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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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어디에서 쏟아진 빛들일까

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우울을 애도하다」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2031환하다. 시집 곳곳에서 빛이 터져나온다. 어디로부터 온 빛인가. 우선 눈이 가는 것은 시편 여기저기에 피어 있는 꽃들이다. 『와온 바다』(창비 2012)에는 이름도 색도 가지각색인 꽃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꽃’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해서 저절로 색이 피어날 리는 없는 법. 오래된 관용구처럼 ‘장미’라는 이름은 전혀 향기롭지도 빛깔을 띠지도 않는다. 그런데, 곽재구(郭在九) 시인이 피운 꽃은 다르다. 그것은 고요한 가운데 빛을 뿜는다. 마치 청각으로 표출될 기운이 모조리 색으로 화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보라색 눈물을 뒤집어쓴 한그루 꽃나무가 햇살에 드러난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와온 가는 길」). 이 눈물은 소리를 갖는 대신 색으로 화했다. 감출 수 없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드러나기 마련인 것일까. 곽재구의 꽃들은 감출 수 없는 생기가 언어의 장벽을 깨며 밀고 올라오는 순간 피어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단지 관습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자연물이 아니라 어떤 폭발의 흔적이다. 내면의 요동이 바깥에서 개화한 순간이며,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내던진 해방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무」에서 시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인간인 당신이 나뭇잎 속으로 들어와 춤을 출 때”라고 적었다. 이 춤추는 나뭇잎도 꽃이다. 그것이 어찌 환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빛의 발현지로 판단되는 것은 또 있다. 『와온 바다』는 허기로 풍성한 시집이다. 무언가를 먹는 정황이 자주 펼쳐지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의 순간을 부른다. “옥수수”나 “참외” 혹은 “토하젓” 등등. 시에 등장하는 먹거리들이 모두 소박해서일까, 아니면 시집 중간중간에 배곯던 유년의 기억이(「무화과」 「수선화」)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까. 가난한 이의 식량을 떠올리게 하는 시어들이 고립된 허허로움 같은 것을 우리의 눈앞에 짓는다. 해서 그 시어들이 놓인 자리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함께한다. 약간의 연민이나 동정이 개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허기의 순도를 낮출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점은 그 시어들이 자신을 입에 담고 오물거리는 자에게 가난과 허기를 되새기게 한다는 사실이다. 시집을 읽은 독자들은 물질적 풍요가 결코 충족시켜줄 수 없는 허허로운 기운이 어디선가 불현듯 얼굴을 내미는 순간을 목격할 것이다. 청빈(淸貧)이라고 했던가. 맑고 곧은 빛의 가난이 우리 안의 텅 빈 자리를 비춘다는 말이다. 시인이 「약천리 허상갑씨가 굴비 식사를 하고 난 뒤」에서 역사로부터 소외된 이가 역사의 주인 행세를 하는 이들은 결코 취할 수 없는 위엄있는 태도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려넣을 수 있었던 연유도 저 푸른빛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꽃과 허기만이 빛을 내는 것은 아니다. 이 시집에서 쏟아지는 빛의 중심에는 ‘인간’이 놓여 있다. 즉 생각을 하고 사랑을 나누며, 무언가를 제 속에 들이고, 또 무언가를 찾아 제 밖으로 떠도는 인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시인은 환멸과 절망의 어조를 떨쳐내고 그 모습을 기록한다. 가령 「반얀나무」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이날 밤 나는 사람이 나무를/사람이 밤 열차의 쓸쓸한 뿌리를/사람이 먼 밤하늘의 별과 별들의 노래를/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그 노인의 빛나는 뿌리를/누운 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런 기록이 뭐 별난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꽤 별난 일이다. 한동안 우리의 시 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과 인간적인 사랑에 믿음을 저버린 듯한 시들이 줄을 이었다.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속물적이라거나 자기애에 가득 차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취급받았고, 많은 시들이 안정적인 인간의 음성보다는 과잉적인 괴물의 목소리를 찾아 헤맸다.

곽재구는 빛을 잃은 ‘인간’이라는 말이 다시 제 안에 남은 빛을 길어올릴 수 있도록 맥락을 빚었다. ‘생각하다’라는 서술어를 반복하며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또한 그것이 자기의 부족을 스스로 깨치는 순간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인간의 사랑이 거느린 술어가 끊임없이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시작하는 움직임에 가깝다는 것을 말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을 자기 바깥으로 내던질 수 있는 해방의 능력이 여전히 인간이란 단어에 깃들어 있음을, 또한 인간이란 말에는 자신을 되비추고 자신의 인간됨을 유지할 수 있는 근원적 허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밝혔다. 『와온 바다』에서 인간은 저 자신의 오래되고 새로운 역사를 다시 만난다. 이 시집의 한 구절, “인간은/해와 달이 빚은 알이다”는 인간이 아직 덜 깨어난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송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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