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억울하지 않을 자유’를 위하여
새봄을 앞두고 있지만 연이어 일어나는 사회적 사건 사고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수위를 보여준다. 전세금 폭등과 주거불안이 심화되는 가운데 신용카드 정보유출과 조류독감, 여수 기름유출 등 일상의 안전을 뒤흔드는 뉴스들이 연일 들려오고 있다. 이 중에서도 무려 1억여건의 고객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은 일상을 마비시키는 혼란과 후유증을 남겼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습과정에서도 정부와 관련기관의 황당하고 무능한 대응방식으로 국민의 분노를 샀다. 대통령과 금융위원장의 정보도 빠져나갔으니 우리 모두 피해자이고 공범자라는 몰상식한 주장에서부터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진다’ ‘소비자도 정보제공에 동의해줬지 않느냐’는 실언이 공적 발언으로 태연하게 표명되었다. 이렇듯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와 생활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거꾸로 국민 각자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태도는 공공적인 책무에 무감각한 집권세력의 집단적인 무의식을 고스란히 노출한 것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상식과 법률적 안전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은 박완서의 소설 「조그만 체험기」(1976)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공권력의 타락과 부패가 횡행하는 세태를 풍자한 이 소설은 우리가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한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주인공은 ‘법 없이도 살’ 우직하고 양심적인 남편이 하루아침에 사기죄로 구치소에 끌려들어가면서 ‘억울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실히 체감한다. 그녀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겁주면서 잇속을 챙기는 공권력의 횡포에 분개하며, ‘억울하지 않을 자유’의 소중함을 되돌아본다. 구치소 면회를 다니면서 자신보다 훨씬 억울하고 가난한 이들의 사연을 듣게 된 그녀는 중산층 소시민으로서의 자기 위치도 새삼 깨닫는다. 그녀가 구치소에서 남편을 쉽게 빼내주겠다는 편법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느낄 ‘고약한 억울함’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는 나의 안위를 넘어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보장된 진짜 억울함”에 대한 공감과 통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기득권의 논리는 억울함과 불평등의 문제를 눈감게 하는 새로운 꿈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흔들어댄다. 카드는 해지하고 재발급받으면 되며, 전세금이 오른다고 절망할 필요 없이 이 기회에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서 도약해보라는 위무와 격려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냉정히 직시하고 해결해야 할 구조적 사회 현안을 묵과해버리는 이러한 위기와 기회의 프레임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지우고 ‘맨땅’에서 장밋빛 꿈을 퍼올리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공공영역을 기득권의 몫으로 사유화하고 그 후유증과 파동을 허황한 공약으로 무마하며 지나가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빠듯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정부는 오히려 기득권세력에 유리한 ‘대박의 꿈’을 퍼뜨리면서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은폐하고 있다. 경제와 복지 분야를 휩쓸고 간 대형공약은 최근 통일대박론에 이르러 가장 문제적인 파장을 형성하고 있다. 경제민주화 공약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통일대박론이 내수확대라는 새로운 경제전략으로 등장한 것이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느닷없는 표어를 쉽게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가능성 있는 실천적 지침을 표방해서가 아니다. 기본적인 내용 없이 흩뿌려지는 대박론은 통일문제뿐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현안과 장기적 설계를 무화하는 위험한 수사다. 더구나 통일대박론이 암암리에 전제하는 북의 급변사태나 흡수통일의 틀은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적 통일의 현실적인 길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무모한 대박의 꿈으로 억울함을 잊게 만드는 사회, 그 꿈이 좌절되면서 억울함을 체념하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찾을 수 없다. 김수영의 시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라는 따가운 자기성찰은 결코 ‘조그마한 일’이 될 수 없는 일상의 평범한 하루하루를 되새겨보게 한다. ‘억울하지 않을 자유’를 갖기 위해서는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실감하고 깨닫는 부조리함이 공적 영역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각자의 실천적 자각과 공적 영역의 제도적인 실천은 ‘당신도 함께 이 기득권에 동참하라’는 은밀한 권유 속에 묻히는 온갖 억울함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 특집에서는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후 지난 일년의 한국사회 흐름과 변화를 점검하고, 진보의 재구성 문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자 한다. 현재의 민주개혁세력이 당면한 실천적 과제를 분석하고 그간 창비에서 가다듬어온 담론들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지 궁구하는 논의를 담았다.
이남주는 기로에 처해 있는 연합정치의 활로를 찾는 데 변혁적 중도주의가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필자는 연합과 혁신을 결합하는 원칙으로서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민주개혁세력의 활로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결집을 도모하는 중요한 지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남한사회의 개혁뿐 아니라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한반도 차원의 변혁이 함께 지향되어야 한다는 이 글의 주요 관점은 현재의 정세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서보혁은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지형을 면밀히 살피면서 이에 관한 진보진영의 성찰과 대안을 모색한다. 인권의 보편성을 한반도의 구체적인 현실에 합리적으로 적용하는 통로로서 변혁적 중도주의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남주의 글과 관련이 있다. 이태호는 한국사회에 본격화한 보수우익의 세력화와 함께 군사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 전반에 스며들고 있는가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민주개혁세력이 평화와 협력을 국가전략으로 선명히 제시하고 호혜적인 동아시아 공동 안보협력체계를 추구하면서 외교안보 분야의 민주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제안도 담겨 있다.
김종엽・은수미・이철희・정현곤이 참여한 대화란에서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소득불평등, 박근혜정부의 소통과 네트워크의 문제, 종북・안보・통일 담론의 위력, 포용정책 2.0의 유효성 등 지난 일년간의 주요 현안을 이야기한다. 각자의 활동영역에서 민주개혁세력의 향후 진로를 깊이 성찰해온 참석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논단과 현장에서는 동아시아와 관련한 두편의 글을 소개한다. 권혁태는 일본 아베 총리의 신사참배로 표면화한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안보를 위해 역사를 망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온 한일관계의 왜곡과 굴절을 비판한다. 이정훈은 백영서의 저서를 중심으로 분단체제론과 연계된 동아시아담론의 발전과정을 세심하게 되짚는다. 필자는 백영서가 제기한 ‘핵심현장’과 ‘이중적 주변’ 개념의 이론적·실천적 의의를 평가하고 이에 대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진지한 반응도 함께 소개해 동아시아담론에 대한 한층 깊은 이해를 돕는다.
문학평론란에서는 한국문학 현장의 비평담론에서 주요한 쟁점들을 부각한 세편의 글을 소개한다. 차미령은 장편소설의 가능성과 전망을 둘러싸고 최근 벌어진 비평적 논쟁을 세심하게 따라읽으며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다. 아울러 장편소설이 갖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신경숙, 김애란, 황정은의 소설을 읽으며 논의한다. 양경언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던 ‘안녕 대자보’ 현상에서 드러난 언어의 소통성과 황인찬, 백상웅 등 2010년대의 젊은 시를 연계하여 문학 속에서 삶과 정치가 구체적으로 연동되는 양상을 분석한다. 러시아 문예학자인 유리 로뜨만의 저작을 탐구한 김수환의 글은 삶과 예술의 경계, 책과 현실 간의 접점을 탐색함으로써 우리 비평에도 유용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로뜨만의 ‘책에 따라 살기’라는 독특한 모델을 통해 삶과 예술을 가르는 경계를 긋지 않으려는 태도, 이념과 현실의 복합적인 관계를 추적한 점이 흥미롭다.
창작란에서도 한국문학의 다채롭고 풍성한 현장을 만날 수 있다. 시란에서는 모두 열명의 시인이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내보이며 독자를 기다린다. 소설란에서는 성석제의 장편연재가 결실을 맺으며 마무리되고, 중국 장춘에 거주하는 김금희를 비롯하여 정지아, 최은미의 신작단편을 소개한다. 작가조명에서는 신작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출간한 신경림 시인과 강정 시인이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강정 시인의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문체를 따라 우리 시단의 원로인 신경림 시인의 시세계가 주는 깊은 울림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세대와 경험의 차이를 넘어 문학과 현실에 관해 나눈 허심탄회한 방담을 읽는 재미도 있다.
이번호부터 문학초점란이 대폭 개편되었다. 이 계절에 주목할 문학 신간들을 선정하여 세 사람의 좌담으로 논평을 진행한다. 전문화된 비평의 문제를 극복하고 다양한 형태로 독자와 소통하는 서평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첫회에는 강경석 백낙청 송종원이 여섯권의 시・소설 화제작을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을 나누었다. 이후에도 강경석 송종원이 고정으로 참여하고 창비 안팎의 초대손님을 모실 예정이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입장과 의견을 통해 문학작품에 대한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비문학 분야 신간을 리뷰하는 촌평란 역시 앞으로는 문학비평서를 포함해 인문・사회・자연과학 분야의 주목할 만한 책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문화평과 교육시평에도 애정어린 눈길을 바란다. 더불어 제12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을 기쁜 마음으로 선보이며 패기 넘치는 대학생 문사들의 활약을 함께 지켜봐주시길 부탁한다. 이밖에도 각 분야에서 참여해주신 필자 한분 한분에게 감사드린다.
청마해를 맞이해 봄호를 독자에게 선보이며 새삼 다짐한다. 동아시아 질서를 새롭게 짜기 위해 주변국이 각축하는 2014년에 한반도가 인간해방과 평화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거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올해 치러질 지방선거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각종 기회가 그러한 역사적 책무를 감당하기 위한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독자와 더불어 힘써 노력할 것이다.
白智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