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 대전환의 한국사회,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전환의 지향으로서의 돌봄을 향한 투쟁
돌볼 수 있는 역량의 강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백영경 白英瓊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집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및 공저서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배틀그라운드』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등이 있음.
yg.paik@gmail.com
돌봄위기가 코로나19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막대한 예산의 투입에도 올라가지 않는 출생률이 한국사회의 재생산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가운데 그 핵심에는 이미 돌봄의 위기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19는 돌봄 수요를 증대시키면서도 돌봄이 이루어지던 기존의 네트워크를 해체함으로써 사회적 돌봄의 실종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 이미 취약한 상태에 있던 돌봄체계가 큰 타격을 입었다. 필수노동의 주요 부문을 담당하는 여성노동자들은 가족 돌봄의 부담까지 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이들이 가정에서도 돌봄노동의 담당자라는 사실은 코로나19 시기 돌봄문제를 둘러싼 딜레마를 만들었다. 이들이 가족의 필요에 따라 기존 노동현장에서 떠나야 하는 상황은 방역을 위한 필수노동 영역에 어려움을 불러오고, 반대로 이들이 필수노동을 지속하면 가족 돌봄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감염병 위기상황에서 필수노동이 온전히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돌봄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하며, 위기가 지속되거나 반복될 수 있으므로 돌봄을 사회의 중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돌봄을 사회의 중심적인 가치로 삼는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제까지 저임금·불안정 노동으로 자리매김해온 돌봄노동에 적절한 보상을 하고 그것이 시장에서도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중요하지만,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단지 기존 체제 내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일과는 다르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그대로 둔다면 돌봄은 성장지상주의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작동하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돌봄이라는 가치는 성장과 이윤, 효율성을 목표로 삼는 사회와는 병립하기 어려우며, 돌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좀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돌봄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대부분은 돌봄노동에 대한 보상 확대 및 인력 확충 등의 제안에 머무르며 그 이상을 논하지 않고 있고, 이는 돌봄이 중요하다는 당위론을 넘어서는 사회적 쟁점을 형성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지금 시대 가장 긴급한 사회적 의제 중 하나라는 점에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돌봄문제가 과연 오늘날 전환의 지향점으로서 공유되고 있는지, 전환의 지향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유가 필요한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돌봄의 확보를 위한 투쟁의 역사
필자는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겪고 있는 돌봄의 위기는 (…)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 및 이를 통해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노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돌봄의 현장에서 나와 내가 속한 사회, 나아가 인간 너머의 세계를 돌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최일선 공동체의 일원”1이라고 볼 수 있는 시각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가령 인력 확충이라는 정책적 제안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간호인력 확충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음에도 증원은커녕 오히려 인력을 감축해왔고, 최근까지도 간호인력 배치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는 데서 볼 수 있듯이2 돌봄문제가 새로운 세계를 위한 싸움의 최일선이기도 하다는 인식의 사회적 공유 없이는 돌봄의 확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를 비롯한 현재적 위기에 대응하는 최일선의 투쟁에서 돌봄을 중심에 위치시키고, 실질적인 돌봄 확대를 통해 사회전환을 이끌기 위해서는 어떤 인식이 필요한가. 현재의 돌봄위기를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나 가족의 기능 변화라는 틀로만 인식할 경우, 그 대안도 공적 지원의 확대나 복지국가의 역할 강화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필자는 우선 돌봄의 확대가 언제나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기본적인 수준의 돌봄을 어떻게 제공할지, 돌봄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할지 하는 문제에 있어 국가 책임은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의 책임을 강화해온 과정 역시 한 나라 차원에서 때로는 국제적 연대의 차원에서 시민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재생산노동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에서도 역시 그러하다.3
1975년 아이슬란드의 여성들은 여성이 아이슬란드의 경제 및 사회복지에 얼마나 필수적으로 공헌하고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여성 파업의 날’(Women’s Day Off)을 기획했다.4 파업의 주요 목표는 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여성노동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일에 대한 항의였으며, 당시 아이슬란드 여성의 약 90%가 파업에 동참하면서 나라 전체가 마비되기도 했다. 이듬해 아이슬란드 의회는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임금을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오늘날 아이슬란드는 성별 불평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녀 동일임금이 시행되는 세계에서 가장 성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여겨진다.
국제적 차원에서 여성의 재생산노동에 대한 저항이 이루어진 사건으로는 1970년대 미국과 유럽의 가사노동 임금투쟁을 들 수 있다. 한국에도 알려진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와 마리아로사 달라 꼬스따(Mariarosa Dalla Costa)를 비롯한 여성운동가들은 ‘가사노동에 임금을’(Wages for Housework)이라는 구호와 함께,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들을 노동자로 인정하고 연대를 창출하려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조직했다.5 다만 이 운동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이후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함께 그 기세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이 운동은 성공적인 사례로 기억되고 있지는 못하고 심지어 지금도 ‘가사노동에 임금을’이라는 구호 및 역사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지만, 그 선구적인 성격은 부인하기 어렵다. 가사노동을 비롯한 돌봄노동에 국가가 수당을 지급하게 된 현재 시점에서 돌아보면 해당 운동이 국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음이 드러난다. 더욱이 이 운동은 1970년대 당시에도 여성노동을 재평가하라는 요구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서는 남성에게 의존해야 하고 원하지 않아도 이성애 핵가족제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당시 복지제도에 기생하는 존재로 그려지던 유색인 조손가정의 여성 양육자가 실제로는 사회적 돌봄의 적극적인 주체임을 강조했다. 백인 중산층 여성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삶을 단지 취약계층의 삶으로만 보지 않으며 이주여성, 유색인 여성, 성소수자 여성들이 이미 주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돌봄에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가사노동에 임금을’ 투쟁은 이후 돌봄문제를 둘러싼 급진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2000년대 들어 세계화의 부정적인 영향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가사노동 임금투쟁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2000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전세계 60개국 이상의 여성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세계여성파업’을 제안했고, ‘임금, 연금, 토지 및 기타 자원에서의 모든 돌봄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과 ‘제3세계의 부채 탕감’ 방안을 요구했다. 세계여성파업 네트워크는 이후로도 돌봄노동자들에 대한 생활임금 지급,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성노동자들의 권리 등을 주장했으며, 2019년에는 유럽녹색뉴딜(GNDE, Green New Deal for Europe)을 요구하는 단체들의 연합에 동참했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가사노동 임금투쟁을 해온 셀마 제임스(Selma James)와 함께 GNDE 플랫폼 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했는데, 가사노동에 한정되었던 돌봄의 정의를 인간과 지구, 생명 전반을 돌보는 활동으로 확장하면서, 필수적이지만 무급 혹은 저임금으로 이루어지는 돌봄노동에 대해 돌봄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을 보고서에 포함시켰다. 2020년 폴란드에서도 가사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논의되었고, 유럽연합의 ‘양성평등 전략 2020~25’에서도 탈성장 전략과 돌봄의 연계가 고려되었다.6 현재 세계여성파업운동은 빈곤 해결, 복지삭감 반대, 아이를 돌보는 양육자들을 위한 생활임금 혹은 돌봄소득 지급, 가사노동자의 권리 보장, 강간 및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안전망 마련, 인종·장애·퀴어 차별 반대, 성노동 비범죄화, 이주 돌봄노동자의 권리 보장 등을 내세우고 있다. 요컨대 돌봄노동에 대한 단순한 가치 재평가를 넘어 현대 복지제도의 재설계와 성평등, 글로벌 불평등 개선 등으로 의제를 확대하는 중이다.
2000년 세계 여성의 날에는 한국도 세계여성파업 캠페인에 동참하며 같은 의제를 공유했다. 당시 나왔던 구호들은 여전히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이슈로 남아 있는데,7 기후위기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그 중요성이 더욱 증가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위기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소비나 이윤추구 행위에는 가치를 부여하면서, 생태계를 돌보고 사회를 생산·유지해온 재생산노동은 평가절하해온 체제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봄문제는 단지 돌봄 부담을 줄이거나 결핍을 해소하는 운동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전환을 꾀하는 운동이며, 지구적인 불평등 해소나 환경정의의 실현과 함께 가는 운동이기도 하다.
돌봄을 위한 투쟁의 현재: 돌봄소득
그렇다면 돌봄을 위한 투쟁에서 현실적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돌봄에 대한 강조 이상으로 사회전환 프로그램을 내세우는 흐름은 많지 않고, 실질적인 정책 수단을 제시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따라서 ‘돌봄을 통한 사회적 전환’이 좋은 목표이긴 하나 구체적 수단이 결여되어 있어 막연하다는 비판이 이어져왔다. 이때 주요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돌봄과 결합한 탈성장 논의이다. 성장주의 탈피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련의 실천적 흐름을 이뤄온 탈성장론은 담론 형성 초기인 1970년대부터 자급과 돌봄의 가치를 강조해왔으며, 코로나19 이후에는 ‘돌봄 가득한(care-full) 탈성장’을 목표로 제시했다.8 이들은 코로나19가 복합적인 위기의 일부분이며, 이 위기를 계기로 돌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탈성장사회로의 전환을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칼리스(G. Kallis)를 비롯한 탈성장론자들은 사회전환의 핵심으로 ‘돌봄’과 ‘커머닝’(commoning)을 강조하는데,9 이때 커머닝이란 흔히 자원 공유 시스템 혹은 공유경제로 알려진 커먼즈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시민들이 커먼즈를 통해 자원을 얻고 공동체를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과정 전체가 커머닝인 것이다. 탈성장론자들은 돌봄과 커머닝을 통해 더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을 것을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 중 돌봄소득(care income)과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에 대한 제안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성장론에서 돌봄이 언제나 중요한 가치였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논자들이 주장한 것은 보편적 기본소득이었으며, 돌봄소득이 직접 제시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 코로나19 이후인 2020년 보편적 돌봄소득 혹은 돌봄소득이라는 정책 대안이 등장했다. 일반적인 탈성장론에서 주장하는 보편적 기본서비스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목표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적정한 수준에서 안전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착취적인 임금노동에서 개인을 해방함은 물론 생태계에 해악을 미치는 생산·소비 체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문제와 생계의 문제가 대립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이 체제전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기본소득이라는 물질적 여건 마련이 긴요하게 여겨진다. 보편적 돌봄소득은 이러한 보편적 기본소득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제까지 무급 혹은 저임금으로 이루어져온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돌봄소득은 자신과 친족, 공동체를 돌보는 역량에 공통의 부를 투자하는 것으로 보편소득을 이해하며, 이를 통해 형평성의 구현과 연대가 촉진될 수 있다고 본다.
돌봄소득이라는 의제가 제시되는 과정에는 ‘페미니즘들과 탈성장연대’(FaDA, Feminisms and Degrowth Alliance)에서 활동하는 탈성장 페미니스트들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시장의 화폐가치에 따라 노동을 평가하고 생산 영역과 재생산 영역,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여성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온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사회재생산 과정에서 핵심적인 출산과 양육과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체제의 존속을 위해 여성에게 집중되고 비가시화되어온 현실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지금의 성장 위주 사회를 변혁하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탈성장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소득을 통해 여성과 남성의 고정된 성역할, 핵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돌봄의 현실, 이성애 정상가족에 기반한 재생산 행위들에 대한 변화까지 유도하고자 한다.
한가지 염두에 둘 것은 돌봄을 가시화하고 재평가한다고 할 때, 그 주장이 돌봄에 더 높은 시장가치를 매겨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탈성장 페미니스트들은 무급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돌봄노동을 국가 정책 차원에서 유급화하는 데 비판적이다.10 물론 현실적으로는 저평가되어 있는 돌봄노동의 임금 수준을 올리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돌봄의 시장가치를 높이고, 돌봄을 국가 책임으로 규정하면서 국가 지원 확대를 통해 돌봄을 사회화하는 전략은 삶의 전반적인 화폐화와 상품화를 증가시킬 뿐이다. 탈성장 페미니스트들은 복지국가 모델 역시 비판하며 복지국가가 모든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일반적인 경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20세기 서구의 특정한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한 것임을 짚는다. 이들은 복지국가 모델이 21세기에도 과연 실현 가능한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탈성장을 추구하는 견해에서는 서구의 복지국가·복지사회를 가능하게 한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대량생산·대량소비는 글로벌 남반구의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고 수탈하면서 이루어져왔고, 이는 결국 제국적 삶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복지사회를 꿈꾸면서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모두 제국적이라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복지사회에서 누리는 풍요롭고 안정된 삶은 자칫 제국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 있고, 현재 인류세(人類世)를 초래한 화석연료 기반 문명의 연장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돌볼 수 있는 시간, 돌볼 수 있는 역량을 위하여
한국의 경우 돌봄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점차 활성화되고는 있지만 돌봄소득은 여전히 낯선 개념이다. 그러나 개념 자체가 낯선 것과는 별개로 이미 돌봄에 대한 보상은 가정양육수당이나 가족요양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11 문제는 이를 탈성장론자들이 말하는 돌봄소득으로 볼 수 있는가이다. 돌봄소득은 돌봄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돌봄이 성장과 이윤을 위한 행위가 아닌 한 사회의 활동을 기획하고 이해하는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현행 한국의 돌봄 관련 수당들은 개별 수당의 충분성을 평가하기에 앞서, 돌봄을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로만 보고 있다는 점에서 돌봄소득의 목표와 배치된다. 돌봄의 책임을 일차적으로 가족에게 부여함으로써 가족 위주 돌봄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며, 그 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기보다 타인을 돌보는 노동에 비해서도 낮게 보상함으로써 돌봄의 상품화를 부추긴다.12 돌봄소득과 유사하지만 사회전환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뚜렷한 정책인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국가가 돌봄에 수당을 지급한다고 해서 돌봄소득이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시장이 아닌 국가에 의한 보상이라 해도 돌봄노동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사회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수당은 돌봄소득의 의도와는 반대효과를 낼 수도 있다. 한국처럼 가족 규범이 강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돌봄소득이란 나와 타인, 가족, 나아가 생태계까지 책임있게 돌보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돌봄을 행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돌봄의 성별 쏠림 현상을 개선하고 돌봄의 책임과 권리를 민주적으로 배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를 통해 돌봄이 가능한 사회로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돌봄에 대한 소극적 태도 못지않게 장시간 노동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서 임금노동 종사자들 대부분은 돌봄에 할애할 시간이 부족하다. 따라서 한국에서 돌봄이 더 민주적으로 이루어질 방도를 찾고자 한다면 돌볼 수 있는 시간의 확보, 이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시간의 감축이 핵심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노동시간 감축을 돌봄문제로부터 사유하여 돌봄소득과 연결짓는 방식은 더욱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간 노동시간 감축 논의는 주로 유급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그 혜택이 정규직 일부 직종에 국한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돌봄소득은 노동시간 감축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 출발이 돌봄을 감당할 시간의 확보라는,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할 일에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돌봄소득에 대한 정책적 논의가 더 빨리 확산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돌봄소득은 그 주창자들 역시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 제시하는 바가 많지 않고, 각 나라의 현실에 맞춰서 고안되어야 한다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모호하다. 이때 참조할 수 있는 모델 가운데 하나는 OECD 대부분 나라에서 시행 중이며 한국에서도 2022년부터 시범적으로 도입된 ‘상병(傷病)수당’이다. 상병수당은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해 일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소득상실을 보전하여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이다. 상병수당은 현재 취업자, 그중에서도 소득 하위 50% 이하 취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향후 그 범위를 확대하고 지역의료보험 가입자들을 포괄해 자영업자도 해당되게 한다면 시민들의 보편적인 권리로 확장되어 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13 나아가 사회보험이 아닌 공공부조 방식으로, 즉 조세로 재원을 마련해 상병수당을 운영하는 나라들은 노동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포괄한다는 특징이 있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아프면 쉴 권리’, 즉 ‘쉴 시간’을 확보하는 데 상병수당의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상병수당은 산업재해가 아닌 업무 외 사유로 인해 발생한 부상·질병일 경우에 노동자들이 장기휴가를 쓰기 어려운 점, 산업재해가 아니라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득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 빈곤에 처할 수 있고 질병이 만성화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 정책이다. 현재로서는 수당의 보장 일수나 범위에 제한이 있지만, 이 모델을 확장해 취업 여부와 무관하게 아픈 사람은 쉬고 돌보고자 하는 사람은—그 대상이 누구든, 무엇을 돌보고자 하든—돌볼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할 수 있다면 현행의 돌봄 관련 수당보다 돌봄소득의 상에 훨씬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윤석열정부의 노동시간 확대 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사회적 논란을 돌봄사회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시간 감축과 돌봄소득을 통한 돌봄의 확대가 복합위기에 맞서는 최일선의 문제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기본소득 논의가 성별화된 삶이 돌봄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데 대한 고려 없이 좋은 삶과 고루 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전을 큰 틀에서 이야기한다면, 돌봄소득 논의는 한발 더 나아가 그러한 사회의 핵심은 돌봄의 실현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돌봄이 가능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자고 요청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봄소득이라는 용어나 정책 그 자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회적으로 더 나은 돌봄을 가능하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이 돌봄에 참여하게끔 할 수 있는가를 구체화할 필요성과 그 긴급함이다. 그 용어를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그것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 속에서 삶의 본질을 성찰하게 한다. 살 만한 사회를 위한 우리의 희망이 타인이나 지구 위에 함께 살아가는 뭇 존재들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곧바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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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고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최일선 공동체를 위하여」,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31면.↩
- 「간호인력난 심해지는 국립대병원…2곳 중 1곳은 정원도 못채워」, 청년의사 2022.9.30; 「의사인력 확충 대책은 지지부진…PA 간호사 활용만 쑥쑥 늘어」, 라포르시안 2023.3.7 참조.↩
- 이하 이 글의 내용은 졸고 「‘돌봄소득’(Care Income)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새로운 시민운동의 가능성」, 『NGO연구』 제17권 제2호, 2022의 일부를 보완·축약·변용한 것이다. ↩
- ‘여성 파업의 날’에 대해서는 “Women’s Day Off 1975,” The Women’s History Archives 참조(kvennasogusafn.is/index.php?page=womens-day-off-1975).↩
- ‘가사노동에 임금을’ 운동의 기록으로는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김현지·이영주 옮김, 갈무리 2017;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3 참조.↩
- Dafne Calvo et als., “Towards a Critical Understanding of Social Networks for the Feminist Movement,” Tripodos No. 50, 2021 참조.↩
- 가령, 여성노동자회·전국여성노동조합 「2022 20대 대선, 여성노동자가 제안하는 대선의제: 성평등 노동 가치 실현을 위한 사회적 대전환을 위하여」, 2021 참조.↩
- FaDA, “Collaborative feminist degrowth: Pandemic as an Opening for a Care-full Radical Transformation,” www.degrowth.info 참조.↩
- 요르고스 칼리스 외 『디그로쓰』, 우석영·장석준 옮김, 산현재 2021 참조.↩
- Corinna Dengler and Miriam Lang, “Commoning Care: Feminist Degrowth Visions for a Socio-Ecological Transformation,” Feminist Economics Vol. 28 No. 1, 2022 참조.↩
- 가령 어린이집·유치원에 가지 않고 가정에서 양육되는 영유아가 있을 경우 월 10~20만원의 가정양육수당이 지원되고,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 등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고령의 가족을 가정에서 돌볼 경우 월 22만 3천원의 가족요양비가 지급된다.↩
- 김영·김수정 「팬데믹 시대의 보육노동: 오래된 불평등과 새로운 위험」, 『페미니즘연구』 제21권 제2호, 2021 참조. ↩
- 윤성원 「상병수당 시범사업 시행의 의의와 향후 과제」, 『이슈와 논점』 제1980호, 국회입법조사처 2022.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