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책머리에

 

 

미국의 보복전쟁에 반대한다

 

 

21세기는 환란(患亂)의 세기가 될 것인가. 새 세기의 첫해가 저물기 전에 미국의 심장부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나더니 어느새 세계는 ‘대(對)테러’ 전쟁의 포화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9월 11일 테러는 민간항공기를 대형 미사일로 둔갑시켜 수천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는 비정함으로 형언하기 힘든 충격을 주었다. 세계무역쎈터 쌍둥이 빌딩의 잔해 속에 잿빛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쓴 미국인들의 유령 같은 모습은 종말론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선지 많은 사람들은 이번 테러사태로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난 세기 미·소 양대국의 가공할 폭력과 강압을 겪은 주변부 민중들에게는 이번 테러의 잔혹함이나 비정함이 그렇게 새롭지는 않다. 전쟁 혹은 ‘대(對)테러’ 작전이라는 명분상의 차이점은 있을지언정 냉전시대와 탈냉전시대의 입구에서 한국·베트남·칠레·니까라과·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의 수많은 양민들 역시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을 경험했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에 의한 인명의 대량학살은 근대의 생명존중원칙을 무참히 유린한 점에서는 이번 테러 못지않다. 이렇게 보면 이번 테러는 20세기에 자행된 잔인한 폭력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런 폭력이 세계체제의 중심부 국가인 미국 땅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중심부 역시 이제 주변부적인 폭력에 노출되었으니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좀더 평등해졌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달라진 대목은 몇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첫째, 자국의 심장부가 공격당했다는 자의식과 그에 따른 보복의지가 테러사태 이후 미국의 대응방식을 오만하고 무분별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공격의 첫번째 작전명 ‘무한한 정의’(Infinite Justice)처럼 미국은 자신이 지목한 테러세력에 대한 가혹한 보복이 곧 무한한 정의라고 생각하는 듯이 움직인다. 그러기에, ‘테러와의 전쟁’이란 것이 정의를 위한 것인지 보복을 위한 것인지, 빈 라덴을 잡는 문제인지 세상의 모든 테러를 뿌리뽑는 문제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테러와의 전쟁’이 부시 대통령의 말처럼 ‘선과 악의 대결’이라면 탈레반 못지않게 폭정과 악행을 일삼은 북부동맹이나 우즈베끼스딴과는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둘째, 미국은 정의니 인권이니 하는 근대의 보편적 가치를 아프간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이제는 자신의 서구중심주의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이 공언하는 근대의 보편적 가치와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서구중심주의 간의 심각한 괴리와 모순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전화(戰禍)와 폭정과 굶주림에 찌든 지구상의 최빈국을 한달 이상 폭격함으로써 기아선상의 수백만 아프간 민중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전쟁이 그 명분에 합당할지 의문이다. 영미의 참전에 이어 서구열강이 줄줄이 파병의사를 밝힌 이 전쟁은 사실은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지배권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가. ‘기독교 대 이슬람’이라는 문명충돌론의 이데올로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도 이렇게 서구중심주의가 뻔히 드러나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서구중심주의적 발상으로는 테러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악화시키기 십상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이 설령 자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동맹군을 동원하여 빈 라덴을 체포하고 탈레반정권을 무너뜨린다 해도, 이로써 세계의 테러가 근절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누가 테러리스트냐 하는 문제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여기서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이 지난 10월 31일 씨리아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는 의미심장하다. 양국 정상의 합동기자회견에서 씨리아에 근거를 둔 하마스,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 등의 테러단체를 단속해달라는 블레어 수상의 요청에 대해 씨리아의 아싸드 대통령은 테러집단은 오히려 이스라엘인들이고 그들은 ‘자유의 투사’라고 맞받아친 것이다. 레지스땅스운동을 이끈 드골을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없듯이 이스라엘에 빼앗긴 주권과 영토의 탈환을 위해 싸우는 이들 역시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한 ‘테러리스트/자유의 투사’라는 이분법이 타자의 목소리에 의해 전복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화해와 강압, 평화와 폭력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서구중심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타자와 평화적인 해결을 꾀하느냐 아니면 그 한계에 눈감고 폭력적인 방식을 밀어붙이냐의 선택이다. 빈 라덴과 탈레반은 이슬람권에 대한 서구의 식민주의적 간섭은 물론 이슬람권 내부의 근대화·세속화의 흐름에도 반발하고 있다. 때문에 서구가 이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입지가 정당화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들이 반미테러를 촉구하는 근거는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과 미국의 탄압이니만큼 팔레스타인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만이 테러문제를 풀 수 있는 참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래야 테러와의 전쟁도 ‘이슬람 대 기독교’의 대결이라는 파멸의 덫에서 헤어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빈 라덴과 탈레반의 반생명적 원리를 극복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한반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슬람권(특히 팔레스타인)과 더불어 세계사적인 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한반도가 이번 사태의 와중에서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남북한간의 평화와 신뢰의 기틀이 어느정도 마련된 덕택이다. 하지만 분단체제의 특성상 북미관계의 사소한 충돌이나 남북관계의 묘한 어긋남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기에 분단체제 극복 노력을 평화운동과 굳건히 결합시킬 필요가 있고, 서구중심주의에의 투항을 거부하되 현실적인 대미외교를 적절히 구사하는 중도의 지혜가 더없이 중요하다.

 

이번호 특집은 둘이다. 미 테러사태와 아프간전쟁을 다룬 ‘특집2’는 이번 사태의 특징적인 면모와 추이를 국내외 필자들의 다양한 접근방식을 통해 집중 조명한다. 이슬람법과 급진주의적 원리주의에 대한 이원삼의 글이나, 문명충돌론에 담긴 위험성을 엄중히 경고하는 싸이드의 글, 특유의 냉정한 논리로 향후 미국 헤게모니의 점진적인 쇠퇴를 예고하는 월러스틴의 글은 모두 이 사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UN의 탈레반에 대한 교섭과정을 소상히 기록한 카와바따의 글은 UN의 관점에 치우친 감은 있으나, 탈레반의 성향과 태도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미덕을 지닌다. 90년대 미국경제를 분석하면서 향후의 경제흐름을 전망하는 전창환의 글과 테러사태 전후 남북관계의 추이를 짚으면서 “남북관계의 끈만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원섭의 글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한편 시타와 조너선 셸은 각각 여성주의와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전쟁의 폐해를 고발하고 반성을 촉구하는데, 강렬한 윤리의식과 절박한 논법이 돋보인다. 이들의 실천적인 논지는 아프간전쟁이 남의 일이 아님을 일러준다. 그밖에도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우리말 완역본의 의의를 짚은 이희수의 서평과 싸이드의 자서전에 대한 촌평, 그리고 테러사태 전후의 미국경제에 관한 로버트 브레너의 관점이 간략히 언급된 브레너·정성진의 대담 역시 이번 특집과 관련하여 읽으면 흥미를 더할 것이다.

‘특집1’은 최근 우리 문학에 나타나는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하여 평가하는 기획으로서, 우리의 문학논의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임규찬은 윤지관·황종연·최원식의 입장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밑변의 대각으로 하고 양자의 회통론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구도 속에서 논한다. 하정일은 김명환에 대한 반론을 펼치면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과 최원식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의 의의와 문제점을 찬찬히 살피고 있어 임규찬의 글과 함께 주목할 만하다.

황현산은 미당 서정주에 대한 일체의 통념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 미당의 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엄정한 비평적 평가를 시도한다. 고은의 「미당 담론」에 이어 찬양과 비난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또 한걸음의 중요한 진전이 이뤄졌다고 하겠다. 특히 「자화상」을 보들레르의 「축성」과, 「동천」을 황진이의 「영반월」과 비교하는 비평전략이 신선하다. 염무웅의 유장하되 섬세한 비평은 그가 다루는 이성선·최하림·김영무의 자연풍경 속에 담긴 ‘고통의 텍스트’들의 각각 다른 의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김승희는 주류 시들의 안정된 서정화 경향을 비판하면서 고통스러운 현실세계에 열려 있고 도발과 전복으로 가득한 시들을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방대한 문학특집에다 중견평론가 성민엽의 『손님』론과 신인 이재영의 신경숙론, 주목받는 김정란, 남진우의 시비평집들의 공과를 차분히 짚는 유성호의 서평을 더하면 이번호 문학논의는 풍성하다. 그밖에 음양오행을 우리말의 원리와 인지작용과 관련하여 풀이한 소광섭의 글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의미있는 만남으로서, 일독을 권한다.

두 특집과 관련된 이야기가 길어지다보니 다른 글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못한다. 이번호 소설란은 윤영수, 김지우 그리고 신인 권채운, 표명희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중·노년의 삶에 주목하고 있어 이채롭다. 이가림을 필두로 신인 최금진에 이르는 시란도 만만찮은 성과를 자랑한다. 또한 현장통신·촌평·문화평과 독자의 목소리 필자들께 감사드리며, 디지털창비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창비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신인 여러분께 심심한 축하를 보내며 정진을 기대한다.

[韓基煜]

한기욱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