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헤이즐 스미스 『장마당과 선군정치』, 창비 2017
‘북한적 사회구성’의 성격논쟁을 제안한다
구갑우 具甲祐
북한대학원대 교수 kwkoo@kyungnam.ac.kr
북한은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특이하지만 불가사의한 곳은 아니다.”(64면) 영국의 북한연구자 헤이즐 스미스(Hazel Smith)가 『장마당과 선군정치』(North Korea: Markets and Military Rule, 2015, 김재오 옮김)에서 말하고픈 핵심 한줄이다. 당연한 진술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낯설게 느낀다. 2000년 헤이즐 스미스가 『국제문제』(International Affairs)라는 학술지에서 북한이 미치지도 나쁘지도 않은 행위자라 말했을 때도, 오히려 미침과 나쁨이 같은 것일 수 없음에도 그 모순적 인식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서구사회가 비정상적임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문화적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국가의 대외행동은 서로 닮아간다는 주류 국제정치이론이 가정하듯 북한도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합리적 행위자이지만 경제적 곤궁 때문에 애처로운 행위자로 보아야 한다는 헤이즐 스미스의 제안도 북한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을 내장하고 있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 일부를 포함하여 서구 일반이 북한을 합리적 행위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합심리를 헤이즐 스미스가 비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북한의 기이함이라는 신화를 영속화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곳은 다름 아닌 북한 정권”(40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마당과 선군정치』의 한국어판 서문 첫머리에 이 책이 “‘과학과 학문의 관습적 방법으로는 북한을 알 수 없으며, 이해하기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에 대한 도전”이라고 쓴 것도 이해가 간다. 북한의 정치경제가 비교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북한이라는 국가의 행동 또한 여느 국가의 행동처럼 설명 가능하다는 의미다. 헤이즐 스미스가 보편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사회과학방법론이 북한에 적용 가능하다고 과도하게 느껴질 만큼 언급하는 이유도, 유례가 없는 비정상적 악마로 취급받고 있는 북한이라는 연구대상이 다른 국가와 다르지 않게 연구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책의 1부는 그 주장을 누구보다도 설득력 있게 실증하고 있다. 북한은 “위험하고 비이성적인 무력국가”가 아니다. 그 이유로 저자는 한국이 2009년 현재 “북한의 거의 네배 정도의 방위비”(45면)를 지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북한의 핵개발이 저비용 고효율의 억지수단을 개발하려는 시도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북한이 “주민들을 굶겨 죽인다”는 “통념”에 대해서는, 2012년 기준으로 북한과 인도, 인도네시아를 비교할 때 아동 영양실조 수치가 낮다는 자료를 제시하며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민주적 정부가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누구나 불편해할 수 있는 주장을 해야 할 것”(57면)이라고 반박한다. 마약밀매를 하고 위조지폐를 찍고 있는 “북한은 범죄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미국의 연구자들 스스로 “미국 법정에서 증거로 조금이라도 고려될 수 있는 어떤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제시한다(58면). “북한 주민이 나, 너와 다르다”는 편견에 대해서는 북한 주민이 한국의 DVD와 CD뿐 아니라 외국 매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하려 한다.
그러나 “민족정체성”을 다룬 1부 2장과 “김일성주의의 흥망”을 다룬 2부를 읽고 있노라면 『장마당과 선군정치』가 보편적인 사회과학방법론을 적용한 연구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한반도 밖의 북한연구자들이 종종 보여주듯, 북한에 대해 모든 것을 쓸 수 있다는, 이른바 한반도 5천년의 역사를 수십쪽으로 정리해도 괜찮다는, 지적 오만이라는 또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을 확인하게 된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 이후 영국의 변화를 보기 위해 켈트족의 역사를 더듬는 형국이다. 북한이라는 연구대상에 대해 무엇이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과잉 자의식이 낳은 비극이다. 예를 들어, 헤이즐 스미스는 현대의 한반도가 “공통의 역사·문화·건국신화·언어·공간으로 이루어진 독특하고 특별한 문화적 유산에서 생겨나는 특징적인 종족적 정체성”(65면)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사실 북한은 국가건설 초기 공식적으로는 민족이 자본주의적 현상이라는 스딸린적 정의를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조선통사』를 출간하면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김일성이 1964년 “언어학자들과 한 담화”에서 이른바 ‘핏줄’과 언어의 공동체로 민족을 정의했다. 이에 따라 현재의 북한은 헤이즐 스미스의 지적처럼 종족적 정체성에 기반한 민족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왜 스딸린적 민족 개념이 혈통적 민족 개념으로 바뀌었는지를 물어야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른바 사회과학적 질문이 될 수 있다. 북한현대사도 ‘우리 식’과 김일성주의라는 미리 주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으로 기술된다. 북한이 갈 수 있었던 다양한 길이 역사적 사실로부터 제시되지 않고 북한이 만든 역사를 수용할 뿐이다. 즉 북한이 왜 고전적 사회주의체제에 도달한 이후 그 위에 수령제 같은 독특한 국가형태를 축조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2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3부 “시장화와 군사통치”는 북한적 사회구성의 또다른 전환을 포착하는 유용한 기술을 담고 있다. 헤이즐 스미스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이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 불렀던 경제위기를 거치며, 북한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경험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이 이행의 동력은 1990년대 중반 경제위기 속에서 생존의 방법을 찾던 북한 주민, 특히 그 가운데 여성들이 선택한 시장화였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상업의 한 형태로 이론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사실상 비법화·불법화되어 있던 시장을 제도화하는 방향이었다. 물론 헤이즐 스미스도 북한에서는 시장화의 전면화 속에서도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노동력의 상품화가 제한적 현상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헤이즐 스미스는 북한의 벼락부자(원문 nouveau riche, 북한말 ‘돈주’)를 실천적·도덕적 측면에서의 자본가로 보려 한다. 노동력 상품화 없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의 탄생인 셈이다. 더 난국은 돈주와 더불어 그가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남성성의 현현인 계획경제의 주체이자 (헤이즐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정치적 연줄로 구성된 깡패자본주의를 만들어가는 행위자인 북한의 당과 국가 또한 시장화에서 이득을 보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거대한 전환』의 저자 폴라니(K. Polanyi)가 ‘악마의 맷돌’에 비유한 대로 시장은 북한에서 양극화와 복지의 시장화를 초래하고 있음을 『장마당과 선군정치』는 실증한다.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공존이 북한적 사회구성의 토대라면, 그 상부구조는 유격대국가의 극단적 형태인 선군정치(先軍政治)라는 기묘한 조합이다. 더 큰 난국은 선군정치를 했던 작은 안보국가가, 김정은정권이 등장하면서 고전적 사회주의체제의 당-국가로 회귀하고 있기는 하지만, 핵국가를 지향하는 내적 세력균형정책의 극단으로 현존하는 핵비확산체제를 부정하며 그 체제를 설계한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마당과 선군정치』는 우리에게 시장화로 재구성되고 있는 북한의 생산양식의 접합 및 그 토대와 연관되어 있는 극단적인 안보국가화를 유기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회구성적 개념화의 필요를 제기한다. 북한적 사회구성이 어떤 이행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북한에서 폴라니적 의미로 시장의 전횡에 맞서는 사회의 형성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헤이즐 스미스는, 패권국가 미국이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을 하는, “북한 지도부와의 불편한 타협이 수반”되는 국제적 길 하나와, 변화의 주역인 북한주민 스스로가 주체의 감옥을 벗어나 자율적 행위자가 되는 또다른 길을 제시하려 한다. 다른 하나는, 헤이즐 스미스도 지적하는 것처럼, 남한과의 분리를 목적으로 하는 “김일성민족”에 기초한 “북한 민족주의”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설계하고자 할 때도, 북한적 사회구성의 개념화는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