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대선 이후에도 키워가야 할 ‘변화 열망’
이명박정부의 무능과 부패의 정치를 끝내면서 사회 전체를 확 바꿔 새 시대를 열고자 한 시민들의 바람은 무척 거셌다. 오죽하면 대통령선거운동 막바지에 여당 후보인 박근혜조차 “정권교체를 뛰어넘는 시대교체를 이루겠습니다”고 공약했을까. 그러나 이렇게 도저한 변화에의 열망에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은 잇달아 패배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있었다.
사실 나 자신 지지표를 던지면서도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거니와 마음속으로 복기할 때 ‘이건 아니다’ 싶은 대목이 적지 않다. 가령 문재인 후보는 선한 품성과 순수한 열정을 지녔으되 모든 것을 던져 승리하고자 하는 지도자다운 결기가 부족했다. 그는 유세를 끝내고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했지만, 나는 막판에 그가 자신의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이른바 ‘친노’ 실세의 ‘백의종군 선언’을 이끌어내는 승부수를 날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민주당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새 정치의 주역에 걸맞은 자기혁신도, 책임지는 지도부도, 심지어 후보 단일화 외에는 특별한 전략도 없는 듯했다. 향후 소속 국회의원 127명이 남다른 활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붕괴될 위험마저 있다. 각고의 자기쇄신으로 조직을 재건하고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
야권에 특히 아픈 대목은 유권자 가운데 소득과 학력이 높을수록 야권 후보를, 낮을수록 여권 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이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한 민주당과 노동자・농민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진보진영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푸대접받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이 되는가. 진보개혁진영은 밑바닥 시민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부단한 자기혁신을 수행해야 한다. 이들의 절박한 요구에 책임있게 응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부와 학벌의 위력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내놓고 이를 실천하려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야권을 지지한 시민의 입장에서도 이번 패배는 자성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나를 포함해 야당 후보를 지지한 대다수는 선거 당일 예상 밖의 투표율 상승으로 승리의 기대감에 취했다가 개표와 동시에 패배를 확인함으로써 이른바 ‘멘붕’ 상태를 겪었다. 예측과 실제의 괴리가 충격적인 까닭은 변화하는 유권자의 실상과 우리 사회 기득권구조의 완강함에 우리 스스로 그만큼 어두웠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비평을 하면서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사회적 약자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던 나 자신 역시 고달픈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내 편한 대로 해석하진 않았는지 사뭇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절망과 패배주의에 빠져 계속 헤매는 것은 또다른 게으름이요 책임회피일 것이다. 야당 후보가 받은 48% 지지율에 담긴 국민의 변화 열망, 선거승리를 위해 여당 후보조차 영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열망을 저버리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결정적인 패배일지 모른다. 이 패배를 물리치려면 5년 후가 아니라 당장 그런 변화 열망에 부응할 길을 고민해야 한다.
우선 박근혜의 집권이라는 조건에서 이명박정부가 망가뜨린 민주주의, 남북관계, 민생 등을 얼마나 복구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이 순서다. 박근혜는 진보적인 정책들도 공약했지만, 당선 후의 인선 작업을 지켜보면 망가진 인권과 민주주의를 그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일조차 쉽지 않을 듯하다. 윤창중, 이동흡 같은 자격 미달의 인물도 그렇거니와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인수위원회 운영과 인선 스타일로 보건대 소통과 배려의 민주주의는 기대난망이다. 물론 당선인과 김용준 인수위원장의 신조처럼 ‘법대로’ 하면 공직사회의 비리와 부패가 많이 줄 테지만, 이런 법치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분리될 경우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이어지기 어렵고 오히려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공안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소지가 많다. 그렇기에 박근혜식 ‘법치주의’가 변질하여 민주주의에 역행하지 않도록 야당은 강력히 견제하고 시민들은 항시 감시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으며, 때론 양자가 연대해서 맞서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남북관계도 박근혜정부에만 맡겨놓을 경우 쉽게 복원될 것 같지 않다. 북의 3차 핵실험과 관련하여 박근혜 당선인이 제안하여 초당적인 대처를 하기로 약속한 것은 좋은데, 당선인・여야대표 삼자회동에서 합의한 강경책만으로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야권은 정부의 강경 일변도 정책을 견제할 창의적인 대안을 내놓고, 시민사회도 나서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 정작 삼자회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민생 현안 가운데 여야 공통의 대선 공약이었던 사안을 조속히 입법처리하기로 하고 여야 간 협의체를 운영하기로 한 결정이다. 민생 공약을 실천하려는 당선인의 의지가 느껴지는데, 다만 민생과 직결된 복지와 경제민주화 정책을 조정하는 데는 정치권의 협의에 그치지 말고 시민사회의 공론화를 통해 더 철저한 점검이 이뤄져야 한다.
박근혜정부 아래서는 이처럼 이미 망가진 것들을 회복하는 일조차 만만찮겠지만, 진보개혁세력과 시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대적인 ‘변화 열망’에 부응하려 애쓸 때 어느새 ‘시대교체’의 문턱에 다가서 있을 것이다.
본지는 이번호 대화와 특집을 선거 평가와 향후 과제를 중심으로 기획하면서 우리 자신부터 성찰하고 실천하는 자세를 가다듬고자 한다. 김용구・백낙청・이상돈・이일영이 참여한 대화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치른 경험을 각자의 입장에서 돌아보면서, 새 시대를 향한 국민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감당해야 할 과제를 짚어본다. 참여자들은 선거에서 여권이 승리한 원인, 2013년체제론의 유효성에 대한 진단, 안철수현상의 교훈, 진정한 시대교체를 이루기 위한 요건과 과제 등 중요 쟁점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밝히면서 흥미진진한 토론을 이어간다. 상이한 관점과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체험에서 우러나는 뼈있는 논평이 섞여들면서 핵심 현안들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 이뤄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이 대화의 묘미다.
특집 ‘2013년에 무엇을 해야 하나’는 대선 결과를 성찰하는 한편 향후의 핵심 과제들을 영역별로 살펴본다. 고원은 대선에서 87년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새 정치’ 실험에 주목하고 박근혜정부 아래 새 정치의 과제와 실현 방도를 꼼꼼히 따진다. 87년체제의 삼중 위기와 안철수현상에 대한 분석, 민주진보세력의 현황과 역할에 대한 논의, ‘시민배심제’의 제안 등 새겨읽을 대목이 많다. 박창기는 한국 경제위기의 핵심 요인을 좋은 일자리 부족에서 찾고 그 분석틀로 ‘신자유주의 폐해론’ 대신 ‘이권집단들의 최소승리연합론’을 제시한다. 87년체제에서 재벌과 정규직 노조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여 이권집단을 이룬 것으로 진단하고 그에 따라 해법을 찾는 그의 글은 도발적이고 날카롭다. 손열은 박근혜정부가 추구할 외교 전략을 ‘중견국 외교’ 개념을 통해 개진한다. 미중 간의 세력구도가 변하는 상황에서 한미관계와 한중관계 모두를 병행적으로 심화하면서 한미동맹, 아시아외교, 지역 및 지구적 수준에서의 다자외교를 균형있게 추구해야 하며, 북한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이재훈은 87년체제의 중요한 한계와 오류로 기존의 학벌 엘리트주의를 뜯어고치기는커녕 더 강고한 학벌서열체제로 키운 점을 꼽는다. 여러 자료를 통해 경제력에 따른 학벌 프리미엄 격차 및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기술하는 대목도 실감나거니와, 근래 대안으로 논의되는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를 촉진할 방안도 제시해 활발한 토론거리가 될 만하다.
이번호 문학란도 자못 풍성하다. 작가조명에는 등단 50주년에 즈음하여 장편 여울물 소리를 출간한 작가 황석영을 초대했다. 평론가 백지연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함께 받고 있는 이 화제작을 쓰게 된 계기와 작품의 특성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의 타고난 말솜씨와 백지연의 적절한 해석이 교차하는 가운데 장편소설과 민초들의 인생에서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작가의 예술적 탐구심이 점차 확연해진다.
문학평론에는 주목할 만한 세편의 평문이 실렸다. 신형철은 2000년대 한국시의 결정적인 혁신을 ‘감응적 인물’의 출현과 그로 말미암은 낯선 것들에서 찾고 2010년대의 조인호와 김승일이 이런 유산을 어떻게 상속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한국시의 흐름과 정치적 조건, 개별 시편에 대한 구체적인 실감이 논지의 설득력을 높인다. 변현태는 바흐찐 소설이론을 논하면서 그 핵심으로 여겨지는 소설의 대화적 성격과 ‘삶의 형식’으로서의 소설 개념을 천착한다. 전공학자의 해박한 지식과 비평적 문제의식이 함께 녹아 있어 최근 국내의 장편소설 논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형택은 비판적 후학의 입장에서 임화의 문학사 인식논리의 허실을 엄정하게 따지면서도 비평적 균형을 잃지 않는다. 한문학을 우리 문학사의 일부로 인정하는 임화의 선진적인 사고를 높이 사되, 그것이 서구중심주의에 포획된 그의 이식사관과는 모순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소설란에는 손보미와 최제훈의 소설들이 특이한 화법과 발상을 펼쳐보인다. 첫회분부터 섬세한 감각과 깊은 울림의 언어로 줄곧 관심을 끈 정이현과 황정은의 장편들은 이번호로 마무리된다. 성공리에 연재를 끝낸 두 작가에게 축하와 감사의 뜻을 전한다. 시란 역시 열두명의 시인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시편들로 꾸몄으며, 올해 11회를 맞는 대산대학문학상의 수상작들도 독자를 기다린다. 이밖에 문학초점과 촌평, 문화평도 풍부한 인문적 교양과 독서의 재미를 선사한다.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필자들께 감사를 전한다.
봄호부터 본지 편집위원진에 일부 변화가 있다. 고세현 창비 전 대표이사가 합류하고 김현미, 최태욱 교수는 사임한다. 새로운 분의 동참을 환영하며 그간 수고한 두분의 건투를 빈다. 본지는 향후에도 성공적인 시대교체를 이루기 위해 자기갱신을 포함한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독자들의 변함없는 성원과 동참을 기대한다.
韓基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