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기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의 중국 ‘사회주의’, 수사인가 가능성인가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과 편서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lee87@skhu.ac.kr
1. “자본주의가 중국을 구원하고,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원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중국 인터넷상에서 “1949년에는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원할 수 있었고, 1979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원할 수 있었고, 1989년에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원할 수 있었고, 2008년에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원할 수 있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국공산당(중공)이 내걸었던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라는 표어의 변조인데, 현대 중국의 중요한 전환점과 논란이 되는 지점들을 포착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자본주의와 중국의 관계를 문제로 삼는 둘째와 넷째 주장의 현재적 의미는 크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은 자본주의의 수용 때문인가, 또 중국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의 편입은 자본주의의 생명력을 더 강화시켜주는가 등의 매우 논쟁적인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견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모습은 위의 두 질문에 모두 ‘그렇다’는 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21세기 들어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중국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문제로 삼는 논의가 증가하고 있다. 위 질문들에 대한 반응은 흥미롭게도 전통적인 좌와 우의 구분에 따라 나뉘지 않는다. 그렇다는 답을 제시해온 자유주의적인 주류 관점 내에서도 중국이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있다거나, 이러한 중국이 서구의 헤게모니를 위협하고 있다는 등 중국에 대해 비판적인 논의의 증가세가 뚜렷하다. 이러한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이 자본주의적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1) 여기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역사성이 시야에서 배제되고 그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개입할 공간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온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곧 소멸할 것이라는 성급한 주장도 문제지만, 반복되는 금융위기부터 생태위기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순이 계속 쌓여가고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자체를 문제로 삼지 않는 시각도 그렇다.2)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중국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접근들을 주로 검토하고 이 관계를 보는 필자의 견해를 제출할 것이다.3) 물론 이들도 중국을 보는 관점이 같지는 않다. 중국이 이미 자본주의로 변질되고 그들이 내세우는 사회주의는 수사(修辭)에 불과하다는 주장(당연히 중국의 경제성장도 성공사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폐해를 증가시킨 사례로 조명된다)부터4) 사회주의적 전통이 중국의 발전에 유의미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주장까지5)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이 당장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다거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이 문제를 대하는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이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변화를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 역사적 과정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그 가운데서 감지되고 열려가는 가능성을 세계의 바람직한 미래로 연결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물론 중국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우리와 직접 관계가 없는 먼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질곡을 만든 한반도 분단체제가 동아시아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의 변화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미치는 영향이 우리와 무관할 수 없고, 동시에 우리의 실천이 중국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미치는 영향도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작업은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 나아가 우리의 노력이 어떤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가를 조망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2. 비자본주의적 발전모델인가, 자본주의로의 변질인가?
중국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관계에 대해 가장 도전적인 주장을 한 아리기(G. Arrighi)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6) 그의 핵심주장은 첫째, 중국경제가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비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둘째, 비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을 걷는 중국의 부상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 및 기존 헤게모니 국가의 쇠퇴와 겹치면서 세계체제를 더 평화롭고 평등한 질서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두가지로 집약된다.7) 이 중에서도 아리기는 전자의 주장을 입증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두번째 주장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기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론에 이론적 영감을 주었다고 간주되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호출해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론을 구성한다. 즉 스미스는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1)분업과 시장을 경제발전 및 국부의 주요 원천으로 보기는 했지만 이와 동시에 시장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재생산하는 정부의 역할과, 정부가 시장을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통치도구로 삼는 행위를 지지했다. (2)무역과 생산에서 투자에 따르는 위험을 겨우 보상할 수 있는 최저 수준까지 이윤이 하락하도록 자본가들끼리 경쟁시키는 것을 정부의 중요한 역할로 간주했다. (3)독립적인 생산단위 사이의 분업(노동의 사회적 분업)을 지지했을 뿐이지 하나의 생산단위 내의 노동분업(노동의 기술적 분업)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이상의 세가지 점을 근거로 아리기는 스미스가 논의한 시장경제와, 자본이 무제한적인 축적요구(M-C-M’)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구조를 파괴하고 재조직해가는 자본주의 논리를 구별한다. 이러한 주장은 스미스가, 시장과 분업이 정부에 의해 규제될 뿐 아니라 농업에 기반하고, 농업의 확대가 공업과 무역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발전경로”(natural course of things 또는 natural progress of opulence)를 지지했고 중국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는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8) 이처럼 스미스는 비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데만 아니라 중국을 그 대표적 사례로 간주하는 데에도 아리기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 두가지 점에서 모두 아리기는 브로델(F. Braudel)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특히 “시장 기반 발전의 자본주의적 성격은 자본주의적 제도와 성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자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 국가가 그들의 계급이익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시장경제는 여전히 비자본주의적이다”라며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명확하게 구별한 것은 브로델의 자본주의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다.9) 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생산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자본주의를 해석하는 맑시스트들의 비판을 받았다.10) 그렇지만 필자는 브로델적인 자본주의 해석이 미래의 대안적 사회상을 시장경제를 억압하는 폐쇄적 사회주의국가로 그리는 사고의 시대착오성을 비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평가에 동의한다.11)
여기서는 일반적 이론에 대한 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고전적 이해에 기초해 중국의 변화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측면만 강조하는 주장의 문제점을 검토해보겠다. 무엇보다 이러한 주장들은 많은 경험적 자료(사유제의 비중 증가, 빈부격차의 확대, 높은 무역의존도 등)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극복의 지평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고 자본주의 세계체제 극복이라는 지향과 관련해 현실성있는 논의를 진전시키기 어렵다. 이들은 전통적 사회주의 모델로 돌아가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대안적 모델의 돌파구가 있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물론 중국의 자본주의화라는 논지를 세계체제론적 접근과 결합시켜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종말을 촉진할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자본-임노동 관계의 확대가 중국을 세계 계급투쟁의 주요 무대로 만들고 이것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극복의 새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12) 이에 따르면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지구적 차원에서의 맑스주의적 기획을 현실화할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중국의 자본주의화-계급투쟁의 지구화-자본주의의 종식’이라는 회로는 맑스주의의 전통에서는 낯익은 설명방식이고 변화의 한 측면을 포착하기는 하지만, 이 회로 내에서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화 혹은 최후를 논증하려는 방식으로는 현실변화의 복합성을 포착하고 인지하기 어렵다. 계급투쟁에 대한 국가의 대응, 자본주의의 생명력,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의 모습 등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화 사이에는 설명되어야 할 변수가 너무 많다.13) 이 관점은 일견 분명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천적으로 무력감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
중국의 변화를 사회주의 포기와 자본주의로의 변질이라는 틀 내에서만 설명할 때는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복합적 측면과 역동성을 포착하기 힘들다. 중국에서 사회주의적 유산은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개혁개방 이전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여러 실천 중 심각한 오류와 실패가 있었다. 이러한 오류와 실패에 대한 객관적 분석 없이,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가 보여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모색이 결여된 채 단순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원론적으로 대비시키며 논의하는 것은 매우 비역사적인 접근이다. 또한 이러한 논리는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초래한 문제를 비판하는 데도 효과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현재 중국의 문제가 모두 자본주의로의 변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만 내세운다면, 과거 사회주의에서의 실패는 무엇이고 자본주의적 논리를 도입한 이후의 성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매우 단순한 질문에도 대응하기 어렵다.14) 과거 사회주의 실천에서도 극복해야 할 한계 또는 결함이 있었다면 개혁개방 이후의 변화를 단순히 자본주의로의 변질로만 규정할 일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이 왜 개혁개방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그 실천에서 사회주의라는 전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는 어떤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등 간단치 않은 질문들이 ‘사회주의의 부정과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폐쇄회로에서만이 아니라 좀더 개방된 방식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주장과 달리 중국에서 사회주의적 유산은 오늘날 노동운동을 포함해 농민, 농민공 등 기층의 저항운동에서 당과 국가 수준의 행위에 이르기까지 중국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경제의 성장원인은 자유화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여기에는 사회주의적 실천을 통해 구축한 물적 토대가 여전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15) 예를 들어 중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잔여적인 것만이 아니다. 기층운동에서는 사회주의를 자신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적극 동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은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건설을 최종목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행위를 여전히 강하게 규제한다. 2003년 공식출범한 ‘후 진타오(胡錦濤)-원 자바오(溫家寶) 체제’는 ‘조화〔和諧〕사회론’을 제시했다. 효율 위주의 성장방식에서 사회공평과 환경친화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기조는 지금의 시 진핑(習近平)체제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노력이 얼마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는가는 더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중국은 2013년 1인당 GDP 세계 84위(세계은행 통계), 2014년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세계 91위(국제연합개발계획 발표)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분배와 생태 등의 의제를 핵심적 국가목표로 삼고 있다. 이는 중공이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떼어놓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산에만 주목하는 방식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중국에서 당과 국가가 여전히 경제의 관제고지(管制高地, command height)를 장악하고 자본가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 즉 아리기가 주장하는 것처럼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있는 정치적 기초가 공고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회주의적 유산의 영향력은 여전히 중국의 미래에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즉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산의 영향과 상호작용하며 진행 중이다. 결국 이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는가가 중국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문제이다.
3. 현대 중국과 이중과제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산과 비자본주의적 발전경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아리기의 설명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2009년 하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중국에서 〔자본친화적일지 아니면 노동친화적일지 중〕 어떤 특정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지만 중국이 어디로 가는가를 관찰할 때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에서보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6) 이 문제에 성급히 답을 제시하려는 태도가 중국의 변화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이를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다만 여러 가능성 사이의 관계를 내적 연관성이 없는 독립적 경로로 보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현대 중국의 변화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기 어렵다. 아리기의 논의가 ‘중국이 자본주의적으로 변질되었는가 아닌가’를 둘러싼 반복된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원인도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한 다른 답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나름의 경험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논쟁이 돌파구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현대 중국의 역사 내부로 진입해 보면 자본주의가 이룬 성취를 수용하려는 노력과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은 항상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를 맺어왔다. 양자의 길항관계는 단순히 과도기적 현상의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지향들이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그리고 감당해가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구조 속에서 개별 국가의 행위능력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인한다.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냉전시기 사회주의체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의 하위체제로 규정하고 이러한 사회주의 국가모델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7) 일국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논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려는 시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극복하기보다는 어떤 면에서 자본주의체제에도 못 미치는 왜곡된 사회체제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작동하는 조건에서는 자본주의적 논리 혹은 근대성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극복을 위한 더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한계에 도달하면 결국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는 기계론적 전망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기초를 축적해가는 노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는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제시된 명제이다.18)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자본주의적 원리의 도입과 확산도 이중과제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주목할 것은, 중국의 변화를 주도한 주요 정치인의 사상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중과제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19)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식민주의와 결합된 근대성 혹은 자본주의의 도래에 직면한 중국 지식인들은 단순히 수용적 태도로만 대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 식민성에 대한 저항은 이들의 인식을 서구식 발전노선과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지평으로 확장시켰다. 캉 유웨이(康有爲)의 경우 청조말기에 자본주의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변법운동을 추진했지만 그의 정치변화를 향한 에토스는 상당부분 ‘대동사상(大同思想)’, 즉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유토피아적 사상에서 나왔다.20) 쑨 원(孫文)도 공식적으로는 중국 부르주아혁명 시기 위대한 혁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삼민주의 중 민생(民生)주의는 자본주의와 서구식 발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발상을 담았다.21) 마오 쩌둥(毛澤東)의 경우 자본주의의 극복을 가장 핵심적 과제로 삼았고 이를 위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기도 했지만 혁명과정에서 계속 견지한 이중과제적 인식은 맑스주의를 중국화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인 중국은 일정시기 동안 중공의 영도 아래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준비해야 한다”는 신민주주의론이 바로 그것이다. 1949년 10월 건국 이후 중공은 신민주주의론에 입각한 국가운영을 약속했는데, 1953년 과도기총노선을 제시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선언하면서 신민주주의적 실천이 중단되었다.22) 덩 샤오핑(鄧小平)은 문화대혁명에서 벗어나 중국공산당의 통치정당성을 강화하고 중국의 부국강병 실현을 위해 경제성장의 이룩을 핵심적인 과제로 삼으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사회주의적 이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보수파가 득세하며 정체되었던 개혁개방을 다시 가속화할 것을 촉구한 1992년의 남순강화(南巡講話)23)에서도 덩 샤오핑은 ‘공동부유(共同富裕)’를 여전히 최종적 목표로 제시했고, 1987년 당의 공식노선으로 채택된 이래 지금까지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사회주의초급단계론도 논리적으로는 이중과제적 지향을 담고 있다.24)
이처럼 현대 중국은 이중과제의 긴장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개혁개방 시기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장이라는 측면만 부각하거나 자본주의적 논리가 내재화되는 측면을 무시하는 접근은 모두 문제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방식을 바꿀 수 있다. 중국의 자본주의적 논리의 도입이 이중과제 수행이라는 틀 안에서 작동하는가, 아니면 이중과제 내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무너뜨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중과제의 틀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중국의 변화를 성급하게 이념적으로 규정하는 잘못을 피할 수 있고, 긴장관계가 와해되고 있다면 다시 건강한 긴장관계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이중과제의 긴장이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단일과제로 해소되었던 1950년대 초반 중국의 상황과는 달리, 현재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이중과제의 긴장이 해소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생산력 발전을 이 단계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사회주의초급단계론의 논리가 무제한적 자본축적의 욕망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초기 침체된 경제의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국면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지만, 중국이 상당한 양적 성장을 이룬 시점에서 생산력중심주의 혹은 중국식 발전주의는 많은 비판적 논자가 지적하듯이 이미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들어 중국공산당이 개혁개방 이후 시장화와 대외개방을 중심으로 삼았던 노선을 수정하려는 시도는 중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아리기 등은 비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주목했지만, 중국이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사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한다. 또는 의도는 좋지만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현실적 평가도 있다.25) 실제로 자원분배구조의 변화를 살펴보면 노선에 급격한 전환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통치정당성을 보완할 수 있는 미세조정 정도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타당한 평가이다.26) 사실 수십년간 지속된,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발전노선의 변화가 쉽게 달성 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그렇지만 자원분배구조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사회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라는 차원에서 보면 상당히 의미있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경제영역에서는 명백하게, 그리고 정치사회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했던 자유화 노선의 헤게모니는 뚜렷이 약화되었다.27) 그런데 이런 추세가 새 발전노선의 형성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자명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이 급격한 성장률 저하 등의 문제에 직면할 경우 빠른 해결책으로 성장률 제고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정책이 다시 전면에 부상할 가능성도 여전히 크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와 실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향방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4. 중국사회의 변화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위의 논의와 실천의 향방은 중국에서 정치사회세력이 어떤 방식으로 재배치될지에 좌우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 네가지 경로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각 경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관련해 매우 다른 함의를 갖는다.28) 첫째 경로는 중공의 통치정당성이 약화되면서 반중공 사회연합이 강화되는 것이다. 둘째 경로는 중공 내 개혁파와 자유주의적 사회세력의 연합이 강화되는 것이다. 셋째 경로는 자본주의적 축적방식을 지속시키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권력의 억압적·강제적 성격이 강화되는 경우이다. 넷째 경로는 중공과 좌파 사이의 연합이 강화되면서 지금까지의 성장모델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경제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첫째 경로는 현재 각각 다른 이유로 중공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좌파와 우파 중 어느 한 세력이 빠르게 확장하거나 그 과정에 양자의 흐름이 결합될 때 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중공이 여전히 다른 정치세력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수준의 통치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좌나 우의 반대세력 모두 역량이 미약할 뿐 아니라 그마저도 극도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 경로가 현실화된다면, 질서있는 전환이라기보다는 천하대란 같은 양상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자신의 모순을 중국에 전가하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 수 있는 계기, 즉 중국이 자본주의 위기의 공간적 해결을 위한 무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비중을 볼 때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더 심각한 혼란에 몰아넣을 것이다.29) 미국이 중국에 대해 적극적인 협력을 추구하지 않고 경쟁자로 보면서도 전면적 봉쇄에 나서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이런 태도를 고려하면 이 씨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둘째 경로는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친화적인 체제로 질서있게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서구세력이 기대해온 바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이유로 이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해석에서는 주로 중공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이 경로가 현실화되지 못하는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사이의 부조화, 즉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장이 ‘자연스럽게’ 지속되기 어렵다는 현실을 간과하는 설명이다. 사회주의 시기 중국은 주로 내부자원의 동원을 통해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축적을 해왔다.30) 개혁개방 이후에는 해외시장과 자원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제공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빈부격차가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하면서 농민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축적을 위한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빈부격차가 더 증가한다면 중공의 통치합법성까지 위협할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과정과는 달리 대외적으로 내부모순을 전가할 수 있는 공간도 많지 않다. 이제 겨우 발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자원외교가 이미 다양한 수준의 반작용을 부르고 있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조건에서 서구의 경우와 같이 자유주의적 논리와 자본주의적 확장이 공존하기 힘들다.31)
그럼에도 기존의 성장방식을 유지하면서 국내외의 제약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자유주의적 개혁경로를 따르기보다 대내외적으로 권력의 억압적이고 강제적 성격을 더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셋째 경로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생태문제의 심각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서구식 공업화와 자본축적 방식을 계속 따를 경우(여기에 인도도 당분간 이러한 길을 가리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미 적색경보를 보내고 있는 기후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접어들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당연히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넷째 경로는 발전노선의 전환을 위해 새로운 정치사회연합이 출현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둘째 경로가 갖는 한계가 뚜렷해지고, 셋째 경로가 초래할 위험이 감지되는 조건에서 새로운 발전노선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가 이런 연합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축적을 확대하기 위한 자유화 프로젝트의 실패가 촉발하게 되는 중공과 좌파의 연합이 셋째 경로로 기울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중국 내에서 ‘좌’의 혁신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32) 이를 통한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도 지금까지의 역사적 선례를 생각해보면 당장 성공을 낙관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적어도 생산력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물적 토대를 구축한 중국의 변화는, 과거 중국혁명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성장국면에서 매우 미약한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진행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지금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곧 세계 최대의 경제규모를 갖게 되고33)여전히 그 안에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중국의 문제는 단순히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실험무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분명히하고 싶은 것은 이런 주장이 결코 중국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접근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조구찌 유우조오(溝口雄三)는 일본의 기존 중국학 연구방법을 성찰하며 자기의 목적을 중국에 강요하는 ‘중국이 없는 중국연구’나 중국의 목적을 그대로 자신의 연구목적으로 삼는 것도 아닌 “방법으로서의 중국”이라는 연구태도를 제시했는데 이는 여전히 유효한 요구이다. 여기서 중국연구의 목적은 중국을 통해 세계의 다원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그 기초 위에서 더 높은 수준의 세계적 비전을 창출하는 길을 여는 것이다.34) 이러한 가능성에 우리는 어떻게 개입할지가 우리에게 남겨진 또하나의 질문이다. 여기서 이중과제론의 보편적 의미를 환기하고자 한다. 이중과제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그 너머를 지향할 때 요청되는 인식이다. 따라서 이는 특정 국가에만 부여된 과제가 아니다. 이러한 지향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속한 곳에서 이중과제를 추진하는 실천적 공간을 만들고 이를 확장하는 것이, 곧 또다른 실천의 장에서 이중과제를 더 효과적으로 추구할 가능성을 제고한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협력적 경제조직의 창출과 확장, 분단체제 극복을 통해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 등이 중국의 이중과제 수행에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연관성에 주목할 때 중국은 단지 지적욕구를 만족시키는 대상이나 우리의 이익을 증진하는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실천적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계기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
1) 이에 대해서는 Yasheng Huang, Capitalism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Entrepreneurship and the Stat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천 즈우 『중국식 모델은 없다』, 박혜린 외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1; 스테판 할퍼 『베이징 컨센서스』, 권영근 옮김, 21세기북스 2011.
2)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성백용 옮김, 창비 2014)에 이러한 문제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3) 여기서 자유주의적 관점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정당화하는 주류적 이데올로기를 지칭하고 비판적 사유란 그런 관점에 도전하는 다양한 흐름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필자는 “비판적 중국연구란 주류적 사유체계를 중국에 (대한 연구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문제시하고, 이를 통해 (중국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지구적 차원, 지역적 차원, 일국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삼는 접근법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졸고 「중국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창작과비평』 2012년 가을호 181면. 비판적 중국연구는 필자만의 주장이 아니며 이 표현의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한국 중국연구의 주된 화두 중 하나였다. 이런 전통과 비판적 중국연구의 발전방향에 대한 논의는 백영서 「중국학의 궤적과 비판적 중국연구」, 『사회인문학의 길』(창비 2014)을 참고.
4) Martin Hart-Landsberg, “The Chinese Reform Experience: A Critical Assessment,” Review of Radical Polictal Economics 43(1), 2011.
5) 조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강진아 옮김, 길 2009.
6) 이 글에서는 중국 내 논의보다는 서구의 논의가 많이 언급되는데 이는 중국 내 학자들이 여러 이유로 자기 연구의 보편적 함의를 제시하는 데 비교적 조심스러운 반면(이들은 중국모델의 논의에서도 보편적 함의를 갖는 ‘모델’이라는 개념보다 중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중국 경험’ ‘중국적 길’ 등의 표현을 선호한다), 서구 연구자들은 중국의 경험을 개별적 사례로 다루기보다는 그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관계를 문제로 삼는 경향이 강한 사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중국 내 논의와 그 한계에 대해서는 앞의 졸고 참고.
7) 아리기, 앞의 책 11장과 12장.
8) 아리기의 스미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아리기, 앞의 책 2장.
9) 아리기, 앞의 책 457~58면.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경쟁적이고 투명하고도 개방적인 교환영역으로서의 시장경제에 대한 배제가 실현되는 반(反)시장적인 것이며, 반드시 권력의 위계구조,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I-1: 교환의 세계 上』, 주경철 옮김, 까치 1996, 323면. 브로델도 비자본주의적 시장활동이 활성화된 사례로 중국을 주목했지만, 아리기의 중국에 대한 논의는 웡(R. B. Wong), 포머란츠(K. Pomeranz) 등의 연구에 더 많이 기대고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 이전 아시아가 유럽보다 시장과 교역 등이 더 활성화되어 있었으며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발생한 것은 자원분포, 아메리카 발견 등의 우연적 요인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준 바 있다. 이들의 논의는 강진아 「동아시아로 다시 쓴 세계사: 포머란츠와 캘리포니아학파」(『역사비평』 2008년 봄호)에 잘 소개되어 있다.
10) 예를 들어 굴릭( J. Gulick)이 브로델적 접근을 아리기 방법론의 주요 문제로 비판했다. John Gulick, “The Long Twentieth Century and Barriers to China’s Hegemonic Accession,”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 Vol. XVII, No.1 (2011).
11) 유재건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성—자본주의의 문제」, 『한국민족문화』 제32호(2008. 10) 356면. 필자의 이러한 입장은 졸고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22~23면)에 제시되었다.
12) Minqi Li, “Can Global Capitalism Be Saved? “Exit Strategies” for Capitalism or Humanity,” Alternate Routes: A Journal of Critical Social Research Vol. 22 (2011), 62~64면. 리 민치(李民琪)는 이와 함께 자본주의적 축적이 생태위기를 심화하는 것을 자본주의적 축적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는 주요 요인으로 제시한다. 자본주의적 축적방식과 생태위기 사이의 밀접한 관계와, 생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발전방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많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인데, 현재 생태위기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종식으로 바로 이어질 것이라는 리 민치의 논지도 지나치게 단순한 결론으로 보인다. 씰버(B. J. Silver)와 장(Lu Zhang)도 중국 노동운동이 세계 노동운동의 중심무대로 등장할 가능성과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미칠 영향을 주목한다. 그렇지만 노동운동과 당 및 국가 사이의 긍정적 상호작용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이 자본주의적 노선을 걷고 있다고 단정하며 논리를 전개하는 리 민치와는 차이가 있다. Beverly J. Silver and Lu Zhang, “China as an Emerging Epicenter of World Labor Unrest,” Ho-fung Hung (ed), China and the Transformation of Global Capitalism,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9.
13) 이와 관련해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협소한 이해의 문제점, 나아가 맑스의 한계에 대한 하비(D. Harvey)의 논의를 참고할 만하다. David Harvey, interview by David Primrose, “Contesting Capitalism in the Light of the Crisis: a Conversation with David Harvey,” Journal of Australian Political Economy No. 71 (2013).
14) 예를 들어 황 야셩(黄亞生)에 대한 안드레아스( J. Andreas)의 비판은 구체적인 논의에서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주의적 소유제가 사유제보다 우월하다는 그의 전제는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들의 실천사례에 의해 부정된다는 황의 꽤 날카로운 반론에 직면한다. Joel Andreas, “A Shanghai Model?: on Capitalism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New Left Review 65 (Sep/Oct 2010)와 Huang Yasheng, “The Politics of China’s Path: A Reply to Joel Andreas,” New Left Review 65 (Sep/Oct 2010), 90면.
15) 여기서 국유기업과 사적 소유를 금하는 토지소유제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이 경제적 유산들이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장을 규제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지, 아니면 자본의 축적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해체되거나 다른 형식으로 변화할 것인지가 중국의 사회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이다.
16) G. Arrighi, interview by D. Harvey, “The Winding Paths of Capital,” New Left Review 56 (Mar/Apr 2009), 84면.
17) 월러스틴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된 이후 이러한 논지를 더 분명히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백영경 옮김, 창비 1999) 1장 참고.
18) 이중과제론은 백낙청(白樂晴)에 의해 1998년 한 학술대회에서 처음 제출되었고, 관련 논문이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에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그 이후의 논의는 졸편 『이중과제론』(창비 2009)을, 그리고 최근의 상세한 논의는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백낙청의 강연(네이버문화재단 주최 ‘열린연단’, 2014.11.22)을 참고. 이 강연의 동영상과 강연록 전문은 http://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48484&rid=251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 왕 후이(汪暉)는 ‘반현대의 현대성’(反現代的現代性)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모순적 관계를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마오 쩌둥의 실천의 의미와 한계를 이 개념으로 설명했고(「중국 사회주의와 근대성 문제」, 이욱연 옮김, 『창작과비평』 1994년 겨울호), 이러한 문제의식이 캉 유웨이 이후 주요 사상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現代中國思想的興起』, 三聯書店 2004). 여기서 왕 후이는 일국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구별되는 다른 근대성의 존재 가능성 혹은 그에 대한 모색에 초점을 맞추었고 최종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 근대성을 포함하는 근대성 자체를 문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근대성에 대한 발본적 성찰로서의 의미가 있는 작업이지만 두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반자본주의적 근대성이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갖는 관계가 혼란스럽다. 반자본주의적 근대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구축한 근대성의 구성요소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표현 그대로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또한 현 역사적 단계에서 자본주의적 논리의 작동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 및 이러한 상호작용이 갖는 의미에 대한 분석이 점차 시야에서 멀어진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규정력을 강조하지만 그 안에서 적응과 극복의 모순적 결합과 이것이 갖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적응과 극복의 동시적 실천을 통한 자본주의 세계체제 극복의 길을 모색하는 이중과제론과 차이가 있다.
20) 『대동서(大同書)』의 경부(庚部) “산업간의 경계를 없애 생업을 공평하게 한다(去産界公生業)”에 캉 유웨이의 이러한 사상이 정리되어 있다. 강유위〔캉 유웨이〕 『대동서』, 이성애 옮김, 을유문화사 2006, 537~79면.
21) 그는 민생주의에 대한 설명에서 중국은 계급분화를 거친 이후에 사회혁명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서구의 발전경로를 따라갈 필요가 없고, 빈부격차의 출현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공업화를 추진함으로써 사회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평등지권(平等地權)’과 ‘절제자본(節制資本)’을 그 수단으로 제시했다. 일종의 예방혁명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적 지향이라는 주장부터 국가자본주의적 발상이라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이 자본주의 수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발상은 1906년 12월 동경에서 『민보(民報)』 창간 1주년을 기념한 연설에서 처음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魏新柏 選編 『孫中山著作選編(上)』, 中華書局 2011, 131~38면.
22) 신민주주의의 이론적 의미와 이 이론이 조기에 폐기된 원인에 대해서는 졸고 「마오쩌둥 시기 급진주의의 기원: 신민주주의론의 폐기와 그 함의」, 『동향과전망』 78호(2010.2)를 참고. 그리고 이중과제론의 관점에서 이 과정에 대해 평가한 글로는 중문 졸고 「新民主主義的曆史經驗及社會主義初級階段論的理論含義」(『1950-1953 中國新民主主義的歷史,社會,文化,生活意涵』, 亞際書院北京辦公室 2014) 참고.
23) 덩 샤오핑이 가족과 측근만 데리고 상하이, 광둥성 등을 순방하며 발표한 일련의 연설. 특히 시장은 경제수단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그해 가을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시장경제론을 채택하는 길을 열었다.
24) 사회주의초급단계론은 생산력과 현대적 생산방식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조건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지침이며 이 단계의 핵심임무를 현대적 생산방식과 생산력 발전으로 제시한다. 앞의 중문 졸고 19면.
25) Ho-fung Hung, “Is China Saving Global Capitalism from the Global Crisis?,” Protosociology: An International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Research Vol. 29 (2012), 173~75면.
26) 졸고 「중국의 신발전관: 동아시아 모델의 부활?」,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18호(2010년 하반기) 87면.
27) 시 진핑 체제의 출범 이후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를 다음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Chris Buckley and Andrew Jacobs, “Maoist in China, Given New Life, Attack Dissent,” New York Times Jan. 5. 2015.
28) 최근 중국 내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와 주요 경향 및 이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졸고 「중국의 ‘좌우논쟁(左右之爭)’과 시진핑체제」, 세교연구소 심포지움 “중국 사회주의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2013.11.15) 발제문 참고.
29) 이와 관련해 중국에서 자본주의 논리의 확산이 지금까지 자본주의 위기의 공간적 해결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자본주의 내의 불균형을 확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들이 흥미롭다. Michael Pettis, The Great Rebalancing: Trade, Conflict, and the Perilous Road Ahead for the World Econom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변수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즉 중국의 국가규모와 자주적 주권은 기존 헤게모니의 이익이 쉽게 관철되거나 과거의 방식으로 재균형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아리기는 이러한 현상이 비자본주의적 발전과 결합될 경우 세계가 더 조화롭고 평등한 질서로 전환될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 비판자들은 국가 간 평등보다는 중국 내의 불평등 심화를 더 중요한 문제로 간주한다.
30) 사회주의 공업화를 이런 관점에서 설명한 연구로는 원 톄쥔(溫鐵軍)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게 2013) 참고.
31) 훙은 이를 내부의 균형성장으로의 전환이 실패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지적한 바 있지만 그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Ho-fung Hung, “China’s Rise Stalled?,” New Left Review 81 (May/June 2013), 159~60면.
32) 이와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것이 민주주의 문제이다. 민주주의 실현에 있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주권재민의 원칙을 형해화하는 자유주의적 프로젝트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성에 대한 요청은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적 개혁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이 단순히 국가주의적 논리의 확장으로 귀결돼서는 안된다. 이러한 결과를 방지할 수 있는 장치가 무엇인가가 문제인데 중국은 이에 대해 여전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중공이 시민사회에 대해 취하는 적대적 태도도 부정적 신호로 보인다. 이른바 ‘색깔혁명’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이유로 시민사회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인민민주’ 실현에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
33) 중국의 GDP는 현재 세계경제의 약 15%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크노미스트』의 예측에 따르면 2020년 전후에 중국이 경제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한다. http://www.economist.com/blogs/graphicdetail/2014/08/chinese-and-american-gdp-forecasts.
34) 溝口雄三 著, 孫軍悅 譯 『作爲方法的中國』, 三聯書店 2011, 129~33면. 중국을 계기로 해서 세계적 비전의 창출로 연결하는 과제는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그렇지만 복수의 근대성 등의 담론을 통해 중국의 특수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실은 중국을 특권화할 가능성이 높고 다른 공간의 실천과의 상호작용을 피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에 대한 연구(동아시아에 대한 연구 포함)에서 지역과 전지구적 문제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전지구적 시야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백영서는 이러한 모색을 지구지역학(Glocalogy)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백영서, 앞의 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