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50주년 특별기획: 창비에 바란다
동아시아 인문잡지의 미래를 열자
김항 金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본지 편집위원. 저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제국일본의 사상』, 역서 『근대초극론』 『예외상태』 『정치신학』 등이 있음. ssanai73@gmail.com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는 1973년에 창간된 일본의 인문잡지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뉴레프트(new left)가 학생운동뿐 아니라 사상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일 텐데, 1970년대는 학생운동이 퇴행기를 맞이하는 시기임과 동시에 뉴레프트의 사상적 영향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겐다이시소오』는 그런 정황 속에서 태어난 잡지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편집장을 역임한 이께가미 요시히꼬(池上善彦)가 말한 대로 애초에 이 잡지는 동시대 유럽의 사상 소개를 주된 임무 중 하나로 삼았다. 이 잡지를 통해 푸꼬, 데리다, 들뢰즈 등 1960~70년대를 주름잡은 사상가의 저술이 실시간으로 번역·소개되었고, 대학 아카데미즘에서는 다뤄질 수 없는 현재적(actual) 사유가 이 잡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단순한 소개는 아니었다. 『겐다이시소오』는 뉴레프트의 실천적 문제의식 속에서 유럽의 동시대 이론을 마주하려 했으며, 그런 까닭에 단순한 번역보다는 일본 필자에 의한 글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면을 차지했다. 그렇게 『겐다이시소오』는 연합적군파 사건으로 폐허가 된 뉴레프트의 정치공간을 언설의 장에서 재건하려 했던 것이다.
전성기인 1970~80년대에 비하면 판매부수도 영향력도 축소되었음을 냉정하게 인정하더라도, 『겐다이시소오』가 지금도 여전히 일본 인문잡지의 중요한 한축을 이루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인문사회 분야에서 비판적 지식과 분투하는 많은 연구자·비평가가 기고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저명한 필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논객이 이 잡지를 통해 ‘등단’하기 때문이다.
이번 인터뷰에 응해준 오시까와 쥰(押川淳, 이하 오시까와)은 이 잡지의 3세대 편집진 중 한 사람이다. 스스로가 저명한 비평가인 미우라 마사시(三浦雅史)와 ‘제3세계’ 전역을 누비며 지식연대를 실천하는 운동가 이께가미 요시히꼬가 주도하던 『겐다이시소오』는 현재 이 잡지와 동세대인 1970년대생 편집자들의 주도로 제작된다. 이들은 유럽의 현대사상뿐 아니라 일본 국내의 현재적인 이슈나 동아시아의 상황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겐다이시소오』의 현재를 짊어지고 있는 젊은 편집자인 오시까와는 『창작과비평』의 주도하에 2006년 시작된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 심포지엄에 몇차례 참여한 바 있으며, 인터넷으로 배포되는 『창비』 일본어판(http://jp.changbi.com)의 애독자이다. 그에게 동아시아 인문잡지의 미래라는 큰 틀 속에서 『창비』에 대한 인상과 그 전망을 물어보았다. 그는 일본의 현 정세를 개관하면서 질문에 답해주었다.
지난해 여름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을 10만여명의 시민이 에워싼 장면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른바 ‘평화안보법제’의 의회 채택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 시민들은 의회 주변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법안은 우여곡절 끝에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날치기’ 처리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 시민의 직접행동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점거운동을 주도한 집단 중에는 90년대 이후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郎)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9조의 모임’ 네트워크도 있었지만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역시 ‘SEALDs’(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aracy)였다. 이들은 2015년 6월 이후 매주 금요일 의사당 주변에서 열린 항의집회를 주도했고 중심 멤버들은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오피니언 리더로 부상했다. ‘9조의 모임’이 6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장년층 인텔리의 집단이라면, SEALDs는 마치 이들의 20대를 재연하는 것처럼 미디어는 주목했던 것이다.
그러나 SEALDs는 60년대 뉴레프트 투사들과는 사상에서도 행동에서도 전혀 달랐다. 이들은 스타일리시한 옷차림과 힙합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그루브 있는 구호로 시위를 전개했다. 또한 SNS를 통해 거리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파하면서 온·오프라인의 점거를 이끌어나갔다. 구호는 간명했고 방법은 세련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과거의 뉴레프트처럼 먹물기로 가득한 과격 청년이 아니라 패셔니스타에 가까웠다. 과격 청년들이 글과 말로 합성된 육체를 권력에 내던졌다면, 이들은 랩과 이미지로 제작된 플래시로 권력을 조롱했던 셈이다.
오시까와는 이 새로운 흐름을 보면서 인문잡지의 현재와 미래를 타진해주었다. 우선 그는 일본 인문잡지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60년 안보투쟁시 지식인의 발언을 보면 대다수가 『세까이(世界)』(1946년 창간되어 전후 민주주의를 견인한 잡지)를 비롯한 ‘논단지(論壇誌)’에서 발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잡지 미디어를 통한 상황분석과 발언은 1970년대에 이미 영향력을 상실했다. 시민이라는 단일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논단지의 공론장은 다양하게 갈라져나온 잡지들의 특성화를 통해 분화되었다. 독자들의 관심도 어떤 지식인이 발언하느냐에서 어떤 잡지에서 어떤 편집하에 논의가 이루어지느냐로 옮겨갔다. 지식인 개인이 아니라 개별 잡지 고유의 관점이 중요해졌고 다른 잡지와 다른 필자를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즉 누가 발언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편집의 힘이 전면화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겐다이시소오』의 창간은 이런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상황은 변화했다. 1996년을 정점으로 하여 출판시장 전체의 규모가 전성기의 60% 정도로 축소되었고, 그중에서도 잡지의 쇠락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인문잡지의 경우 상황은 더 나빠서 유력지 중 몇몇이 속속 폐간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오시까와는 SEALDs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 등장과 연관시켜 상황을 분석한다.
70년대 이후 인문잡지의 기능 중 하나가 운동의 미디어가 되는 일이었다. 사회운동 그룹의 대다수는 사람이나 예산이나 기술의 측면에서 자체적으로 발신수단을 보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몇몇의 인문잡지는 그런 그룹과 손을 잡음으로써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SEALDs처럼 스스로가 미디어가 되는 운동그룹의 등장은 운동과 잡지의 역할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양자 사이에 새로운 생산적 관계가 만들어질지 아니면 서로를 무시하면서 병존하는 비생산적 관계로 전락할지는 미지수이다. 아마도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늠하면서 앞으로의 관계를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인문잡지 편집이라는 일선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고민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오시까와는 이런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창비』에 대해 짚어주었다. 오시까와는 일본어판을 통해 『창비』를 읽는다. 1970년대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교수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 그룹이 『창비』 ‘해적판’을 읽고 번역해서 출판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세대를 건너뛰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조건을 통해 『창비』를 접했지만, 오시까와와 와다 교수 그룹의 『창비』에 대한 인상은 공통점을 가진다. 와다 교수 그룹이 『창비』를 읽으며 당대 한국의 상황을 세계정세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지적 안목에 주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시까와도 『창비』 지면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현 정세를 긴장감있게 분석하는 머리말과 글로컬(glocal, global+local) 레벨의 현안을 다룬 ‘논단과 현장’ 지면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단과 현장’의 인상을 전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상이나 사회실천의 도입·소개도, 변화하는 상황의 단순한 분석도 아닌 것 같다. 개별 현장의 특이성·개별성·역사성에 주목하면서, 그곳에서 생겨나는 사상을 어떻게든 공유하고 새로운 맥락으로 번역하려는 의도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추출된 사상의 가능성을 개별 현장에서 다시 검증하는 시도로도 보였다. 이런 소중하고 수고스러운 작업을 국내를 넘어서 동아시아뿐 아니라 아프리카까지를 아우르는 시야로 전개하고 있다는 것은 이 잡지가 한국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아시아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사상적 자원이 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듯 오시까와에게 『창비』는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는 잡지라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개별 현장의 생생한 사유를 한반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검증하는 잡지로 인식되고 있다. 1970년대에 『창비』 해적판을 읽었던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해적판을 탐독했던 것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냉전구도의 타파를 위해 ‘방법으로서의 한반도’라는 의식하에 해적판을 읽었기 때문이다. 오시까와도 마찬가지로 『창비』를 한국이나 일본에 국한될 수 없는 동아시아와 글로벌한 차원의 비판적 사유를 위한 매개로 삼고 있다. 그는 자신도 참여한 바 있는 2015년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에 관한 글을 인용하면서 『창비』를 비롯한 인문잡지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창비』 2015년 가을호에 실린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 보고문(졸고 「입장에서 현장으로」)에는 백영서 교수의 ‘핵심현장’이란 개념을 “‘입장’에서 ‘현장’으로”라는 패러다임 변환으로 파악하는 시사적 논의가 있었다. 장(場)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장을 다시 여는 일, 이것은 파국적 상황에 놓여 있는 일본의 인문잡지를 위해서 중요한 시사를 준다. 인문잡지는 각자가 만들어온 고유의 장에 자리하면서도 그 장을 다시 열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잡지가 표명하는 사상이나 입장을 지탱하는 몇몇 핵심 개념이 스스로의 장을 넘어서서 공감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야 한다. 그런 ‘현장’을 구축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야말로 지금 당장 단편적으로라도 시작되어야 한다. ‘현장’을 아시아/세계의 차원에서 재구축해나가지 않으면 인문잡지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오시까와는 『창비』의 미래는 얼마나 스스로의 ‘장’을 세계 속으로 열어나감으로써 ‘열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다소 추상적인 이 말을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창비』의 미래는 한반도라는 장을 얼마나 동아시아나 글로벌한 차원으로 열어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인 듯하다. 물론 이는 한국 바깥에서 독자를 구하라는 ‘경영 컨설팅’이 아니다. 문제는 한반도의 문학과 사회상황이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틀로 재단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창비』는 한국어 매체이다. 하지만 마주하는 세계는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동아시아나 세계라는 고정된 공간으로의 확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나 동아시아나 세계는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비』가 열어나가야 할 ‘현장’이기 때문이다. 『창비』에 대한 오시까와의 주문은, 그런 의미에서 50주년을 맞이하는 『창비』에 소중한 제언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