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전환, 어디서 시작할까
문학의 열린 길
어그러진 세계와 주체, 그리고 문학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가 있음. kiwookh@gmail.com
1. 문학의 길은 열려 있다
삶이 그렇듯이 문학도 자명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역사적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그 물음에 나름의 답을 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물음의 변주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한 개인이 삶의 고비마다 이게 삶다운 삶인가? 하고 자문하듯 문학에 있어서도 이게 문학다운 문학인가? 하고 캐묻게 된다.
지난 50년 동안 계간 『창작과비평』은 이런저런 문학의 위기를 겪으면서 문학의 장 내부에서 일어나는 두가지 편향과도 싸워왔다. 하나는 ‘순수문학’ 또는 ‘(순수)문학주의’라고 불리는 것, 즉 시대현실이나 이데올로기에 초연한 채 순수한 미적 가치를 지향하는 문학적 흐름이다. 이 흐름은 문학의 순수성을 내세움으로써 민족 또는 민중의 입장에서 독재와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문학을 불순한 이데올로기로 몰아붙인다. 순수문학은 ‘순수 대 참여’ 논쟁을 거치면서 자유주의라기보다 차라리 반공독재 순응주의라 할 ‘순수’ 자체의 이데올로기가 폭로되기도 했고 1980년대 민중문학의 확산으로 평단에서는 자유주의 세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소련·동구권이 무너지고 포스트모던 담론이 유입된 1990년대 이후 현실순응적인 자유주의가 다시 여러 형태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서구 문학사에서는 19세기 후반의 예술지상주의, 20세기 초반 영미학계의 신비평, 20세기 중후반의 (후기)구조주의 역시 이런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문학 경향의 문제점은 문학 텍스트를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하나의 형식 혹은 구조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른바 ‘문학의 자율성’을 절대화하면서 문학 고유의 텍스트-공간을 설정하고 그것의 형식과 구조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때의 형식 역시 온전한 것은 아니다. 브라질의 비평가 호베르뚜 슈바르스(Roberto Schwarz)는 신비평과 구조주의가 문학적 형식과 사회적 형식 사이의 변증법적인 연관을 무시한 결과 통념과 반대로 형식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는 반면 자본에 대한 연구에서 형식과 물질의 변증법을 끝까지 밀고 나간 맑스야말로 구조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사상가라고 평한다.1) 요컨대 이런 순수주의 문학 노선은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열려 있지 않는 ‘닫힌 길’이며,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사유하는 데 필수적인 문학을 형식 미학의 문제로 환원한다.
또 하나의 편향은 문학이 어떤 대의를 위해 존재하며 이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목적론적이며 도구론적인 경향이다. 이런 문학도 나아갈 길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의미에서 ‘열린 길’이 아니다. 이런 경향은 흔히 혁명기 문학에서 나타나는데, 사회주의리얼리즘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카프에 이어 1970~80년대 반독재민주화 시기의 급진적인 문학론 가운데서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이 경향의 기본적인 문제는 문학이 사회과학적·철학적 혁명론에 종속됨으로써 본래의 상상력과 창조성이 위축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속류 맑스주의나 ‘주체문예’를 포함하여 현실사회주의의 공식적인 문학관에서 나타나듯 이 경향의 문학은 이미 과학적으로 파악된 인간과 시대현실의 진실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는, 후행적이고 보조적인 성격을 띤다. 1970,80년대 민중문학이나 노동문학 가운데 최상의 작품들은 문학사의 기념비로 남았지만, 경직되고 도식적인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도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후 민중문학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고 애썼고 그 성과도 적지 않았으나 목적론적 문학관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문학은 사회과학이나 철학적 이론이 이미 인식한 바를 문학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제시하거나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청년 맑스에게 소중한 지적 영감이 된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다음 이를 뛰어나게 작품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당대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핵심 원리와 그 반인간적인 성격을 직관하고 그것을 살아 있는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작가가 의식하든 안하든 주어진 삶과 현실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 사유와 감각에서 미답의 세계를 여는 일이며, 비평은 이 창조적 행위가 열어놓은 새로운 인식과 감성의 의미를 밝히면서 그 창조적 핵심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렇기에 비평은 이를 오도하거나 흩트리는 사견(邪見)들과 비타협적으로 싸워야 한다.
문학의 길은 순수주의와 목적론적 편향을 여의고, 자신을 포함한 구체적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열려 있는 길이다. 문학의 열린 길은 존재의 개방성을 전제로 하며 문학이 어떤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규칙에 매이지 않음을 함축한다. 그렇다고 무슨 보편적인 진리의 공간에 거주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문학은 ‘보편적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형이상학을 해체하면서 한 개인이 그때그때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에 살아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구현되기 때문이다.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시대와 주체의 문제를 따져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평은 세계와 시대와 주체의 문제를 놓고 (사회과학과 철학과 이론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논의들과 대화하고 때론 논쟁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문학비평은 학문으로서의 인문학과 맞닿아 있는 영역이고 서로의 사유와 상상력에 빚질 수밖에 없다.
2. 어그러진 세상, 갑을관계, 그리고 변혁의 주체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Hamlet, 1601)은 근대적 개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대의 문제를 제기한다. 왕자 햄릿은 자신의 “시대가 어그러졌음”(The time is out of joint, 1막 5장)을 인지하고 자신이 그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탄한다. 햄릿의 시대에 수습 불가능하게 어그러진 것은 왕권과 부권을 뼈대로 하는 봉건질서였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몇몇 세계적인 학자들은 ‘어그러진’이라는 형용사로 자본주의체제의 현재를 진단한다.
볼프강 슈트레크(Wolfgang Streeck)는 자본주의의 종언을 예측하는 글의 마지막 절 ‘어그러진 세상’(The World Out of Joint)에서 현재 자본주의의 악성 병폐 다섯가지를 열거하고 치유약이 없다고 단언한다.2)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근대 이후 진행된 역사적 경향이 선형적 진보냐 양극화냐를 분야별로 점검하는 책—이 책의 표제도 ‘세상이 어그러졌다’(The World Is Out of Joint)이다—에서 현재의 위기에는 신자유주의적인 방법도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국가 모델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진단한다.3) 현재의 세계체제는 평형상태로 되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졌고 하층계급은 물론 자본가에게도 더이상 득이 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첨단기술이 관리노동을 대체함으로써 중간계급이 설자리가 없어져서 자본주의가 붕괴된다거나, 자본주의는 혁신을 통해 유지될 수 있으나 핵이나 기후변화에 의한 생태적 위기가 체제를 끝장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4)
물론 자본주의의 미래를 이보다 낙관하는 견해도 많다. 그런데 낙관론이 우세한 경제학계 내에서도 자본주의가 심각한 지경임을 입증하는 연구가 나온다. 지난 2세기 동안 전지구적으로 소득과 부의 불평등 추이를 추적한 또마 삐께띠(Thomas Piketty)는 양극화가 줄곧 심화되고 있다는—월러스틴도 진단한 바 있는—가설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서 2011년 월가 점령시위까지 대중이 피부로 실감한 것, 즉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직관이 사실임을 입증한 것이다.5) 월가 점령시위 때 나온 ‘1% 대 99%’의 구호는 이제 엄연한 현실로 판명되고 있다.6) 요컨대 지금은 자본주의가 망해가는데 그 후속 체제는 드러나지 않고 있는 위기의 시대요, 그렇기에 대전환이 절실해진 시대인 것이다.
눈길을 우리 사회 내부로 돌리면, 2014년 세월호사건을 통해 드러난 체제상의 심각한 병폐들이 고쳐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었음을 실감한다. 게다가 중장기적 문제는 방치하고 있으니 체제 자체가 조만간 붕괴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령 최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 장덕진(張德鎭)은 저출산·고령화, 정규직·비정규직 이중화, 민주주의, 통일, 환경 등의 문제가 매우 심각함을 역설하며 “앞으로 숙제할 시간은 7~8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때쯤부터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기 시작할 겁니다. 패닉 상태가 되면 어떤 정책 수단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7)라고 경고한다. 이런 위기를 반전시킬 그의 해법은 정치를 바로잡는 것, 특히 북유럽과 같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강화에 있다. 거론한 사안들이 모두 화급한 문제이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법이 정치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를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과정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그의 진단과 처방은 현실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박근혜정권은 그간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기반마저 무너뜨리려고 거짓말, 편법, 불법을 일삼았는데, 이런 역행적인 정치적 흐름을 전환해서 합의제 민주주의를 강화할 방도가 너무 막연할 뿐 아니라, 박근혜가 무너뜨리려는 것이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전제 자체가 87년 이후의 성과를 과대평가하고 분단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87년체제의 한계를 간과한 것이다.8)
언제부턴지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갑을관계의 작동 현상이 점점 두드러지고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뿐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하청)기업도 갑을관계이다. 권력자 앞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을이 될 수밖에 없는데, 대통령과 각료부터가 국민에게 갑질을 하고 관료사회 전체가 이를 충실히 재생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갑을관계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그물망처럼 뻗어 있어 대다수 사람들을 을로 만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크게 보아 을에 해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갑을관계로 둔갑하기 일쑤다. 우리 사회는 ‘갑을사회’로 불릴 만하고9) 그렇기에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을”에 주목하고 을을 정치적 주체로 삼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발상도 나올 만하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잘 정리된 개념보다는 하나의 화두에 가까운 말이다. 을이 누구인지, 그들이 실제로 정치적 주체로, 민주주의적 주체로 구성될 수 있을지, 그들이 과연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역사적 대한민국’의 공동체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을은 그냥 잠시 사용되었다가 곧 소멸하게 될 유행어인지, 따라서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기를 건너는 새로운 정치의 주체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할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을 을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사회 스스로 을이라는 이 평범한 말을, 심각하고 무거운 말로, 사회의 심층적인 현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10)
숙고해볼 만한 제언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을의 민주주의의 기반이 될 ‘을들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토론에 기여하는 의미에서 논평을 덧붙이면, 우선 을의 정체를 구성하는 ‘몫 없는 이들’에 글자 그대로 부합하는 소수자들, 즉 장애인, 이주자, 성소수자, 탈북인, 난민 등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의 ‘몫 없음’ 혹은 ‘을’의 상태는 종래의 ‘민중’ 개념에서도 탈식민주의의 ‘하위주체’(subaltern) 논의에서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밖에도 범주화되지 않은 주변적 존재들에게 눈길을 돌릴 때만이 ‘을’이 (‘병’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을’을 낳는 악순환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약자의 위치에 놓이는 여성 역시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할 것은 집단적·지역적 주체로서 갑과 을의 관계이다. 가령 현재 수도권과 지방은 적어도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는 갑을관계로 체감되는데, 이는 실제로는 수도권 특권층과 (토호를 제외한) 지방주민의 관계일 터이다. 집단적·지역적 갑을관계는 오래 지속되면 식민화를 동반한다. 오늘날 한국의 지방들이 수도권의 식민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원의 갑을관계는 한국사회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야말로 전형적인 갑을관계가 아닌가. 이명박정권 이후 한국정부는 한미 간의 갑을관계를 완화하려 했던 전임 정부의 노력마저 불안해하며, 돌려받을 예정이던 전시작전지휘권을 자진 반납하기까지 했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한 관계이다. 현재 남북한 사이는 딱히 갑을관계는 아닐지 모르지만, 남북한의 힘의 비대칭이 뚜렷해지고 국제사회에서의 대접이 판이함에 따라 남은—특히 남북한의 적대관계를 마다않는 남측 정권이 들어섰을 때—북에 갑처럼 행세하려든다. 북은 (미국을 등에 업은) 남의 이런 태도를 ‘갑질’로 인식하고 핵무기와 미사일·인공위성 개발로 대응한다. 이에 남은 개성공단 전면중단(사실상의 폐쇄)이라는 자해적이지만 전형적인 갑질에 해당하는 초강수를 발동한다. 세계체제 패권국의 입장에서는 남북한의 이런 분열과 적대가 한반도를 통제하는 데 더없이 편리한 기제다. 한국에 이데올로기적 조공을 헌납받는 데 더해 사드(THAAD)처럼 대중국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무기까지 배치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남북한 기득권층에게도 상호간의 적대는 나쁘지 않다. 자신의 설자리를 위협하는 개혁세력에게 ‘종북’이나 ‘반동’의 딱지를 붙여 몰아냄으로써 특권을 유지·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박대통령이 개성공단 폐쇄조처를 내린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든 자신의 권력기반을 지키는 데 불리할 게 없다는 정략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분단체제를 갑을관계로 설명하자면, 남북한 전체가 세계적 패권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을의 입장에 놓이지만, 한반도 차원에서는 남북의 소수 특권층이 갑이요 남북의 대다수 주민이 을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사회에서 을의 민주주의를 통해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역사적 대한민국’의 공동체와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분단체제라는 갑을관계까지 철폐하거나 적어도 해소해가는 과정을 수반해야 한다. 분단체제의 갑을관계야말로 한국사회의 온갖 갑을관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상위 기제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갑을관계로서의 분단체제 극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한국사회 내부의 복잡한 갑을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면 갑을관계의 상대주의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을의 민주주의가 정상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터레그넘의 시기를 건너는 새로운 정치”라는 설정도 주목을 요한다. ‘인터레그넘’(interregnum, 王座空位期間)의 개념은 원래 그람시(A. Gramci)의 ‘위기’ 발언에 유래한 것이지만 지그문트 바우만(Zigmund Bauman)과 진태원(陳泰元)은 각각 또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바우만이 이 개념을 통해 주목한 것은 국민국가 시대에서 세계화 시대로의 전환기에서 생겨나는 권력과 정치의 어긋남이다. 즉 정치는 아직 국민국가 단위로 작동하는데, 권력(특히 세계시장 및 자본의 권력)은 국민국가와 국민적 주권의 힘을 넘어서는 데 따른 위기국면을 뜻한다. 한편 진태원은 세월호사건이 드러낸 “검은 공백으로서의 국가”라는 것에 주목하고 그러한 공백을 통해 표현된 “주체성을 상실한 국가”를 “어떻게 (다시) 주체화할 것인가의 문제”를 사유하고자 한다.
바우만과 진태원의 의미부여는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이 개념이 유래한 그람시의 발언, 즉 “위기는 정확히 말하면,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터레그넘에서는 극히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이 출현하게 된다”11)라는 지적을 존중하면서 현재의 위기(인터레그넘)를 말한다면 대략 세 층위의 체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시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여 건설한 87년체제의 위기, 둘은 분단체제의 위기, 셋은 앞서 거론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가 그것이다. 이 세 층위의 위기는 연동되어 있으며 낡은 세 체제가 무너진 후에 어떤 ‘새로운 것’이 나타날지는 미정이다.
87년체제의 위기부터 살펴보자. 세월호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국가 자체의 부재나 공백이라기보다 이 나라를 ‘을을 위한 나라’로 만들지 않겠다는 기득권-집권층 카르텔의 결연한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역행적인 움직임이 점점 강화되면서 87년체제의 근간인 민주주의적 거버넌스를 뒤집어엎는 사태—이남주의 표현으로는 ‘점진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엄중한 국면이다.12) 현재 분단체제의 위기는 김대중·노무현 시대에 비교적 원만한 해체작업이 진행되던 것을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와서 중단하고 분단체제를 억지로 복원하려드는 데서 비롯된다. 복원이 불가능한 까닭은 무엇보다 분단체제 고착기와 달리 지금은 동서냉전의 한 축이던 소련이 붕괴했고 그럼에도 미국이 패권국의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이 적어도 한국 경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로 떠오른 상태에서 미국에 ‘올인’하면서 남북대결을 다시 격화시킨다고 해서 무너져가는 분단체제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분단체제가 더욱 위험해질 수는 있으나 그럴수록 무리한 착수로 자칫하면 땜질한 건물처럼 순식간에 붕괴되면서 경제적 파탄이나 전쟁 같은 대재앙을 부를 가능성만 커지고 있다.13)
도래할 새 체제를 일궈나갈 정치적 주체, 이를테면 을의 민주주의의 주체로 나설 사람들은 누구일까. 87년 민주대항쟁의 주역이던 ‘386세대’는 이제 기득권세력의 전형으로 비난받는다. 그들로서는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그만한 이유도 없지 않다. 그들은 민주화 주역이라는 훈장도 있고 자유화의 혜택도 누렸으며 다수가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에 반해 오늘의 청년세대는 저들이 누린 많은 것(연애, 결혼, 인간관계, 내집마련 등)을 포기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사실은 기성세대도 체제의 위기를 피할 수 없는 까닭에 대다수는 곧 중산층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다. 아무튼 뜻있는 소수를 제하고는 기성세대가 자발적으로 을의 민주주의 주체로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청년세대는 어떨까? 손아람은 청년세대의 입장을 대변하는 ‘망국선언문’을 쓰면서 서두에 이런 말을 한다.
이곳을 지옥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의 몫으로 더 나빠질 여지를 남겨두는 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종말을 확신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상상력은 최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등 뒤로 멀어지는 모든 시점을 우리는 그나마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조만간 이 순간을 그리워해야 합니다.14)
십분 공감한다. 만약 지금보다 나쁜 체제가 들어설 경우 우리 사는 이곳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나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은 아니며,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청년이 주체로 나서느냐 아니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며,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바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국호를 망각한 백성들처럼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릅니다”라는 선언은 기성세대에게 청년들이 얼마나 막막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일깨우려는 의도라면 납득되지만 미래의 주체로서의 발언은 아니다. “불공평한 생존”을 바꿔보려는 생각 없이 “공평한 파멸”만을 바라는 존재라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자신이 지은 ‘마음지옥’도 어쩌지 못한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분한(憤恨)을 넘어서는 마음 하나를 더 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청년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가령 지금 이곳의 막다른 상황을 직시하고 분노할지언정 원망과 절망과 무기력에 잡혀 살지는 않는 이들,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기 몫의 힘을 보태려는 이들이 많다. 청년들뿐 아니라 다양한 세대와 계층에서 갑을관계의 변화를 진정으로 열망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될 것이다.
3. 문학의 아토포스와 오늘의 한국문학
어그러진 세상에서 문학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은 문학 독자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는 보도가 들리고 심지어 문학은 죽었다는 단언까지 나도는 오늘날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물음 앞에 정직하게 설 때만이 유의미한 문학 논의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작금의 문학위기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학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전에는 영화와 TV, 인터넷 같은 대중문화 매체의 영향이 거론되었으나 스마트폰 사용과 SNS가 일상화되고 웹소설과 웹툰이라는 새로운 대중문학·문화 장르가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문학은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간다는 위기감이 존재한다. 그런데 정보기술과 매체의 발달이 문학의 종언을 낳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문학은 원래 문자언어에 국한되지 않는 언어예술이다. 구비문학은 차치하더라도 셰익스피어 희곡이나 우리의 판소리도 그 대본이 문자화되어 책으로 묶이기 전에 청중에게 향유되던 예술이다. 『미생』이나 『송곳』 같은 만화도 순수한 언어예술은 아니지만 연극과 희곡처럼 문학적 향유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럴진대 종이책이 아닌 오디오북이나 전자책, 인터넷과 SNS상의 글이나 소리의 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문학의 자격에 하자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매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우리 삶에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고 소중한 것이냐이다.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제도 문학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알다시피 근대 자본주의에서 문학은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고 자본주의가 진전될수록 문학작품은 예술이자 상품이라는 이중성을 띠게 되었다. 문학의 독자 역시 언어예술의 향유자이자 상품의 소비자가 되었다. 예술로서의 문학은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제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문화적 지배방식이 점점 교묘해짐에 따라 문학이 상품화의 미로에 포섭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세계의 문학은 아니라도 한 나라, 한 지역의 문학이 문화상품 같은 오락거리로 추락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사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고 문학 장을 떠난 데는 일본문학이 타락했다는 그 나름의 판단이 깔려 있었다.
코오진이 한국문학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한국문학도 끝났다고 성급하게 판단한 데는 그의 목적론적인 문학관이 한몫했다고 본다. 문학이 국민국가의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듯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변혁하는 일에도 기여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문학은 찾기 힘들었던 것이다. 코오진의 종언론이 일본보다 한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실은 아이러닉하다. 문학평론가 김종철(金鍾哲)처럼 1990년대 이래 문학이 사회변혁의 힘을 상실했다고 판단하는 비평가에게도, 서구 포스트모던담론의 영향하에 1970,80년대 민족문학의 과도한 사회정치성을 비판하던 젊은 비평가들에게도 종언론은 환대받았는데, 서로 다른 이유에서였다. 따지고 보면 희한한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문학주의 비평가들은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믿었음에도 코오진과 김종철처럼 문학의 장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떠난 사람들이 무의미하다고 일축한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탈근대문학)을 새 시대의 문학으로 제시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가령 2000년대 문학의 탈사회적·탈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이광호의 ‘무중력 공간의 서사’라든지 김영찬의 ‘탈내면적 서사’와 ‘무기력한 주체’는 이런 흐름을 대변한다.15)
2000년대 문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애란 박민규 황정은의 소설은 1970,80년대 민중문학과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무중력 공간의 서사’나 ‘무기력한 주체’의 이야기인 것도 아니다. 이들은 탈사회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기존 소설과는 다른 방식과 감각으로 사회성과 정치성을 구현했던 것이다. 랑씨에르(J. Rancière) 문학론을 참조한 진은영(陳恩英)의 글 「감각적인 것의 분배」(『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가 촉발한 ‘문학과 정치’ 논의는 미래파 시 이래의 고민을 담고 있었지만 새로운 소설의 정치성을 해석하는 데도 긴요했다. 그후 백낙청 이장욱 신형철 등이 참여하여 한층 풍부하게 된 ‘문학과 정치’ 논의는 코오진의 종언론에 대응하는 대안담론적 성격을 띠며, 그런 만큼 한국문학의 비평적 활력을 입증해 보였다.
진은영이 최근에 제출한 문학의 ‘아토포스’(atopos, 非場所)론은 ‘문학과 정치’에서 보여준 고민을 심화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문학의 아토포스란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다른 사회적 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16)이다. 진은영의 이 개념은 문학이 이미 정립된 특정 형식이나 공간, 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일 수 있다. 하지만 백낙청(白樂晴)의 지적처럼 이런 작업은 새로운 문학적 공간을 창출하는 일(새로운 토포스)이거나 기존 공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변화된 토포스)이지 그것 자체가 ‘아토포스’(비장소)의 구현은 아니다.17) 이어지는 진은영의 발언 “이렇게 떠도는 공간성, 그리하여 결코 확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의 토포스를 생성하고 파괴하며 휘발시키는 일”(같은 면) 역시 유목적이고 불확정적인 방식이긴 하나 ‘토포스’의 생성과 파괴, 사라짐이지 ‘아토포스’의 출현은 아니다.
오히려 ‘아토포스’ 개념은 진은영이 바디우(A. Badiou)의 말라르메 논의를 논평하면서 “말라르메가 사용하는 춤의 유비를 따라 우리는 시를 시적 테크닉과 시를 쓰는 시인의 경험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출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153~54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인과관계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발현의 순간으로서의 시”(154면)에 주목할 때 더 방불하다. 이런 순수한 출현과 발현의 순간으로서의 시에 대해 백낙청은 “현실의 어떤 ‘토포스’에서 일어나는 사건일지라도 그것을 훌쩍 벗어난 ‘아토포스’를 함축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현실공간의 온갖 인과관계와 필기구의 잡다한 특성을 간직한 채 ‘아토포스’를 창출하는 것인지, 아니면 ‘순수한 출현’이라는 또 하나의 관념으로 시를 단순화하는 것인지는 한층 엄밀한 검토를 요한다”라고 단서를 단다(126면). 백낙청 자신은 “작품이 발현될 때 드러나며 이룩되는 아토포스는 그냥 ‘없음(無)’도 아니려니와 ‘있음(有)’의 영역—플라톤의 ‘이데아’나 그 어떤 초월적 존재를 포함해서—도 아니라는 사유방식”(127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동아시아의 도(道)라는 ‘아토포스’의 차원에서 재조명한다.
‘문학과 정치’의 논의에 이어 또 한번 진은영과 백낙청 사이에 종요로운 대화가 이어진 느낌인데, 거론된 사안들을 상론하지 못하고 간단한 논평만 덧붙인다. 진은영의 ‘아토포스’론은 새로운 문학적 토포스를 창출하거나 기존의 문학적 토포스를 변화시키거나 파괴할 때 생겨나는 생동감, 활력, 정동(情動, affect)에 주목하는 한편 시란 시인의 테크닉이나 경험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발현이며, 더욱이 “시가 쓰여진 대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이와의 감응 속에서 사건으로서 발현된다는 점”(154면)을 강조한다. 이런 아방가르드적인 태도 때문인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구체적인 시나 소설의 면면에 대해서는 섬세하게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창작과 독서, 시 낭독과 청취 같은 문학 행위의 토포스가 어디냐에 상관없이 예술언어로서의 작품이 진실의 빛을 발할 때 문학의 아토포스가 이룩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영국의 소설가 D. H. 로런스의 “예술언어가 유일한 진실이다. 예술가는 대개가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지만 그의 예술은 그것이 예술인 한은 그날의 진실을 일러줄 것이다. 영원한 진리 따윈 소용없다. 진리는 그날그날로 살아 있는 것이다”18)라는 발언은 문학의 아토포스와 관련해서도 새겨볼 만하다. 예술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그날의 진실을 빼고 문학의 아토포스를 논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것이다. 실은 우리 마음의 거처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아토포스이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마음에 작용하는데, 문학이 그날의 진실을 일러줄 때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토포스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이 그날의 세상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꿔보려는 마음을 내게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자면 마음이 돈의 노예가 아니라야 하고 다른 사람과 세상, 말 그대로 우주만물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근자에, 특히 표절과 문학권력 사태 이후 한국문학은 죽었다고 단언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문학의 아토포스를 실감케 하는 작품은 계속 태어나고 있다. 한국문학은 살아 있는 것이다.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서 앞의 논의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최근작 몇편을 살펴보고자 한다. 백무산의 최근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2015)는 글자 그대로 ‘그날의 진실’을 일러줌으로써 문학의 아토포스를 실감케 한다.19) 시인은 시대현실과 체제 같은 큰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지만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살아 있는 몸으로 겪은 바를 표현하기에 관념적인 발상이 틈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특히 『햄릿』처럼 시대의 문제를 주체의 속내로부터 끄집어내는 점이 미덥다. 햄릿의 독백이 ‘시대’만큼이나 어그러지고 분열된 그의 ‘내면’을, 벼랑 끝에 선 그의 ‘마음’을 쏟아내듯, 백무산의 「패닉」의 화자는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않고 자신의 황폐한 마음을 토로한다.
어쩌다 한밤중 산길에서
올려다본 밤하늘
만져질 듯한 별들이 패닉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우주
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
나는 드러난다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죽음이 갯벌처럼 어둡게 찾아들고
사랑이 불같이 스며들고
모든 질서를 뒤엎고 재앙의 붉은 피가 스며들 때
나는 패닉에 열광한다
—「패닉」 16면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의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가 폐허가 되었는가? 하고 묻게 된다. 즉각 떠오르는 것은 단원고 학생 250명을 포함한 승객 304명을 수장시킨 세월호사건이다. 시집 제목의 ‘인양’과 인용시의 마지막 문장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는 주장이 진실과 함께 수장된 세월호의 인양 책임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이 시집 곳곳에서 출현하는 ‘폐허’는 세월호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시집의 ‘폐허’는 『햄릿』의 ‘어그러짐’과 맞먹는 의미, 즉 한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의 역할을 한다. 위에 인용한 3연에도 세상의 파국을 맞이하는 듯한 묵시록적 분위기가 스며 있다.
‘폐허’와 더불어 ‘패닉(panic)’이라는 말이 화자 ‘나’의 특이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주효하다. 가령 그것의 역어인 ‘공황(恐慌)’이나 ‘공포’를 사용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자리에 ‘패닉’을 넣으니 그럴 듯해진다. ‘패닉’이 우리 당대의 언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말이 목신(牧神) 판(Pan)에게서 유래되었음을 감안하면 단순한 공포라기보다 경이로움이 깃들어 있는 공포, 그리고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광란의 무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요컨대 파국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는 근대적 합리성을 초과하는 직관적인 열광에 가깝다. 그렇기에 ‘나’는 세상의 파국을 두려워하는지 반기는지 애매모호하다. 이 애매모호함은 나와 세상과의 관계에도 스며 있다. 1,2연에서는 우주의 풍경에 비친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패닉처럼 드러나지만, 3연에 이르러서는 내가 폐허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폐허로 변하는 광경에 열광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의심마저 깃들어 있다. 사실 시의 마지막 문장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에서 ‘그 폐허’에는 세상의 파국을 지켜보면서 패닉에 열광하는 병적인 측면까지 포함될 듯하다.
백무산은 여기서 우리가 사는 부도덕한 세상에 대한 윤리적이고 당위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상의 가능한 파국 앞에 서서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이 점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설마 망하지는 않으리라는 가정하에 그 부정적인 면을 세련된 방식으로 꼬집거나 세상이 망했다고 큰소리로 개탄하는 대다수 비판적 지식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자본주의의 변화상에 대한 통찰로는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알겠으나」도 빼놓을 수 없다. 가령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의미를 아이러닉하게 진술하는 구절이 그렇다.
정규직 노예가 되고 싶다 비정규직 노예를 철폐하라
불안정 노예를 정규 노예화하라고 외쳐야 한다
인간에게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
자유를 팔면 자유보다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자유를 반납하면 더 풍족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들판의 자유는 패배자의 위안일 뿐이라고 믿는다
새로 구입한 것이 자유인지 아닌지 그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철창을 걷어낸 후에도 들판으로 갈 수 없다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알겠으나」 종결부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에게 자유란 중세의 신분적 족쇄에서 풀려남을 뜻하는 동시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 즉 임금노예가 되는 것임이 은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노동자에게 진정한 자유란 무엇보다 임금노예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자유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우리 시대의 ‘믿음’에 따르면 자유는 “더 풍족한 삶”을 누리려고 스스로 반납할 수 있는 어떤 사소한 권리 같은 것이다. 이런 믿음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철폐와 정규직 전환’이라는 구호조차 “불안정 노예를 정규 노예화하라”는 임금노예들의 이권투쟁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란 자본이 노동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한때 노동자들의 이념적 무기였던 “들판의 자유”를 “패배자들의 위안”으로 믿게 만든 결과 생겨난 것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이념마저 무너뜨렸으니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동안 위태롭게 삐걱거리던 자본주의가 한결 단단해졌다기보다는 뭔가 자신을 초과하여 다른 무엇으로 전화한 느낌마저 든다. 이를테면 기왕의 자본주의가 노동과 자본의 팽팽한 대립을 축으로 삼은 데 비해 이 시에서 나타나는 체제는 양자의 대립이 무너지고 자본의 지배가 아무런 이념적 제동 없이 전일적으로 이뤄지는 상태라고 할까.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더 나쁜 미래의 맛을 느끼게 한다.20)
백무산의 이번 시집에 희망의 전언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비관이나 절망에 빠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희망도 절망도 여읜 채 자신과 세계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소중하게 지켜온 삶의 원칙들이 파괴되고 있음을 정직하고 치열하게 말할 뿐이다. 폐허 같은 시대와 자신에 대한 증언 같기도 한 시들이 밝게 보일 리 없지만, 「풀의 투쟁」이나 「완전연소의 꿈」에서처럼 인간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 인간의 영역보다 더 큰 대지와 자연에 대한 그의 폭넓은 사유와 믿음이 감지되면서 어둡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노동자의 관점이지만 편협한 노동자주의에서 벗어나 육식, 성소수자, 동물과의 관계 등 근대문명 차원의 쟁점에 대해서도 통념을 깨뜨리는 성찰을 보여준다.
최근 우리 문학이 노동하는 주체를 빈번하게 등장시키는 것은 노동을 삶의 핵심적인 요소로 재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여겨진다. 특히 백무산과 더불어 1980년대, 90년대에 노동문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정화진과 이인휘가 오랜 침묵을 깨고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한 것이 반갑다. 정화진의 「두리번거리다」(『황해문화』 2015년 가을호)와 이인휘의 「공장의 불빛」(『실천문학』 2015년 봄호)은 둘 다 노동자가 주인공인 소설이지만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공장의 불빛」이 노동현장에 집중하는 전형적인 노동소설이라면 「두리번거리다」는 노동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주인공 남녀의 일상적 삶과 서로 간의 관계가 주축을 이룬다.
「두리번거리다」의 미덕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화를 통해 자본에 매이지 않을 때의 노동 본연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데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을 체험한 남자와, 대기업 인턴생활과 실직(알바생활)을 반복해온 여자가 이웃으로 만나 고장난 변기를 고치는 일을 함께 해냄으로써 둘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소설의 골자다. 고장의 원인인 낡은 고무패킹을 껌으로 땜질함으로써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우여곡절의 과정이 재미있으면서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고장난 변기를 고치는 일도 노동인데 직장에서의 노동과 달리 즐겁고 훈훈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순간 노동은 그것의 시장가격과 상관없이 즐겁고 유용한 활동, 약간의 인내심과 창의력을 발휘하면 하나의 성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남녀의 됨됨이나 그들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제시되고 있긴 하나 갈등의 여지없이 너무 원만하게 그려져 이상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아쉽다.
「공장의 불빛」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작품이다. 한 합판공장의 살벌한 노동현장과 비정한 노사관계, 노동자끼리의 갈등과 연대감 등이 박진감있게 그려져 있어 우리 시대의 「객지」 가운데 하나라고 느껴진다. 합판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노동과정, 사장이 노동자를 부려먹는 방식, 그 과정에서 쫓겨난 한 고참 노동자의 자살, 노동과 종교의 연계 등을 적나라하게 제시함으로써 오늘의 노동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강도 높은 노동현장의 분위기와 힘의 논리를 실감케 하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라면, 인물들이 다소 유형화되어 있고 소설의 강렬한 남성적 언어가 새로운 세대의 감각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두 작품 모두 아쉬운 대목이 없지 않지만 목적론적 문학관에서 벗어나 달라진 노동현실을 직시하려고 나름의 방식으로 분투하고 있다는 점은 사주고 싶다.
김애란의 『비행운』(문학과지성사 2012) 이후 젊은 세대의 문학에서도 삶의 핵심 국면으로서의 노동문제가 꾸준히 다뤄지고 있다. 그중에 이미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은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외에도 『센티멘털도 하루이틀』(2014)을 출간한 김금희(金錦姬)가 최근에 발표한 몇몇 소설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문학동네』 2015년 겨울호)에는 전통 부엌가구 회사의 과장이었다가 ‘직능계발부’로 발령받아 생산직 교육을 받게 되는 특이한 인물이 나온다. 모과장은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난 사람이었고 여러번 물의를 빚어 부하 직원으로부터 ‘비정상적인 분’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그가 보통의 직장인과 다른 점은 공원(工員)으로 입사해서 본사의 관리직으로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나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다들 하청업체를 ‘족치러’ 나간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그는 그냥 망치질을 하고 싶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틈틈이 망치를 두드리지 않으면, 머릿속이 텅텅 울리도록 충격을 가하지 않으면 온종일 무언가가 쇳물처럼 끓어올랐다. 삶의 활력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하고 무기력해서 너무 무기력해서 도리어 어떤 형태의 에너지로 변해버린 것 같기도 했다. (207면)
모과장은 ‘(육체)노동 중독’인가? 아니면 그냥 ‘또라이’인가? 어느 쪽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원래 노동이란 ‘삶의 활력’이 구현되는 한 방식일 가능성이다. 말하자면 모과장이 ‘또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육체노동을 기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노동해야 살맛이 나는 모과장을 모나게 보이게 한 것일 수 있다. 가령 사장으로부터 ‘직능계발부’를 맡아달라는, 즉 생산직 교육을 명분으로 관리직을 해고하는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모과장은 “저는 그저 망치질이 좋습니다만”이라고 답하지만 사장은 “에헤-모과장, 망치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라고 일축한다(226~27면).
모과장의 삶을 구성하는 또 하나 특이한 면은 유기묘의 주인을 찾아주는 일이다. 그가 그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우울감과 알코올에 젖어 자살하기로 결심한 날 길고양이 한마리가 마당의 고무 ‘다라이’에 낳은 새끼들 때문에 “며칠을 더 살았고 나중에는 그냥 자기 자신을 고양이에게 기탁했”(223면)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고양이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는 이 집에서 그저 고양이 옆에 있는 ‘무언가’였고 그 삶에 만족했다.”(222면) 사실 그는 사람들보다 고양이에게 더 가까운 사람인지 몰랐다. 집집마다 나는 특유의 냄새 때문에 ‘집멀미’를 하게 되는데도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요청에 응하는 것은 “십이만원의 일당이나 의뢰인들의 하소연이 아니라 순전히 집 나간 고양이들이 겪을 고통 때문”(210면)이었다. 심지어 그는 생선을 좋아하고 특히 꽁치조림을 반겼는데 식당 주인 여자가 빈 꽁치 접시를 채워주면 “마치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딴청을 피우다가 주인이 텔레비전이나 다른 손님에게 시선을 팔 때 그 검푸른 몸체를 재빨리 파먹곤 했다.”(211면) 이처럼 하는 짓까지 고양이를 닮아가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는 들뢰즈(G. Deleuze) 식의 ‘고양이 되기’를 수행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 점에서 ‘직능계발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민에 빠지는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가족이 데려가는가. 그에게는 없는 가족이 그 사람을 데려가 나쁘지 않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인가. 그 사람들에게는 아마 고양이는 없을 테지만 고양이는 사실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쫓기지는 않는가,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227면)
그는 해고된 회사 동료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유기묘 신세와의 유비를 통해서 사람들의 절박한 처지를 상상한다. 마치 고양이와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들과 접속하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서 제기되는 핵심적인 물음은 노동문제에서뿐 아니라 동물과의 관계에서 모과장이 ‘비정상적’인가 아니면 오히려 그를 모나게 보이게 하는 다른 사람들이 ‘비정상적’인가이다. 이 물음에 딱 부러지게 답하기 힘들다. 양쪽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나 할까. 모과장은 주위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을뿐더러 타인과 유의미한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포기한 사람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 노동과 고양이에 대한 태도에서 보듯 그는 기본적으로 돈에 매인 사람이 아니며 돈의 가치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삶에 ‘부적응자’인 면이 있다. 그는 이미 절반은 고양이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이미 절반은 자본주의 질서 바깥의 삶—‘대안적인 삶’이라는 것과 질감은 다르지만—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를 연상케 하는 것은 존재적인 단절과 폐쇄성을 지니면서도 자본주의적 가치체계를 거부하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21세기문학』 2015년 가을호)는 주인공 남녀의 복잡 미묘한 변화를 섬세한 언어로 포착하고 있다. 이 소설에도 모과장 못지않게 특이한 양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의 중심에는 필용과 양희의 연애관계, 즉 사랑이 놓이지만, 그 사랑이 어긋나고 교차하는 지점에는 예술(연극)과 노동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 예술, 노동의 세 요소가 빚어내는 복합적인 움직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소설은 앞서의 작품과 비슷하게 주인공 필용이 “문책을 받아 영업팀장에서 시설관리직으로 밀려나는”(45면), 사실상의 권고사직을 뜻하는 좌천에서 시작된다. 필용은 버티기로 했지만 충격이 컸고, 직장 동료들의 이목을 피해 종로의 맥도날드에서 점심식사를 하다가 맞은편 건물에서 16년 전 대학시절 과후배 양희가 대본을 쓴 관객참여형 부조리 연극을 알리는 현수막을 보게 되는 순간 “필용은 자기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왜 종로의 맥도날드가 떠올랐는지 깨달았다. (…) 필용이 하필이면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것은 바로 양희와 재회하기 위해서였다.”(50면)
사실 그때 어긋났던 둘의 사랑이 필용의 좌천을 계기로 지금 다시 불려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업팀에서 시설관리직으로 오면서 필용은 서서히 표정이 바뀐다. “무엇보다 양 입가를 팽팽하게 견인하고 있던 긴장이 사라졌다. 그 긴장은 언제라도 무슨 존칭, 무슨 웃음, 무슨 헛기침, 무슨 지시, 무슨 권유, 무슨 답변 등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당분간은 필요 없었다. 10년 넘게 얼굴을 차지하고 있던 긴장이 사라지자 필용의 얼굴은 말개지는 게 어딘가 젊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53면) 필용의 이런 변화는 그간 재촉받았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중독기가 현저히 빠졌음을 암시한다.
소설은 필용과 양희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들의 이런 존재적인 변화를 추적한다. 16년 전의 그들은 서로 성격이 전혀 달랐다. 그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55면)과 그에 대한 필용의 반응이다. 같은 어학원을 다니던 시절 함께 종로 맥도날드에서 필용이 떠벌리는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양희는 불쑥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하고 고백한다. 양희는 그 말을 “감정의 고저 없이, 2,3천원을 쥐어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톤”으로 하는 것이다. 당황한 필용은 웃으면서 묻는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요?”
양희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56면)
사랑을 끝내는 방식도 느닷없기는 마찬가지다.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햄버거를 먹다가 양희가 “깜박 잊을 뻔했다는 투로, 아, 선배 나 안해요, 사랑, 한 것”이다. “안해?”/“네.”/“왜?”/“없어졌어요.”/필용은 믿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표정 없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는데 말이 되는가?/“없어? 아예?”/“없어요.”/“없는 게 아니라 전만큼은 아니게 시들한 거지. 야, 그게 어떻게 그렇게 단박에 사라지냐?”(64~65면) 이렇게 이어지는 필용과 양희의 대화는 서로 성격이 다른 사람들 간의 대화일뿐더러 마치 다른 세대, 다른 시대 사람들 간의 대화로도 느껴진다. 묘하게도 이 때문에 둘의 대화는 선문답처럼 들린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간의 불가피한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효과일 텐데, 사실 사랑을 보는 두 사람의 현격한 차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생각과 감각의 차이와 맞닿아 있다.
필용은 우리 시대를 사는 평범한 얼굴의 인물이었지만 양희를 만나면서 그 체제의 바깥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 양희는 예전에 자신이 대본을 썼던 부조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예술가가 되었다. 16년 전에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당연시했던 필용은 좌천을 계기로 상당히 달라졌다. 그에게도 이 체제의 방식과 다른 일면이 내부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필용은 양희의 연극을 수차례 관람하고 마침내 그 무대에 참여하는 경험을 통해 다른 방식의 삶과 예술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75~76면)
문학뿐 아니라 사랑을 포함해서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인 일종의 아토포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이 소설은 이런 삶의 진실을 섬세하고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써 스스로가 아토포스의 경지임을 입증한다.
4. 글을 맺으며
문학은 세가지 세상과 관련된다. ‘이 세상’과 ‘다음 세상’, ‘다른 세상’이 그것이다. 이 세 세상은 독자적이되 중첩되어 있기도 해서 그 셋의 복합적인 관계를 동시에 사유하는 종합적인 예술이 더없이 소중하다. 예컨대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그 속에 좋은 미래와 나쁜 미래의 맹아들이 들어와 있다. ‘이 세상’의 개체와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자면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작업을 통해 이미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잠재적인 ‘다음 세상’의 성격을 감별해야 한다. 이 작업은 대단히 섬세하고 지적인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눈길을 끄는 신예작가들이 적지 않은데, 특히 김엄지 김종옥 최정화, 그리고 최근 국내에서 첫 소설집을 펴낸 중국교포 작가 금희의 소설이 기대된다.
체제 전환기를 맞아 장편소설에 관한 비평과 이론 역시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간단한 논평을 달고자 한다. 흔히 『창작과비평』의 비평가들이 장편소설 ‘대망(大望)’론을 펼쳐왔다는 전제를 깔고 논쟁이 이뤄지는데, 그것은 정확한 파악이 아니다. 필자가 초지일관 주장한 것은 장편소설이 이제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 말고 그 미래를 열어놓고 지켜보자는 것이다. 장편소설의 가능성에 주목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성과가 기대에 못 미쳤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그간 문예지나 웹진의 연재 공간을 통해 뛰어난 장편소설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한국문학이 이만한 힘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 또한 한때 주목할 만한 장편소설론을 개진했다가 디지털 인문학과 진화론적 문학관으로 전환함으로써 장편소설 불가능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만 편식할 게 아니라 다양한 장편소설론으로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21)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무너져가고 아직 미정인 다음 체제가 형성되는 전환기에 있다. 그와 연동된 한반도의 분단체제 역시 슬기로운 극복이냐 재앙적인 파국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들어서 있다. 작금의 세상은 향후 수십년 동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한 사람의 작은 문학적·사회적 실천이 실로 중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문학은 자명하지 않고 미래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 문학의 열린 길을 용감하게 갈 때만이 지금은 가려진 더 나은 세상을 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런 용감한 삶은 그 자체로 더 나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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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 E. Cevasco, “Roberto Schwarz’s ‘Two Girls’ and Other Essays,” Historical Materialism 22:1 (2014) 162면 참조.
2) Wolfgang Streeck, “How Will Capitalism End?” New Left Review 87, May-June 2014, 62~64면 참조. 그가 열거한 병폐는 “성장의 쇠퇴, 과두제, 공공영역의 궁핍화, 부패, 전지구적 무정부상태”이다.
3) I. Wallerstein, ed. The World Is Out of Joint: World-Historical Interpretations of Continuing Polarizations, Paradigm Publishers 2014, 168면.
4)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성백용 옮김, 창비 2014)의 2장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의 논의와 5장 크레이크 캘훈(Craig Calhoun)의 논의 참조.
5) 삐께띠는 빈부격차의 해결책으로 세계적인 부자들에게 누진과세 하는 ‘전지구적인 자본세’를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의 연구가 일러주는 바는 결국 앞으로 자본주의가 점점 더 심각한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리라는 것이다. 『옵저버』지 온라인판에 실린 앤드루 허쉬(Andrew Hussey)의 삐께띠 인터뷰 기사, “Occupy was right: capitalism has failed the world” 참조(http://www.theguardian.com/books/2014/apr/13/occupy-right-capitalism-failed-world-french-economist-thomas-piketty).
6) 한 보도자료에서 국제구호단체 옥스팜(Oxfam)은 “작년 다보스포럼에 앞서 곧 세계 1%의 부자들이 나머지 인구를 합친 것보다 더욱 많은 부를 가질 것이라 예상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상보다 빨리 2015년에 발생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http://www.oxfam.or.kr/content/62 참조.
7) “남은 시간은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6.2.2(http://www.huffingtonpost.kr/zeitgeist-korea/story_b_9108486.html).
8) 장덕진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중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치했다기보다는 ‘불개입’의 입장을 선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라고 주장하지만 기간제법과 파견법이 포함된 ‘노동개혁 5법’을 밀어붙이는 것은 노동시장에 적극 개입해서 ‘이중화’ 체제를 더 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세계화와 탈산업 시대에 사회의 내부자와 외부자가 구분되는 현상을 지칭하는 ‘이중화’라는 용어도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을 그저 세계적인 현상의 하나쯤으로 보이게 하는 문제가 있다.
9) 이와 관련된 논의로는 강준만 『갑과 을의 나라』(인물과사상사 2013) 참조.
10)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웹진 『민연』 2015년 5월호(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discourseList.minyeon?selectArticle_id=587).
11) 앞의 글에서 재인용.
12)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본호의 이남주 글 「수구의 ‘롤백 전략’과 시민사회의 ‘대전환’ 기획」 참조.
13) 김선주(金善珠)는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발상을 빌려 “2044년. 그때도 분단체제일까. 분단 100년을 맞게 되는 것일까. 북은 핵을, 남은 사드를 장착하고 6자회담 4자회담을 놓고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는 게 여전할까. 무겁고 무섭다”라고 한반도의 가능한 나쁜 미래를 상상한다(김선주 칼럼 「‘응답하라 2016’」, 한겨레 2016.2.3). 그때도 분단체제라면 그건 ‘무겁고 무서운’ 상황이겠지만, 그때는 십중팔구 분단체제가 아닐 것이다.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체제를 만들었든가 아니면 분단체제보다 더 나쁜, 그 무거움과 무서움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4) 「손아람 작가 신년 특별기고 ‘망국(望國)선언문’」, 경향신문 2016.1.1.
15) 코오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강경석 「비평의 로도스는 어디인가: ‘근대문학 종언론’에서 ‘장편소설 논쟁’까지」, 『문학들』 2015년 여름호 및 졸고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장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프레임”,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 참조.
16)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80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17)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 그리고 문학의 ‘도’와 ‘덕’」 2장 ‘이중과제론과 문학의 거처’,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참조. 앞으로 이 글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18) D. H. Lawrence,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Ed. E. Greenspan, L. Vasey and J. Worthen, Cambridge UP 2003, 14면.
19) 백무산의 이번 시집에 대한 논의로는 백낙청, 앞의 글 135~40면 참조. 그전에 이미 필자도 페이스북에서 이 시집을 거론—「패닉」(2015년 10월 11일),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가듯이」(10월 6일)—한 바 있다.
20) ‘이미 와 있는 미래’라는 발상과 관련된 논의로는 황정아 「‘이미 와 있는 미래’의 소설적 주체들」, 『창작과비평』 2012년 겨울호 참조.
21) 황정아 엮음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창비 2015) 및 호베르뚜 슈바르스의 소설론을 검토한 졸고 「주변에서 중심의 형식을 성찰하다」, 『안과밖』 2015년 하반기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