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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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민생이라는 말의 참뜻

 

 

“조용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수영의 시 「애정지둔(愛情遲鈍)」의 첫 구절은 어딘지 속 시끄럽고 불안한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마치 표어처럼 보이는 “생활무한(生活無限)/고난돌기(苦難突起)/백골의복(白骨衣服)/삼복염천거래(三伏炎天去來)”라는 데까지 읽어 내려오면 김수영이 그리는 저 시간이 퍽 고된 시절이었음을 더욱 짐작하게 된다. 저 구절들은 어쩌면 전지구적 팬데믹을 경험하며 도달한 세계의 모습이나 대선 이후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혼란스러운 여름과도 꽤나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스태그플레이션을 예측하는 경제지표나 전쟁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세계정세 등은 생활 내지 생계의 문제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예측을 하게 하고(‘생활무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여주는 여러 한심한 작태들은 고난이 수시로 찾아올 수도 있다는 예감에 빠지게 한다(‘고난돌기’). 고단한 생활과 고난의 예감이 불우한 삶의 그림자를 불러오고(‘백골의복’), 여기에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에서 감지되는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한 불안감은 이제 우리 일상의 정서 밑바닥에 자리하게 되었다(‘삼복염천거래’).

이러한 때, 정치권은 또 익숙한 단어를 들고나왔다. 집권여당의 비대위 수립 논란을 보도한 기사 사진에는 빈 사무실에 걸린 ‘오직 민생’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저 문구가 전달하는 기시감은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들에 의해 한층 커진다. 각종 규제의 완화로 기득권세력의 사익 부풀리기가 쉬워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 시사프로그램에서는 밀양의 사드반대 집회, 용산 남일당, 쌍용자동차 공장 등지에서 드러난 경찰의 과잉진압을 거론하며 신설된 경찰국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또 (지금은 철회 수순으로 바뀌어 다행인 일이지만) 돌봄 주체들과는 아무런 논의도 없이 경제적 효과를 앞세워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5세로 낮추겠다고 했던 발언과, 수해현장을 방문해 정치인들이 보여준 참담한 언행은 어떤가. 이들의 ‘민생 없는 민생’ 이야기가 이렇듯 다시 떠돌고 있다.

‘민생’은 사전상으로는 ‘일반 국민의 생계나 생활’ 정도의 의미로, 이때 생계는 물가라는 단어와 연동하며 먹고사는 일을 주로 지칭하고는 한다. 민생물가나 민생안정이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민생은 물가와 생활의 문제들, 노동·빈곤·교육·가족·노인 문제를 자주 호출한다. 일례로 참여연대는 가계에 어려움을 초래하는 3대 지출 요소인 주거비·교육비·의료비를 기준으로 민생 문제에 접근하기도 했다. 민생만큼 자주 언급되는 ‘서민’이라는 단어를 통해 민생의 맥락을 그려볼 수도 있다. 서민은 사전적으로는 보통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하지 못한 사람’으로 풀이된다. 그러고 보면 정치인들이 선거용 이미지를 담기 위해 찾는 곳들, 가령 재래시장, 쪽방촌, 대중교통 시설, 청소노동의 현장 등은 실로 민생과 연결된 서민들의 삶의 자리이다.

민생에 대한 조명은 불안정한 사회에서 생존의 위협을 실감하는 이들의 삶을 보살피려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따로 있다. 민생의 현장이 곧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이 집약된 자리라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터전, 그리고 여전히 그림자노동으로 취급받는 각종 돌봄노동이 수행되는 곳 등이 바로 민생의 긴박한 현장이다. 따라서 민생을 해결하는 과정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하고 각종 차별과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을 문제 삼아 체제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하청노동자가 참담한 산업재해로 희생되지 않게 하는 것, 영세 자영업자의 가정파탄 관련 보도를 더이상 사회면에서 보지 않게 하는 것,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고 신체적 약자를 돌보는 일의 고귀한 가치를 알아보는 것 모두 민생을 돌보는 일과 긴밀하게 연동하는 우리의 과제이다. 더불어 민생은 ‘빚투’ ‘영끌’ ‘파이어족’이라는 단어들을 빚어내는 투기와 노동혐오의 세계를 벗어나, 노동과 꿈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사회적 과제와도 결코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민생을 돌보는 정치는 민(民)이 사랑하고 꿈꾸는 일을 도와야 한다. 민의 생존을 돌보는 일은 그것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물론 이것을 정치권 인사들에게만 맡길 일은 아니다. 「애정지둔」에서 김수영은 고난의 시기에 오히려 사랑이 굵어졌다고 말한다. 고단한 삶들이 지속되는 “첩첩이 무서운 주야”를 지나면서도 어찌되었든 사랑과 관련한 자신의 노래는 땅으로 스민다고 적었다(“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이것은 현실을 외면한 어리석은 노래인가, 시인의 환상인가. 둘 다 아니다. 김수영의 저 시는 1953년, 그러니까 6·25를 경험하는 중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창작 시기를 염두에 두면 ‘백골의복’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며 이 시가 말하는 고난이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음을 비로소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에 시인이 땅에 심어둔 사랑이라니, 그것이 얼마나 격렬하고 깊은 생의 욕망인지를 감히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들이 현재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른 미래를 꿈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과 관련한다는 사실을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는 또 시인이 노래한 사랑이 아무리 특별할지라도, 그 사랑은 다름 아닌 이 땅의 민의 삶들을 관찰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발견한 결과라는 사실도 안다. 김수영이 살았던 땅 위에 우리가 산다. 이제 그 땅에서 올라오는 사랑의 노래를 배우자. 현재의 사는 모양새에 속지 말고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되묻자.

 

대선 이후 혼란이 깊다. 정부여당은 좌충우돌 중이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역시 여전히 뚜렷한 비전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를 걱정하는 민심이 벌써 커지는 중이다.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하나’라는 이야기까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길 찾기가 시급한 때다. 그러나 혼란 중에 길을 모색했던 직접적이고 가까웠던 경험이 우리에게 없지 않다.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이 ‘다시 촛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번호 특집은 ‘대선 이후 촛불의 갈 길’을 고민한다. 우선 이남주는 촛불혁명의 현재 상황을 살피고, 그에 내재한 문제적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모색한다. 촛불연합이 왜 균열되었는지, 촛불연합을 재구성할 길은 무엇인지를 물으며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사회·정치 세력들에 개방된 ‘플랫폼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역할을 강조하고, 변혁적 중도주의를 고려하는 실천을 주문한다. 특히 민주당의 변화가 필요한 영역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설파하는 4장은 더욱 많은 독자들이 수신했으면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윤영상은 한국 진보정치의 의미와 역사를 여러 국면에서 톺아본다. 2000년대 이후 진보정치의 역동적 변화와 최근까지의 부침을 살피는 과정이 꼼꼼하다. 관습과 당위에 빠진 진보정치가 현재의 난관을 타개하려면 연합정치의 능력을 키워야 하며, 사회 갈등을 창조적으로 해결할 공론장을 통해 공공적인 것을 어떻게 사유할지가 관건이라고 밝히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주병기는 지난 5년간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을 냉정히 돌아본다. 문재인정부가 다수의 경제지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실질적으로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살피는 균형감이 돋보인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것을 기조로 하는 새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대목들 역시 날카롭다. 결론에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경제정책 패러다임이 성장지상주의와 결별하고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그려 보인다.

김중미는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가난한 이들의 공부방과 공동체를 만들고 돌봐온 경험을 토대로 글을 펼친다. ‘청년세대’라는 말 속에 배제되어 있는 청년들의 현실 속 삶과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생생하게 전한다. 풍부한 경제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이들이 ‘서로 돌봄’의 그물망에 참여하고 그것을 확장시키는 경험 속에서 움트는 희망의 싹이 감동적이다.

백영서의 사회로 김성문 백민정 유영주가 참여한 대화 「새로운 한국학과 개벽이라는 화두」는 스케일도 크고 내용의 밀도도 높다. 한국의 문화 역량을 평가하고 국내외 한국학의 과제를 점검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아, 새로운 한국학의 필요성을 구체화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학을 재구성할 동력으로 ‘개벽’을 논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명대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에 개벽의 한국학이 “한국의 토착적 사상을 오늘에 되살려 한국학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고 “서구에 대한 ‘문화적 되감기’를 수행하는” 기획일 수 있다는 목소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한국학의 과제를 진단하는 논의에서 출발해 어느새 개벽과 촛불 민주주의까지 아우르며 확장해나가는 토론의 활기를, 그리고 그 활기에 내재된 한국의 사상적 흐름과 가능성을 독자들도 느껴보길 바란다.

논단에는 두편의 글이 실렸다. 염무웅은 시인 김지하의 죽음을 추도하면서 시인의 가까운 옆자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고, 눈 밝은 평자로서 길어올릴 수 있었던 그의 삶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시인의 삶이 통과한 고난은 물론 곡진한 추도사의 품격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조형근은 ‘K-방역의 그늘’을 살피는 일을 통해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모순들을 드러낸다. 한국의 방역을 성공적으로 평가하는 서사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지점을 찾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 내재한 혐오 정동과 권위주의에 대한 은밀한 동경 등을 파헤치는 순간과 만난다.

현장의 네이오미 클라인의 글은 우끄라이나전쟁과 기후위기라는 사태가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근간에 동일한 원인이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짚는다. 화석연료에 강력하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과 이상화된 과거에 집착하는 우익들, 글로벌 시장 판매를 위해 지구 자원을 마음껏 추출해서 쓰는 추출주의적 사고 등의 결합이 기후위기를 심화하고 화석연료를 매개로 하는 전쟁을 부른다는 것이다. 클라인은 우리에게 화급한 것이 전시 수준의 긴급성과 행동성을 바탕으로 녹색변혁의 실천을 이뤄나가는 일임을 강조한다. 김경원·박선영의 글은 ‘지속 가능한 환경과 책임수산물 생산을 위한 국제인증 활동’에 초점을 두고 어촌의 실태와 문제점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 바다 생태계의 건강함과 ‘의식있는 연안 주민의 삶’이 서로 어떻게 상호 의존할 수 있는지, 우리 모두가 경청할 대목이다.

문학평론란도 알차다. 장은영은 강지혜 이근화 김선우의 시를 중심으로 최근 한국 시단의 작품들이 “돌봄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평등의 문제를 사유하며, 정치적 권력을 나누는 꼬뮌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흥미롭게 제시한다. 김요섭은 정미경 최은영 강화길 한정현의 작품을 통해 잊힌 과거를 듣는 작업을 그리는 소설들을 일별하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연대의 감각과 더 나은 삶에 대한 탐색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문학초점은 신용목 시인, 최진석 문학평론가, 김남희 편집자가 참여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책과 긴밀히 연관된 작업을 해온 이들이 이 계절의 의미있는 작품을 선별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다.

작가조명에서는 김성중 소설가가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출간한 이장욱을 만났다.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유쾌하면서도 흥미로운 질문과 재치있고 진지한 답변들이 이어진다. 마치 손발이 잘 맞는 구기종목 복식조 경기를 보는 듯해, 독자들의 즐거운 시간을 보장한다.

산문은 김해자 시인의 글로 ‘내가 사는 곳’ 연재를 이어나간다. 시인이 거주하는 천안 광덕산 아래에서 시인만큼이나 시인처럼 보이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산문을 읽고 나면 정갈한 나물 밥상을 받아든 듯한, 건강한 한끼를 선물로 받은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촌평란에서 좋은 책을 소개하고, 책만큼 좋은 글을 보내준 필자들을 만나는 기쁨은 한결같다. 이번호는 여느 때보다 많은 12권에 대한 서평이 실려 더욱 다채롭다.

시란 또한 풍성하다. 신예와 중견을 아우르는 12인의 시와 더불어 올해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된 김상희의 시를 같이 실었음을 알린다. 소설란 역시 김정아 정선임 최은영의 신작 단편과 함께 창비신인소설상의 주인공 주영하의 작품이 지면을 채운다. 이주혜의 장편연재는 이번호에도 창작란에 힘을 실어준다.

아울러 제40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최지인 시인과 정성숙 소설가, 김요섭 문학평론가에게 축하를 보낸다. 이번 가을호에서는 만해문학상의 최종심 대상작 또한 살필 수 있으며, 겨울호에 이어질 수상작 발표에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잡지를 기획하고 그 기획이 여러 필자들과 편집자들의 도움으로 구현되는 것을 볼 때마다 신비로움을 느낀다. 한국어의 역량과 한국인의 지혜가 만만치 않으며 그것은 지금도 조금씩 더 커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또한 그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느낀다. 국내외 정치·경제 상황과 기후위기 등이 모두 불안하고 어두워 보이는 국면이지만, 그 속에서도 길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창조와 노력과 협동을 신뢰한다. 이러한 신뢰와 실감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나누는 일, 그것이 창비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또 한권의 잡지로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 보람된 여름이었다.

송종원

송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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