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 한국문학의 오늘, 민족문학의 새로운 구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
최원식·윤지관·황종연을 통해 본 우리 비평의 현단계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평론집으로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작품과 시간』이 있음. kclim@mail.skhu.ac.kr
1. 들어가며
근년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문제가 재차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문학 혹은 비평이 어떤 곤경에 처한 듯하다. 기본적으로 대립적이기만 했던 두 개념어가 때로 한 몸체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손을 내밀어 악수하기를 원하는 느낌을 주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의 흐름이─현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를 포함하여─뭔가 막혀 있다는 생각과 함께 출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우리 시대의 밑마음 한자락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필자 역시 그래서였을까, 근자에 발간된 여러 비평집 속에서 세 사람의 또렷한 목소리가 유독 눈과 귀를 붙들었다. 그 주인공은 최원식(崔元植)의 『문학의 귀환』(창작과비평사 2001), 윤지관(尹志寬)의 『놋쇠하늘 아래서』(창작과비평사 2001), 황종연(黃鍾淵)의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이다.(이하 이 책에 관한 인용은 평론제목과 면수만 본문에 표기한다.) 그런데 막상 한곳에 모아놓고 보니 흥미롭게도 이들은 삼각형의 세 꼭지점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윤지관과 황종연이 각각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에 거점을 두고 각기 상대입장을 비판하면서도 견인하는 구도로 밑변에서 대립하고 있다면, 최원식은 그 위에 서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이야기하며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간의 교류 없이 각자가 생각하는 방향을 따라 밖으로만 치닫는 형세라 이들이 만들어낸 삼각형 안의 공동구역은 왠지 침묵만이 감도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침묵이야말로 폭풍 전야와 같은 것이 아닐까. 입장이 다른만큼 이들의 목소리는 상대를 지칭하지 않은 채 서로 격렬히 부딪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 평론가의 비평적 모색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비평의 현단계를 어느정도 가늠해볼 수 있고 또 대략적인 풍향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들이 만들어낸 침묵의 공동구역을 하나의 소통공간이 될 수 있도록 바람구멍을 내고 싶은 충동도 글쓰기의 한 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본고 역시 그런 각인각색을 고려하여, 더구나 이들간에 직접적인 논전도 없이 삼각구도를 보이는지라 개인별 점검을 통해 이 구도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다만 리얼리즘·모더니즘과 관련된 사항에 중점을 두었기에 개별 평론가가 보여준 나름의 다양한 비평적 성취가 자연 배제될 수밖에 없어 일면적 평가가 될 소지가 많을 것이다. 다만 필자로서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문제가 전체를 아우르는 이론체계의 문제이기에 단순한 일면성으로만 흐르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2. 논리의 치열성·선명성과 내적 균열─윤지관의 리얼리즘론
윤지관의 『놋쇠하늘 아래서』는 이미 제목 자체에서 감지되듯 쇠의 기운에 장악되어 있다. 좀더 제목과 밀착해서 부연하자면 ‘쇠에는 쇠로’라는 기운이 꽉 들어찬 리얼리즘론의 한판 싸움터이다. 실제로 그는 최근의 민족문학 논의에는 어딘가 기(氣)가 빠져 있다며, 이를 이겨낼 힘을 구성해내는 일(처방)은 리얼리스트의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말한다(민족문학에 떠도는 모더니즘의 유령」 175〜76면). 과연 그의 글에는 민족문학·리얼리즘·민중문학·객관성·당파성 등과 자유주의·(포스트)모더니즘·과학주의·정치주의 등이 각기 일사불란한 대열을 이루고 후자를 향한 전자의 공격이 참으로 치열하다. 가령 윤지관이 전개하는 전투양상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전형적으로 집약되어 드러난다.
당파성이란 어느 일개인의 성향이나 이념이 아니라 바로 사회변혁을 담보할 집단적 주체의 지향과 성격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해체된 마당에 한술 더 떠서 집단적 주체라고? 그런 것이 어디 있는가?라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지금은 이념이 판치는 80년대가 아니다. 탈이념과 탈정치가 도도한 흐름을 이루는 90년대, 바로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그들은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런 판에 박힌 말들은 이 연대에 들어와서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이 상투화된 ‘탈(脫)’의 주장 자체는 인간사가 이념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아주 벗어날(脫) 수는 없는 까닭에 늘 자가당착에 시달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이여, 걱정 마시라, 이념과 정치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탈이념과 탈정치의 이면에는 탈이념의 이념과 탈정치의 정치학이 목하 음험하고도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80년대에 존재하던 주체가 90년대가 오니 사라졌다고? 걱정 마시라, 주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그 주체는 엄연히 살아있으니까. 80년대까지는 이성의 시대였으나 90년대는 반이성의 시대이며 이성은 얼굴을 바꾸어 압제자가 되었다? 청컨대 제발 걱정을 놓으시라. 이성의 시대가 갔다고 판단하는 그 이성은 여전히 변함없이 건재하고 있으니까. (「해방의 서사와 세기말의 문학」 224면)
물론 이 예문은 윤지관의 비평집 전체에서 가장 ‘과격한’ 서술로 손꼽히겠지만, 여기서 보여지는 기본적 특징이 그의 글 전반에 두루 산재하여 나타난다. 무엇보다 비판·역설 어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옹호하는 논리화 방식이 눈에 잡힌다. 그런만큼 윤지관의 『놋쇠하늘 아래서』가 주는 일차적 인상은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자부심과 그가 적대시한 대상에 대한 서릿발 같은 비판이다.
필자 역시 리얼리즘을 근본에서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윤지관의 이런 선명한 판가름에 내심 통쾌한 기분도 든다. 실로 90년대 이후 위세를 얻고 있는 신종 문학현상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순히 표현강도에서가 아니라 때로 뿌리를 잡아 흔드는 면에서 발본성이 있다. 이를테면 한국비평의 문제를 과학주의와 정치주의로 범주화하여 그 문제점과 한계를 예리하게 분석한 것이나(「속물비평의 기원」 「날아라, 비평」 등), 광기와 신경증과 환상이 상기시키는 온갖 프로이트적 세계의 언어로 가득한 90년대 담론을 사회적 무의식 차원에서 징후적으로 꼼꼼하게 읽어내 비판한 점이나(「90년대 정신분석」),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서 모더니즘의 주요한 이론적 발판 노릇을 했던 버먼(M. Berman)의 『근대성의 경험』(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Penguin 1988)에 대한 비판적 독해(「민족문학에 떠도는 모더니즘의 유령」) 등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그러한 점이야말로 『놋쇠하늘 아래서』가 가지는 최량의 성과이다. 그러나 솔직히 통쾌한 기분은 그대로 있으면서 뒷맛이 그리 개운치가 않다. 선명한 대립구도로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그 역공의 힘으로 리얼리즘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형태가 실인즉 일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립자라 할지라도 동일성 속에 여러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이에 대한 세심한 분별없이 손쉽게 단순화·일률화하여 상대진영을 공략하는 전법 역시 일면적이다.
가령 그가 주된 표적으로 내세운 자유주의와 모더니즘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그는 60년대 후 한국 모더니즘을 “민중성을 상실한 한국적 자유주의와 결합”(같은 글 187면)한 것으로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필자는 ‘민족문학과 리얼리즘’ 대 ‘자유주의와 모더니즘’이라는 대립적 도식에는 ‘민족문학〓이념, 리얼리즘〓방법’이나 ‘세계관과 방법’ 틀로 사유하였던 80년대적 인식론의 기계적 확장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1 그런데도 이 도식을 구사하는 것은 알게모르게 모더니즘문학 일반에 대한 부정성을 일거에 징치하기 위한 비판전략 때문이 아닐까. 이를테면 ‘자유주의’로 모더니즘 일반을 비판하는 방식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모더니즘의 재인식을 주장한 일부 논자들이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주요 근거로 논의를 폈던 것에 대해 그는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의 맥락에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같은 글 188면)이라는 꼬리표를 슬쩍 달아놓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족문학론은 모더니즘의 이념에 반대하는 것이지 우리 현실에서 배태된 모더니즘의 작품적 성과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문제는 ‘모더니즘의 수용’이 아니다」 205면)기 때문에, 자신은 모더니즘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의 “‘숨은’ 동조자”(「민족문학에 떠도는 모더니즘의 유령」 173면)라고 아무리 말하더라도 워낙 견고하게 쳐놓은 울타리인지라 확장의 운동이 자유로울 리 없다. 결국 자유주의와 모더니즘의 무원칙한 혼색(混色)은 ‘자유주의’에 대한 그 자신의 부정적 신념으로 모더니즘 일반에 대한 부정의 능선을 가파르게 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가 이상(李箱)을 두고 “경우에 따라 리얼리즘의 명칭을 부여받는 것도 아주 부당한 것만은 아니”(같은 글 193면)라며 때로 작품과 이론의 구별이라는 온당한 접근법을 구사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근대문학에서 리얼리즘론은 어떤 의미에서 모더니즘론을 포함하고 있는 것”(「문제는 ‘모더니즘의 수용’이 아니다」 204면)으로까지 치닫는 것을 보면 이것 아니면 전무(全無) 식의 흡수통합론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가질 법하다.
그런데 모더니즘의 단순화는 윤지관 자신의 리얼리즘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월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몇몇 예외가 되는 그릇된 리얼리즘론에 대한 비판을 항시 단서로 달지만, 그가 펼치고 있는 리얼리즘론은 이미 ‘확립’된 어떤 것이다. 물론 애정을 담아 표현하자면 ‘리얼리즘 심화론’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눈으로 보더라도 몇가지 개념적 사유가, 비유적으로 말해 일종의 법률개정 수준에서 이루어질 뿐 입법적 수준에서 문학과 더불어 진정으로 심화, 쇄신되고 있다는 느낌은 주질 못한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개념 중의 하나인 ‘당파성’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이에 대한 이해가 과거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격으로 바라본 점에 오류가 있었으나 당파성에 덕지덕지 묻은 때를 벗기고 제 모습을 찾게 만들면 당파성이 곧 객관성임을 알 수 있다며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문학에서의 당파성이란 특정한 이념이 얼마나 드러나 있느냐는 차원이 아니라, 작품이 어떻게 사회적 연관관계 속에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는가를 말한다는 점에서 객관성이기도 한 것이다. 즉 당파성의 구현이야말로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물음과 관찰을 문학적 성과 속에 녹여내는 일이며, 그런 점에서 해방의 서사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문학이론이 실재하는 사회운동과의 연결점을 확보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요, 더 깊게는 진리·현실·객관의 차원을 의지·실천·주관의 문제와 결합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해방의 서사와 세기말의 문학」 222〜23면)
명백한 오류로 판명된 일부 관점은 이렇게 단서를 달아 손쉽게 가지치기를 하지만,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신의 입론은 낯익은 원론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그는 즐겨 ‘객관성’과 ‘당파성’을, 또한 ‘과학됨의 참의미’ ‘진리 추구’ 등을 강조하지만, 그 자체가 ‘지성의 훈련 곧 감수성의 훈련’으로서 현실과 문학 속에서 탐구되는 것이 아닌, 자명한 것 즉 지식의 측면으로 도구화되어 있다.2 아니 그것이 어딘가에 이미 존재한다는 듯이 외재성(外在性)에 기대어 구사되고 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작업들이 창조적 상호협동성에 기반하여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느정도 유추해서 그 맥락을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당연한 전제사항으로 간주하고 서술함으로써, 더구나 80년대와 별반 분리되지 않은 채로, 오히려 그때 다져진 철길을 따라 철마가 의심없이 질주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까지 냄으로써, 그의 이론체계에서 불변하는 법칙으로 명제화되어 있다. 물론 이런 진단에 윤지관 자신은 억울함을 느낄 것이다. 사실 글 부분부분에서 예리한 분석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본골조가 워낙 강하다보니 그 나름의 세심한 여러 배려나 외연의 확장 노력이 그 자체로 부차화되고 만다. 말하자면 위계구조가 이미 확고히 짜인 상태이기에 바깥을 아무리 넓혀도 자신의 진정성만큼 합당한 반응을 얻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실제 작품평을 보면 더 잘 드러난다. 가령 방현석의 『십년간』과 신경숙(申京淑)의 『외딴 방』을 나름대로 꼼꼼하게 분석·비교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근대성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 두 작품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리얼리즘의 길에 가까운가에 대해 섣부른 단정을 내리고 싶지 않다. 두 작품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만큼, 전체적인 작품의 성공도만으로 그 공과를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작품적 완성도에서는 『외딴 방』이 우월하다고 보지만, 『십년간』이 포괄하는 전체성과 리얼리즘 양식의 힘이 뿜어내는 효과는 미적 형식의 차원에서만 설명할 수 없는 면이 있기 때문”(「90년대 리얼리즘의 길찾기」 257〜58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전체적인 작품의 성공도’와 별개로 그 무엇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나, ‘그 무엇’이 ‘전통적인 리얼리즘 양식’(사실주의적인 현실묘사의 기율과 실천적 정신, 총체적 반영)으로서 이것만 어느정도 구비하면 ‘작품의 성공도’와 별개로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식이다. 물론 『외딴 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방현석의 『십년간』을 향한 윤지관의 충정은 이해 못할 바 아니나,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80년대의 낯익은 비평적 얼굴이다. 가령 방현석의 후속작 『당신의 왼편』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기록물을 제시하는 것이 소설이 아닌만큼, 소설에서 일어나는 기억은 현재를 통해 이룩되는 재생이며, 그런 점에서 하나의 사건이자 창조”(「기억의 거처」 328면)라는 온당한 발언을 빠뜨리지 않지만, “주인공 설정과 서술전략의 엉성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전체를 끌어가는 힘으로서 기록에의 충동은 경탄스럽다”(같은 글 327면)는 발언에 이르면 작품의 창조성 대신 현실 반영의 기록성만 가지고도 작품은 제몫을 한다는 결론으로 선회하고 만다. 리얼리즘적 원리로 상정한 몇가지 것들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다보니 통상적인 리얼리즘론에 의한 도식적 평가라는 혐의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오히려 이 점에서 윤지관은 이론주의(혹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과학주의’)의 혐의까지 받을 위험이 있다. 그가 과학주의 비평을 격하게 비판하면서 인용한, “아놀드가 일찍이 말했듯이, 작품 자체가 아니라 체계에 한쪽 눈이 가 있는 비평으로는, 아무리 ‘치밀하게’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도 비평이 지향하는 객관성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속물비평의 기원」 145면)다는 발언은 자신에게로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화살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얼굴을 내미는 낯익은 80년대적 잔영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이 점에서 ‘외재적 사유와 내재적 사유’ 문제를 제기한 김상환(金上煥)의 발언은 이 문제에 대한 좋은 가늠자를 제공해준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외재적 사유는 규칙에 대한 예속을 의미있고 정당한 행위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유, 외부로부터 주어진 원리와 이념의 인도 없이는 혼돈에 대처할 능력이 없는 사유이다. 반면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가는 내재적 사유는 스스로 규칙과 방향을 창출해가는 행위로서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행위이자 자유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창조적 행위야말로 예술적 행위인데, 그것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규칙을 사례화한다는 데 있다. 예술이 창조하는 것은 규칙의 사례가 아니라 사례적 규칙 자체이다. 이런 예술에 대하여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타성, 즉 외재성이다.”3 나아가 그는 이를 역사적 범례주의의 길, 즉 질서를 창출하는 규칙과 그 규칙의 선험적 규범성은 계승 가능한 역사적 범례 안에서, 그 범례에 대한 창조적 해석을 통하여 추구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딱히 윤지관만이 아닌, 필자 자신을 포함하여 리얼리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경지만큼 내재화된,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갖춘 경우는 흔치 않다는 생각이다.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이 점에서도 다시 절감한다. 발본적인 면에서 추스릴 것은 추스리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면서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영접하는 과감한 환골탈태가 필요하다는 생각, 윤지관의 비평집을 통해서 필자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실패 속에서도 잊어서는 안될 80년대의 젊은 혼을 되살리는 것이리라.
3. 유연화 전략의 경계와 자기모순─황종연의 모더니즘론
사실 황종연은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특별한 호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제목처럼 카니발적이라 할 만하다. 물론 이것저것 구별되지 않는 혼돈이란 의미의 난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성격이 다른 많은 것들이 하나의 장소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속에서 그는 그때그때 적절한 무리를 선택해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함께 공유하는 미적 특징을 해부해나간다. 실로 거기에 황종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과 장기가 숨쉬고 있다. 그런데 그가 붙인 이름과 작은 무리들을 눈여겨보면 암묵적으로, 말하자면 내부에서 스스로 드러내며 부르는 이름이 있다. 필자는 그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모더니즘론이라 부른다. 좀더 텍스트의 문맥에 결부시키면 ‘버먼식 모더니즘론’이라고 불러도 좋을 터이다.
이념적으로 근대주의의 유혹에서 좀처럼 놓여나지 못했던 우리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훈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근대성에 대한 철저하고 전면적인 반성은 이제 시대의 정언과도 같다. 그러한 반성은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생산한 근대 부정의 담론들을 복습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요구한다. 근대란 어쩌다 우연히 탑승한 역사의 객차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담론적, 이념적 권역(圈域) 안에서, 바로 그것 때문에 숱한 갈등과 분쟁을 겪으면서 우리 스스로를 형성한 역사가 있다. 따라서, 근대성을 반성하는 작업은 우리의 자아를 심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버금가는 발본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근대성을 둘러싼 모험」 385면)
황종연은 이렇듯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자신의 입지점을 그것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따라 근대성이란 광활한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 발본적인 반성을 통해 근대성을 재구축하는 데 둔다. 이런 인식은 황종연 자신이 버먼의 모더니즘론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버먼처럼 여전히 살아 있는 창조적 기획으로 모더니즘의 새로운 갱생론을 추구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과거 모더니즘론의 진지한 핵심을 보존하고 그에 기반하여 오늘의 문학에 나타난 여러 징후를 검증한다. 그 검증은 매우 조심스럽고 유연하다. 그는 자신의 평론집 머리말에서 말한 바대로 문학의 관습과 전통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지금 이 시대의 문학에 대한 나름의 확인과 명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평론가이다. 특히 그의 꼼꼼한 작품읽기와 폭넓은 문학적 지식이 상호 넘나들며 펼쳐지는 비평의 장은 그 자체의 풍요로움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유연화와 폭넓음은 미덕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비평의 정당성과 객관성을 담보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특징이 자신의 이론체계와 어떤 관련을 맺고 발현되는가 하는 이론적 해명이 뒤따라야만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모더니즘론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그의 체계에서 중심동력을 이루는 버먼의 모더니즘론부터 보자.
그는 버먼의 『근대성의 경험』을 분석한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에서 버먼의 모더니즘론이 갖는 최대 강점으로 정의(定義)의 유연함을 든다. 그리고 그런 유연함을 모더니즘이 근대화와 맺고 있는 관계가 대단히 복합적이라는 데서 찾는다. 한마디로 버먼은 근대성을 생성과 분해, 창조와 파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 속의 유동성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근대생활을 “종결 없는 생성과 해체의 변증법적 과정”(「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 376면)이라고 봄으로써 그 속에 이미 자기초월의 변증법적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근대적 삶을 철저히 사는 길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같은 글 380면)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황종연은 버먼에 기대어 ‘종결 없는’ 근대에 철저히 살아가는 것, 즉 ‘근대충실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버먼의 입장에 대해서는 황종연도 거론한 앤더슨(P. Anderson), 그리고 국내논자로 백낙청(白樂晴), 윤지관 등이 비판적으로 접근한 바 있다. 백낙청은 기본적으로 앤더슨의 논의에 동의하면서, 모든 변혁적 사상과 운동조차 ‘녹여버리는’ 것이 근대로 설정되어 “근대화의 와중에서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에 반대할지를 판별할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며, 일단 근대가 시작된 후로는 ‘모든 고정된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명제가 영구불변의 진리인 듯이 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끝없는 파괴성이 극복된 상황을 사유하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4들었다고 비판한다. 결국 “모더니즘이 곧 리얼리즘이다”라는 버먼의 발언은 모더니즘 옹호자치고는 드물게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정도지, 모더니즘 및 모더니티의 극복을 지향하는 리얼리즘론과는 뚜렷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 백낙청의 주장이다. 윤지관의 버먼 분석(「민족문학에 떠도는 모더니즘의 유령」)은 리얼리즘론에서 버먼 읽기라고 할 만큼 흥미롭다. 그는, 버먼이 사용하는 ‘모더니즘’은 우리말로는 아예 ‘근대론’이나 ‘근대문학’으로 옮기는 편이 더 정확한 것이고, 버먼의 모더니즘론은 오히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더 큰 의도가 있다고 색다르게 해석한다. 예를 들어 18,19세기 작가들이 근대성의 복합적인 국면을 깊이있게 탐구하였고, 정작 모더니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20세기 본격 모더니즘 작가들은 송두리째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신랄히 비판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 나아가 모더니즘에 자리잡고 있는 충동은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짐에도 불구하고 리얼한 어떤 것을 창조하고 포착하려는 열망”이라는 버먼 자신의 정리야말로 실상 리얼리즘적인 것에 가깝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를 제3세계의 민중운동과 버먼 자신의 모더니즘론을 결합시키는 데서 발견한다.
사실 버먼의 논의를 두고 황종연과 비판자들 사이에는 해석상의 여러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근대의 ‘종결 없음’을 유독 강조하는 황종연과, 오히려 그것을 결정적인 한계로 비판하는 백낙청은 곧 모더니즘론과 리얼리즘론의 선명한 대립전선이다. 또한 제3세계와의 연관성 문제만 해도 그렇다. 황종연은 이를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로 정리하는 것이 타당한가는 의문일지라도”(「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 380면)라고 단서를 달면서 이를 모더니즘의 자기갱신 능력과 연관짓는다. 그에 의하면 앤더슨이 모더니즘을 서구적 맥락 안에서 파악하는 관점을 고집하고 있는 반면에 버먼은 제3세계에까지 적용되는 세계적 차원의 문화로 이해하면서 그 주요한 동력으로 근대화의 양면성을 혹독하게 경험한 제3세계 국가들의 사정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사실 이 지점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본질적 측면이 있다. 즉 앤더슨의 종합국면에 대한 설명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모더니즘에 활기를 부여한 ‘문화적 역장(力場)’ 속에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에 연결되는 이질적인 가치, 이념, 비전들이 복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에는 모더니즘의 초기 단계에서 근대성의 역설에 철저한 문학적, 예술적 표현들이 유독 번창한 역사적 이유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같은 글 379면)라고 말한다. 황종연의 말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초기단계와 최근의 제3세계가 보여주는 문학성은 역으로 근대성의 체험에 충실하면서 근대의 극복을 지향하는 리얼리즘의 정당성을 확인케 해준다. 따라서 역사적 전개양상 속에서 비서양적인 주체적 책읽기를 좀더 밀고 나가 질적인 접근을 수행한다면 버먼의 말대로 근대성의 체험에 충실하면서 버먼보다 더 확실하게 근대의 극복을 지향하는 예술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종연 자신은 실제 자신의 비평에서 리얼리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모더니즘론과 접합되고 있는가. 문제를 그렇게 던져놓고 그의 글을 보면 상당히 용의주도한 버먼식 흡수통합론이 구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령 “소설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기왕의 통념을 고집하기보다 80년대 리얼리즘 소설의 관습과 그 이념적 전제를 반성하고 있는, 또는 반성하게 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현명한 태도”(「개인주체의 귀환」 196면)라는 일견 정당한 듯한 어법만 해도 그렇다. 감추어진 비판의 칼날은 ‘리얼리즘과 그 이후’라는 소제목이 보여주듯 ‘통념’ ‘관습’을 근거로 한 손쉬운 재단(裁斷) 어법이다. 그가 리얼리즘 문학 혹은 리얼리즘론 자체에 대해 상세히 논하지 않은 탓에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없지만 ‘전체성 지향의 리얼리즘’ ‘현실의 전체적 인식과 재현이라는 리얼리즘의 규범’ 등으로 표출되는 어휘선택만으로도 그 점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5 일반적인 ‘총체성’이라는 개념보다 ‘전체성’ ‘전체적’이란 개념을 차용하는 것도 ‘내포적인 총체성’을 배제하고 ‘외포적인 총체성’을 다분히 겨냥한 개념이며, ‘인식과 재현’만을 강조하여 반영론으로 규범화하는 접근자세 또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전체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리라 여겨졌던 이념적 원리들이 현실 자체의 변화에 의해 어쩌면 폐기 선고로 끝날지 모르는 혹독한 검증을 받고 있는 지금”(같은 곳) 기존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재평가와 재인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창조성과 재현의 문제 등이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논의되고 있는 현재의 고투에 그는 더이상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는 리얼리즘(론)이 한계에 도달하여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점을 은연중 살포하는 방식을 쓴다. 이런 식의 리얼리즘론 한계선언이야말로 보이지 않게 그 자신의 모더니즘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생각할 사항은 아니다. 이러한 한계선 긋기는 리얼리즘론을 과거의 것으로 붙박아놓고, 다른 한편으로 리얼리즘론에서 활용할 만한 것은 모더니즘론 안으로 불균질하게 끌어들여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과 그 극복으로서 모더니즘론이라는 이론틀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수 있는 적절한 시험대가 그의 특장이기도 한 작은 유형화 작업이다. 그중에서도 장정일(蔣正一)과 신경숙, 윤대녕(尹大寧) 등이 그가 즐겨찾는 비평의 대상이란 점에서 이들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장정일과 최인석(崔仁碩)이 한묶음 되고(「비루한 것의 카니발」) 신경숙과 윤대녕이 한묶음 되는(「내향적 인간의 진실」) 데서 이미 황종연의 유연화전략은 어느정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전자의 묶음은 통상적 분류에서는 이질적인 것의 통합작업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의 묶음은 통상적 분류에 내실을 기하는 확증작업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통념은 통념대로 끌어안으면서 그 영토를 넓히는 비평전략이다.
먼저 장정일과 최인석을 보자. 황종연은 이들이 스타일이나 주제에서 대극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판이하지만 ‘비루한 것에의 매혹’이란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는 점을 포착하여 이를 우리 시대가 내보이는 문학의 한 유형으로 조형한다. 실제 이들의 작품에 대한 분석은 매우 정치하고 또한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그 결론을 ‘진정성’6으로 귀결짓는 대목에 이르면 단순한 아쉬움 차원이 아닌 황종연의 비평적 발판에 대한 어떤 의구심이 생긴다. 스타일이나 주제에서 두 작가가 대극적일 정도로 판이하다고 진단한만큼 그에 걸맞은 근원적인 무엇이 있어야 했다. 실은 여기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하나의 핵심적 사안만 간단히 지적하자. 황종연이 ‘비루함의 영웅’이라고 이름붙인 공통항은 평범함과 기이함의 관계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장정일의 소설세계는 기이함과 사회적인 평범함의 추상적인 양극화가 중심축을 이룬다. 이러한 양극화 속에서 기이함은 평범한 것의 필연적인 보완물 역할을 한다. 물론 오늘의 우리 삶은 인간본질의 왜곡(형해화 또는 마비상태)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광기와 같은 정신병리학을 이러한 왜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왜곡이다. 결국 장정일의 소설에서 인간본질의 왜곡이 존재의 정상적인 상태처럼 되고 만다. 반면 최인석에게서 평범성은 인간과 사회에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에 의해 매우 극적인 기이함으로 이어진다. 그런만큼 거기서 빚어지는 기이함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특별한 사회, 이를테면 감옥·수용소·매음굴·공사장·고아원·군대 등이 알레고리적으로 상징화하는 사회구조적 왜곡과 긴밀한 연결을 맺는다. 그래서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기이함과는 구별될 뿐만 아니라 장정일적 기이함과도 구별된다. 가령 황종연도 지적하는 유토피아와 복수심은 극단적으로 억압당한 단독자 개인이 취할 수밖에 없는 상상과 행위로서 현실적 의미망을 구성한다. 황종연이 주로 장정일을 겨냥하여 결론 부분에서 “기성 질서에 역설적으로 기여하는 광기의 운명은 온갖 폭력과 외설과 불륜이 활개치는 대중문화상품 생산에서 이미 조직적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은가”(「비루한 것의 카니발」 31면)라 한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최인석과 장정일의 문학적 거리가 어느만큼 큰가를 보여주는 지적이다. 그러나 황종연은 그런 차이를 알면서도 그들을 동일성으로 묶어 ‘진정성’이란 다분히 주관화된 방으로 함께 몰아넣고 만다.
신경숙과 윤대녕을 바라보는 데서도 이러한 점은 유사하게 나타난다. 황종연은 “신경숙은 공동의 기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가능한 공감을 통해 자아가 이미 타자들과 더불어 세계 속에 존재함을 깨닫게 하며, 윤대녕은 자아의 근본적 타자성을 음미하는 가운데 넓은 우주적 삶의 질서 속에서 진정한 자아의 근거를 찾는다”(「내향적 인간의 진실」 135면)고 했다. 적어도 이 점에서 보면 윤대녕의 문학세계가 훨씬 깊고 더욱 발본적이며 근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물론 황종연은 그 방향으로 더이상 나아가지 않으며, 대신 근대적 주체성을 넘어선 미적 주체성이란 이름으로 이들을 함께 포용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는 사실 ‘내면의 탐구’라는 스타일상의 유사성으로 묶여질 뿐 근본적으로 상이한 문학적 토대에 기초해 있다. 신경숙에게서 인간존재란 황종연도 말했듯 특수한 사회적 운명으로서 그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 그리고 미래의 전망과 맺는 여러 관계의 복합성으로 이끌어지며 그 속에서 공동체적 사회성격이 형성된다.7 그러나 윤대녕에게서 개인의 정체성이란 “일상적·사회적 관계에 순응함으로써 획득한 가상”(같은 글 130면)에 불과하다. 애초부터 고독하고 비사회적이라 다른 인간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성과 기억성에 의존한 채 인간조건의 점진적인 폭로만을 담게 되어 결국 자기분열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타자 역시 비사회적이기에 우연적인 방식으로만, 따라서 일회적인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기 역사를 스스로 만들 수 없는 존재이기에 신비로운 또다른 가상을 불러들여 빈약한 존재의 궁핍을 보완할 따름이다. 오히려 현실적인 것은 이미 근본에서 적대적인 것이라 ‘시원으로의 회귀’ ‘불교적 회향’이라 흔히 불리는 초월적 심상에 가탁할 수밖에 없다. 외관은 화려하고 심오하지만 근본은 허약할 수밖에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런 근원적인 차이를 무시한 채 단순히 스타일의 유사성이나 기법의 유사성으로 동일성의 논리를 구상하는 것 역시 모더니즘론의 한 특징이 아닐까.
오히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장정일과 윤대녕의 한묶음이야말로 동일성의 범주에 해당하는 우리 시대의 한 유형이다. 둘 다 외부세계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객관성의 결여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현실을 몽상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이를 대신한다. 인간조건의 전형으로서 제시되는 성도착과 백치상태가 그렇게 서로 닮아가고 있다. 마음껏 ‘탈승화’한 충격적인 해방의 묘사(장정일)나 ‘탈속화’한 자연으로의 무작정 회귀(윤대녕)나 마찬가지로 주관화된 낭만성의 산물이다. 다만 한쪽이 동물적이고 다른 한쪽이 식물적이라 미적 효과 면에서 대극적인 것처럼 보일 뿐 근본은 동일한 셈이다. 이처럼 평범함과 기이함이란 이분법은 본질상 자연주의적인 것과 낭만주의적인 것의 그럴듯한 조합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리얼리티를 넘어선 비합리적이지만 본질적인 어떤 것 운운하며 거기에 문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새로움의 표상으로 치켜세우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도한다. 그러나 “행복의 추구가 나중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만성적 도취의 기쁨 속에서 위안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니면 정신병에서 보이듯이 절망적인 반란의 시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프로이트(S. Freud)의 말을 근거로 월러스틴은 비합리적인 도피처럼 보이는 정신병으로의 도피조차 기실 합리적인 사회적 함의를 깔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라고 진단한다.8 그렇게 보면 이들의 문학은 사회병리현상을 미적으로 변형한 단순재현물이라는 성격을 사회적으로 갖게 된다.
결국 황종연의 모더니즘론은 더 깊이 파고들어가야 할 깊이와 더 멀리 바라보아야 할 방향의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런데그곳에 리얼리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창조적 삶이 지난해지고 있는 지금 리얼리즘의 긴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황종연 자신이 되풀이해서 강조한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윤리의 창출”(「비루한 것의 카니발」 32면), “개인의 자아 발전과 사회적 제휴의 창출”(「편모슬하, 성장의 고행」 58면), “개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발전적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문제적 개인의 행방」 238면) 등은 근대극복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사항이다. 더불어 장정일이나 윤대녕에 대해 이 평론집에서 ‘적극적 동의자’였다가 서서히 ‘비판적 동의자’로 가치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황종연 내부에 함께 동거하고 있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싸움으로, 이렇게 아전인수 격으로 보면 너무 허황한 것일까.
4. ‘너머’와 ‘넘어’ 사이─최원식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
두 평론가의 비평집 검토를 마치고 나니 마치 그것 봐라 하면서 최원식의 목소리가 드디어 가까이 다가선다. “진정한 리얼리즘이건 광의의 모더니즘이건, 어느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흡수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가상일지라도 한번 생긴 것은 그 가상을 성립시킨 업(業)이 소멸되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58면) 우연일지 모르지만 윤지관과 황종연은 최원식의 지적대로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흡수통합론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직접 맞대면하지 않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앙숙과도 같다. 실제로 양자 사이의 소통을 위한 만남의 장소는 그들의 이론체계에서는 별반 없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서구에서 상륙한 이래 이 땅에서 벌어진 긴 이데올로기 투쟁과정에 얽히고 설킨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제아무리 갈고 닦아도 구원의 가망이 없는 용어들인지도 모른다”(같은 글 56면)는 최원식의 탄식에 가까운 말에 멈칫해진다. 최원식은 확실히 그런 두 사람을 처연히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사실 90년대에 들어서 누구보다도 가장 열정적인 비평 및 문학사연구 활동을 전개한 사람이 바로 최원식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글은 시공을 뛰어넘는 폭넓은 지적 대해(大海)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가히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동서양의 풍요로운 문학적·역사적 지식이 글마다, 글 도처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스스로 언명한 ‘영향없는 유사성’에 입각한 비교문학적 방법이 펼쳐내는 장관이다. 더구나 이제 스타일리스트라고 명명해도 무방할 만큼 최원식표 문체까지 확립했으니 글읽는 재미 또한 여간 아니다. 그런데 현재의 이런 개화(開花)에는 나름의 역사성이 있다.9 그가 제출한 가장 본질적인 대립쌍의 하나가 ‘맹목적 근대추종과 낭만적 근대부정’이다. 사실 전자야 대다수 사람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에 새삼스럽지 않지만, 후자에 대한 개념어를 얻는 순간 그의 비평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질주하기 시작한다. ‘카프의 주류성을 해소하자’라는 그의 간명한 명제가 함축하고 있듯 식민지 치하의 카프진영과 80년대의 급진적 민족문학진영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수행하면서 그의 문학세계는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상대적인 복권조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회통론에 다다른다.
그의 비평과 문학사연구는 뗄 수 없는 함수관계이다. 아마도 리얼리즘·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최원식이 거둔 성과 중의 하나는 이것의 한국적 실상에 즉하여 논리를 구축하려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저자의 촛점이 구미 학계에서도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통상적인’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의 대립구도보다, 1920,30년대의 한국에서 화제가 된 카프식 리얼리즘론 대 김기림 등의 모더니즘이라는 대립구도에 맞춰져”10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가 최근에 수행한 일련의 작업이 그러했고, 그 결과의 하나가 회통론으로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를 살아있는 현실로 이동하는 순간 회통론은 하나의 해체론으로 다가온다. 특히 70년대 이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전선을 상기할 때, 그가 지금까지 함께해온 리얼리즘운동의 자리에서 보자면 그렇다. 더구나 리얼리즘을 버리고 떠나자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대립자로 마주섰던 모더니즘과 함께 넘어가자는 해체론이니 사태는 더욱 복잡하다.
따라서 최원식의 최근 작업을 폭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는 자리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회통론이라 이름은 붙였지만 크게 보면 아직도 구상중인 단계에 있다 할 것이다. 그 점에서 ‘회통’이란 화두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면이 강하다. 실제로 박지원(朴趾源)의 「호질(虎叱)」에서 범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보고, 하늘이 명한 바로 보면 범이나 인간이나 똑같은 일물(一物)이라 갈파했던 것과 같은 관점의 대전환을 설파한 것은 아닐까. 특히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주류’ 혹은 ‘진영’적 흐름이나 관점에 주된 촛점을 맞추고 비판적 작업을 해온 그의 내력을 감안할 때, 이것들과 근본적으로 분리되는 통합적인 큰 시야에서 과거와 현실을 질적으로 재편하여 새로이 읽어내려는 매우 야심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그가 동양적 어원을 탐구하며 ‘문학(文學)’과 ‘소설(小說)’을 분석하는(「문학의 귀환」) 등 기원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런만큼 섣부른 예단이나 ‘좁은 시야’로 그의 행보를 쉽사리 가늠질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이다. 우리의 ‘움직이는 현실’(생성으로서 리얼리즘론) 자체를 곤혹스럽게 만든 면, ‘곤혹’이 아니더라도 문학 자체의 현재성을 감안할 때 마냥 지켜보며 그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편 그가 지금까지 일군 여러 노력들을 ‘회통론’과 관련해 이모저모 따져보는 일도 그가 펼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의 실현뿐만 아니라 오늘의 리얼리즘론을 위해서도 서로의 거울이 될 것이다. 그래서 『문학의 귀환』에 대한 솔직한 독후감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사실 필자는 『문학의 귀환』을 읽고 나서 루카치(G. Lukács)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우리는 모더니즘 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을 구분함에 있어서 순전히 형식적인 기준을 이용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기준은 비록 문학적 표현의 기초를 이루고 그것에 틀을 부여하지만 일반적 경향만을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강조와 자기의식의 다양한 정도와 함께 한 작가 내지 한 작품에서조차 공존할 수도 있다. 정말로 우리가 모더니즘 문학만이 미래의 가능한 문학이라고 말하는 모더니스트 비평가들을 뒤따르기를 거부하고 반리얼리즘 운동 내에 여전히 존재하는 리얼리즘 경향을 추적한다면 우리 시대의 문학은 광활한 싸움터를 방불케 할 것이다. 그 싸움터는 현대의 반리얼리즘의 투사들과 ‘휴머니즘의 반란’의 투사들이 시끄럽게 다투는 싸움터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두 전형적인 문학운동이 아니라 두 개의 기본적인 경향 사이의 갈등, 그리고 한 작가나 동일한 종류의 작가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 작품의 시, 소설, 희곡이나 같은 종류의 것들 내에서 발생되는 갈등도 연구해야 한다.11
말하자면 필자는 『문학의 귀환』을 루카치처럼 리얼리즘 경향과 모더니즘 경향의 갈등과 싸움에 대한 연구로 읽었다. 『문학의 귀환』뿐만 아니라 문학사 관련 저서 『한국근대문학을 찾아서』(인하대학교출판부 1999) 속에 담긴 많은 글, 심지어 모더니즘을 이야기하며 작품분석을 행하는 곳에서조차 크게 보아 리얼리즘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생생한 현장성을 느꼈다. 그가 백석(白石)이나 김수영(金洙暎)을 두고 ‘모더니스트’라고 단정해도 그랬다. 그런데 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언제 싸웠냐는 듯 한이불 속에 나란히 누워 있는 부부처럼 느껴질까. 그것이 나의 첫 의문이었다. 그것은 ‘문학사적─또는 한층 좁은 의미로 문예사조사적─관점’이 큰 틀을 지배하면서 불가피하게 유형학의 외투를 입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문학사적인 주류와 관행을 과녘 바깥으로 완전히 내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제일의 표지로 삼은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비평가로서 현재적 실천보다 문학사가로서 사후적 판관의 성격이 더 앞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동반하였다.
물론 최원식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합궁’을 추진하고 미래의 아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문학이 보여준 구체적 실체에 대한 나름의 판단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그는 리얼리즘 문학의 위대성보다 최량의 모더니즘 문학이 성취한 위대성에 더 신선함 혹은 새로운 친근성을 느끼는 듯하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그는 한차원 더 높은 싸움을 벌여야 했다. 최량의 리얼리즘 문학과 최량의 모더니즘 문학 간의 대결이 그것이다. 그가 일구어놓은 문학사연구를 보면 개별작가 단위, 혹은 유파적 진영 속에서 개별적인 산의 형태로는 어느정도 분별을 이루어냈지만, 그런 산들이 구축하는 산맥의 형상은 아직 또렷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역사성을 형성하는 방식에서 어떤 문제와 연루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가령 그가 최근 들어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30년대 모더니즘만 하더라도 그 성과는 60년대의 김수영과 내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또 70년대 이후 모더니즘 문학의 성취는 누락된 채 각자의 시대적 공간에서 맥락을 구성할 뿐이고, 다만 ‘최량’의 모더니즘으로서 증거역할을 할 따름이다. 그렇게 되면서 일정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이 문제가 통시적으로 배제되면서 제대로 된 공시성과 통시성의 변증법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리비스(F.R. Leavis)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리비스의 생각에 개별작품의 제대로 된 이해는 “개별작품에 대한 지식의 축적으로 해소되는 것도 아니요, ‘문학사’적인 지식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 핵심적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가운데 ‘늘어가는 그의〔문학도의〕 영문학 지식에 방향과 활력을 주고 조직적인 것으로 만들어줄 살아 있는 원리’를 획득함으로써 감당해나가야 하는 문제”12라는 것이다. ‘이론과 현실의 안이한 예정조화의 신앙’(이론신앙)을 누구보다도 통렬히 비판했던 최원식이었기에 우리는 이러한 리비스의 진술에 합당한 무엇을 기대하게 된다. 만약 그러한 성취가 있었다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 아닌 더욱 확실한 선택 혹은 ‘우리식 창조적 어법’을 얻었을지 모르겠다.
사실 최원식의 최근 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다루는 대상영역에 따라 가장 핵심이 된다고 판단되는 두 대립자를 역사 속에서 불러모아 한자리에 내세우고 그 비판을 통해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형태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맹목적인 근대추종과 낭만적 근대부정, 내재적 발전론과 비교문학론, 소인유와 군자유, 소국주의와 대국주의 등이 그것으로 ‘통일’ ‘극복’ ‘복안의 시각’ ‘균형점’ 등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하나의 공안(公案)으로 제출한다. 이런 대립자의 호출은 현실의 모순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극복을 내적 운동으로 만들 수 있는 변증법(‘대립물의 통일’)의 장(場)이 될 수 있기에 큰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근대문학사 연구와 관련하여 그가 제안한 내재적 발전론과 비교문학론의 극복문제는 우리 문학 자체가 담지할 수밖에 없는 모순성에 근거한 것인지라 매우 효과적인 과제설정이다. 그리고 그런 분석에 힘입은 비평적 성취야말로 최근 그의 작업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내적 모순에 따른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는 변증법적 성취의 길을 멋지게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모순성에 대한 정밀한 고려 없이 불러들인 대립짝들은 형식논리에 가깝게 되면서 대립물간의 질적 차이가 무화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문제가 그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문학의 역사가 그려내듯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각기 자신의 장(場)을 갖고 움직이는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얼리즘은 자체 모순에 근거한 필연적 운동으로서 자기 역사를 펼쳐나가고 있으며, 모더니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상호영향을 받아가며 각자의 발전을 도모했고 도모하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만큼 이 지점에서 “최량의 리얼리즘조차 최량의 모더니즘에 포섭된다는 ‘광의의 모더니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최량의 모더니즘일지라도 최량의 리얼리즘에 의한 극복대상이라는─70년대 이래 우리 평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가꾸어온─리얼리즘론도 가능하다. 요는 논자 나름의 분명한 구도를 밝히면서 그 안에서 김수영이면 김수영이─그리고 70년대 이래의 시인으로 국한하더라도 고은이나 김지하, 백무산, 황지우 등등이 각각─정확히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13라는 백낙청의 발언은 적절하다.
아울러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을 둘이 아닌 하나의 과업으로 인식한 리얼리즘의 맥락에서 볼 때, 부정적인 범주로 대상화하여 대립짝으로 내세운 통상적 리얼리즘과 통상적 모더니즘이 루카치의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의 연속성’ 명제를 상기하면 기실 ‘회통’을 책할 필요도 없는 ‘한통속’임을 날카롭게 보여주었다는 백낙청의 지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원식은 “김수영의 모더니즘도 해방 직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혁명적 낭만주의와의 차별 속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20년대의 자연주의 낭만주의와 결별하면서 시작되었던 30년대 모더니즘과 공통적”(「‘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50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모더니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령 임화(林和)가 신경향파문학을 두고 이야기한 최서해(崔曙海)적 경향과 박영희(朴英熙)적 경향의 분리문제만 하더라도 이 점을 날카롭게 환기한다.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시 그러한 기본적 속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루카치는 지적한다. 개별적 사태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의 직접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원리(스딸린의 테제, 당의 강령과 전술적 결정 등)와 결합하는 문학을 가리켜 루카치는 새로운 자연주의, 즉 ‘사회주의적 자연주의’로 규정한다. 아울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또다른 구성부분인 혁명적 낭만주의도 도식적이고 정태적인 모든 자연주의 문학에서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삶의 포에지’를 보충하기 위한 그릇된 고안물이라고 루카치는 비판한다.14 그러기에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김수영을 ‘참된 리얼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임화가 지향했던 리얼리즘과 김기림(金起林)이 지향했던 모더니즘이 서로 적대적으로 출발했다가 자기운동과 상호영향 속에서 30년대 후반 들어 서서히 합류하는 지점에까지 도달하고, 어쨌든 해방 직후 한배를 타게 된 것도 단순히 우연의 소산만은 아닐 것이다.15
최원식 역시 90년대 문학은 80년대 혁명문학의 붕괴를 새로운 사유의 발진지, 즉 “붕괴가 좀더 정상적인 조건으로의 복귀라는 측면도 지닌다는 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붕괴에 대한 과도한 방어심리에 기초한 교조성을 어떻게 극복할지 진지하게 숙고할 때다. 아니 붕괴의 시점을 진정한 사유의 발진지(發進地)”(「문학의 귀환」 29〜30면)로 삼는 지적·실천적 성숙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낭만주의적 근대부정을 껴안으면서 넘어서는 근대극복의 변증법적 성취를 말하는 것으로 리얼리즘론의 관건사항을 지적한 것에 다름아니다. 리얼리즘의 진정한 자기운동을 위한 현실적 쇄신을 촉구한 셈이다. 그런데 왜 굳이 ‘회통론’을 말하는 것일까? 다른 한편으로 그가 “90년대에 이상(李箱) 비슷한, 구보(仇甫) 비슷한 모조품은 나왔어도 마이너스(-) 지점의 최저까지 천착해가는 지경에는 미달이었다”(같은 글 18면)며 90년대를 하강기로 규정하고 ‘하강기 미학’으로서 모더니즘을 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90년대에는 하강기의 치열한 미학 대신 하강의 포즈만 범람했으니,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 아래 적절히(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본의 시대와 제휴한 의(擬)모더니즘만 횡행했다”(같은 글 18〜19면)고 진단한다.
이렇게 되면 상승과 하강이라는 국면에 따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교체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생긴다. 실제로 최원식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이 두 계열의 정전(正典)들은 정연하게 정열되지 않는다. 두 계열은 시대를 따라 넘나든다”(「‘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57면)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오늘의 시대를 ‘모더니즘(이 융성해야 할) 시대’로 보는 것인가.(문맥의 흐름을 보면 30년대가 연상되듯이 90년대 이후가 구성되어 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은 일종의 발칸반도로서 한국문학계의 예민한 화약고’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최원식은 어느덧 ‘단속적인 전쟁상태’의 지속에서 발을 빼내어 휴전을 제의하고 수습책을 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교체나 전쟁상태가 아닌 그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적 통일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경과를 보면 30년대와 60년대의 문학사가 보여준 성취를 가지고서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전개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려는, 문학사적 힘을 바탕으로 현단계 비평의 난관을 돌파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아울러 이것을 현재적 맥락으로 위치지으면 일종의 중도(통합)론자로 그 징후가 읽혀진다.16 결국 그렇게 되면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대등한 위상으로, 이른바 우리 문학사를 구성하는 동전의 양면처럼 구성된다. 아울러 과거의 산발적인 대립의 역사를 그 형태대로 보존한 채 한자리에 불러모으기 때문에 그가 내세운 대립짝은 그가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의 생성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여 하나의 장소를 점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고, 잡기 힘든 한 마리 토끼의 양면을 손에 쥐려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17
그리고 이 지점에서 보면 최원식의 구상이 크게 보아 버먼식 포괄주의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근대 바깥에 대한 사유가 차단되었던, 아니 스스로 봉쇄했던 버먼과 달리 근대 바깥을 사유하며 근대 안을 궁리하고 있다고나 할까. 최근에 그가 펼치는 전체적 행보는 기존의 관행과 현상에 대한 강력한 거부와 함께 현재까지 일군 합리적인 핵심을 두루 껴안으며 ‘근본에서 다시 출발하자’는 해체론적 사유를 주요한 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긴 역사 속에서 보여지는 반복적 경험,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제3의 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런 새로운 창조의 씨앗을 찾으려는 거대한 제안들이 그의 글 곳곳에 숨쉬고 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회통 문제 역시 그런 의도의 산물이다. 의도가 거대한만큼 그 논리가 자기 얼굴을 만들기까지에는 더 많은 시간과 곡절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다. 그는 어떤 길을 만들어갈 것인가. 그의 다음 행보가 그래서 매우 궁금해진다.
5. 나오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의 순례를 끝냈다. 끝내고 나니 시야가 탁 트인 정상에 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첩첩산중에 들어선 느낌이다. 우리 시대의 주목할 만한 평론가들이 그려내는 삼각형은 그 자체로 여러 갈래의 길을 보여주고 있어 보기 나름으로 풍요로움을 예증하는 징표일 수 있으나 상호간의 거리가 만만치 않음은 역으로 위기를 보여주는 징표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문제의식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해 가기보다 각자의 방향대로 제각기 가고 있다는 조바심도 생겨났다. 그래서 세 평론가의 속으로 들어가 그들 각자를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냉정하게 바깥으로 끌고 나오려고 애썼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제대로 된 토론이 부재하기에, 세 꼭지점이 만든 공동구역은 자기만의 굴파기가 아닌 말 그대로 광장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에서다.
그러나 각자의 주장만큼이나 당당한 상호토론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너무 앞섰던 것일까, 써놓고 보니 시비가 앞서버린 글이 되어버렸다. 똑같은 강물이건만 그 소리가 상황에 따라 갖가지로 달리 들리는 이유는 다름아닌 마음속의 선입견 때문이라고 박지원이 설파했듯이 이 비판적 순례 역시 지금의 ‘나’라는 선입견이 어쨌든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남을 비판하고 나면 그래서 스스로가 거울에 비춰진다. 너는 무엇인가. 너는 너안에 무엇을 어느만큼 쥐고 있는가. 시방(十方)세계를 바라보는 석가여래의 혜안처럼 편견없는 ‘평등안(平等眼)’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연암 박지원의 철리(哲理)가 떠오르면서 마음 한켠이 께름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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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고 「세계사적 전환기에 민족문학은 유효한가」,『작품과 시간』(소명출판사 2001) 322〜23면.↩
- 「해방의 서사와 세기말의 문학」에서 윤지관은 대조적인 작가로 최인석과 배수아를 예로 들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차이를 설명한다. 윤지관은 배수아의 소설에다 민족문학의 새로운 이념적 갱신과 모색의 출발점을 위치지우는 신승엽의 견해를 설득력있게 비판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공감하는 바 크다. 그러나 당파성 문제를 그와 대비하여 최인석 소설의 특징으로 거론하면서 스스로 딜레머에 빠지는 모습은 자명한 것 즉 지식의 도구화된 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즉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정신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가 그 당파성을 말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며, 결국 당파성이란 작품의 성과를 통해 구현된다고 말한다. 그런 뒤에 “나는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이 이러한 당파성을 ‘구현’하였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런 최종적 판단은 작품에 드러난 인식과 현사회에서 작용하는 힘들과의 관계와 아울러 작품의 형식적 차원에 대한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진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다”(237면)라며 원론만 다시 되풀이한 채 자리를 피하고 만다. ↩
- 김상환 「철학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민음사 1999) 57〜58면.↩
- 백낙청 「문학과 예술에서의 근대성 문제」, 『창작과비평』 1993년 겨울호 21면.↩
- 민족문학을 두고 “종래에 민족주의 문학운동의 가장 진지하고 진보적인 노선을 형성한 ‘민족문학’”(「민족을 상상하는 문학」 88면)으로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 사실 ‘진정성’이란 평가 개념은 작품에서나 비평에서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랄 수는 없다. 더구나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일정한 내실과 성취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표현하는 일종의 형용사적 개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명환의 「90년대문학 성찰의 좌표를 찾아서」(『창작과비평』 2001년 가을호 214〜16면)를 참조할 것. 오히려 이 개념과 관련해서는 김종철(金鍾哲)이 미국 비평가 트릴링(L. Trilling)의 개념을 빌려 설명한 것이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성실성’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의지작용의 자질을 지칭한 것이고, ‘진정성’은 성실성의 가능성 자체를 묻는, 의도나 의지 이상의 근원성을 지칭한다는 것이다.(김종철 「인간·흙·상상력」, 권성우 엮음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동네 1994, 68〜69면)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구사하는 ‘진정성’은 ‘성실성’에 가까운 개념이다.↩
- 가령 고독의 문제를 다루더라도 신경숙은 『외딴 방』이 보여주듯 일정한 사회적·역사적 상황 속에 있는 어떤 인간유형의 특징을 환기해준다. 그리고 그런 고독과는 별개로 공동의 삶과 다른 인간존재들과의 관계적 삶 역시 계속되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여 있는 불빛」 「감자 먹는 사람들」 등과 다르게 최근의 작품들이 공동체적 삶의 측면이 크게 약화되면서 동시에 나르씨시즘 경향이 강화되는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 월러스틴, 백승욱 옮김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창작과비평사 2001) 324면 참조.↩
- 1972년에 등단한 최원식은 첫 평론집(『민족문학의 논리』)을 1982년에 내고 무려 15년 만에 두번째 평론집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를 냄과 동시에 올해 들어 또다시 『문학의 귀환』을 낸 것만 보더라도 90년대 이후 그 필력이 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223면.↩
- 루카치, 문학예술연구회 옮김 『우리시대의 리얼리즘』(인간사 1986) 47〜48면.↩
- 김영희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창작과비평사 1993) 100면. 여기서 말하는 원리에 대해 리비스 자신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는 원리의 규정에 더 가까운 작업인데, 이때 원리란 단순한 일반론적인 진술로는 규정해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원리’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 방법과 정신(이 두 단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낱말이 필요한데)은 구체적인 예시의 도움을 얻어서만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김영희, 같은 책 99〜100면에서 재인용)↩
-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225면.↩
- 김경식 『게오르그 루카치』(한울아카데미 2000) 148〜53면 참조.↩
- 이런 사실들은 ‘자연주의와 낭만주의’의 진정한 극복문제를 중심에 두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비교하는 작업의 중요함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이기도 하다. 최원식은 이 과제를 부분적으로 문제제기 차원에서 제출했을 뿐 아직 정면대결이 없는 듯하다.↩
- 그래서 문학에 관한 논의 속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기존의 중심주의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중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중심주의 자체를 철저히 해체함으로써 중심 바깥에, 아니 ‘중심’들 사이에 균형점을 조정하는 것이 핵심”(「한국발 또는 동아시아발 대안?」 381면)이라는 말은 마치 그가 숨겨둔 현재적 거울로 비춰진다. 이전의 각기 다른 두 중심주의들을 비판하고 그 중심들 사이에 균형점을 조정하는 접근방식, 좀더 확대하면 최량의 리얼리즘과 최량의 모더니즘을 한곳에 모아 화해시키는 장소로서의 연합전선론이 숨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글에서 민중성이 약화되고 약화되는 만큼 지식인적인 것이 강화되는 저울추의 기울어짐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 최원식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7)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