,
밖을 향한 감각은 온전해도
내면에는 암흑이 들어앉지요.
온갖 보화를 차지하고도
진정 자기 것이 아니지요.
행복도 불행도 변덕스러운 환상일 뿐이니
풍요 속에서도 굶주립니다.(11452~61행)
영혼이 암흑에 갇혀 있는 터에 온 세상을 다 가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결국 아무리 부강해도 마음의 궁핍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히 넓은 제국을 소유하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파우스트는 당연히 이러한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며, 그런 파우스트에게 ‘근심’이 “인간들은 평생 눈먼 존재들이니/그런즉 파우스트여, 그대도 결국 장님이 되리라!”(11497~98행)고 저주를 내리자 눈이 머는 파우스트는 간척사업의 완공을 다그치며 이렇게 외친다.
(눈이 멀어서) 밤이 점점 깊어가는 듯하구나.
하지만 나의 내면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을 이제 서둘러 완성해야겠다.
주인의 말,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희 졸개들아! 한놈도 빠짐없이!
내가 대담하게 구상한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게 해다오.
연장을 잡아라, 삽과 괭이를 놀려라!
맡은 일은 즉시 해치워야 한다.
엄격한 규칙대로 열심히 일하면
더없이 좋은 보수를 받으리라.
이 위대한 과업을 완성하는 데는
수천의 수족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족하리라.(11499~ 510행)
인명을 제물로 바치는 폭압적 착취와 더불어 이 장면은 노동자의 고혈을 짜내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13)을 보여주는 축소판이자 일사불란한 노동과정을 “수천의 수족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표상하는 점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동화된 기계적 생산체계의 지체(“수족”)로 편입되는 현대적 집단노동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없지 않다.14) 눈이 멀었음에도 ‘내면의 밝은 빛’에 현혹되는 정신적 백야(白夜)상태에서 파우스트는 자유와 평등의 지상낙원을 꿈꾼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선 위험에 둘러싸여서도
남녀노소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북적대는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11575~80행)
파우스트의 이 마지막 대사는 훗날 구동독 학계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전거로 곧잘 인용되곤 했는데, 괴테 자신은 쌩시몽이 주창한 범세계적 노동자국가를 비판의 모델로 삼았다. 쌩시몽은 사회를 거대한 공장으로 조직하고 철저히 통제된 집단노동으로 자연을 정복하여 자유와 평등의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초기 사회주의 이념의 선창자였지만, 철저한 산업주의의 세계화가 기독교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종교’라고 설파한 점에서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도래를 예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파우스트식 근대화 기획이야말로 현실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 존속했던 20세기의 지구적 현실에 들어맞는 것도 사실이다. 나아가서 호문쿨루스라는 인조인간까지 만들어내어 폭력적 지배와 전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기술만능의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파우스트』를 21세기의 드라마로 읽을 수 있는 여지도 제공한다(2막 참조).
4. 맺는말
괴테는 이십대 후반부터 바이마르 공국의 부름을 받아 평생 동안 국정의 중책을 맡아 현실정치에 몸담았다. 당시 바이마르가 속해 있던 소공국은 인구 10만의 군단위 규모에 영토 대부분이 산림지대여서 자원이 부족하고 빈궁한 소국이었던 만큼 정치인 괴테는 독일의 낙후성을 누구보다 절감하면서 국부를 증진시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근대화를 선도하던 프랑스나 영국의 사회상을 주시하고 세계사적 동향의 학습에 정진했던 괴테는 급변하는 진보의 시대를 포함해 모든 역사적 경험은 부단히 새로운 관점에 의해 수시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한 바 있다.
우리 시대에는 세계사가 수시로 다시 서술되어야 한다는 데 더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더 많은 사건이 새롭게 밝혀졌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견해들이 나오기 때문이며, 진보하는 시대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지나온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굽어보고 판단할 수 있는 관점들로 인도되기 때문이다.15)
그러면서도 괴테는 당시 유럽의 반주변부인 독일에서 봉건적 낙후성이 온존하는 가운데 근대적 이행의 기운이 공존했던 역사적 과도기의 복합적 발전양상을 단순히 순차적 진화로만 보지 않고 『수업시대』의 로타리오 같은 인물이 온몸으로 보여주듯 그것을 여러 시대의 모순과 갈등이 뒤엉켜 있는 복합체로 파악했다. 괴테가 당대의 선진적 이념들에 주목하면서도 선뜻 동조하지 않고 그 현실적 구현이 과연 사람살이의 실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를 천착하는 방식으로 창작에 임했던 것도 그러한 역사적 균형감각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죽기 한해 전에 탈고한 『파우스트』 최종본을 생시에 출간하지 못하게 봉인했던 괴테는 ‘혼란스러운 상거래와 학설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시대정신은 결코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봉인의 이유를 밝혔다. 그처럼 근대세계를 견인하는 시대정신의 대세에 거슬러서 탄생한 이 작품을 일찍이 헤겔은 ‘세계정신’이 확고한 자기의식에 도달하고 자유를 향해 발전해가는 ‘인류사의 변증법적 완성’의 드라마로 상찬했지만,16) 그런 세계사적 오독과 달리 작품의 실상은 서구중심주의와 식민지배, 노동착취에 기반한 폭압적 근대화와 기술적 근대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대적 발전의 가속화를 균질적 총체가 아니라 그런 복합적 모순이 균열을 일으키며 인간다운 삶을 위협하는 위기의 중첩과 가속화로 통찰했다는 점에서 『파우스트』의 진정한 현대성을 엿볼 수 있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성격을 가리켜 ‘최고의 지식과 온갖 재화에도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전방위로 돌진하지만 결국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인 근대인의 본성’17)에 부합한다고 강조한 바 있거니와, 자본의 물신이 지배하는 시대의 대세에 적응하지 않고는 인간다운 삶은커녕 생존조차 힘들어지는 지금의 난세에 이 인류사의 드라마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도 우리가 사는 시대가 여전히 파우스트적 욕망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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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의 이중과제론에 대한 개괄적 설명은 이남주 「이중과제란 무엇인가」, 『이중과제론: 근대극복과 근대적응의 이중과제』, 창비 2009, 11~26면 참조.
2) 백낙청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115면.
3)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8, 53~54면.(1824년 1월 4일 대담. 번역은 부분적으로 수정하였음.)
4)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안삼환 옮김, 민음사 1996, 402면 이하 참조.
5) 바흐찐은 이처럼 아주 사소해 보이는 작은 시공간을 역동적인 역사적 시공간으로 변환시키는 괴테 특유의 상상력을 교양소설의 리얼리즘적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미하일 바흐찐 「교양소설과 리얼리즘 역사 속에서의 그 의미」, 『말의 미학』, 김희숙・박종소 옮김, 길 2006, 287~347면 참조.
6) 당시 소설에서 복식부기는 부르주아적 사업수완의 코드로 통했다. 가령 괴테 다음 세대인 스땅달의 『적과 흑』(1830)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 쥘리앙 쏘렐은 라 몰 후작 댁에 집사로 들어가 후작 자신도 다 꿰지 못하는 재산상태를 복식부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데, 이에 감동한 후작은 친아들에게도 주지 않던 훈장을 조정에서 얻어내어 쏘렐에게 수여한다.
7) 게오르크 루카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리얼리즘 문학의 실제비평』, 반성완 외 옮김, 까치 1987, 76면 참조.
8) 그런 의미에서 모레띠는 발자끄 소설의 플롯이 일체의 내면적 성찰을 배제하는 ‘산문’(provorsa: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뜻)의 완벽한 승리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프랑꼬 모레띠 『세상의 이치: 유럽문화 속의 교양소설』,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 297면 참조.
9) 예컨대 미뇽과 하프 악사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탑의 결사’의 일률적인 계몽의 훈육이 초래한 비극이다. 앞서 언급한 백작이 난데없이 개입하여 이 비극에 가세하는 양상은 일방적 근대주의가 여차하면 복고적 퇴행과 맞물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졸고 「미뇽—낭만적 영혼의 비극적 초상」(안삼환 엮음 『괴테,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여성들』, 서울대출판부 2005, 215~31면) 참조.
10) 발자끄 『잃어버린 환상』, 이철 옮김, 서울대출판부 1999, 243면 참조.
11) 앞으로 작품인용은 다음 판본에 따르되 번역은 다소 수정함. 『파우스트』, 김수용 옮김, 책세상 2006.
12) 프랑꼬 모레띠 『근대의 서사시』,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1, 89면.
13) G. Lukács, Faust-Studien, in: Probleme des Realismus III, Berlin 1965, 568면.
14) 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김호균 옮김, 백의 2000, 369면. “노동수단은 자본의 생산과정에 편입되면 다양한 형태변환을 거치는데, 그 마지막 형태가 기계이거나, 또는 차라리 자동장치(Automat)에 의해, 자동으로 운동하는 동력에 의해, 가동되는 자동화된 기계적 생산체계이다. (…) 이 자동장치는 다수의 기계적이고 지능적인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노동자 자신은 그것의 의식적 지체(肢體)로만 규정될 뿐이다.”(번역은 부분적으로 수정하였음)
15) Goethe, Die Schriften zur Naturwissenschaft I vol. 6, Weimar 1957, 149면.
16) 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III, Frankfurt a. M. 1986, 557면 참조.
17) Goethe, Faust, München 1989, 4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