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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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근신과 적공의 도덕을 위하여

 

 

헤르더의 시 「염려의 아들」(Das Kind der Sorge)에 나오는 우화에 따르면, 염려의 여신 쿠라는 강을 건너다 점토를 발견하고는 그것으로 형상을 빚었다. 그러고는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주피터에게 이 덩어리에 혼을 불어넣어달라고 청했다. 쿠라가 완성된 창조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 하자 주피터는 반대하였고 대지의 신 텔루스도 점토는 자기 것이므로 제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우겼다. 세 신은 한참을 싸우다 시간의 신을 판관으로 모셨다. 그는 이 형상이 죽으면 주피터는 영혼을, 텔루스는 육체를 돌려받고,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쿠라가 맡으라고 판결했다. 우화는 시간의 신의 짓궂은 판결 때문에 우리가 쿠라의 소유물로서 평생 온갖 근심에 시달리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쿠라(Cura)는 라틴어로 염려를 뜻하지만 거기에는 ‘겁먹은 노력’ ‘조심’ ‘헌신’이란 뜻도 들어 있다. 나아가 철학자 세네카는 신의 선은 그 본성에 의해 완성되고, 인간의 선은 염려에 의해 완성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분석하고 있는 이 염려의 우화와 철학이 서구 문화의 전유물은 아니다. 중국 학자인 쉬 푸관()은 근심과 염려를 도덕적 활동의 기초로 삼는 우환의식이야말로 동아시아인들의 인문주의적 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때 우환은 단순한 하루하루의 걱정거리(一朝之患)와는 다르다. 가령 맹자 같은 이에게 그것은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근심(終身之憂)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사회적 재난과 정치적 사건 들을 생각해보면, 모두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적폐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 사회야말로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없는 우환으로 넘쳐나는 곳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우환의식이 주체적인 사회문화적 풍토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는 말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환에 대한 통념 이상의 접근이 필요하다. 세월호참사로 확인된 국가의 부실한 안전시스템이야 이 나라에서 사는 내내 근심할 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옛 동아시아인들이 품었던 일생의 근심이란 사는 동안 수치스러운 행동을 할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주희(朱熹)는 사사로운 생각이 싹트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견지해야 할 자세를 설명하기 위해 『시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여 나아가며, 심연의 자락에 서 있는 듯, 살얼음을 밟은 듯.” 세네카처럼 동아시아의 유가 사상가들도 도덕적 재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분투하는 염려의 태도가 선을 완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할 무렵 책이 한권 나왔다. 본지 편집인 백낙청이 각계 전문가 일곱 사람을 만나 연속적으로 대화를 나눈 대담집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창비 2015)이다. 책의 서장에서는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에서 “체념을 거부하고 ‘일상’으로의 편안한 복귀를 거절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유가족들이 “비탄 속에서도 각기 자기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면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새로 깨닫고 결연히 뜻을 세워 싸워나가는 모습들이 생생하다”고 적고 있다. 백낙청은 유가족이 “힘든 싸움을 해내면서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해 터뜨리는 탄식의 소리와 스스로 별다른 변화를 이룩하지 않은 채 세상을 탓하며 체념하는 목소리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별에는 도덕적 영웅의 숙명론과 도덕적 실패자의 숙명론을 분명히 구별하고자 한 유가 사상가들의 엄정함 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다. 주희는 모든 것을 체념하는 도덕적 실패자의 숙명론을 “이른바 하늘에 순종하고 명령에 따르는 부도덕하고 방종한 견해”라고 경멸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도덕적 영웅은 두려움(恐懼)의 마음을 가지고 학습과 수신을 통해 “자신을 강하게 했던”(自强) 사람이다. 그러한 이는 “하늘의 명령이 나에게 있음”(天命在我)을 발견하면서 심지어 “천명의 수립”에도 참여할 수 있다(토마스 메츠거 『곤경의 탈피』).

동아시아의 유가적 전통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우환의식은 단순히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의 환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태에 대해 예민한 주의를 기울이고 근신하면서 우리의 행동을 기획하고 공덕을 쌓아가는, 그리고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태도이다. 이러한 근신과 적공(積功)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이지만, 이때의 도덕은 그저 나와 타인을 가엾게 여기는 정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나 정치의 권위적 흐름과 낡은 구획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우리의 역량을 전제(前提)하는 정치학이다. 이러한 역량은 동아시아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사회 지도자에게 요구되던 것이다. 그들은 그날그날의 자기 걱정에 빠져 있는 대신, 일생 동안 공동체 성원들의 근심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염려를 짊어져야 하는 자들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현 정권의 ‘제왕적’ 통치 스타일을 나무라는 말조차 아깝다는 느낌이 든다. 안전에 대한 국민의 근심과 불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세월호특별법시행령을 통해 자신들의 당면한 걱정거리를 무마하려는 모습은 전근대적 지도자에게 요구되던 기본 덕목조차 갖추지 못한 소인배적 졸렬함으로 가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한심한 광경 앞에서 우리는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근신하고 경계하면서 해나가야 할 것들을 곰곰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번호 특집 ‘세월호 이후, 다시 생각하는 한국문학’은 우리 시대의 근심어린 사건들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미래를 우리 가까이로 끌어당기려는 문학적 분투를 담고 있다. 분투의 결과가 늘 만족스러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아니며, 종종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되새기며 그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실패의 자리를 드러낼 뿐이지만, 오직 그 자리로부터만 시대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백지연은 “시대의 방향을 가늠하는 ‘전망’이 강렬하게 호명되었던” 1980년대 한국문학에 대해 논한다. 백지연은 윤정모 홍희담 신경숙의 소설을 다루면서 80년대의 역사적 전망과 90년대의 개인적 욕망이라는 간단한 이분법적 환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역량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역량의 가능성은 두 시기를 기계적 도식으로 정리한 뒤 한 시기를 특권화하여 문학적 거점으로 삼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지평과 노동자로서의 삶의 전망 사이에서 진동하는 생활의 감수성을 절실하게 드러냄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신샛별은 김애란 김영하 박민규 황정은의 근작들을 살피면서 아이는 사라졌지만 부모의 자리를 떠날 수 없는 세월호 유가족을 모욕하는 일그러진 세간의 언설에 대항하는 새로운 ‘부모도덕’에 대해 탐구한다. 이 도덕은 그저 “잃어버린 아이를 기억하느라 미처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과오”를 피해 “미래를 낳는 기억의 한 형식”에 대해 “있는 힘을 다해 질문”한다. 이어지는 권성우의 글은 ‘더 넓어지고 깊어지자’라는 힘찬 제목 아래 “80년대 문학이 응당 지닐 법한 시대정신이나 문학정신”이 부재한 듯 보이는 몇몇 소설이 “민중문학의 성과와는 다른 방식으로” 모순된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근원적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변혁과 개혁에 대한 희망이 점차 스러져가는 이즈음의 시대적 감각”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정념에 대한 무거운 성찰과 깊은 회한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고 본다. 백지연과 권성우가 80년대 문학에 대해 제시하는 상이한 견해는 ‘문학의 창조적 역할’을 사유하려고 할 때 짚어보아야 할 여러 교착지점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남상욱은 후꾸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사회의 변화를 전경화한 문학작품들을 검토하면서 그것이 보여준 ‘이후’의 상상력이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에 하나의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을지 탐색한다. 그가 거론한 작품들은 참혹한 사건을 “법칙상 하나의 오류이자 예외적인 것에 불과한 것처럼 인식”하는 대신 “자기 한계를 드러내는 지표이자 미래의 ‘근거’로서 정초할 수 있을 때만” 시대의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문학평론란은 김학철의 소설과 삶을 생생하고 활달한 필치로 조감하고 있는 최원식의 글로 특별히 흥미롭다. 일생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소설가의 삶은 민족서사시, 수용소문학, 사회주의 교양소설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들 속에서 표현된다. 굴곡과 곤경에 맞서 불굴의 낙관주의로 일생을 살아온 노작가가 “최후의 순간, 희망은 없어,라고 뇌시며” 운명했다는 일화를 들을 때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은 도저한 절망이 아니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애쓰고 애쓰며 이루려 했던 지독한 염원 없이는 희망의 여부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조차 없다는 엄숙하고 간곡한 충고를 전해 듣는 느낌이다.

‘대화’에서는 ‘탈북인의 자리를 돌아보다’라는 제목 아래 이 분야 전문가인 고경빈 이향규, 탈북인 설송아, 평론가 한기욱이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탈북자 누적 규모가 조만간 3만명에 근접하는 상황에서 한국사회에 이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를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로 마련했다. 탈북자는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이상 가장 간섭받고 다치기 쉬운” 존재로서 이들이 부여받는 “오도된 가시성”을 갱신하는 일이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본지가 이번에 특별히 주목한 것이다. 탈북자와 관련된 중요한 현안과 쟁점에 대해 전문가의 식견과 비평적 감각, 당사자의 경험이 한데 어우러진 유익한 좌담이다.

‘논단과 현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먼저 서재정은 사드(THAAD, 종말단계고고도지역방어) 미사일 요격체계의 한국 배치 문제를 다룬 글에서 사드 배치에 대한 찬반론 각각의 한계를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사대적 양자택일을 넘어선 평화체제 구축의 길을 모색하려 한다. 이어 박성철은 1980년대 벌어진 간첩조작사건과 그후 재심을 통한 무죄판결, 그리고 국가배상책임 시효 논란까지 기막힌 사연을 소개하며 인권유린 국가 불법행위에 대해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자고 시의적절하게 제안한다.

이 계절의 창작란은 여느 때보다 신선하고 풍성하다. 시란은 등단 후 한국문학에 새 기운과 활력을 주고 있는 신예시인 15인의 작품으로 꾸몄다. 아직 첫 시집을 내지 않은 시인들의 매력적인 작품을 읽으며 곧 도래할 한국시단의 흐름을 예견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소설란에서는 전성태의 장편연재 첫 회를 싣게 돼 기쁘다. 정이현 정찬 한강의 단편 역시 독자들을 흡족하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문학분야의 주요 출간작을 좌담 형식으로 리뷰하는 문학초점란에는 소설가 권여선을 초대해 흥미로운 토론을 가졌다. 아울러 최근 화제도서와 문화현상에 대한 열한편의 촌평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른 더위에도 애써준 모든 필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여러모로 답답한 우리 삶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길 간절히 바란다.

陳恩英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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