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시적 창조와 세상 만들기
시와 역사의 협동적 창조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되찾은 ‘님’ 의 시간」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1. 엇나간 문명과 시의 전환 능력
한 아이가 분석심리학자를 찾아온다.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제공받으며 자라왔지만, 언젠가부터 아이는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마음의 문제를 앓기 시작했다. 아이와 신뢰를 쌓으며 대화를 나누던 어느날 심리학자는 아이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는다.
“우리 집에는 종교가 없어요.”
일본의 분석심리학자 카와이 하야오(河井隼雄)의 임상사례이다. 하야오는 물질적 풍요에 있어서는 현대인이 거의 신에 가까워졌지만 실제로는 신에 가까워지지도 풍요로워지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덧붙여 아이가 말한 ‘종교가 없다’는 말은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에 가까운 질문을 내포하며, 어쩌면 아이의 투명한 눈으로 바라본 어떤 진실일 거라고 헤아린다.1 그의 분석이 일본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오늘날 군사적 정복 못지않은 심각한 상업적 정복에 처해 있는2 우리의 삶에 부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할 수도 있고, 개벽사상의 언어로는 ‘물질개벽만 있고 정신개벽이 없는’ 상황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적 경험과 변화에 깊은 관심을 두어온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뚜까르쭈끄(Olga Tókarczuk)의 언급도 여기 더할 만하다.
과거에 우리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비전을 구축했으며,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으로 향하는 길목 어딘가에서 우리는 그만 프롤레타리아화되고 말았다.3
이들의 말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통합적이고 초월적인 것들에 무심해졌으며 그로 인해 인간 존재가 얼마나 작아진 세계에서 위축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다만 하야오와 뚜까르쭈끄의 말은 우리가 결국 그러한 존재로 ‘귀결’되었다는 판정이기보다 어떻게 이 문제적 상황을 넘어가야 하는지를 묻기 위한 진단에 가깝다. 그렇다면 진단 이후가 중요하겠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 모두 예술의 창조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먼저 하야오는 예술이 단순한 표현으로서의 문화현상이 아닌 창조임을 강조하고, 자아의 ‘표현’과 자아 이상의 것을 동반하는 ‘창조’ 사이의 차이를 말한다.4 그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근대적 자아가 돈과 매뉴얼에 사로잡힌 한계를 자주 언급하는데, 이로부터 그가 말하는 창조가 자본과 근대과학의 질서를 넘어서는 일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올가 뚜까르쭈끄의 견해는 문학에 초점이 맺혀 있다. 그는 문학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문학만큼 상호 연결과 영향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에너지가 강력한 장르는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문학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이고 이를 통해 모든 개체 사이에 광범위한 교감과 연결이 생기며, 충만한 전체성에 대한 통찰을 실험할 수 있게 된다. 창조라는 역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진술을 문학의 창조성에 대한 설명이라 해도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5
문학에서도 시의 경우는 어떤가. 시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뀜’과 ‘변화’와 관련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시는 관례적 언어의 사용을 바꾸며 동시에 그 관례와 연동된 시선 또한 변화시킨다.
어둠 속에 사람이 몇 있었다
모두 숨죽인 채였으므로 깨진 해변을 피해 걸었다
바다에 빠진 잠수부를 구하기 위해
잠수부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누가 먼저 바닥과 가까워졌는지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첨벙 다음은 파도
더 거세졌을까
돌멩이 하나가 먼발치에서 무거웠다
—오산하 「wave」전문(『첨벙 다음은 파도』, 창비 2025)
시에는 한 생명이 위급한 순간 모두가 “숨죽인” 풍경이 그려진다. 해변도 파도도 돌멩이도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인간도 순간 다른 존재로 화하는 질적 변화를 겪는다. 깨어지고 뛰어들고 거세지고 또 무거워지는 연쇄적 파동 속에서 모두가 하나의 사건에 동참하고 있다. 이 존재론적 변화를 사소하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기대어온 언어와 감수성의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요구와 거룩하다고 부를 만한 숨결을 나누는 공동의 움직임이 있다. 이를 존재자들의 내외부 경계가 사라지며 만물이 자신의 바닥으로부터 새로운 존재성을 일으키는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떨까. 짧은 시 속에 내가 ‘나’로만 이루어진 폐쇄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물론, 세계가 새롭게 일어나는 순간의 강렬함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경이로운 전환과 더불어 “의미있는 변화”에 대한 의식 내지는 “역사의식”이 작동하고 그것이 또한 “역사의 과정에서 노력하고 싸워서 쟁취한 결과”6를 포착하는 시선에까지 이르는 경우를 우리는 더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젊은 감수성이 직관적으로 뚫어낸 세계의 장막 저편에 “오랜 시간”이라는 표현에 숨은 어떤 실감들이 더 꿈틀거릴 것만 같다.
2. 시간의 주인과 성숙한 시간의식
어떤 시는 다양한 삶의 결과 깊이를 배워 서로에게 연결되며 거듭나는 시간의 경험을 제공한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도약하기 위해 지금 이 시간이 역사의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지, 어떤 결정적 때에 이르렀는지를 살피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본래 시인들의 남다른 능력 중 하나가 ‘때’를 알아보는 힘이다. 가령 소월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진달래꽃」)이라고 적을 때 우리는 이별의 정한을 읽는 데 국한되기보다 어떤 때의 무르익음을 짚어낸 감각의 탁월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7 이육사의 「광야」와 「청포도」, 심훈의 「그날이 오면」,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등 이렇게 적고 보면 한국의 명시 중 적지 않은 경우가 때의 임박과 기다림을 말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봅니다 (…) 아아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 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 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진이정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부분
진이정 시집(『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초판 세계사 1994, 복간판 문학동네 2022)의 이 시는 「님의 침묵」을 에워싸고 있는 만해의 곡진한 어조에 재치를 가미해 변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제목부터 그러하듯 시와 시간이 어떻게 관계맺는지를 잘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시간은 그저 개인적인 것일 뿐 별다른 명명 없이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시간’의 ‘이름’에 대한 시인의 물음, 명명의 시도는 시대성을 둘러싼 공동의 언어지평을 새롭게 열고 세우는 행위이자, 역사라는 공동의 시간성을 예민하게 감각한 이의 것이라 볼 만하다. 시인은 복잡한 흐름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움직임”을 알아채고 저항의 기세도 확인하며 “지금 이 시간”의 필연성을 파악하는 일을 시도 중이고, 동시에 다음을 예측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만드는 작업 중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 잠시 얼굴을 내비치는 것들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향기”를 맡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일은 쉽게 존재를 확정할 수 없는 것들과의 관계맺음이 적극적으로 일어나는 현장에서 벌어진다.
저 독특한 감각은 오래전부터 시의 역능으로 일컬어져왔다. 회감(回感)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의 논의8도 그중 하나다. 한 철학자는 후썰(E. Husserl)의 논의를 경유해서 인류가 음악을 즐기는 경험능력—‘이미 지나간 음’을 가능한 한 길게 머물게 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음’을 가능한 멀리 예측하는 능력—을 설명하며 그것이 인류에게 죽은 자를 추모하고 초월자를 경외하는 문화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9 시에서 “누구의 허락도 없이”라는 구절이 쓰인 연유도 ‘나’로 수렴될 수 없는 존재의 힘과 선형적으로만 구축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이 작동하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을 두텁게 파악하는 시인들은 지금 눈앞에 분명히 보이지 않는 것도 여전히 흐름의 경과 중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더불어 아직 오지 않은 것들도 당겨 감각한다.
누군가는 시에서 “꽃”과 “별”과 “당신”과 “풀씨” 그리고 “파도” 등을 불러오는 연유를 의심하며 애수의 탐미라 쉽게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자신을 “노예”라고 칭하는 과도한 자기연민이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받아주소서”라 말하는 저 “노예”는 ‘당신’ 내지 ‘벗’과 함께 해방을 예비하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며, 나를 부수어 무수한 “거품”으로 만들지언정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로 가려는 “파도” 또한 “막다른 곳까지 몰”릴지라도 끝내 당당히 맞서던 노래10와 닮아 있다. 시가 결국은 노래이며, 민주화 과정 속 그 거리의 노래들을 기억하는 이라면 이 시의 꽃, 풀씨, 잎이 조금 다르게 다가올 만하다. 진이정에게 저 목록은 애수에 휩싸인 이미지의 소품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거리에서 노래로 불렀던 이름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드럽게 시작한 시의 어조가 간절한 느낌으로 전환되어 큰 존재를 호명하는 듯한 전개로 흐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시인의 작업은 새로운 차원의 삶을 내보이기 위해 ‘지금’에 불을 붙이며 결국에는 시간 속에서 행동을 감지하고 일으킨다. “움직임이시여”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인이 ‘움직임이 시’라는 전언을 새겨넣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곧 시간의 주인, 역사의 주인을 낳는 몸짓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삼십 갑자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중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제 난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기로 한 것이다
덧없음의 지우개 앞에, 난 흑판처럼 선뜻 맨살을 내밀 뿐이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하지만 못내 구체적인, 빵꾸 나오시 가게의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호이루와 몽키스패너들의 그 완강함이다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난 이제야 그 옛날의 십 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그 슬픈 돈을 내고 구체적인 박카스 한 병 사먹으리라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받으리라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진이정 「아트만의 나날들」 부분
진이정의 시는 의미의 위계를 허용하지 않는 다양한 차원의 들끓는 말들로 이질적인 삶의 부면들의 공존을 성공적으로 시화했다고 조명된 바 있다.11 나아가 그는 문화의 시간, 경제의 시간, 정치의 시간 등 다양한 시간성을 총체적으로 살피며 그것들의 역동적 절합을 관찰하는 데 능한 시세계를 거느린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아마도 시인의 남다른 역사의식이 작동했을 거라 생각한다. 인용한 시의 배경에는 화자가 특별히 애착을 가졌던 존재, 외삼촌의 죽음이 기원처럼 자리한다. 그가 사라진 이후 화자에게 세상은 현실감을 잃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마음이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과 “인생이 꿈”이라는 표현을 만들었을 것이다. 기댈 만한 세상의 정상적인 큰 질서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종교적 어휘를 가지고 정신의 고공비행을 일으키려는 찰나, 화자의 감각을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사물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허망함에 압도당하는 화자를 구제해 어떤 세계의 실감으로 인도한다.
“호이루”는 자동차 휠의 일본식 발음이고 “몽키스패너”는 폭행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 공구다. 시의 서두에는 미군부대 주둔지의 풍경과 병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미친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적산가옥 앞길을 지나/포대기에 업힌” 내가 외삼촌의 등에 실려가는 장면과 무엇엔가 취해 있는 외삼촌의 이미지에는 역사의 상흔이 압축되어 있다. 두 제국적 세력이 사람들의 삶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인은 그것이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망쳐놓았는가를 묻고, 또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짙은 무력감을 심어놓았는가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타박과 분노는 이 시의 일부에 불과하다.
두 연장이 뒹구는 장소인 “빵꾸 나오시 가게”에서 ‘나오시’는 수선(修繕)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우리는 저 묘한 조합의 명칭으로부터 이상하게도 상흔을 자기의 것으로 감당하고 책임지는 삶의 태도를 환기하게 된다. 완강한 듯 보이는 현실의 상처는 그것을 수선하는 자리에서 기세를 잃고 물러난다. 그날그날의 삶 속에서 제국적 힘을 물리치려 고투하는 현장이 거기 있을 것이다. 시의 전개가 이를 증명하는바 상처를 수선하는 태도는 초월적 영혼에 기대지 않는 당당함을 불러온다(“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영혼의 구걸 없이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 당당한 지불행위를 하자, “인생이 꿈”이라던 관념적 허무의 자리가 구체적인 슬픔의 자리로 탈바꿈한다. 지불 없이 누린 허무맹랑한 “나라는 물건”이 사라지고 비로소 “각성”한 ‘나’의 날이 열린다. 이 시는 지난날들로부터 좋은 것은 취하고 불편한 것은 물리는 태도와는 거리를 두고 지금 여기에 흘러든 모든 현실을 감당하고 책임지며 거듭나는 자리를 그린다. 지금 여기만이 현실이 아니라, 지금 안에서 작동 중인 “그 옛날의” “슬픈” 역사까지 모두 현실이라는 성숙한 시간의식이 있다. 또한 수선이 곧 창조이며 수선하는 일상이 나날의 새로운 시작을 빚는 거룩한 작업이라는 깨달음도 기억해둘 만하다.
3. 어떤 죽음 그리고 그다음은?
“기억과 희망이 현재라는 순간순간을 호흡하면서 몸에 실리는 거죠. 몸 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일 수 있습니다. (…) 혁명은 사실 새로운 시간을 발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12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초심』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등 백무산은 시간성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시집들을 내어놓곤 했다. 새 시집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창비 2025)에는 죽음을 매개로 삼아 우리가 사는 현재의 시간이 어떤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는지를 살피는 시선이 자주 눈에 띈다. 죽음은 ‘이후의 시간’을 사유하도록 강제하기에 가장 강력한 시간의 문제를 품는다.
창원 가는 길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폭염의 아스팔트에 내려
걸음걸이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헐거워져 있었다
마스크를 내리지 않았다면
모서리가 깨어진 그 말들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낮 최고기온 39도라 했다
(…)
차는 고급차인데 헤드라이트 한쪽 반사경이 깨져 있었다
그의 왼쪽 눈동자도 회색이었다
(…)
초행길이냐 물었더니 전에 살았던 곳이라고
얼마 만이냐 물었더니 대답 대신 식은땀이다
(…)
가긴 가봐야 하는 길인데… 거기까지만 말했다
가면 뭐 하나 누가 반긴다고… 거기까지만 말했다
내비도 있을 터인데 딱히 길을 잃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내게 길을 잃어버리는 방법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국수 먹고 가라 했더니 그제야 물이나 좀 달라고 한다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폭염의 아스팔트를 타고
조수석에 코로나를 태우고 그는 떠났다
가봐야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백무산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폭염이」 부분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아스팔트 위 폭염은 일차적으로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그 열기가 ‘창원’이라는 지명과 결합하고 길을 묻는 자와 알려주는 자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또다른 상상을 부른다. 창원이 어떤 곳이기에 그런가. 1973년에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완공되고 1974년에 창원기계공업단지가 건설되면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었던 곳이자, 불안한 노동조건과 보장되지 않는 노동권 등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 역사를 품은 장소이다. 마창노련(마산창 원노동조합총연합)은 전국 최초로 결성된 지역노조이며, 1990년대 초까지 왕성한 연대투쟁을 벌였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건설되기까지 마산·창원 지역에서 1천여명이 넘는 조합원이 구속·수배되거나 해고되었다.13 마창노련, 민주노조의 튼튼한 토대를 세우다」, 『노동사회』 195권, 2017 참조.] 이는 한국노동운동사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이며 그 실천과 참여가 민주노조운동의 생명력과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백무산에게 창원이라는 장소가 거느린 거대한 힘의 기억은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폭염의 아스팔트” 위에서 환영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과거가 역진하여 현재를 뒤덮는다는 표현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 시인은 코로나19가 아닌 다른 감염병을 본다. 가령 부서진 반사경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회색 눈동자’는 노동자의 각성된 힘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자가 앓고 있는 증상처럼 보인다. “식은땀”은 또 어떤가. 노동의 뜨거운 땀과 대비되는 저 표현은 지금의 자신이 거리를 둔 과거의 삶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때 그의 등줄기에 흐르는 무거운 죄책감처럼도 보인다. 언뜻 길을 묻는 이를 만난 경험을 건조하게 그려낸 것으로 보이는 시의 풍경은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무언가를 묻는 듯하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정신을 이미 놓아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활기 넘쳤던 노동운동이 자신들이 열었던 길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아닌지, 나아가 폭염으로 상징되는 이 세계의 변화가 우리를 그처럼 제정신일 수 없게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목적지로 놓인 장례식장이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 시의 죽음에는 변질된 삶이 감염병처럼 창궐하는 세계로 귀결되지 않는, 다른 방향으로 더 읽어내야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가령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전에 살았던 곳”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표현은 회심하고 귀향하는 탕자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깊은 시간의 상처를 들추어 새롭게 정비하는 심사는 시간을 수선하며 시대의 그림자를 환한 곳으로 불러내 앞으로 나아갈 세계를 정향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독법은 어머니의 형상을 기원을 대리하는 관념적 상징으로 읽는 식이 되어버린다. 어머니의 자리를 노동자들의 투쟁을 돌보았던 돌봄 주체의 처소로 해석하는 방식은 어떤가. 비가시화・비임금화된 돌봄노동이 수행되어온 곳이 가정이라면 자본의 외부에서 약탈당한 영역이 자연이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사실까지 떠올리면, 이 시는 노동의 시간과 생태의 시간 그리고 젠더의 시간을 동시에 문제시하며 사유한다고 읽힌다. 시인은 지금 이 복합적 위기의 시간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자리가 바로 다음 세계로 건너가기 위해 우리가 꼭 지나야 하는 문이 아닐까.
밤 기차 타고 간 번잡한 장례식장
정권만 바뀐 줄 알았는데
애도의 국면도 바뀌었다
(…)
조문 온 전직 민주 인사들
어용 인사 바꿔 달고 관제 조문이다
그는 죽어서도 아직 죽기 이르지만
죽자마자 서둘러 죽은 자가 되었다
그 마른 눈빛들 마주 보고 싶지 않아
지하철 막차도 떠난 시각
먼 밤길 걸어 서울역 시계탑 새벽 두시
첫차는 여섯시
광장에 하나뿐인 불빛
롯데리아 가서 햄버거 두개 사 들고
야전병원처럼 좌우 도열한 노숙자들
널브러진 지하도 바닥 한 모퉁이 얻어서 누웠다
노숙은 노숙인데 별은 보이지 않는다
꿈결인 양 부르는 소리에 놀라 깨어
새벽 기차에 오르는 시간
남쪽이 고향인 그도 이 시간 떠날 채비를 하고
역에 나오셨을까, 누가 날 불러 깨운 걸까
—백무산 「누가 나를 깨운 걸까」 부분
또 하나의 죽음을 보자. 이상한 장례식이다. 여러 인사들, 관리들이 조문을 왔다니 어느 유명했던 이의 죽음인가 싶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에 시인은 다른 ‘죽음’에 더 시선을 둔다. “조문 온 전직 민주 인사들/어용 인사 바꿔 달고 관제 조문이다”라는 표현에서 ‘민주’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는 제도권 정치의 양상을 꼬집는 시선이 드러난다. 뒤따라오는 연에서 “서둘러” 죽음을 판정받는 상황은 장례식의 주인인 ‘그’에 대한 이야기지만 재빠르게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을 바꾼 ‘민주 인사’가 함께 걸리는 듯도 하다. 그러고 보면 화자가 조문 뒤에 향한 빈 광장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뜨거운 함성을 쏟아낸 집회의 현장이었던 서울역 광장에선 지금 프랜차이즈점이 켜둔 불빛 하나만 적요에 휩싸여 있다.
〔제도화된 사회질서인 자본주의는〕 사회생활의 지대한 부분을 ‘시장’(실제로는 거대 기업들)의 지배에 맡김으로써 민주적 의사결정이나 집단행동, 공적 통제에 출입금지 명령을 선포한다. 이 제도배열 탓에 우리는 어떤 에너지를 기반으로, 어떤 종류의 사회관계를 통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길 원하는지를 집단적으로 결정할 능력을 빼앗긴다.14
자본주의가 제도화한 질서들은 언제든 민주라는 가치를 위협할 요소를 내장한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자본이 축적을 위해서면 공적 권력에 끼어들어 법률체제와 조직 등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을 거라 경고한다. 현 시점의 전지구적 우경화 양상을 떠올리게 하는 진단이 아닐 수 없다. 백무산은 제도정치로 편입되어간 민주 인사들의 모습과 더불어 텅 빈 광장과 그 광장 주위에서 기거하는 노숙인의 형상을 잇대어 놓음으로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 그 둘의 연관관계를 동시에 묻는다. 민중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할 수 없는 대도시 속 노숙의 형상이 바로 자본주의질서가 만들어낸 소외의 모습이다. 이는 커먼즈(commons)가 해체되는 시초축적의 단계에서 임노동자가 되길 거부하고 방랑 내지 부랑의 형식을 취한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 있다. 자본주의는 형성기부터 지금까지 각자가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서며 자유롭게 어우러져 사는 민주적 삶의 양식을 지속적으로 위협해왔던 것이다.
화자는 “널브러진 지하도 바닥 한 모퉁이 얻어서” 눕지만, “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뚜렷한 이정표가 존재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목소리는 눈앞에 별이 보이지 않아도 별을 그릴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있듯이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상존하더라도 그것의 가치를 지향하고 돌보는 과정이 우리를 깨울 것이라고, 더불어 민주적 삶의 양식을 활성화해 민주주의 자체를 새롭게 깨울 것이라고 전한다.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일은 제도로서 이미 완벽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됨을 위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나날의 정성과 공동의 싸움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다.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이 비로소 “그”를 애도하며 “누가 날 불러 깨운 걸까” 물을 때, “그”와 “누가”라는 말 모두에 ‘민주’라는 의미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본다.
4. 시호(時乎)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時乎)로다
앞서 현대시 속에서 ‘때’와 관련된 사유를 살펴보았다면 좀더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이와 관련한 전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는 「검결(劍訣)」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때가 왔네 때가 왔네 다시 못 올 때가 왔네
만세에 한번 나오는 장수가 오만년 만에 때를 만났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 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한 몸으로 비켜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때가 왔네 때가 왔네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해와 달을 놀리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 명장 어디 있나 장부 앞에 장사 없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15
검무를 추며 불렀다고 전해지는 이 가사의 시작 부분에 “다시 못 올 때가 왔네(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라는 표현이 있다. 때의 무르익음을 말하는 구절이자, 용천검을 드는 장면과 더불어 볼 때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변혁을 꿈꾸었다고 해석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 가사는 동학농민혁명 때 애창되었다고도 전해진다. 도올 김용옥은 “개벽 후 5만년”이라는 후천개벽사상의 의미를 두고 ‘개벽 후 5만년이 지나 비로소 민주의 가능성이 생겼다’고 풀어낸 바 있다.16 김인환은 『용담유사』에 실린 여러 가사의 의미적 관계망 속에서 「검결」의 뜻을 풀어내면서 이 작품을 19세기 문학 가운데 가장 빛나는 혁명의 노래라 평했는데, 다시없는 때를 만난 장부를 하느님을 모시는 일에 공을 들여 지극한 데까지 나아간 사람으로, 날랜 검과 게으른 적삼의 결합을 우주와 같이 넓은 경지에 이른 대장부의 모습으로 읽었다.17 검의 노래에서 깨달음의 노래로 의미를 확장한 셈이다. 그리고 이때의 깨달음은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버리고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에 쓰인 이 작품이 낯설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우리 가까이에 지난겨울 내란사태를 겪으며 목격한 시민들의 민주적이고 창조적인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의 무르익음을 직감하고 자발적으로 광장으로 모여든 이들의 모습, 혹은 각자가 딴 마음으로 살던 자리를 물리고 광장에 모여 뜻을 모아 어떤 때의 무르익음을 스스로 창조한 이들의 모습에서 ‘시간에 불을 붙이는’ 시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응원봉을 손에 들고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춤추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검무를 추며 「검결」을 부르는 민중을 볼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불러 세워 춤추고 깨우는 역사의 무도가 펼쳐지는 듯하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미완의 과제가 있다. 백무산 시가 보여준 넘어야 할 문턱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노동의 문제부터 젠더의 문제, 생태위기의 문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어디 이뿐이랴, 지난겨울 광장을 뒤덮었던 수많은 깃발은 더 많은 문제와 사회적 요구들을 표면화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이 개별적인 사안이 아니라 연결된 복합적 위기의 과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앎이 불안과 냉소로 우리를 더 몰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남태령에서 농민운동과 퀴어운동 그리고 현실정치가 만나 서로를 돕던 장면처럼 연결된 복합적 위기는 더 많은 연대와 협동적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민주적 실천은 늘 관념적 지식을 해체하는 생동감을 일으켜 미래의 시를 촉진한다. 그리고 그 시는 다시 무르익은 때에 불려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놓으며 뜨거운 열망으로 우리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일으킨다. K문학과 K민주주의로 불리는 성취들이 그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깨끗한 힘으로 우리를 충전시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세상과 만나게 해주는 백무산의 시 한편(「밥이 끓는 동안」, 『이렇게 한심한 시절 의 아침에』, 창비 2020)에서 두 구절을 옮긴다. 현재는 끓는 밥이다. 현재는 끓고 있는 창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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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이 하야오 『어린이 책을 읽는다』, 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2006, 9~12면.↩
- 웬델 베리 『소농, 문명의 뿌리』, 이승렬 옮김, 한티재 2016.↩
-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최성은 옮김, 민음사 2022, 38면.↩
- 가와이 하야오 「현대인과 예술」, 『일본인의 심성과 일본문화』, 백계문 옮김, 한울 2018.↩
- 올가 토카르추크, 앞의 책 39~42면.↩
- 백낙청 「대중과 역사의식」,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502~503면.↩
- 김소월 시에서 ‘님’의 존재가 ‘때’에 대한 감각과 ‘장소’에 대한 감각을 중요하게 전해주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에 대해서 말한 바 있다. 졸고 「이별의 능력, 아니 큰 사랑: 김소월과 3·1」, 『잔다리서가』 6호; 창비주간논평 2025.7.29.↩
- “회감(Erinnerung)은 주체와 객체의 간격 부재(不在)에 대한 명칭일 수 있으며, 서정적인 상호융화(Ineinander)에 대한 명칭일 수 있다. 현재의 것, 과거의 것, 심지어 미래의 것도 서정시 속에 회감될 수 있다.” 에밀 슈타이거 『시학의 근본개념』, 이유영・오현일 옮김, 삼중당 1978, 96면.↩
-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의 시간론』, 박동섭 옮김, 갈라파고스 2023, 300~301면.↩
- 민중가요 「단결투쟁가」를 염두에 두었다(“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진이정이 시를 쓰던 시기의 민중가요들이 자주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배경으로 했던 점과 「녹두꽃」 「민들레처럼」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의 노래도 떠올려봄직하다. 진이정이 자신의 시에 팝・동요・대중가요 등 다양한 차원의 노래를 인유하고 패러디한 흔적이 많다는 사실을 고려하건대 그의 시에 민중가요가 용해되어 있음을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장르 간 길트기’를 하는 자로 평하고 “도시의 게릴라전을 익히느라, 이십대를 보냈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5」)고 쓴 시인인 점도 고려할 만하다.↩
-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창비 2005년, 36~37면.↩
- 백무산의 말. 황규관 「열권의 시집, 열개의 고원」,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445면.↩
- 이흥석 「[내가 경험한 87년 노동자대투쟁↩
-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230면.↩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현대국문본을 참조한 필자의 번역. 원문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08_0060).↩
- 백낙청・김용옥・박맹수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백낙청 외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창비 2024, 79면.↩
- 김인환 「용담유사의 내용분석」, 『문학과 문학사상』, 한국학술정보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