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를 경계한다
한동안 요란한 폭음으로 밤잠을 설치게 한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이 앞으로 지구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헤아리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전쟁의 발단에서 전후처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언행을 납득하기가 난감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전쟁명분으로 내세운 대량살상무기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바그다드 함락 후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미국이 그런 치명적 무기의 존재여부를 정말 사전에 몰랐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만약 그런 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미국은 지구촌 주민 모두를 속여가며 전쟁을 일으킨 셈이다. 미국이 유엔과 국제사회의 분명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으리라는 혐의만으로 한 주권국가를 침략한 것이라 해도, 사태의 심각성은 여전하다. 그것은 인류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어렵사리 일궈낸 국제질서나 국제법의 핵심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스스로가 전후의 국제질서 형성을 주도했음을 생각하면 이를 무참히 짓밟은 이번 전쟁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의 무지막지한 전쟁수행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사담 후쎄인을 비롯한 이라크군 수뇌부를 초장에 박살내겠다는 ‘목 날리기’ 작전, 엄청난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어 상대방의 전쟁의지를 꺾어버리겠다는 ‘충격과 공포’ 작전 등은 최고의 군사대국이 구사하는 전술치고는 당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량살상무기 해체를 내건 전쟁에서 미국 자신이 집속탄이나 벙크깨기폭탄 같은 사실상의 대량살상무기를 대거 동원한 것도 자기모순이다. 강자의 오만한 폭력행사 같은 이번 전쟁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일종의 무력시위를 벌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그다드 함락 후 이라크인들에 의한 관공서 및 문화재의 광범위한 파괴와 약탈을 미국이 방치한 것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제네바협약에 명시된 의무조항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라크의 정부청사와 대사관, 박물관과 도서관 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약탈과 방화의 현장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식의 소치인지 오만함의 소치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이런 태도에는 이라크인과 이슬람문화에 대한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후쎄인 독재에서 이라크인을 자유롭게 할 ‘해방군’으로 왔다는 미국측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그 ‘해방’의 수혜자인 시아파들이 대미항전에 나서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미국 지도부의 호언장담이 종종 아이러니컬한 여운을 띠는 현상도 주목할 일이다. 가령, 부시는 후쎄인을 지구평화를 위협하는 최대의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하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시 자신도 그 규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번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묘사하고 그 작전명을 ‘이라크의 자유’라고 명명한 것도 이런 아이러니를 피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해방’ 등 근대의 주요한 정치적 개념을 아이러니의 소용돌이에 총체적으로 빠뜨린 이번 전쟁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바로 그 패권이 기존의 국제질서와 근대문명의 주요한 가치들을 뒤흔들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국력이 예전보다 강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예전에는 우월한 경제력이나 문화적 힘만으로도 세계를 제 뜻대로 끌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엄청난 군사력에 의거해서만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처지에 몰렸다. 전쟁도 일어나기 전에 수백만의 지구촌 주민들이 반전시위에 나선 것도 유례없거니와, 언제나 미국의 든든한 우방이었던 서유럽의 중심국가들이 보스격인 미국의 의도에 감히 제동을 건 것도 이례적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최고의 권력자가 기존의 지위를 상실할 때 사나운 폭력을 휘두르기 쉽다는 사실이다.
핵문제를 놓고 북미간의 대립이 고조되는 한반도의 주민으로서는 미국의 이같은 군사패권주의를 특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와중에 상당수의 한국시민들이 세계적인 반전평화시위에 가담함으로써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의 뜻을 분명히했다. 예전 같으면 별다른 저항 없이 통과되었을 정부의 파병안 역시 국회 안팎에서의 반대로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야 가까스로 통과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시민사회가 한두 해 사이에 몰라보게 성숙했음을 입증한다. 이번의 반미반전시위는 종래의 단순한 민족주의적 지향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연대를 보여주는 이정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하지만 한반도의 상황이 엄중한 만큼 미국에 대한 신중한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노무현정부의 공약대로 한미동맹을 양국이 대등한 동반자적 관계로 조정할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되, 그때그때의 미국쪽 요구에는 사안별로 따져 적절하게 응수하는 것이 대책이다. 우리 정부가 “전쟁만은 안된다”는 것을 한반도 비핵화원칙과 더불어 기본입장으로 천명하고, 그보다 사소한 미국측 요구들을 때론 수용하는 유연한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북한에 대해서도 균형잡힌 인식과 대응이 요구된다. 핵문제에서 북이 미국을 상대로 벼랑끝전술을 구사하는 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한반도 안팎에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은 직시할 일이다. 그렇기에 북의 ‘민족공조’ 주장에 완전한 동조도 거부도 아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남북간, 한미간의 양방향 대화와 우호 증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되 북과 미국이라는 두 비타협적인 당사자의 강압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중도의 지혜가 절실하다. 순결하되 냉철한 눈으로 우리가 통과하는 이 예민한 한반도의 시간표를 온몸으로 겪어낼 때가 아닐 수 없다.
이번호 특집은 새정부가 최고의 국정과제로 제시한 ‘동북아경제중심’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짚는 글들로 꾸렸다. 이라크전과 북핵문제로 조성된 국내외의 급박한 분위기 속에서는 좀 한가한 주제로 비칠지 모르겠다. 하지만 ‘21세기의 한반도 구상 1’이라는 씨리즈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 세기의 향방을 가늠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구상이나 중장기 과제는 그에 걸맞은 긴 호흡과 안목으로 차분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창비 편집진의 생각이다. 새정부의 ‘동북아경제중심’ 구상의 취지는 미국경제의 침체와 중국경제의 부상이라는 정황과 한반도의 유리한 지경학(地經學)적 위치를 감안하면 일단 수긍이 간다. 하지만 이 구상이 우리의 여건에 부합하고 우리의 경제적 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는 그야말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야무지게 따질 필요가 있다. 우정은은 한국의 ‘거점경제’로의 발전가능성을 전지구적·지역적·민족적 층위에서 점검하면서 동북아경제거점의 구상이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이 유효한 방안이 되며 그 문화적 가능성까지 살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김원배는 동북아중심 구상을 물류·금융·연구개발의 기능적 차원에서 검토한 후에 “물류기능을 우선 육성하는 전략이 가장 타당하다”고 결론짓는다. 이남주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여 남북경협이 한반도 경제의 질적 발전의 계기가 되는 동시에 동북아평화체제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최병권은 새정부의 동북아 비전이 실답게 구현되려면 무엇보다 ‘정신 인프라’가 튼실해야 함을 네덜란드의 사례를 들어 역설한다.
특집과 아울러 이번호에서 눈여겨볼 것은 전쟁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글들이다. 현장통신의 피스크 인터뷰는 중동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베떼랑 기자의 눈으로 이라크전쟁의 핵심적인 면모를 짚는데,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투철한 기자정신이 이야기의 실감을 드높인다. 이라크반전평화팀에 참여한 경험을 성찰하는 허혜경의 글과 아프가니스탄 구호활동에 투신한 이덕아의 진솔한 글 역시 전쟁으로 유린되는 삶의 현장보고서들이다. 한편 시평의 강태호는 이라크전 파병과 북핵문제로 초미의 관심사가 된 한미동맹의 현황을 꼼꼼히 분석하고, 박인규는 이라크전을 계기로 재편되는 국제질서의 향방을 추적한다. 영화 「칸다하르」를 문학적 감수성으로 분석한 최인석의 영화평과 박상우의 전쟁게임 이야기, 그리고 김종엽·이삼성·구갑우의 뼈 있는 촌평 역시 우리 시대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글들이다.
이번호 문학란이 ‘문학중심지’로서의 창비에 거는 독자들의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킬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문단 선배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소설가 황석영은 얼마 전 작고한 명천(鳴川) 이문구와 관련된 문단야사를 특유의 입담으로 엮어내는데, 추도사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새 한편의 인상적인 이문구론이 되었다. 최두석의 평론은 길의 모티프를 중심으로 신경림·황동규 두 원로시인의 기행시를 비교분석한 것으로, 평자 자신의 시인 체험에서 나오는 발언이 신선하다. 신예평론가 이재영은 소설가 이혜경의 작품세계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차분하게 분석한다. 아울러 정찬의 신작 소설을 섬세하게 읽되 따끔한 비판을 잊지 않는 염무웅의 촌평과 안주(安住)를 거부하는 고은 시의 특징적 면모를 짚어내는 박영근 시인의 촌평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박완서 소설 「후남아, 밥먹어라」는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한 여인의 한반도의 삶과 이국의 삶을 대비하면서 적확한 심리묘사를 통해 두 삶의 관계를 깊숙이 추궁하는 수작이다. 그밖에 서정인의 실험적 대화체 소설 「쟁몽두」를 비롯한 김인숙·공선옥·하성란의 소설들, 그리고 오랜만에 본지에 청아한 시편을 기고한 최하림 시인과, 이시영·김윤식·조용미·이선식·문성해·박판식·윤성학의 시들도 다채롭다. 이필렬·김성보·이종묵·이주형의 촌평들, 그리고 역사적인 쟁점을 다룬 논단의 김경현, 미야지마 히로시, 에릭 밀런츠의 논문들 모두 필자의 공력이 배어 있는 글들로 일독에 값한다. 미처 소개가 늦어졌지만, 시평의 심재현, 현장통신의 공인주, 그리고 ‘독자의 목소리’에 투고한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번호부터 이시영 시인이 본지 자문위원으로, 백영서 편집위원이 부주간으로 활동하게 됐음을 알려드린다. 창비가 이번호를 끝으로 마포시대를 접고 다음호부터는 파주에서 독자 여러분과 만날 것인데, 새시대에도 변함없는 성원과 질책을 바란다. [韓基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