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변화의 새싹과 숨은 움직임을 추스를 때
2000년 벽두, 한반도 남쪽은 ‘바꿔’ 열풍과 ‘산불’로 시작되었다. 사실 ‘산불’은 총선 와중이고 순식간의 일이었기에 쉽사리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눈여겨보면 황사 속의 ‘산불’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역사 속에서 침묵만 하던 자연의 인간을 향한 준엄한 경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쓰는 순간, 화마가 휩쓴 산자락에 새싹이 다시 움트는 신문 속의 사진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불에 탄 싸리나무 밑동에서 돋아난 새싹, 폐허의 백두대간 계곡을 따라 다시 일어나는 청색의 긴 생명선…… 자연은 이처럼 경이로운 창조의 부활도 함께 선사하면서 인간을 일깨운다.
그런데 기실 ‘바꿔’ 열풍인즉 거기에 화답하는 우리들의 작은 부활의 싹이 아니던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위력 속에서 침체 일로였던 90년대를 생각하면, 이는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고 다시 일어서는 형세라 할 만하다. 물론 ‘총선’이라는 시공의 제한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오히려 그런만큼 이제 한때의 바람이 아닌 ‘지속’을 궁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가시적인 총선결과보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보이는 변화의 새싹과 숨은 움직임을 차분히 추스를 때다. 부문운동으로 분화되었던 운동단체들의 광범한 연대를 일거에 일궈낸 총선시민연대의 성과와 한계,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역으로 깨닫게 되는 대안운동의 필요성, ‘바꿔’ 열풍의 주역이자 최저투표율의 주역이기도 한 n세대의 정치불신이 내포한 복합성, 분단이데올로기의 서서한 퇴조와 미묘하게 형질 변경되고 있는 지역주의 등 결코 단순치 않은 기류의 한가운데 우리는 서 있다. 역사상 최초로 개최될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한반도의 새로운 움직임과 대만의 정권교체 등 나라 안팎에서, 채 예상치 못한 사태 또한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언제나 큰 시야를 놓치지 않으려 애써온 창비로서는 자연 어느 호보다 긴장된 호흡으로 이 계절을 응시했다. 우선 ‘4·13총선’을 종합 점검하는 좌담을 마련하였다. 총선시민연대를 주도했던 박원순 변호사, 권기홍·신광영 교수, 그리고 민주당 한명숙 의원이 이번 총선 속에 담긴 여러 의미와 징후를 폭넓게 점검한다. 이와 함께 변모하는 사회운동을 분야별로 다룬 특집논문도 다채롭고 풍성하다. 김영희 교수는 기조논문을 통해 여성운동의 핵심 쟁점을 점검하면서, 여성운동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에 어떻게 상호침투하는지를 치밀하게 고구하여 ‘자율화·다양화와 함께하는 연대 모색’의 길을 예시한다. 또 국내 환경운동단체의 구체적 활동상을 ‘환경관리주의와 생태주의’라는 근본적 틀로 분석하여 앞으로의 과제를 탐색한 이필렬 교수, 87년 이후 노동운동이 지금까지 어떤 경로를 거쳐왔는지를 통해 ‘세계화와 자유주의에 대한 투쟁’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중요성을 역설한 심상정씨, 그리고 ‘세대단절의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것’도 사회운동의 큰 몫이라는 견지에서 n세대의 실체에 밀착하여 그 접합점을 모색한 박영선씨, 또 90년대 들어서 가장 크게 지각변동을 겪었던 언론운동과 인권운동의 실상과 추이를 탐사한 임영호 교수와 김형태 변호사의 글도 제각기 소중한 길트기 작업이다.
덧붙여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아 마련한 강인철 교수의 글도 특집을 거든다. 전쟁 이후 우리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반공주의’가 ‘시민종교’의 특성을 지닌 독특한 이데올로기 복합체, 나아가 ‘총체적인 제도와 과정’으로 심화되다가 최근 들어서 탈각되는 과정임을 밝혀내고 있다. 아울러 타이완에서 이루어진 정권교체 과정과 의미를 타이완 학자 두 분으로부터 직접 듣게 된 것도 이번 호의 수확이다. 특히 쳔 꽝싱 교수는 ‘민족주의운동과 탈냉전’이라는 일국사와 지역사를 통투(通透)하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조망하여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많다. 또한 ‘과외금지 위헌 판결’의 파장을 긴급히, 그러나 사회구조와 연관시켜 점검한 김종엽 교수의 ‘현장통신’ 역시 시의적절하다. 거기에 현직교사 정진화 선생이 바라보는 조기유학 문제, 대형학원 강사 길종각 선생과 학원논술교사 경험을 가진 김창수씨가 바라보는 공교육 문제 등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번호 문학분야 또한 튼실한 열매로 내실을 기하게 되어 마음 뿌듯하다. 무엇보다도 80년대 「동지와 함께」의 작가 ‘한백’으로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정혜주씨의 중편 「강·섬·배」(430매)를 주목해주기 바란다. 잔잔하고도 깊이있는 서정적 문체로,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젊은 여성이 90년대의 변화된 상황과 혼신으로 맞대결하는 삶의 진경을 펼쳐 보이는, 가히 ‘후일담의 완결판이자 극복편’이라 할 만하다. 여기에 어느덧 20주년을 맞는 광주항쟁의 현재적 상흔을 다룬 박정요씨의 단편도 애잔하다. 또한 강은교·이동순·이상국·홍일선·양애경·김경미·나기철·조정인 등 중견에서 신예에 이르는 시인들이 펼치는 다양한 시의 무대 또한 따사롭고 싱싱하다.
문학평론도 시·소설·비평 등의 영역을 두루 포괄하여 우리 문학의 현재를 종합적으로 가늠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90년대에 활발한 비평활동을 전개했던 정과리·신승엽·고미숙·방민호의 신작평론집을 심도있게 분석한 김명환 교수, 상당한 난맥상을 보여온 9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날카롭게 조회하여 4인의 대표시인들을 추출, 그 시적 성취를 설득력있게 제시한 유성호 교수, 90년대 들어 변모하는 소설미학에 주목하여 한강·배수아·백민석의 신작을 애정으로 끌어안은 신수정씨 등의 평문과, 최현식씨의 시집촌평이 그것이다. 여기에 우리 문학·예술계의 핵심 쟁점인 ‘재현’의 의미를 발본적으로 재구하는 김진석 교수의 도전적인 글 또한 흥미롭다.
그밖에도 국내에 첫 번역된 E.P. 톰슨의 명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아동문학의 최근작을 점검한 이남희씨와 김상욱 교수의 서평, 그리고 많은 분들이 수고해주신 촌평란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최근의 중요 저작과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林奎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