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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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K민주주의의 약진 | K 담론을 모색한다 ⑤

 

김대중사상과 K민주주의

‘변혁적 중도’의 시각에서

 

 

이남주 李南周

정치학자,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저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공저서 『21세기의 한반도 구상』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중국, 새로운 패러다임』 『백년의 변혁』, 편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lee87@skhu.ac.kr

 

 

1. 왜 김대중사상인가

 

김대중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노선을 계속 다르게 설명했다. 1956년 민정당 창당을 추진하면서는(정식 창당 시 당명은 ‘공화당’) 당의 노선을 ‘합리적이고 건전한 진보주의’로 설명했지만, 1960년대 소속했던 민주당과 신민당의 노선은 각각 ‘전진적 보수주의’와 ‘반공 자유민주주의 정당’으로 설명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 출마를 결정하고 자신이 주도해 창당한 평화민주당에서는 ‘온건개혁주의’를 표방했고, 1991년 야권연합으로 창당한 신민주연합당의 노선은 ‘중도개혁주의’라 했다. 1995년 7월 정계 복귀 선언 후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중도’로,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0년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은 ‘국민적 개혁정당’으로 규정했다.

진보, 보수, 중도 등 이념적 스펙트럼을 분류하는 개념들이 모두 동원된 여러 노선 사이에 일관성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주요한 사회적·역사적 자취들을 살피는 데 있어 주목해야 할 것은 텍스트들의 형식논리적 정합성보다 해당 텍스트들이 당시 역사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새로운 차원의 일관성, 즉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사유의 정수’여야 할 것이다.1 지속적으로 변화한 김대중의 정치적 수사 이면에는 다른 현실정치가들에게서 보기 힘든 일관적 태도와 체계가 존재한다. 그 점에서 김대중의 사유와 실천을 하나의 독자적 사상으로서 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특히 김대중사상은 민주주의를 기초로 구성되었던 만큼 오늘날 K민주주의 논의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미 김대중을 사상가로 조명하는 시도도 있었다.2 신앙과 양심, 정치노선, 정치철학, 민주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 등 다양한 각도에서 김대중사상을 조명한 것이다. 그중 특히 김대중의 중도주의, 중도개혁주의에 대한 논의3는 김대중사상의 큰 흐름을 조망하는 데 도움이 될 법하다. 다만 김대중사상에서 중도와 급진주의 사이의 대립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그 사상의 전모를 알기보다 편향적 이해로 치우칠 염려도 있다.

김대중이 비현실적인 급진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비판했던 것은 사실이나 4 그 자신이 급진주의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은 면도 주목해야 한다. 이를 간과하고 급진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만을 강조하면 한국현대사에서 그가 보여온 사상과 실천의 의미를 왜소화하게 된다. 김대중사상과 ‘제3의 길’(1994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제안했으며 중도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이념) 등 서구 담론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도 그가 한국과 한반도에서의 실천을 기초로 하여 새롭게 만들어간 지평을 소거시키는 문제가 있다. 정당 노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표현들은 변화했지만, “보수적 자본우위의 방향이나 또는 한국의 현실적 여건을 무시하는 관념적 사회주의를 거부”(「민정당의 기본방향」, 『월간정경』 1956년 4월 창간호)5한다는 지향부터 새정치국민회의의 중도성에 대해 “보수정당과 혁신정당 사이의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말』지와의 인터뷰」, 『말』 1995년 9월호)으로 칭하는 데까지의 이면에는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태도 즉, 급진주의를 한국의 상황에 맞게 소화하고 실행 가능하게끔 하고자 하는 분투가 자리하고 있다. “이상주의가 소거된 ‘중도’가 아니라, 이상주의나 급진주의의 가능성을 유지하면서도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시도”6인 ‘변혁적 중도’는 김대중사상의 이러한 정수를 더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변혁적 중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극복에 대한 의지를 변혁성의 기초로 삼는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역사적 체제로서 여러 성취를 만들어낸 동시에 인류 공동체의 지속을 위협하는 메커니즘도 만들었다. 그 메커니즘을 극복하는 것이 근대 변혁운동의 기본방향이다. 다만 변혁적 중도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혁성 실현의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바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극복을 그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분단체제극복과 결합하지 않는 급진주의는 비현실적 노선으로 전락하기 쉽고, 분단체제극복을 포기한 개혁주의는 개혁이라는 목표도 끝내 달성하기 어렵다.7 이 글은 김대중사상이 K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와 그 과정에서 변혁적 중도의 발상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김대중의 자본주의 인식

 

김대중이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해방 1년 후에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중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답변이 70%(6,037명)에 달했다.8 김대중 역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했고, 소련식 사회주의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사회주의 이념에 담긴 가치, 예를 들면 ‘정의’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휴전 직후에 발표한 글에서 이와 관련한 구체적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죄악적인 착취와 지배를 자행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일방, 우리의 실정이 용납지 않고 겸하여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능률의 후퇴를 면치 못하는 사회주의 자체도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 결국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는 이를 어디까지나 존중하되 종래와 같은 자본만의 우위 지배를 단연 배격하고 노동, 자본, 기술의 3자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그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도 노동자와 기술자 역시 응분이 참여가 허용될 것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노동운동의 진로」(『사상계』 1955년 10월호)

 

이러한 방향은 이후 1960년대까지 수정자본주의나 대중자본주의로 설명되기도 했다. “계획성(국유국영)을 가한 수정자본주의(협동경제)의 방향을 지향하는 것”(「민정당의 기본방향」)이 지당하다고 말하는 데 이어 다음과 같이 대중자본주의도 언급된다.

 

대중자본주의는 우리 스스로의 주장이다. 인민자본주의는 물론 아니요, 현대적 의미의 수정자본주의도 아니다. 우리의 경제, 우리의 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원생적으로 전개시켜나가야 할 우리 스스로의 자본주의인 것이다. 한국경제의 실정으로 볼 때 계급구조의 양극화를 자아내는 독점자본주의적인 제모순성을 수정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빈곤의 악순환부터 해결지어야 할 수정 이전의 책임도 있다. 우리의 대중자본주의는 수정 이전의 단계에서 수정적인 내용까지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단순한 수정자본주의가 아닌 독보적인 우리들의 진로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대중자본주의의 진로」(『비지네스』 1966년 6권 3호, 강조는 인용자)

 

대중자본주의라는 개념에는 사민주의의 영향도 엿보이나, 사민주의의 틀에만 갇힌 것은 아니다. 특히 위 글의 “원생적으로”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은 당시 서구의 수정자본주의를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상황에서 그 폐해에 대응하고자 나온 개념으로 보고,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은 서구와 다른 자본주의 발전경로를 걸어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제시한 ‘대중경제론’ 역시 이러한 모색의 결과이다.

 

비록 몇몇 나라에서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그 고도성장에는 근대경제학의 이론이 크게 공헌했다고 하나 고도성장이 곧 대중생활의 고도향상이 아니라는 현실을 목도할 때 절대다수인 대중은 여전히 소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학도 부재 상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여기에 또한 ‘대중경제론’이 제창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 대중경제는 사회의 실질적인 생산력인 근로대중의 지혜와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케 하는 동시에 그들의 복지를 ‘제도적으로’ 그리고 ‘사전적으로’ 보장하는 경제 시스템을 형성하고 그들의 권익을 영속적으로 보장, 확대하는 일련의 경제정책을 말한다.

——「대중경제를 주창한다」(『신동아』 1969년 11월호, 강조는 인용자)

 

“사전적으로” 보장하는 경제 시스템의 핵심적 내용은 “국가의 개입에 의한 자본에 대한 약간의 간섭과 근로자의 경영 참여가 허용되어야 할 것”(「70년대의 비젼: 대중민주 체제의 구현」, 『사상계』 1970년 1월호)으로 요약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 김대중은 자유경제와 시장경제를 더 강조했다. 그렇다 해도 자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은 아니었으며 현실 사회주의와 고전적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모색은 계속되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5대 공약 중 하나로 ‘정의경제’를 제시했고, 1988년 16년 만의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는 “20세기의 세계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와 정의의 한묶음 실현’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고자 꾸준한 전진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입장을 천명했다. “자유경제의 목적이 정의의 실현에 있을 때만 그 의미가 있습니다. (…) 평화민주당과 저는 자유경제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정의있는 자유경제만을 지지합니다.”(「제13대 국회 제142회 제11차 본회의: 1. 국정에 관한 교섭단체 대표 연설」, 1988.6.29)

그가 탈냉전기에 강조한 시장경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애덤 스미스(A. Smith)나 리카도(D. Ricardo) 등이 생각했던 자본주의에 비하면 거의 자본주의를 포기한 새로운 경제체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본주의가 “계속적으로 자기혁신을 단행하여” “정치적 민주주의체제와 결합”해온 모습을 평가하는 부분이나(「20세기 회고와 21세기의 전망」, 『월간중앙』 1994년 1월호)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도전만 수용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오는 도전도 계속 수용해서 오늘날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버리는 탈자본주의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9라는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실패한 자본주의 극복에의 지향이 담겨 있다.

김대중의 이러한 모색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단연 민주주의이다. 김대중에게 민주주의는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를 넘어 공동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이기도 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논의는 항상 민주주의의 경제적·사회적 차원과 분단극복을 위한 평화적 차원을 포함한다.

 

 

3. 김대중의 민주주의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1950년대 김대중은 관료경제와 특혜경제를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불평등·불균형을 확대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지적하면서,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60년대 말에 대중경제론을 제기하면서도 무엇보다 민주주의체제의 완성이 선행조건이 되어야 하며 “대중경제는 대중의 복지를 제도와 정책 면에서 실현하려는 것이므로 대중의 의사가 권력으로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대중경제를 주창한다」).

그는 민주주의에 기초한 경제발전 전략으로 내포적 발전과 균형발전을 강조했으며 중소기업 육성, 농업 발전, 지역균형 등을 구체적 정책으로 제시했다. 그 연장선에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치를 내세웠음은 물론이다. 이런 발전방식이 민주주의의 질적인 진전에도 더 적합했겠지만, 역사 속에서 이 경로는 봉쇄되었다. 대기업 주도, 수출산업 중심의 발전전략은 경제의 양적 성장을 불러오는 동시에 여러 불균형 또한 초래했고, 이것이 현재 우리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고 불만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당시 김대중이 구상한 경로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폄훼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경제의 기존 성장방식이 한계에 직면한 오늘날 더욱 유용하게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다.

탈냉전 이후, 특히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김대중의 경제정책은 성장에 더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IMF 위기도 주요한 원인이지만,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달라진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국가전략을 추구해야 했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이때도 민주주의의 중요성은 여전히 강조되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 공산주의가 진 것이고, 어떤 것은 스스로 붕괴한 것이라고 봅니다.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다 같이 민주주의를 하면 성공을 하고, 민주주의를 안 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다 실패를 했습니다”(「노동운동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척도」, 『사회평론』 1992년 1월호)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로 강조된다. 어떤 사회체제든 민주주의와 결합해야만 추구하는 바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앞에서부터 살펴보았듯)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때 자본주의가 새로운 지평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통찰로 이어졌다. 이는 자본주의체제를 새 체제로 대체하고자 시도했던, 그러나 실패했던 기존 혁명 모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사유로서도 의미가 있다.

김대중은 탈냉전과 함께 진행된 사회경제적 변화가 경제와 민주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더욱 강화하리라고 인식했다. 1990년대 들어서 그는 정보화 시대, 첨단과학의 시대로 지구적 차원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개발과 기술교육, 다품종 소량생산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소기업 육성, 대등한 노사관계 수립 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정보 흐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민주정치가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했다(「제13대 국회 제151회 제12차 본회의: 1. 국정에 관한 교섭단체 대표 연설」, 1990.11.23). 대통령 재임 시기에 정보통신산업 및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친 것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다. 한국 민주화의 원년인 1987년 1인당 GDP는 3,554달러(2022년 가치 기준)이다. 이는 2022년 세계은행 국가 분류에서 중하위소득 국가의 수준에 속한다. 한국이 중상위소득 국가 단계를 거쳐 고소득 국가로 진입(2007년)한 것은 민주화와 함께 진행된 변화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선순환을 추구하는 김대중의 사유와 실천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은 경제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일각의 주장이나 박정희시대의 국가발전 모델에 대한 과도한 신화화가 근거없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11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안보논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김대중의 분투에서 대면한 가장 큰 벽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역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남북관계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방증했으며 김대중은 이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란 남한의 민주세력에 의한 북한의 해방에 있음”(「북한해방과 남한의 노동자」, 『신태양』 1957년 10월호)이라는 주장에서 엿보이듯이 1950년대 김대중은 북한을 협력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극복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이때도 방점은 단순한 남북 진영대립이 아닌 남한의 민주세력 형성과 강화에 있었으며, 북한과의 대결을 민주주의 억압에 활용하는 정권의 행태를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했다. 이후 1960년대 후반 남북관계에 대한 김대중의 접근법은 적극적 협력 방향으로 변화했고,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첫 기자회견에서 남북교류와 4대국 안전보장 방안이라는 획기적 제안을 했다.

 

70년대에 통일이 이루어질 전망은 크지 않지만 그러나 지금까지와 같은 폐쇄적 무거래 상태는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북간의 서신교환·기자 교류·체육 경기 등 비정치적인 직접 접촉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민당의 외교는 전쟁을 억제하고 민족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데 비중을 둘 것입니다. 우리는 북괴가 지금까지의 선전이 진실이라면 남북한은 서로 전쟁에 의한 통일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며 간첩과 테러분자를 침투시키는 것을 일체 지양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를 수락하도록 주장할 것입니다. 동시에 미·소·일·중공 등 4대 국가에 대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를 공동으로 보장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희망에 찬 대중의 시대를 구현하자」(1970.10.16)

 

이러한 변화에는 닉슨독트린과 미중화해에 따른 진영대립 완화가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지만, 김대중이 일찍부터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이 더 긴요하게 작용했다. 박정희정권은 이 주장을 김대중에 대한 용공공세에 활용하는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의 제안을 정부 정책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물론 박정희정권의 이러한 행보가 통일에 대한 진지한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데 통일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도 곧 드러났다. 이후 김대중은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며 통일의 길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해나간다.

 

한반도에 있어서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방향을 나는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1단계는 남북간의 전쟁 억제와 긴장 완화를 위하여 총력을 다하는 문제입니다. (…) 제2단계로는 남북의 교류를 과감하게 실시해나가는 문제입니다. 이는 일부 제1단계와 병행해서 실천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성과 있는 교류는 남북간의 부전 보장이 확신된 연후에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 제3단계는 정치적 통일의 단계입니다.

——「“닉슨”의 중공방문과 한국의 장래」(1972.2.24)

 

1972년 일본외국특파원협회 연설에서 이 발상은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론으로 정리된다.12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통일 단계 외에 구체적인 통일의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는데, 같은 해 해외망명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여 미국 내 주요 인사들에게 전한 영문 팸플릿 자료에서 그 단초가 보인다. 유신체제의 문제점과 한국 민주화의 필요성에 대한 호소가 담긴 가운데 통일방안도 언급된 것이다.

 

우리 민족은 27년 동안 서로 다른 정치적·사회경제적 제도하에서 분단된 상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남북한이 통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대신에 ‘1민족, 2정부’와 같은 연방제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한반도 상황과 나의 신념(Korean Situation and My Belief)」(1972.11)

 

얼마 뒤에는 이에 대해 “낮은 단계의 연방적 통일을 통일의 범주에 넣습니다. 남북이 서로 간에 외교·국방·내정의 독립권을 각자 가지면서 (…) 그렇게 한다면 시간이 그다지 걸리지 않습니다”라는 설명도 덧붙였다(「‘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 강연」, 1973.2.7). 2000년에 성사된 6·15남북공동선언 2항의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합의의 주요 내용이 이미 1970년대 초부터 구상된 것이다.13

196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이 남북관계 발전을 중요한 의제로 제기한 것은 분단체제극복이라는 변혁적 과제를 수행할 때 한국의 정치·사회 개혁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변혁적 중도의 취지에 부합한다. 다만 1970년대 해외망명 시기부터 강조한 ‘선민주-후통일론’ 혹은 ‘선민주론’은 얼핏 변혁적 중도의 취지와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때도 기계적으로 ‘선민주-후통일론’을 이해하기기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선통일을 주장하며 북한과 접촉할 시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었던 당시의 정치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단번에 완성되지 않으며 계속 심화되고 발전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민주와 통일을 선후관계로만 볼 수 없는 면이 명확해질뿐더러, 남북관계의 진전은 민주주의 진전과 삶의 질 제고와도 맞닿아 있는 중요한 문제다. 김대중도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집권 시기 남북관계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다른 정치지도자와 달리 통일문제를 지속적으로 강조한 이유에 대해 김대중 자신은 “우리 민족은 북쪽이나 남쪽이나 독재 밑에서 시달려왔는데 이런 독재가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분단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치가 통일 지향적이 되지 않고는 남북 내부에 민주주의도 없고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수도 없어요”(「『월간조선』과의 인터뷰」, 『월간조선』 1991년 7월호)라고 답하기도 한바, 김대중과 변혁적 중도의 정신이 결합되는 지점을 드러낸다.

1987년 6월항쟁과 민주주의의 진전, 탈냉전 시기 진영대립의 해소, 특히 미중관계의 변화는 김대중에게 있어 통일에 대해 더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여건들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할 법했고, 1993년의 한 강연에서는 “이제 냉전이 끝나고 고착의 족쇄는 풀렸습니다. 우리 통일은 이제 처음으로 당위성만이 아닌 가능성까지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합니다. (…) 통일만이 우리의 살길이요, 선진국가로 등장할 수 있는 길입니다”라고 적극적으로 발언했다(「세계사의 흐름과 동북아의 정세」, 1993.9.8).

물론 분단체제극복과 통일의 길은 김대중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에는 그의 햇볕정책에 대한 공격도 거세졌다. 그러나 그의 통일방안의 핵심인 ‘1민족, 2(독립)정부’라는 방향은 남북관계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지금도 여전히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로 향하는 중요한 좌표가 되고 있다.

 

 

4. K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

 

김대중의 사유가 한국적 현실에 맞는 변혁적 지향과 한국적 현실에 맞는 실현의 모색을 담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민주주의, 정의, 평화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과제로 제시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K민주주의의 힘과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결합에서 나오는 것이다. K민주주의가 열어가는 새로운 지평에 있어 특히 주목해 살펴볼 부분은 김대중이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벼렸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소개하고 싶은 글이 있다. 1975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특성에 입각한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설: 민족에 대한 경애와 신뢰(民族への敬愛と信頼)」14이다. 여기서 ‘한국적 민주주의’란 박정희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용어로서, 당시 박정희정권은 남북대결이 진행되고 있는 한 민주주의를 실시할 수 없다는 식으로 유신체제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에 김대중은 민주주의 실현에 있어 우리 민족은 이미 부족함이 없다고 역설하며 문민 우위, 평화주의, 교육에 대한 높은 열의 등 풍부한 민주주의적 전통과 자원이 우리 안에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동학혁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눈길을 끈다.

 

모든 역사적 사실은 성공했다고 하여 반드시 위대한 것이 되지 않으며, 실패했다고 하여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동학혁명은 비록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이 나라의 모든 역사를 통해 그 어떤 성공한 사실보다도 높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념 그대로인 인내천 사상, 국민의 대부분이며 전부인 농민계급의 해방과 복지를 위한 투쟁, 대중을 수탈·착취하는 부패한 양반계급에 대한 도전, 그리고 민족독립을 침해해 들어온 외세와의 대결 등 어느 것 하나라도 오늘날의 우리에게 교훈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와 민족독립을 위한 모범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동학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이 민족의 위대한 자질과,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동학혁명에 대한 놀라운 평가이기도 하거니와 K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일찍 선취한 선구적인 사유였다. 이러한 인식은 1990년대 기든스(A. Giddens)의 표현을 빌려 강조한 ‘지구적 민주주의’로도 이어진다. 다음 글에서 명확하게 언급되는 것처럼 지구적 민주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의 확장이 아니며, 그 한계를 넘어서는 지평을 가리키고 있다.15

 

문제는 영국이나 프랑스·일본·미국 등 자기들로서는 그만하면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는 나라들이 바로 아프리카나 중남미·아시아 등 약소국가의 여러가지 희생 위에 잘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국내에서만 민주주의를 하고 밖에 나가서는 민주주의를 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문제인 남북문제인 것입니다. 절대다수의 인구를 점한 남쪽 국가들이 소수의 북쪽 국가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수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자기 국경을 넘어서 이웃과 세계를 포함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 내 국민의 자유, 내 국민의 복지만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이제 한계에 온 것입니다.16

 

1994년 싱가포르 전 총리 리 콴유(李光耀)와의 논쟁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리 콴유가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며 서구 민주주의를 비판한 반면 김대중은 발전된 서구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옹호했다는 식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저개발국가들을 포함한 모든 국가 간에도 자유와 번영과 정의를 도모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출해내야 한다”는 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김대중은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지향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로 야기되는 사회적 교란에 대해 서구의 문화를 희생양으로 삼기보다는 아시아 사회의 전통적 장점을 찾아내어 그것이 어떻게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좀더 합당한 일이다”라며 아시아 문화나 가치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빌미로 삼을 것이 아니라, 더 넓고 높은 차원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자원과 가능성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문화란 운명인가(Is Culture Desitiny?)」, Foreign Affairs, Vol. 73, No. 6, 1994). “정신적 일대혁명을 수반하는 민주주의는 수천년 내 모든 천하를 구별없이 포용해왔지만 자연과 일체 속에 살아온 사상적 토양을 가진 아시아에서 창조되고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20세기 회고와 21세기의 전망」).

물론 이같은 지구적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제국주의와 함께 발전한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색은 아이디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후에도 국민 혹은 대중의 역량에 대한 신뢰를 일관되게 강조했는데, 이는 오늘날 현실에서 돌아보건대 값지고 귀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2008년 촛불시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모색, 특히 엘리트의 과두지배 수단이 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중요한 자원과 의미를 발견해내기도 한다.

 

촛불시위에는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옛날 그리스 아테네에서 했던 그런 직접민주주의인 것이지요. 촛불시위에서 중요한 것은, 직접민주주의 상황에서도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거예요. (…) 그렇게 평화적으로 계속 나가면 앞으로 우리 정치에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정치는 입법·행정·사법 3부가 이끌고 시민단체가 정치에 영향을 줬는데, 이제 이런 촛불문화제에 범국민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정치에 많은 영향을 행사할 거예요.

——「민주적 시장경제와 평화공존에의 여정」(『역사비평』 2008년 가을호)

 

 

5. 사상에서 현실로

 

김대중의 사상은 국정의 책임을 분담해야 하는 야당 지도자는 물론이고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으로서도 재임한 그의 실천과 연결지어 평가될 수밖에 없다. 야당 지도자일 때는 재야 및 운동권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고, 대통령으로서는 IMF 위기극복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확산하는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노동시장 유연화의 수용은 가장 아픈 부분이다.

이러한 김대중사상의 한계에 대한 논의도 K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보수적인—정확히 이야기하면 수구적인—환경을 고려하지 않거나 지구화의 영향 및 그 지구화가 부정적으로 작용하며 초래된 IMF 위기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의 실천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생산적 논의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김대중은 민주노총 합법화 등을 통해 노동자 권리를 강화하고 복지제도 구축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한 부작용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이러한 정도로는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의 한계를 이야기할 때는 당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변혁론을 진보진영에서는 제시했는가, 혹은 지금은 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 역시 뒤따라야 한다. 한국현대사의 험난한 여건 속에서 김대중이 진전시키고 이룬 성과를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 성과가 상당부분 변혁적 중도의 정신이 잘 발휘될 때 가능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K민주주의는 김대중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직면하지 않았던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 힘의 대결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국제질서의 변화, 기존 경제성장 방식의 한계가 더욱 뚜렷해진 상황 등은 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K민주주의는 이러한 도전에 대응할 가능성과 자원을 부단히 만들어왔으며 촛불혁명은 특히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럼에도 혁명에 대한 주관적이고 협애한 인식에 기초해 촛불혁명을 폄훼하는 견해가 여전히 적지 않다. 촛불혁명 과정에서 나타나는,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힘을 모으기보다 촛불혁명을 부정하는 빌미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민중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켜왔으며 지금도 진전시키고 있다. 윤석열 집단의 내란이 성공하지 못했던 것도 그 방증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K민주주의가 제도로서만이 아니라, 인간해방의 지향을 견지하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내는 운동과 함께 발전되어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도 지치지 않고 새 길을 열어갈 K민주주의에 있어 변혁적 중도는 중요한 사상적 동력이며, 김대중사상도 이 도저한 흐름을 만들어낸 귀중한 자산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본지 60주년인 2026년을 앞두고 기획된 ‘창비 한국사상선’ 시리즈(2024년 1차분 10종 발간, 총 30종 발간 예정)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며, 학술적 기준으로 적용되기 쉬운 ‘철학’ 대신 ‘사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백민정·임형택·허석·황정아 대화 「한국사상이란 무엇인가: 창비 한국사상선 출간에 부쳐」,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271~72면.
  2. 황태연 외 『사상가 김대중』, 황태연 책임편집, 지식산업사 2024 참조.
  3. 황태연 「김대중의 중도정치와 창조적 중도개혁주의」, 같은 책.
  4. 예컨대 ‘3비론’(비폭력·비용공·비반미)이 급진주의 비판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반(反)’이 아닌 ‘비(非)’라는 표현을 쓴 데서 알 수 있듯 김대중은 급진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고, 폭력·용공·반미 등이 운동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초점을 두어 급진주의세력의 현실감각 결여를 비판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간 사회운동 및 담론계에서 특정한 변혁 모델을 절대시하며 혁명과 개량을 단순 대립시키는 관습적 시각을 보여오진 않았는지 지적할 필요도 있다. 변혁에 기여할 수 있는 이념과 실천을 ‘개량’으로 규정해 잠재력을 억압하고, 결과적으로 변혁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한 사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5. 이하 김대중의 글 일부는 김대중도서관 홈페이지의 ‘사료관 -전집보기’(www.kdjlibrary.org/president/activity)에서 재인용했다. 글의 제목은 해당 온라인 자료를 준용하고, 표기는 더러 알아보기 쉽게 바꾸었다. 김대중도서관 홈페이지의 이 자료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편 『김대중 전집 I』(전10권,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과 『김대중 전집 II』(전20권,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를 디지털 콘텐츠화한 것이다.
  6. 졸고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은 어떻게 만났는가」,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416면.
  7.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백낙청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320~22면 참조.
  8. 「군정청여론국, 조선국민이 어떠한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지 여론을 조사」, 동아일보 1946.8.1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대한민국사 제3권, https://db.history.go.kr/id/dh_005_1946_08_13_0070.
  9. 김대중·강만길 대담 「우리 민족을 말한다」,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한길사 1994, 82~83면; 강만길 『내 인생의 역사 공부/되돌아보는 역사인식』, 창비 2018, 218면.
  10. 이에 대해 김대중 자신은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방향은 일관되나 박정희정권 때는 불평등문제에 더 초점을 맞췄다면, 1990년대에는 국제 경쟁력 확보를 통한 경제성장에 강조점을 두면서 균형성장을 함께 추진하는 것으로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김대중 육성 회고록』, 한길사 2024, 426면.
  11. 국가간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 있어 포용적 정치제도를 갖추고 있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변수라고 주장한 대런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가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의 주장은 김대중의 민주주의-시장경제의 병행 발전론과 일치하는 지점이 많다. 그는 한국에 대해 “잠깐은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도 경제성장이 가능하지만, 지속될 수는 없다. 한국에서 경제성장이 지속된 것은 1980년대에 경제 성공을 보장하는 포용적 정치제도로 이행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A.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옮김, 시공사 2012, 16면.
  12. 이후 1991년 발표한 ‘남북공화국연합제 통일방안’에서 김대중은 ‘남북연합 -남북의 지역자치정부로 구성되는 연방-완전한 통일(여러 자치정부로 구성되는 미국식 연방제 포함)’의 3단계 통일론을 새로 제시했다. 1970년대 제시한 3단계는 남북공화국연합제 통일방안에서 3원칙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태평화재단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아태평화출판사 1995, 289면.
  13. 이러한 통일방안의 명칭은 연방제, 공화국연방, 공화국연합으로 변화했다. 김대중은 연방제의 형식이 다양하고 자신의 주장한 연방제와 북한의 연방제가 다르다는 점을 (자신의 연방제 제안이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보다 앞섰다는 점과 함께) 오랫동안 강조했지만, 연방제가 용공공세의 빌미가 되는 현실을 고려해 표현을 수정해간 것이다. 그렇지만 내용의 일관성은 유지했고, 오히려 북한이 점차 김대중의 방안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6·15남북공동선언의 2항에 대해서는 남북연합이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모두 남과 북에 국가로서의 권능은 다 인정하자는 것이 양측의 생각이지만, 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에 독립국가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북한 핵과 햇볕정책」, 2006.10.19).
  14. 이 글은 일본에서 출간된 강연·논문집에 수록되었다. 金大中 『民主救国の道 : 講演と論文』, 和田春樹·東海林勤編, 新教出版社 1980.
  15. 김대중의 민주주의론의 이러한 특성은 노명환 「김대중의 동서융합의 민주주의 사상」(『사상가 김대중』)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지구적 민주주의의 생태적 차원도 중요하게 다루었다. 다만 나는 민주주의의 보편성과 관련해 저마다 다양한 민주주의 요소들이 융합하는 과정 이전에, 혹은 적어도 그와 더불어 제국주의와 함께 발전한 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발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자 한다.
  16. 김대중·강만길 대담 「우리 민족을 말한다」,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52~53면; 강만길, 앞의 책 181~82면.

이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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