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역주행하는 원전정책
이명박정부가 저지른 과오와 악행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지만, 그중에서 4대강사업과 더불어 원자력발전 확대정책의 중죄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간 세계 여러 나라들은 후꾸시마 원전사고를 거울삼아 원전정책을 수정했다. 독일은 기존 원전의 연장 운행마저 불허함으로써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기하기로 결정했고, 한때 원전정책 유지를 천명했던 일본정부도 반대여론에 밀려 2050년까지 원전을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며, 스위스를 비롯한 많은 나라도 원전정책을 단계적으로 감축할 뜻을 밝혔다. 후꾸시마 사고 이후의 이런 국제적인 탈원전 분위기 속에서 유독 이명박정부는 원전 확대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면서 무반성의 역주행을 계속해온 것이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은 원전 건설을 미래의 전략적 수출산업으로 삼을 정도로 ‘원전 사랑’이 각별했다. 가령 2009년 12월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受注)를 ‘단군 이래 최대의 국외 수주’로 자랑하면서 수주액을 뻥튀기하기까지 했다. 후꾸시마 사고를 보며 원자력의 위험을 새롭게 인식하기는커녕 남들이 꺼리는 원전 수출에 박차를 가할 호기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유명한 지진대에 속한 터키와 원전 수주 협상을 계속 벌이는 것도 그런 무반성의 일례다. 게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타계 이후의 혼란한 틈을 타서 경북 영덕군과 강원 삼척시 일대의 새 원전 건설후보지를 슬그머니 발표하기까지 했다. 독일, 스위스, 일본이 ‘원전 제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한국은 현재 가동중인 21기와 건설중인 7기, 건설 계획중인 6기, 건설후보지가 선정된 8기, 총 42기의 원전 강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대통령은 작년 9월 유엔 원자력안전 고위급회의의 기조연설에서 원자력 활용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며 적극적인 활용의 입장을 천명했다. 대체에너지만으로 세계적인 에너지수요 증가와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원자력 활용은 불가피하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구사했다. 원자력을 대체할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원자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후꾸시마의 대재앙 후에도 원자력 비중을 줄여나갈 방도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녹색성장의 아버지’라고 자화자찬하는 이대통령은 대체에너지 개발에 애쓰고 있다고 선전하고 다녔으나 한국은 총 에너지 중 대체에너지 비율이 2%를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실 이대통령이 유엔 기조연설에서 분명히한 것은 후꾸시마 사고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을 가속화하겠다는 의지였다. 후꾸시마 원전사고의 참상은 많은 교훈을 남겼으나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이러한 역주행은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유치를 무슨 대단한 외교 성과로 선전해대는 데서도 드러난다. 핵무기를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핵안보’가 주된 목적인 이 회담은 우리의 한반도 비핵화 요구와는 거리가 멀고 미국을 비롯한 핵무기 보유국의 요구에 부합한다. 50개국의 정상이 참여하는 초대형 국제회의라며 분위기를 띄우지만 이 회담을 굳이 우리가 개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원전정책이 우리 삶터 곳곳을 원자력으로 에워싸는 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방사능에 노출될 확률은 점점 높아진다. 또한 원전을 새로 건설하고 수출하는 만큼 이웃의 위험천만한 원전 건설에 대해 비판할 입지가 줄어들게 된다. 가령 백두산 인근의 화산지대나 유사시 한반도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중국의 동부연안에 원전을 무더기로 짓는다 해도 반대할 명분이 충분치 않은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는 북한 핵무기뿐 아니라 남한과 그 주변에 촘촘히 들어서는 원전으로 인해 평화와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위험지대가 될 공산이 크다. 특히 부산과 울산 같은 광역대도시로부터 불과 50km 반경에 고리・월성의 원전 9기가 밀집되어 있는 것이 염려스럽다.
원전을 감축하기보다 확대하려는 이명박정부의 역주행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명박정부와 차별성을 보여주려면 ‘개념있는’ 원전정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진보개혁 정당들은 원전을 줄여나갈 구체적인 방안과 의지를 보여줘야 마땅하다. 에너지 수급체계를 교란할 만큼 급진적인 원전 폐기방안을 내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새 원전 짓지 않기, 기존 원전의 수명연장 불허 등 장・단기적인 감축 및 폐기 계획을 논해야 할 때다. 그래야 노후한 원전의 잦은 고장과 원전설비의 납품 비리, 공사중인 방사능핵폐기장 건설부지의 부적절성 등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적절하고 단호한 대응을 할 수 있다.
시민사회도 원전 확대를 막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마침 탈원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최근 탈핵 법률가모임 ‘해바라기’,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 탈핵에너지 교수모임은 지역주민과 함께 신고리 원전 5, 6호기 방사선환경영향평가와 관련하여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지난 1월 요꼬하마에서 열린 ‘탈원전 세계회의’에 우리의 시민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경주 인근의 주민과 지역 환경단체는 ‘월성 반핵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월성 원전 1호기의 수명 연장과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설립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지역의 주민과 사회단체가 합심하여 원전 확대정책에 제동을 걸고 총선과 대선을 원전의 단계적 폐기에 필요한 방안을 토론하는 계기로 삼자. 시민 각각의 반성과 민주적 참여를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개발주의와 원전옹호론을 제어함으로써 좀더 생태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후꾸시마 사고의 교훈을 되새기고 새로운 체제 건설에 동참하는 뜻깊은 방식이다.
이번호 특집 ‘2013년체제 논의의 진전을 위하여’는 현체제를 혁파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를 부분별로 살펴본다. 이일영은 세계 차원과 동아시아-한반도 차원의 카오스 요소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국가간 관계에만 의존하기보다 평화적 질서 형성에 유리하도록 “도시를 단위로 한 월경적(越境的)・지역적 네트워크 관계”를 누적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런 네트워크형 모델의 하나로 ‘동북아 지중해 경제’를 고려해볼 것을 제안하는데, 과감한 초국가적 발상 전환이 눈길을 끈다. 정현곤은 2013년체제 건설의 핵심 의제인 ‘1953년 정전체제의 해소’ 문제를 한반도 안팎의 대내외적 관계들의 연쇄 속에서 고찰하면서 북한체제의 역학과 동향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분석한다. 정전체제의 해소가 남북경제협력, 북핵 문제, 평화체제, 남북연합과 맞물려 있음에 주목하고 그중에서 남북연합의 형성이 관건임을 강조한다.
이기정은 2013년체제에서 교육부문의 과제를 입시교육, 사교육, 학교 붕괴의 극복으로 압축하여 제시하고 현재 상황에서 실현 가능한 해결을 목표로 설정한다. 각각의 문제를 꼼꼼하게 분석・진단하고 학교 교육을 바꿀 과감한 정책을 제안하는 대목 곳곳에서 교육 현장의 실감과 고심이 묻어난다. 변창흠은 뉴타운사업을 비롯한 구체제의 도시부동산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2013년체제에 요구되는 새로운 도시개발 및 주택정책을 모색한다. 정책 방향을 주거권 중심으로 전환하고 도시정비사업을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쪽으로 꾸리자는 그의 과감한 제언은 경청할 만하다.
김병준 정대영 홍종학 이일영이 참여하는 대화는 ‘2013년 이후 무엇을 먹고살까’라는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물음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참석자들은 일자리 늘리기, 관료 통제와 재벌개혁, 한미FTA 비준 이후의 대책, 동북아 협력과 지역혁신, 새로운 성장동력 등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한다. 성장과 분배를 함께 추구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모델을 발굴하되, 정부의 대기업 지원이 고용과 성장을 늘린다는 낡은 유형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논단과현장에 실린 두편의 글도 2013년체제 건설에 요긴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영묵은 권력 앞에서 언론자유의 신심과 진실 규명의 사명을 견결히 지켜낸 리영희 선생의 올곧은 기자정신을 되새김으로써 언론 본연의 자세와 덕목을 환기한다. 구해근은 내재적 성격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의 중산층을 분석하고 특수성을 규명한다. 중산층이 IMF 금융위기를 계기로 상류와 중하류로 양분하는 과정을 꼼꼼히 추적하고 그 함의를 짚는다.
2013년체제와 관련된 특집과 대화, 논단과현장을 먼저 소개했지만 문학란도 알찬 글들로 풍성하다. 문학평론에는 우리 시대의 주목할 만한 작품을 논하는 세편의 평문이 실렸다. 황정아는 박민규의 소설을 비롯한 최근 재앙의 서사에 함축된 의미를 날카롭게 읽어내면서 시대현실에 눈감지 않는 유의미한 종말의 서사와 주체의 요건을 치밀하게 따진다. 권희철은 김애란의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을 슬픔과 기쁨의 역설적 꼬임을 발견하는 탁월한 ‘감정교육’의 소설로 읽고 그 언어적 비범함을 곡진하게 파헤친다. 김영희는 도종환, 허수경, 최승자의 시에서 김수영의 ‘아픈 몸’이라는 시적 자산이 계승됨을 발견하고 ‘알몸’ ‘우는 몸’ ‘폐허의 몸’의 개념을 통해 각각의 시세계를 탐구한다.
작가조명에서는 두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을 출간한 황정은을 초대했다. 선배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장욱의 인터뷰와 평론가 정홍수의 작품론을 만날 수 있다. 황정은과 이장욱의 무심한 듯 의미심장한 대화와 맛깔스러운 논평, 정홍수의 섬세한 읽기가 황정은 소설의 낮은 목소리와 희미한 형상을 적절히 조명한다. 여기에다 원로시인 고은을 필두로 11명의 시인들의 개성적인 시세계를 선사하는 시란과 장편연재를 성공리에 마무리하는 은희경을 비롯하여 배지영, 정미경, 한창훈이 알뜰하게 준비한 소설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울러 10회를 맞이하는 대산대학문학상 5개 분야 수상작들도 빼놓을 수 없는 읽을거리이다. 문학초점과 촌평, 그리고 문화평까지 쏠쏠한 재미와 인문적 교양을 갖춘 다수의 글들이 독자 여러분을 기다린다.
작년에 첫 수상자를 배출한 사회인문학평론상의 공모 마감을 6월로 앞당기고 상금도 상향 조정했음을 알려드린다. 올해 역시 열렬한 호응을 기대한다. 또한 부득이하게 봄호부터 정가를 인상하게 됐다. 정기구독가는 종전대로 유지한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구하며, 한층 견실한 내용으로 보답할 것임을 다짐한다. 본지 편집위원진에도 소폭 변화가 있다. 그동안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유희석 교수가 연구년을 맞아 비상임위원으로 이동하고 황정아 교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아울러 시민사회운동의 일선에서 오랫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해온 정현곤 선생이 새로 합류하게 되었으니 관심있게 지켜봐주시기 바란다. 4월 선거에서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는 일 역시 빠뜨리지 마시길.
韓基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