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황정아 『개념비평의 인문학』, 창비 2015
우리는 진정 새롭게 사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donnard@hanmail.net
‘개념비평’이라…… 생경하게 들리지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의미있는 표현이다. 우선 이론을 공부하는 자에게 개념은 질료이자 수단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론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개념들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는 인문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대중강연이 요즘 인문학의 한 추세라지만, 그 기반은 여전히 개념을 둘러싼 선행 연구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개념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진되는 인문학적인 주장들은 자칫 요설로 흐를 수 있다고.
그런 점에서 황정아(黃靜雅)의 『개념비평의 인문학』은 인문학적 개념을 공부하는 자의 기본자세가 두드러지는 책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인권, 윤리, 타자성, 공동체, 법과 폭력, 민족주의, 총체성, 실재(주의) 등 인문학에서 한창 논의되고 있고 논쟁 중인 개념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개념들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등 속칭 ‘핫한’ 서구 이론가들의 저서를 중심으로 살피는 동시에 이 개념들을 둘러싼 2차적 논의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부지런한 공부도 공부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해당 이론들에 대한 엄밀한 독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태도는 다소간 논쟁적인 맥락에 놓인 글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생산적 수용’이 이론과의 불일치를 부득이하게 초래한다면 이론을 비판하면서 진행할 일이지 그 이론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애써 끌어내거나 이어붙인다면 공연한 혼란만 초래하기 십상인 것이다.”(72면) 이를 권위있는 이론가들의 원전에 대한 지적 충실성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저자는 자신이 상당한 공감을 느끼는 이론가에 대해서조차 그 논리에서 엿보이는 한계와 모호성을 집요하게 추궁하곤 한다. 그럼에도 이렇듯 분별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이론가의 권위를 빌린 후 슬그머니 자신의 주장으로 대체하는 에피고넨들의 흔한 함정을 피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어떤 개념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 개념이 논의되고 있는 이론적 지형에 대한 일정한 판단과 평가를 함축한다. 모든 이론은 동시에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리고 개념비평은 개념이 현재의 사회적·담론적 지형에서 차지하는 기능에 의식적으로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왜 현재 어떤 개념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담론적 지형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논의에서 보편성의 문제가 새삼 대두된 상황이다(이 책의 1부 제목도 ‘보편의 귀환’이다). “보편성이나 동일성을 거론만 해도 즉각 전체주의를 연상하는 우리 시대 특유의 과민반응”(98면)이 ‘거대담론’을 해체한다는 포스트주의의 여파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개체들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명목으로 보편적인 요구가 폐기되었을 때, 그것은 일반적 등가라는 자본주의적 상품질서의 보편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결과로 귀착될 수 있다. 이에 반해 바디우는 진리의 즉각적인 보편성을 역설한 바 있으며, 저자도 “정치의 위기가 갖는 다른 이름은 보편에 대한 적극적 모색의 부재일 것”(32면)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얼핏 특수성의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아시아 담론이나 민족주의가 어떻게 보편성과 결부될 수 있고 또 결부되어야 하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편성이 정치의 복원을 위해 불가결한 것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진정한 정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보편주의를 역설하는 이론들이 급진적 윤리를 내세울 때 그것이 갱신된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특히 그것이 우리 사회에 수용될 때 사실상 정치를 회피하는 알리바이처럼 사용될 수 있다는 혐의를 떨치기 힘들다. 그리고 윤리적 급진주의는 모든 율법의 기능을 정지시킨다는 메시아주의에서 원천을 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법과 폭력, 공동체가 엄연히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에서 그 정치적 함의를 구체화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이론과 현실의 이러한 간극은 서구 이론의 도움을 받아 우리 사회를 사유하려는 시도에서 일반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책에서 거론된 이론가들 대부분이 철학자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철학자는 대개 극한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현실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일정정도 추상하고 사태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원칙적인 변별점들을 부각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논지의 선명성을 위해 어느정도의 과장이나 단순화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철학적인 차원을 무시한 채 곧바로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의 지침으로 삼을 경우 많은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샤가 진행하는 재판의 예를 들며 법의 철폐나 절대적 환대를 거론하는 사람인들 포샤만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반문하기도 한다. 급진적인 이론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그 이론이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지 않을 경우 공허한 수사에 그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으로 읽힌다.
저자는 섣불리 어떤 결론을 내리거나 대담한 가설을 제시하기보다, 현실의 문제에 비추어보면서 개념의 가능성과 한계를 점검하고 사유하는 데 주력한다. 이는 단순히 신중함이나 균형감각의 문제만이 아니며, 선행 이론가들과 더불어 새롭게 사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 학자들의 아포리아를 면밀하게 검토하는 일(diaporein)을 자기 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도 새로운 서구 이론을 소개하면서 마치 신세계라도 발견한 양 호들갑 떠는 단계는 이제 좀 벗어난 것 같지만, 정말 그들과 함께 사유를 진행시키는 단계에 도달해 있는지는 여전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새로움은 남의 이론을 받아들여 발 빠르게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난점과 한계를 포착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 새롭게 사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