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블랙리스트와 ‘이면헌법’ 없는 세상을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활짝 핀 적이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 임명식에서 분홍 재킷을 입고 그를 맞는 대통령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서로의 가치와 쓸모를 본능적으로 아는 두 사람의 애틋하지만 ‘잘못된’ 만남이었다. 이후 청와대가 발동한 숱한 위헌적·불법적 조치들 가운데서도 블랙리스트야말로 이 둘에겐 회심작이지 싶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과 검찰 공안부에서 잔뼈가 굵은 김기춘은 독재정권의 비판자들을 빨갱이로 몰거나 간첩으로 조작하는 ‘역대급’ 선수였고, 박정희 철권통치를 그리워하는 박근혜는 이런 반인권적 인물이 오히려 미덥게 여겨졌을 터였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도종환 의원의 발언으로 그 일단이 확인된 바 있지만, 특검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전체상이 드러났다. 박근혜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국정지표가 문화융성인데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면 김기춘은 “문화예술계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하라”는 식의 지침을 내렸다. 수석비서관들은 이런 지시를 문화체육관광부에, 문체부는 산하기관에 순차적으로 하달하고 지시사항을 실행함으로써 정부와 견해가 다른 문화예술인 및 단체들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했다.
2015년 초 박 대통령은 당시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에게 “(문체부가)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등의 좌파 문예지만 지원하고, 건전 문예지에는 지원을 안 한다”며 지원정책 수정을 지시했다. 이후 우수문예지 지원사업은 축소되었다가 아예 폐지되었고 두 출판사의 출간 도서는 ‘세종도서’(우수도서 지원사업) 목록에서도 대거 탈락했다. 이 밖에도 연극 연출가 박근형과 이윤택이 창작산실 연극분야 지원과 문학창작기금 지원에서 배제되었고 소설가 김애란과 김연수의 경우 북미 한국문학학회의 초청이 무산되었으며, 평론가 황현산을 포함한 문인들 다수가 예술위원회 심사위원에서 제외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세월호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상영했다고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사퇴 압력을 받았고 예산마저 대폭 삭감당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 등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되고, 대통령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자 한강에게 축전 보내기를 거부한 것은 거론하기조차 민망하다.
박근혜정권의 블랙리스트는 과거 독재정권의 검열과는 달리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 반면 철저하게 제도적 불이익을 준다. 열악한 조건에서 창작하는 문화예술인에게 정부 지원을 끊고 외부 지원을 차단하는 저급한 검열방식인 것이다. 블랙리스트의 명분을 여전히 종북·좌파세력에 대한 대응에서 찾고 있으나 실제와는 너무 큰 괴리가 있다는 것도 눈에 띈다. 언론에 공개된 9473명의 블랙리스트 명단은 세월호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거나 선거에서 문재인과 박원순을 지지한 사람들로 알려졌는데, 이들 모두를 종북·좌파로 규정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이들이 그게 무슨 큰 범죄냐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김기춘은 영장실질심사에서 블랙리스트가 범죄인 줄 몰랐다고 진술했고 박근혜도 정규재와의 인터뷰에서 조윤선의 구속에 대해 “그게 무슨…… 뇌물죄도 아닌데 구속까지 한다는 거는…… 너무 과했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헌법적 가치를 유린하는 중범죄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 취임선서의 첫 구절—“나는 헌법을 준수하고”—을 서약한 당사자가 표현의 자유 같은 핵심적인 헌법 조항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유독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 이렇게 뻔뻔하게—이건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나오는 데는 헌법 외에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박정희 유신시대와 전두환 시대에 혹독한 탄압을 겪은 본지로서는 이번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유신독재를 부활시키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 아니라 유신시대 훨씬 전부터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헌법을 지녔으되 분단국가의 성립 이래, 특히 한국전쟁 이후 분단 고착화에 따라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반공반북의 관습적 가치체계에 줄곧 괴롭힘을 당해왔고 그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헌법적 구속력을 초과해 작동하면서 수구기득권층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해온 이런 관습적 이데올로기를 백낙청은 ‘이면헌법’이라 명명한 바 있다.
박근혜와 김기춘이 대한민국의 헌법을 정면으로 어기면서 그에 합당한 죄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이면헌법에 충실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미래미디어포럼이 “블랙리스트는 정당한 통치행위”라고 강변하거나 태극기집회 참석자가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고 쓰인 방패를 들고 나오거나 이인제 전 의원이 “지금의 촛불집회는 헌법을 파괴하자는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펼 때도 이면헌법의 영향력은 강력하게 발휘된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서 블랙리스트는 이면헌법의 뒷받침을 받아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국면에서 광장에 쏟아져나온 촛불시민들은 서슬 푸른 이면헌법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종북좌빨’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광장에서 가장 인기를 끈 연사는 다분히 관습적으로 투쟁을 고취하는 노동운동 지도부나 정치인보다 각자의 팍팍한 삶에서 터져나온 저마다의 언어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 일반 시민과 개별 노동자들이었다. 모든 종류의 상투형을 거부하는 시민들의 집단적인 지성과 축제 분위기, 그리고 평화시위 원칙이 빛나는 광장이었기에 극단적이고 경직된 얼굴의 이면헌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외치며 당당하게 광장을 행진했는데, 정보기관이나 검찰의 검열과 탄압을 겪은 이들에게 그 광경은 촛불의 호위 아래 헌법을 품에 안고 이면헌법의 어둠 한가운데를 뚫고 가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블랙리스트를 만든 현직 대통령의 탄핵심판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이면헌법에 매달려온 수구기득권 세력도 총력투쟁에 나서는 형국이다. 촛불시민은 나라의 주권자로서 긴장을 늦추지 말고 정말 ‘나쁜 대통령’을 몰아내고 이면헌법의 완전 폐지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곧 블랙리스트 없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이번호 특집 ‘촛불혁명, 전환의 시작’은 지난해 가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의 혁명적 성격을 짚고 그것이 이뤄낸 것과 이뤄낼 것을 점검하며, 우리 앞에 어떤 선택이 놓여 있고 우리 사회의 큰 전환이 어디서 시작될 수 있는지를 논한다.
백낙청은 이번 촛불집회가 기존의 어떤 혁명이나 항쟁과도 다른 새로운 시민혁명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며 그것을 ‘촛불혁명’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평화시위를 집단지성의 전략적 선택으로 파악하며, 세계사에 유례없는 평화적 혁명으로 새세상 만들기를 희망한다. 분단상황의 인식에 바탕하여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며, 박정희 모델의 극복과 이면헌법의 폐지로 새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더불어 촛불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금의 정치권이 새겨야 할 조언도 빼놓지 않는다. 유철규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시야로, 임박한 미중 이해관계의 충돌과 긴장 국면에서 한국이 나아갈 길을 타진한다. 일대일 협상을 추진하려는 트럼프 이후의 미국과 다자협상의 구심점 자리를 노리는 중국이 부딪칠 때 오히려 한국의 입지가 생겨나리라 전망하며 사드 문제도 이런 각도에서 풀어나가기를 주문한다. 아울러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국의 경제 문제, 특히 4차 산업혁명과 저성장에 대한 대응책은 ‘분배’에 있음을 역설한다.
황정아는 촛불광장의 ‘정동(情動)’을 최근의 문학작품을 통해 논하며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지 따져 묻는다.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의 화두가 된 ‘가만히 있음’의 정서를 김금희 소설을 통해 읽어내고, 그것이 어떻게 ‘가만히 있지 않음’의 열정을 발생시키는지 짚는다. 삶의 ‘신성함’과 ‘하찮음’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천착한 황정은 소설을 통해서는 삶의 ‘하찮음’이 광장의 빛으로 진화하는 마음의 궤적을 추적한다. 특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87년 6월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의 촛불좌담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이다. 강남역사건 이후의 페미니즘 액션그룹과 이화여대 학생회, 촛불광장의 퇴진행동에서 활동해온 참석자들이 촛불집회를 경험한 각자의 소감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촛불집회의 원동력이 된 각계의 청년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사유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촛불의 기운은 ‘현장’란에서도 이어진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제목 그대로 ‘촛불과 광장의 한국현대사’를 활달한 문체와 주체적 시민의 시선으로 추적한다. 한국현대사에서 왜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광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돌아보는 가운데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바로세울 때이며 그렇기에 촛불을 끌 수 없다는 주장이 절실하게 와닿는다.
이번호 창작의 시란은 김광규부터 유진목까지 10인의 시인이 개성있는 목소리로 들려주는 다채로운 시편들로 꾸몄다. 올해 소설란의 장편연재는 최근 한국문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인 김금희가 맡는다. 미싱회사에서 일하는 ‘낙하산’ 팀장대리와 무뚝뚝한 여직원 간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해주시기 바란다. 이미 저마다 탄탄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강영숙 김려령 김애란의 단편은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소설서사를 시도한다.
문학초점은 이번호부터 새로 진행을 맡은 손택수 시인과 정주아 평론가가 김언 시인을 초대해 근작 시집과 소설 5권에 대해 흥미로운 토론을 벌인다. 주목받는 신작들을 놓고 참석자 각각이 고유한 관점과 개성적인 어법으로 들려주는 생생한 비평적 이야기라 할 만하다. 작가조명에서는 소설집 『빛의 호위』를 출간한 조해진 소설가를 신미나 시인이 만나 ‘어둠상자에 뚫린 바늘구멍의 틈새로 펼쳐지는 빛의 파노라마’와 같은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 문학평론으로는 박상수 시인이 2000년대 ‘시적 주체의 윤리적 모험’과 2010년대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을 비교하며 최근의 시와 시비평의 풍경을 발빠르게 살피면서 뚜렷한 자기 관점을 힘차게 서술한다.
‘논단’의 세편 글은 해당 분야의 중요한 쟁점을 심도있게 다룬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주의와 사회적 재생산 간의 구조를 ‘자본과 돌봄의 모순’이라는 문제틀로 파고드는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일부를 포섭하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운동의 행로를 고민하는 시사점이 큰 글이다. 안병옥은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이필렬의 「기후변화, 인공지능 그리고 자본주의」(본지 2016년 가을호)에 대한 반론으로 기술낙관론적 입장을 분석·비판한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섭씨 2도 아래로 한다는 빠리협약의 목표, 나아가 1.5도까지 내려잡는 목표가 기후과학의 면에서는 물론 인류의 미래에도 긴요한 정치적 선택임을 강조한다. 구갑우는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등의 근작 회고록 네편을 꼼꼼하게 읽는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깊숙이 개입했던 이들의 진술을 교차검증하는 작업을 통해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를 풀어갈 실마리를 찾는 한편 ‘문학’으로서 회고록의 의의를 발견한다.
‘산문’을 꾸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탄탄하고 섬세하며 품격있는 작품들로 우리 소설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다져온 고(故) 정미경 작가를 추모하며 후배 작가 정지아 정이현이 고인의 삶과 문학을 돌아보는 글을 올렸다. 모순과 갈등의 세계를 단호한 시선으로 끝까지 바라보던 뛰어난 작가를 때이르게 잃은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두 작가에게 감사드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난해 각계 전문가들의 초청 인터뷰로 진행되어 화제를 모았던 ‘독자의 목소리’는 올해 ‘독자 리뷰’로 옷을 갈아입는다. 창비에 관심과 애정을 지닌 문병훈 이주혜 독자가 지난호를 세심히 읽은 소감을 밝혀주었다. 올해 촌평은 하대청(과학), 양효실(여성) 두분을 고정필자로 모셨다. 두분을 포함하여 짧지만 품이 많이 드는 알찬 글을 써주신 일곱분께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올해 15회를 맞은 대산대학문학상 발표와 수상작을 싣는다. 아낌없는 격려와 축하의 인사를 보내며 앞으로 한국문학을 이끌어갈 유망주들의 데뷔작을 눈여겨봐주시길 바란다.
2017년을 맞이해 본지에 몇가지 변화가 있다. 편집위원진에서 진은영이 물러나고 정현곤이 상임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2011년 제정한 창비인문평론상(구 사회인문학평론상) 공모가 2016년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그간 관심 가져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대한 참신하고 실천적인 인문학적 탐구와 비평적 글쓰기를 성원할 방안을 모색할 것을 약속드린다.
올 겨울 촛불시민은 이미 많은 것을 이뤄냈다. 수구 기득권세력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큰 이변이 없는 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일은 아니다. 『창작과비평』은 촛불시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새세상 만들기에 나설 것이며 촛불혁명의 완수를 위한 창조적 사유와 치열한 논의의 장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기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