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 ②
이야기가 품은 우주
황석영 소설 『할매』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1. 자연의 지층에 새겨진 역사
황석영의 장편소설 『할매』(창비 2025)는 먼 곳에서 개똥지빠귀 한마리가 날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설의 도입부는 시베리아 하늘에서 날아온 새들이 한반도 남쪽 마을로 찾아드는 광경을 포착한다. 황조롱이에게 공격당해 가슴에 하얀 흔적을 갖게 된 흰 점박이 개똥지빠귀도 그들 중 하나로, ‘흰 점박이’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짝을 만나고 둥지를 짓고 새끼를 낳아 기르다가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목숨을 다하게 된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개별 생명체의 삶을 생동감 있게 조망하는 소설의 1장은 광대한 자연의 순환을 담은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상하게 하며 독자들을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초대한다.
개똥지빠귀의 뱃속에 팽나무 열매 몇개가 있었다. 열매의 거죽은 새의 시신과 함께 곧 사라졌지만, 딱딱한 굳은 씨앗은 부드러운 모래흙 속으로 들어가 스며드는 물기와 더불어 차츰 땅속으로 묻혔다. 서쪽 언덕 너머로 갯벌과 바다가 있었고 빈터의 동쪽으로는 만의 두번째 강줄기의 샛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밀물이 들어오면 바닷물이 강물을 밀고 역류했다가 썰물 때가 오면 샛강은 실개천이 되어 구불구불 뻗어나간 갯골과 합류했다. 아침마다 물안개가 퍼졌고 햇빛 밝은 낮에는 습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굳고 딱딱한 씨앗은 한해를 보내고 겨울을 맞으면서 움이 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30~31면)
소설은 이렇듯 죽은 새의 뱃속에 든 열매의 씨앗이 부드러운 흙 속으로 스며들어 훗날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리라는 점을 예고하는데, 이는 인간 역시 다른 동식물처럼 자연적 순환의 흐름에 협응해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예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의 중요한 주인공이자 관찰적 화자인 팽나무는 이제 개똥지빠귀의 몸으로부터 세상에 첫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디며 버티”(31면)는 긴 시간을 살아간다.
이후 『할매』가 기록하는 시간은 한반도 남쪽 바닷가, 군산 선연리의 하제마을1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중심으로 오랜 시간 이 땅에서 살아온 생명 존재의 시간들이다. 이러한 소설의 생태적 시야는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는 구체적인 시간대로 조선시대와 식민지시기,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호명한다. 지금은 육백년 된 팽나무가 서 있는 곳, 군사기지화와 생태계 파괴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공동체의 붕괴와 지역소멸을 겪고 있는 하제마을의 지난 역사와 삶들이 그려진다. 그런데 소설에서 지난 시대의 역사는 광대무변한 자연세계 속에서 스쳐가는 개개의 사건이 아니라 한그루 나무에 켜켜이 쌓이는 나이테처럼 축적되는 것으로 포착된다. 자연의 지층에 축적되는 역사적 시간들의 기록은, 붕괴와 소멸에 맞서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도 함께 새겨넣는다.
『할매』와 더불어 최근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한국 소설작품들은 문명전환기를 새롭게 의식하는 생태적 사유와 공동체의 심성을 역사적 시간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성취를 보여왔다. 지리산과 구례 지역에 기반한 공동체의 역사적 기억을 보여준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나 제주 4·3의 역사가 현재로 연결되는 감동을 살린 현기영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전3권, 창비 2023), 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가 좋은 사례라 하겠다. 이들 소설은 역사적·생태적 현실을 포착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지역의 고유성과 공동체의 심성을 잘 살리고 있다. 여기에 더해 『할매』는 한반도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재현하는 가운데 좀더 본격적인 생태서사의 화법을 취하고 있다. 근대적 개발과정에서 피폐화된 자연의 역사를 조명하며 세계적인 비상상황으로서의 생태위기 현실에 대응하고자 하는 『할매』는 식민지 경험과 분단, 급속한 근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국적 서사가 세계의 위기를 돌아보는 성찰적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 개별자와 우주의 관계에 대한 사유
『할매』가 보여주듯 나무와 새, 벌레 등 비인간 존재를 소설의 전면에 부각하는 서술방식은 생태문학에서 자주 쓰이는 형식이다. 『할매』는 리얼리즘 묘사의 전통적인 원근법과 다양한 삽화식 구성을 적절하게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는 흰 점박이 개똥지빠귀의 이야기와 숲의 풍경을 대비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개똥지빠귀 무리 가운데 ‘흰 점박이’와 ‘개암이 날개’의 개별적 이야기를 도드라지게 형상화하는 대목에서는 무리와 개체의 세계를 아우르는 통합적 서술방식이 돋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는 사실주의 서술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관습적인 생태소설의 틀에 머물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더불어 도입부에서 유장하게 펼쳐지는 자연의 역사에 대한 묘사는 소설 중반부터 가속화되는 근대적 개발과정의 연대기와 대조되어 서사의 풍부한 리듬을 확보한다.
‘작가의 말’에서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했지만, 『할매』에서 드러나는 개별 생명과 자연과 역사 사이의 관계는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며 카르마의 계속되는 전이”(220면)라는 불교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소설적 인과성의 세계에 대한 암시로도 읽히는 ‘카르마’(업業,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인물들의 일대기를 간명하게 압축하는 주요한 서술적 원리가 된다. 카르마는 불교의 연기(緣起)적 원리에 뿌리를 두는데, 연기는 모든 현상이 무수한 원인이나 조건과 관계하여 성립하며 현상적 존재가 서로 의존하여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서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존재는 우주와의 관계망 속에서 곧 그 우주 전체를 반영한다.
이러한 상호관계적인 자연 이해는 최근 생태이론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하이퍼객체’(hyperobject)라는 용어에서도 드러나듯 생태적 위기에 놓인 인류의 비상상황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시공간의 사물들에 주목하기를 요구한다.2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형상화하는 새로운 상상력과 서사적 실험이 필요하다. 기후현실의 복잡성을 재현하기 위해서 총체적인 서사보다는 서로 다른 문맥을 지닌 다양한 층위의 삽화들을 병렬 구성하거나, 자연이나 생물의 구조 자체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발견의 서사를 제안하는 것이다. 한 예로 밤나무의 멸종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의 장편소설 『오버스토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진짜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기를 요청한다. ‘오버스토리’(overstory, 숲의 상층부·덮개층)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서사적 시야를 새롭게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다”3는 호소를 통해 ‘보지 않는 세계’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되어버리는 생태학적 비상사태의 현실을 환기한다.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 또한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고, 따라서 상상력의 위기이기도 하다”4는 강력한 전언을 통해 새로운 서사방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서사적 갱신의 요청 가운데 『할매』는 개별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들의 숨결을 섬세하게 살리는 재현의 방식으로 이야기의 생동성을 확보한다. 가령 가장 연약해 보이는 생명체에게도 존엄한 삶의 자리가 있다는 진실이 하루살이와 운석의 우주적인 만남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그 가냘픈 작은 벌레”가 “날개를 떨면서 돌의 주위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더니 기지개를 펴듯이 다리들을 주욱 폈다”(39면)는 묘사는 사십오억살의 나이를 먹은 운석과 고작 두시간에서 하루 반쯤밖에 살 수 없는 하루살이가 함께하는 자리를 그려 보이며, 태초부터 자연과 생명이 어떻게 관계맺어왔는지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하루살이가 온 힘을 다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은 뒤 숨을 거두는 그 짧은 시간은 개별자와 우주가 맺는 상호공존적인 관계를 함축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세밀하고 아름다운 자연 서사가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소설에 담긴 시간에 대한 사유 덕분이다. 개똥지빠귀와 팽나무, 하루살이와 운석, 도요새와 수라갯벌의 생물들이 어우러지는 이 세계에서는 불교의 시간관에서 흔히 거론되는 생의 순환이 체감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시(無始)’는 아무리 거슬러올라가도 그 처음을 짐작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과거를 뜻한다. 세간의 중생과 법이 모두 처음이 없는 것과 같이 금생은 전생의 인연을 따라 존재하고, 전생은 또한 전생을 따라 존재한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생과 사를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이 섭리 속에서 소설 속 ‘몽각’의 보시와 죽음 역시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꿈과 현실, 순간과 영원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시간 구성을 통해 우리는 친숙한 동양적 사유의 전통을 느끼게 된다.5
다만 단순히 비인간 존재를 초점화한다고 해서, 혹은 수많은 단편적 이야기들을 얽어놓는다고 해서 위기의 현실을 일깨우는 생기있는 생태서사가 곧바로 창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인간 존재를 의식적으로 서사의 우위에 고정시키는 서술방식은 인간-비인간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인식을 전하기보다 자연의 경이성을 압도적으로 전면화하는 묘사로 기울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생명과 자연, 인간 역사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주조하기 위해 ‘시간’의 입체적인 서사를 구성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나무의 ‘육백년’에 대응하는 인간의 시간을 서사화하기 위해 민담과 설화, 전설, 야담의 전통을 풍부하게 활용한다. ‘민담 리얼리즘’의 기술방식을 ‘생태-역사’ 연결의 중요한 징검다리로 삼은 것이다.6
예컨대 소설에서 몽각이 꾸는 꿈과 현생의 관계는 『삼국유사』의 ‘조신의 꿈’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담은 것이다. 유랑민의 자식으로 절에 맡겨진 몽각은 꿈속에서 사랑했던 여인과 맺어지는 기쁨을 누리지만 혹독한 빈곤으로 끝내 고통스럽게 이별하는 체험을 하고, 그 꿈으로부터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삼국유사』 설화는 우리 문학이나 영화에서 대중적인 소재로도 많이 활용되는데, 『할매』에서 조신설화는 몽각이 수도자로서 민중의 궁핍한 삶 속에 직접 뛰어들게 되는 각성의 모티프로 활용된다. 이러한 자기깨달음의 서사구조는 불가의 자전(自傳) 양식에서 종교의 형식적 교리나 고답적인 질문의 틀을 깨고 민중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대승 보살행’의 의미와 닿아 있기도 하다.7
소설의 중심부를 받치는 몽각의 서사는 승려의 삶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유랑민-수도자-농어민-수도자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황석영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여행자’ ‘떠돌이’의 모험적 행로에 걸맞게 몽각은 세속과 수도의 삶을 오간다.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흘러들어온 몽각의 여로는 이전의 황석영 소설에 종종 등장했던 이야기꾼과 예인(藝人)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더불어 몽각은 팽나무와 함께 자연재해, 가뭄과 역병, 지진을 겪어내야 했던 조선 민중의 고달픈 삶을 감싸는 존재이기도 하다. 섬에 들어가서 할매 팽나무 옆에 어린 팽나무를 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농사짓기와 푸성귀 기르기며 갯것 채집과 고기잡이의 물때를 가늠하며 살아”(79면)가던 그가 자연스럽게 다시 수도자의 길을 걷고, 급기야는 수라갯벌에서 스스로의 몸을 보시하는 과정은 “꿈에서 깨어나서 꿈으로 다시 돌아”(83면)가는 수도자의 생과 평범한 민중의 삶을 조용히 겹쳐놓는다.
그렇게 보건대 소설 속 다양한 구전적 이야기와 기록문학의 활용은 단순히 비인간 존재와 인간 존재를 동등하게 형상화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황석영 소설의 생명감이 “민중의 심층의식 또는 집단무의식에 대한 풍요로운 재현”8에서 비롯된다는 평에서도 환기되듯이, 자연 묘사와 교차되는 인물들의 일대기는 시대의 변혁을 꿈꾸었던 민중의 삶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방향성을 지니고 압축된다. 몽각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하제 당골네’로서 마을의 팽나무에게 치성을 드리는 ‘고창댁’, 천주학도로 순례자의 생을 살게 되는 ‘유 도사공’, 농민 ‘배춘삼’과 그의 아들로 동학운동에 참여하는 ‘배경순’으로 이어지는 민중의 역사는, 이후 ‘배동수’와 ‘방지거 신부’ 등 갯벌 생태계를 지키는 종교운동가와 시민들의 현재적 이야기로 연결되게 된다.
3. 생태적 항성(抗性)과 새세상을 향한 기다림
『할매』에서 형상화되는 자연재해는 역사적 변동과 얽혀 있어 민중이 겪는 유랑과 정착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전라도는 농경지가 너른 곡창지대인데도 그에 따른 소작농과 빈농도 많아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봄부터 보리와 밀 농사를 이상 기후인 냉해로 이미 그르쳤고, 수수와 좁쌀도 여름의 극성한 병충해와 홍수로 다 망쳤으니 무서운 가을 겨울이 곧 찾아왔다. 그렇게 두해 동안의 끔찍한 기근이 지나가고 있었다”(74면)라고 묘사되는 것처럼 혹독한 재해와 기근을 겪은 민중의 삶은 몽각의 유랑과 정착, 그리고 도요물떼새들과 갯벌의 칠게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때 소설이 포착하는 대규모의 자연재해와 기근, 그리고 이어서 살펴볼 근대적 고난의 역사는 자연과 길항하며 생태적 항성(抗性)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때의 항성은 단순히 굽히지 않고 버티는 저항성과도, 반대로 어떤 변화에 무뎌진 상태인 내성과도 다른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본연의 성질을 잃지 않고 질서를 조율하며, 외부와 조화를 이루는 능동적인 평형의 상태라 할 수 있다.9 생태적 항성은 자연과 생명 존재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군락 속에서 새로운 특성들이 형성되는 창발성과 연동된다. ‘전체는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 혹은 ‘숲은 나무들의 집합 이상이다’ 같은 오랜 금언을 떠올리게 하는 생태적 항성의 세계는, 새롭게 길러진 면역과 창발된 역량을 통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성과 조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진전될 가능성을 암시한다.10 이러한 생태적 항성은 궁극적으로 전지구적인 생명위기 앞에서 그 위기를 초래한 힘을 묻고, 자연과 소통하며 공생하려는 실천적 움직임과 연결될 수 있다.
소설의 5장부터는 하제포구 이야기가 본격화되며 근대적 개발과정을 전면적으로 다룬다. 하나의 마을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가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실제 하제마을의 역사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2000년대에 들어 군산 미군기지(공군) 탄약고가 확장되어 안전거리 확보 문제가 대두되고,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공되면서 하제항이 사라지자 생업을 잃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난다. “근대화를 위해 버려져야 했던 것은 로컬”11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올 정도로 근대적 개발과정에서 먼저 위협받는 것은 지역의 고유한 공간이다. 팽나무와 하제마을은 자연재해, 군사폭력, 미군기지, 새만금 간척사업을 거치면서 개발과 파괴의 시간을 고스란히 감당하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소설에 담긴 생태적 사유, 생태적 항성이 보여주는 미래의식이다. 『할매』는 거대한 자연질서와 그 속의 인간 존재의 왜소함을 평이하게 대비시키는 환경주의 서사, 혹은 기술지상주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암울하게 되풀이하는 종말서사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공동체의 미래적 소망을 담아낸다. 소설의 핵심적인 전언 중 하나는 “쌓여가는 겹겹의 층”(47면)으로 시간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새세상에 대한 민중의 오랜 염원과 미래의식을 드러내는 데로 나아간다.
“나무의 나이가 거의 삼백살쯤 되었을 무렵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삼십여호 가까이 되는 어촌 마을을 이루게”(97면) 된 하제마을에서 팽나무는 자연과 인간의 삶을 아우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을 지키는 나무의 역사는 민중의 기층문화로서 사람들이 갖는 종교적 믿음을 투영하는 동시에 개인적·민족적 고난에 대응하려는 강렬한 소망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 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나 기념비적 장소에 대한 소재는 한국소설에서 다양한 이야기로 녹아들어왔으며, 이 소설에서 훗날 ‘할매 나무’로 불리게 되는 팽나무의 여성성, 대지성, 모성성은 한반도의 민간신앙에 스며든 모계문화적인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다.12 팽나무와 당집은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함께하는 공동체적 장소성을 지니며, 수호신 나무에 올리는 마을사람들의 치성은 개인의 처지를 넘어 민중의 위기와 고난의 삶을 이야기로 승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팽나무는 고단한 민중의 삶을 감싸고 위무하는 동시에 새세상을 향한 이들의 소망과 혁명적인 꿈 역시 몸의 기억에 새긴다. 민중의 수난사로 읽을 법한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고통은 다음 세대가 품게 될 희망의 서사를 이끌어낸다. ‘바람과 물과 불’의 순교로 일컬어지는 천주교도 유분도의 죽음은 유분도와 함께 일했던 배춘삼의 아들 배경순의 삶을 통해 동학의 혁명적 꿈으로 연결된다. ‘개벽세상’의 기운 속에서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이 전해진 것인데, 우연히 만난 어느 동학 접주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라는 말을 들은 배경순은 “무거운 당목으로 종을 치듯 무엇인가 묵중한 충격이 가슴을 치면서 오랫동안 마음에 맴”(154면)도는 감동을 받는다. 배경순이 아버지에게 동학의 교리를 전하면서 나누는 “우리가 밥 먹으면,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네요”라는 시적인 대화는 “얼음과 눈이 녹아 삽시간에 개울이 넘치고 도도한 강물이 되듯이”(157면) 퍼져가는 혁명의 벅찬 기운을 공유한다.
이 소설에서 황석영 특유의 현실적인 감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민중적 인물은 배춘삼이다. 그는 당골네(무당)인 어머니의 업을 이어받기를 거부하고 하제마을을 떠나 떠돌다가 유분도를 만나 천주학 책을 전달하는 일도 하게 되지만,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팽나무의 예언 덕분에 천주교 박해과정에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가 “하늘님 점지하여 하늘 뜻 받아 내려온/우리 할매 서낭님/해 달 별 한맘으로 지켜오신 할매 서낭님”(131면)에게 정화수를 올리고 비나리를 하는 과정은 민중의 신앙 속에 구현되는 영성을 보여주며, 그처럼 삶 속에서 체득한 영성은 그가 후일 아들의 동학운동에 감화받아 동학사상을 믿는 바탕이 된다. 천주교 박해로 희생당한 유분도의 시신을 남모르게 수습하고, 아들 배경순이 동학에 입도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배춘삼은 나름의 현실감각으로 나날의 위기를 넘어서면서 살아낸다. “동학을 가슴에 품고 온 식구가 주문도 외우며 깊게 믿고 있었지만 접을 조직한다거나 드러내놓고 동학도임을 알리지 않아서 관의 압박을 당하지는 않았”(158면)던 배춘삼의 현실감각은 역설적으로 삶 속에 스며든 혁명적 이념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소설에서 배춘삼과 배경순의 일화는 민중적 지지를 얻는 동학운동의 생생한 장면으로 연결된다. 비교적 상세히 그려진 우금치고개의 전투 장면은 역사적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가 ‘빛의 혁명’ 과정에서 함께했던 남태령시위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며, 오늘날 우리가 새로 써가는 민주주의가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바래지 않고 이어져온 민중의 염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13
『할매』에 스며든 민중적인 심성으로서의 영성은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을 소중히 하고 돌보는 마음들이 만들어낸 기다림과 꿈을 표현한다. 나무에게 소망을 빌고 기리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단지 운명론적 세계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 담겨 있다. 공동체의 마음과 의식은 역사적 파고 속에서 축적되고 변화하고 도약한다. 백낙청은 “민중의 의식도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역사에 따라 바뀌는 것이며, 특히 객관적으로 주어진 변혁의 가능성이 은폐되었을 때와 그것이 인식되는 순간 사이에는 몰라볼 만큼의 비약이 이루어지기도 한다”14는 점을 강조했는데,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민중의 소망과 기다림을 탁월하게 그려낸 『할매』는 공동체의 위기와 고난에 대처해온 역사와 그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창조적으로 축적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생태적 위기를 역사 속에서 사유하는 이 소설은, 불가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재해로 다가오는 자연의 위력과 역사의 엄혹한 시련 앞에서 생태적인 항성을 기르는 법을 터득하는 과정을 그린 한국소설의 빛나는 몇 장면들도 떠올리게 한다. 가령 전염병의 창궐을 견뎌내는 과정을 그려낸 박태순의 「홍역」은 우리의 삶이 숱한 투쟁의 순간들을 거쳐서 생태적인 면역력을 얻게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생명 존재에게 주어지는 항성의 의미를 실감하게 한다. 소설 주인공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한 인내와 정성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뼈저린 자각과 더불어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사람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겸허하게 환기한다.15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에서 4·3의 트라우마로부터 평생 벗어나지 못하며 남은 생을 덧없게 생각하던 노인이 초원을 휩쓰는 눈바람의 시련 앞에서 목숨의 소중함을 실감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아무 가망 없이 죽는 일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던 노인은 후려치는 눈보라 속에서 불을 붙여 몸을 따뜻하게 덥힐 수 있는 마른 소똥들을 주워 위기를 벗어난다.16 그에게 눈보라 바람은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혹독한 시련인 동시에 그것을 감당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도록 자각시키는, 살아 있는 현재의 일이기도 했다. 황석영의 『할매』가 주는 여운 역시 이렇듯 역사적 시련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생명체들의 항성이 축적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4. 모시는 마음과 지키는 마음
공동체의 전설이 전해져온 신화적 장소에 깃든 민중의 소망과 기억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미래를 꾸리기 위한 동력으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할매』가 주목하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전지구적인 위기상황으로서의 환경파괴와 기술주의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서사화된다. 소설의 초점이 되는 팽나무의 시간은 오랜 세월 이 땅에서 숙성되어온 민중의 역사의식과 심성이 표출하는 변혁의 지향성을 잘 드러낸다. 이는 세계사적 위기의 현실에서 한국 고유의 사상과 문제의식이 기여할 의의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나무와 갯벌과 마을공동체의 삶은 민중적 믿음과 소망의 세계가 역사적 변혁의 순간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숙성되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에 녹아 있는 민담과 설화, 종교적 믿음들은 민중의 역사 속에서 포착되는 한국 고유의 사상적·문명적 자원들과 연동되어 있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감지되어 혁명의 동력이 되어온 민중사상의 변혁적 저력은, 오늘날 살아 숨 쉬는 한국의 서사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는 사실과 연결해 생각할 때 의미가 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중적인 것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려고 했던 마음들이 끌어낸 ‘빛’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소설이 호명하는 지역과 역사는 식민지 근대, 분단, 민주화를 거쳐온 한국의 고유한 시간들을 돌아보며, 생태적 전환과 평화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 중요한 문명적 성찰을 환기한다. 이는 한반도 민중의 삶을 고통과 억압을 겪는 수난사로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더 확장해나갈 역사적 기반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할매』의 마지막 장면은 팽나무가 살아온 시간이 육백년에 이른 지금, 새만금 수라갯벌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종교인과 지역시민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갯벌을 복원하고 신공항 기지 건설사업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을 함께 펼치는 배동수와 방지거 신부의 대화는 하제마을 팽나무의 역사를 현재의 삶과 연결한다.17 특히 두 사람이 각각의 영적인 체험 속에서 감지하는 갯벌과 나무의 목소리는 우주의 그물 속에 연결된 생명들의 상호작용을 실감하게 한다. 배동수가 어린 시절 외가에서 만났던 신령한 팽나무의 기억은 “헤아릴 수 없는 구멍마다 생명들이 소리를 내고 있”는 갯벌의 “거대한 노래밭”(190면)과 이어지고,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유분도의 후손 방지거 신부는 “너 어디 있느냐”(193면)라는 신의 메시지를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217면)라는 팽나무의 목소리로 이어 듣는다. 한반도 민중의 신앙에 스며든 불교와 천주교, 동학의 사유가 현재의 삶 속에 항성을 기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돌봄과 공생의 사유로 연결되는 흐름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것은 세상 만물을 모시는 마음이면서 서로를 지키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나무는 나이테 속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그 겹겹의 섬유질 속에 계절의 재활과 성장과 갈무리와 휴지의 반복이 새겨졌다. 이를테면 지상에서 계속되는 이 반복은 길건 짧건 시작이나 끝이 아니라 오래오래, 또다시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37면)
소설의 서장으로 돌아가 우리가 새삼 새기게 되는 것은 “시작이나 끝이 아니라 오래오래” 이어질 세계에 대한 상상이다. 『할매』가 품은 무수한 이야기 역시 지속가능한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일구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또다른 질문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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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의 팽나무는 실제 전북 군산 하제마을의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와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모델로 삼고 있다. 과거에는 ‘무의인도’라고 불리는 섬이었다가 일제강점기 소작농 착취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간척지였던 하제마을에서 팽나무는 배를 묶어두는 것뿐 아니라 풍년을 점치고 사람들의 안전을 소망하는 제를 지내는 터전의 역할을 해왔다. 양광희 『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마을 이야기』, 하움출판사 2021, 7면.↩
-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이 설명하는 하이퍼객체는 인간의 시야로 모두 파악될 수 없는 광범위한 시공간의 사물들을 뜻한다. 모턴은 생태학적 비상사태를 일으킨 자본주의 세계에 맞서 실체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고 호명하는 전략을 통해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실재임을 주장한다. 티머시 모턴 『하이퍼객체』, 김지연 옮김, 현실문화, 2024.↩
-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김지원 옮김, 은행나무 2019, 655면.↩
-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19면.↩
- 꿈과 현실의 관계를 얽어놓은 ‘몽자류’ 소설은 동아시아 서사의 전통적인 형식이기도 하다. 임형택은 『구운몽』과 『홍루몽』의 비교를 통해 원형회귀의 하강구조를 지닌 ‘꿈’ 서사가 지닌 현실성과 깨달음의 의미를 동아시아 서사의 전통에서 흥미롭게 논증한다. 임형택 『동아시아 서사와 한국소설사론』, 소명출판 2022, 27면.↩
- 황석영의 민담과 설화의 소설적 활용은 대하장편 『장길산』(초판 전10권, 현암사 1984; 개정판 전12권, 창비 2004)에서 시도되었으며 근작에서는 『여울물 소리』(초판 자음과모음 2012; 개정판 창비 2014)와 『철도원 삼대』(창비 2020)에서 흥미롭게 실험된 바 있다. 황석영 소설에 나타난 ‘민담 리얼리즘’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졸고 「‘나라 만들기’를 향한 서사적 도정」,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참조.↩
- 김승호 『불가의 글쓰기와 불교문학의 가능성』,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40면.↩
- 황광수 「텍스트로서의 『장길산』과 미륵세상」, 최원식·임홍배·엮음 『황석영 문학의 세계』, 창비 2003, 126면.↩
- 이는 적응과 극복을 동시적 과제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과도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근대의 이중과제론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참조.↩
- 유진 오덤은 자연에서 상호이익을 주는 관계로서 생태적 창발성이 지닌 힘이 인간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유진 오덤 『생태학』, 이도원 외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1, 49면.↩
-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49~50면.↩
- 박태순은 나무와 장승 등 마을수호신앙이 담은 ‘민중성’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민중의 삶에 공존하는 샤먼의 존재를 모계문화적인 에코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다시 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박태순 『나의 국토 나의 산하 1』, 한길사 2008, 171~182면.↩
- 민중이 주체가 되어서 혁명의 에너지를 분출한 동학운동과 이후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어온 민주화운동 과정 및 촛불혁명의 의미를 연결한 내용으로는 다음의 대화를 참조. 백낙청·김용옥·박맹수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창비 2024, 74~83면.↩
- 백낙청 「민중은 누구인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566면.↩
- 박태순 「홍역」, 『외촌동 사람들: 박태순 중단편 소설전집 3』, 오창은 엮음, 걷는사람 2024, 284면.↩
- 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마지막 테우리』, 창비 2015, 26~30면.↩
- 법원은 조류충돌 위험, 세계자연유산 훼손, 경제성의 문제 등을 근거로 새만금 신공항 건설에 대한 취소 판결을 내렸지만, 정부와 전북도는 이에 불복해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강, 바다, 뭇 생명이 8천년간 만든 수라갯벌…“습지보호지역으로”」, 한겨레신문 202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