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공동세계를 향한 시의 모험」 「살아 있는 역사와 좋은 시의 언어: 신동엽론」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1. 시민(성)의 재발견
미래를 도모하는 자에게 현실의 변화는 늘 정신의 부지런함을 요구한다고 했던가. 가깝게는 코로나가, 조금 멀게는 촛불이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여러가지 사유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드물 것이다. 이 두 사안을 굳이 엮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각각의 경험을 경유하며 우리에게 수신되는 공통의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혁명에 참여해도 동등한 공적 삶과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사적 삶의 구별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점을 들어가며 촛불혁명의 한계를 재빨리 지적하는 이도 많다. (…) 그것이 일상적 삶을 직접 그리고 즉각 개선해주지 않더라도, 우리를 서로에 대해 존엄한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점은 비할 데 없이 중요하다. (…) 참여의 자세를 유지하지 않고는 일상적 삶을 개선할 제도적 전망을 열어갈 수 없다.1
촛불의 혁명됨을 부정하려는 의견에 맞서 김종엽은 공적 삶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거듭나는 주체성을 이야기한다. 이는 불평등을 포함한 현실의 주요한 문제들이 일거에 해소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적 삶에 참여하는 일은 스스로의 존엄은 물론이거니와 서로의 존엄을 재확인하는 일이 된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행위에 따른 즉각적인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 자체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행위를 지속시키고 그에 부합하는 결과를 전미래적인 것으로 붙잡아두는 사유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거기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또 함께 결정하는 시민의 당당함이 녹아 있기도 하다.2
시민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어렵지만, 그것이 단지 개인을 넘어 공적인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 주체성임에는 크게 이견이 없을 듯하다. 아렌트(H. Arendt)의 견해에 따르면 시민은 “말과 행위를 통하여 다른 사람과 단순히 다르다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한다.”3 다시 말해 시민은 공적인 장과 관련한 말과 행위 속에서 형성되며 또한 그를 통해 자신의 고유함을 증명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촛불은 우리에게 시민이라는 주체성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준 사건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그렇다면 코로나 사태 속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코로나 초기부터 현재까지 미디어에서는 줄곧 ‘성숙한 시민의식’을 강조하고 있으며, 시민적 연대 내지 협동적 관계성에 초점을 둔 분석들도 주목을 끈다.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전지구적 돌봄노동의 위기(취약계층에 돌봄노동을 떠넘기는 행위) 속에서 “공동체를 능동적으로 구성 및 재구성하는” ‘ 커머닝’ (commoning)을 강조하는 커먼즈(commons)론4을 발신했던 백영경이 코로나와 관련해 분명히 말한 것처럼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개개인이 독립된 단자가 아니라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이며, (…) 인간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 환경”5이라는 사실이다.
“연결된 존재”로서의 실감은 코로나가 우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일깨운 감각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저 발언을 코로나 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여기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공거(cohabitation)’ 6를,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일이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알려준 진실은 지금의 위기가 코로나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라 대체로 코로나로 인해 더 심화된 것이라는 점이며, 이를 고려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환경”이라는 사실은 상호돌봄의 관계성에 대한 지향을 이미 오래전부터 과제로 제시해왔음을 깨달을 수 있다. 결국 촛불과 코로나는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생존은 물론이거니와 존엄과도 직결된 시민적 주체성에 새롭게 눈뜨게 만든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민의식/시인의식
시선을 2000년대 시비평 쪽으로 돌려보자. 시민적 주체성과 시인의 주체성 사이에 내재하는 거리감이 ‘시와 정치’라는 주제를 둘러싼 논의 속에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던 때를 기억한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7라는 진은영의 고백은 당시 ‘시와 정치’를 말하는 현장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이장욱은 자신의 평론 중 ‘시민과 시인’이라는 장에서 진은영의 저 말을 인용하고, “시민으로서의 사회참여가 곧바로 시인으로서의 시로 전이되지는 않는다”라고 진술한 뒤, “‘온몸’을 요구하는 시의 ‘윤리’는 많은 경우 시민적 ‘윤리’의 단선적인 시적 변용을 초과하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라고 적었다.8 제도적 예술이 현실과 자신을 완고하게 구분 짓는 태도가 저 기술 속에 자리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지만, 예술가(혹은 시인)와 시민 사이의 불화관계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여기서 다 호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논의의 초점은 과도하게 시인의 윤리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성명서 참여, 지지 방문,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 작성’ 등이 시민의 윤리에서 과연 얼마나 본질적인가. 그러한 행위는 어찌 보면 자신의 시민됨을 상상적으로 승인받는 손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시민 역시 이미 정해진 윤리를 확보한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전략 속에서 쟁취하고 창조해나가는 존재다. 촛불과 코로나가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역사적 주체로서 시민이 되어가는 과정은 시인들이 그토록 희망하는 ‘온몸’을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시의 윤리는 시민의 윤리와 다르다고 강조함으로써, 시민의 윤리를 통해 시의 윤리를 갱신할 가능성을 봉쇄해온 것은 아닌지 반문해볼 때다. 이는 막연한 당위론이 아니다. “우리들의 언어가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9라고 말하며 시민의식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고 그것을 다른 한쪽에서 한 극단까지 밀어 올린 시인의식과 만나게 한 시인을 우리는 목격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시민됨이 시인을 억압한다거나, 시인이 시민을 어떤 강박적 ‘율(律)’에 옥죄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시인-시민이 ‘함께 자유로운’10 관계에 관한 모색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인과 시민 간 연결의 결여 자체를 더 사유했어야 했다.
당시 시비평에서는 ‘누가 말하는가’에 집중하는 담론과 더불어 더이상 어떤 이념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목소리들이 출현했으며 또한 다양한 마이너리티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고 반기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자유롭고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를 우리와 연결한 것은 새로운 경향을 만든 시인들의 성과이지만, 이것이 자유로운 다양성의 차원에만 머문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저 연결조차 무화하는 고립됨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저 목소리들을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비명처럼 여기는 일은 시의 발신자를 위해서도 또한 수신자를 위해서도 좋지 않으며, 더구나 어떤 결속도 거부하는 심미적 개인주의를 우리가 원하는 답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다양성을 하나의 종착지가 아니라 또다른 전망을 향하는 관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의 불완전성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하지 않았을까. 가령 소수자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으로 공동의 책임을 부여하는 목소리를 불러와 그것을 다시 공동의 언어 속에 안착시키는 협동과정을 상상해보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책임을 동반한 유대의 감각을 보여주며 또한 시가 순간적으로 이룬 성과를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어낼 또다른 실험으로서 말이다. 어쩌면 그 당시 우리는 비로소 여럿이 되었고 마침내 ‘우리’를 재발명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11
3. 시민(인)의식과 사랑
생각해보면 시민적 주체성과 시인적 주체성을 함께 고민한 결과물을 우리는 더 오래전에 받아본 적이 있다. 백낙청은 “우리가 추구하는 시민의식이 때로는 ‘사랑’이라는 시인의 말로써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12여 ‘사랑’을 매개로 시인과 시민 사이의 상호주체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를 대표하는 문장은 「시민문학론」의 결말부에 적혀 있다. 거기서 백낙청은 “시민의식의 소재지”를 물으며, “실로 사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시민이 있고, 사랑이 없는 자는 어디서 무엇을 해도 시민이 못 된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이 성숙되어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기술하면서 “‘사랑’을 ‘시민의식’의 정확한 동의어로 쓸 수 있는 날”을 예감한다.(96~97면) 이때의 사랑이 “기만적인 박애주의나 쎈티멘탈리즘”(27면) 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백낙청에게 사랑은 모든 존재가 완성으로 향하는 도정을 부추기는 힘이며, 그 도정 속에 중첩되어 있는 갈등과 모순을 지속시키는 힘이기도 하다.13 또한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새로운 창조를 위한 터전으로 긍정하고 그로부터 재차 역사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회복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3·1운동과 한용운의 시를, 4·19와 김수영의 시를 상호조명하며 읽어내는 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백낙청은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근대적 시민의식다운 시민의식을 갖게 된 계기인 동시에 그 시민의식의 빈곤을 결정적으로 드러낸”(58면) 3·1운동의 이중적 성격을 경유하면서 한용운의 ‘님’이 침묵을 통해 절실한 기다림(자신 스스로를 기다림의 도정 위로 옮겨내는)을 이끌어내는 존재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님에 대한 사랑이 존재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능동적 사건임을 보여준다. 한용운이 시에 그려낸 님에 대한 갈구는 사랑이라는 사건을 통해 주체화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사건의 철학자 바디우의 시각에서 보자면, 저 사랑은 모(母)사건(3·1운동)에 충실성을 보이는 후(後)사건적 주체의 속성이기도 하다.
또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해석하는 자리에서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라는 구절을 두고 시가 “자신의 삶, 자신의 현실, 모든 진보의 주어진 터전으로서의 자신의 전통”을 긍정하고 거기에 “뜨거운 열정과 매서운 비판이 하나가 된 태도”를 보여준다고 평한다.(94면) 그리고 그같은 태도가 유지될 때 비로소 시인이 ”발붙일 유일한 땅을 얻는 것이며 드디어는 사랑과 인간을 되찾는”(같은 면)다고 김수영 시의 현실의식과 자유 그리고 무한한 사랑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는 사랑이 마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관계들을 재조정하고 변화시키려는 열정과 비판 속에서 획득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에서는 백낙청이 시민과 시인과 사랑을 어떻게 생각했는가가 좀더 분명히 드러난다.
시(詩)가 역사의 기점(起點)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심미주의 또는 교양주의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인 역사’, 즉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사건으로써 창시되는 역사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갈 때, 그 결과는 가위 혁명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곧 역사적인 창조와 시적인 창조가 다 같이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는 뜻으로서, 이는 또 모든 인간의 근원적 평등성에 대한 긍정과, 이 평등성이 곧 인간역사의 창조적 가능성 그 자체라는 신념으로 이어진다.(216면)
여기서 “역사적인 창조”라는 말을 공적 삶의 참여자로서의 시민 옆에, “시적인 창조”라는 말을 시인 옆에 두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백낙청은 이 두 주체성을 분리된 채로 두지 않고,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열린 길을 걷는 두개의 방식으로 바라보았으며 둘 모두를 인간에게 내재하는 잠재성의 형식으로 여겼다. 그리고 ‘사랑’은 바로 저 신념 안에 숨어 있다. “인간의 근원적 평등성에 대한 긍정”은 항상 홀로인 사람이 아니라 둘 이상의 사람을 현실의 무대 위에 올릴 것이며 이 둘의 경합과 협동 때로 갈등이 현실의 무대를 주어진 그대로 두지 않고 다른 성격의 장소로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 사랑에 잠재된 현실 변화의 동력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장이 펼쳐질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올 태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동의 장의 수립이 절실한 요즘이기에 어쩌면 저 사랑은 더 절실하다.14 또한 우리가 서둘러 봉합해버린 시인과 시민의 관계를 재조정할 계기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사랑은 새롭게 발견될 여지를 시사한다.
4. 시인의 책임과 창조적 무한
최근에 발표된 시 속에서 시인과 시민의 주체성은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 안희연의 시는 자기성찰적이다. 둔중한 자기성찰보다는 시의 탄력적 활기에 비중을 두었던 최근 시단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시인에게서는 유행과 거리를 둔 어떤 고집스러움이 보이기도 한다. 안희연의 시는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내가 ‘나’ 안에 구속되지 않을지를 오래 고민하는 과정과 더불어 쓰인다. 그런데 그 과정이 늘 순탄치 않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려는 순간 다른 것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성찰의 여정은 그래서 더 멀고, 관조와 같은 평화와도 거리를 두며 결과적으로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물론 이 어려움이 불필요하고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성찰의 순간 개입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번째 시집(창비 2015)의 제목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떠올려보면, 가령 타인의 슬픔 같은 것이 끼어든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타인의 슬픔에 대한 존중은 내 감정의 유동성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게 되고 이로 인해 타인의 슬픔과 더불어 침묵하고 슬퍼하고 때론 타인과 나를 새롭게 규정짓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순간까지 시가 나아간다. 두번째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에서도 그같은 시의 운동성은 이어진다. 이 시집 역시 자기 자신에게 당도하기 위해 어딘가에서 길을 헤맨 경험의 기록들로 풍부하다.
당신에게는 사슴 한마리가 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다
사슴은 색이 없고 무게가 없지만 자주 붉은 사슴이 되고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올 때가 많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오늘도 사슴은 홀로 잡목 숲을 떠돌고 있었다 숲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이윽고 사슴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먼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쇠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듯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그 순간 당신은 비에 대한 낯선 기억 하나를 갖게 된다
소매엔 까닭 모를 흙이 묻어 있다
덫에 걸린 사슴의 발이 검게 썩어들어갈 때
당신은 수없이 지나다니던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붉을 대로 붉어진 사슴이 절뚝이며 당신에게로 돌아올 때
당신은 수백개의 신발이 강물에 떠내려오는 꿈을 꾼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 사슴은 빛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아침 햇빛을 보면 자주 무릎이 꺾인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연루」 전문
이 시에는 ‘나’가 있고 “당신”이 있고 “사슴”이 있다. 사슴의 위상은 여러모로 묘하다. 비중으로 보자면 ‘사슴이 있어 당신이 있고 내가 있다’로 바꿔 읽어야 할 것도 같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정현종 「섬」)에 빗대자면 사람들 사이에 사슴이 있는 것 같다. 그 사슴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돌아다니다 “덫에 걸리고” 또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두고 “눈물을” 떨군다. 저 움직임은 사실 사슴에 관한 묘사이면서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삶을 더 삶답게 만들어주는 행위의 묘사다. 덫에 사로잡혀 낙담한 채 포기하거나 그러한 상황에 순응해버리는 정신이 아니라 곧바로 가질 수 없더라도 그에 대한 갈망을 쉽사리 놓지 않는 어떤 열정을 묘사한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사슴은 특정한 아름다운 미적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삶 그 자체이다. 그런데 그런 삶을 마주한 우리는 어떤가.
시인은 그렇게 우리가 망각한 삶을 불러낸다. 그리고 이 불러냄은 나와 당신 사이의 사슴 이야기로 가능했다. 나의 이야기가 사로잡힐 만한 질척한 감정의 덫이나 사슴 홀로 아름다운 관념의 사슬로부터 시가 놓여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사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주요한 이미지는 단지 사슴이 아니라 ‘나와 당신 사이의 사슴’인 셈이다. 그렇게 ‘사이’는 때때로 난폭하게 내가 하나의 고요한 자아에 머무는 일을 방해한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불이 있었다」)란, 시가 시작되는 시점에 대한 시인 자신의 고백 같은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시인은 다양한 ‘사이’에 벌어지는 삶의 기미들을 포착해 시를 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여러 사람들에게 삶의 비의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를 통해 배움을 수행하는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은 그 이야기들의 집합이며, 굴곡진 시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학습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학습은 무언가를 수용하는 과정을 늘 품고 있다.
그런데 그 ‘받음’ 속에는 선택이 개입할 여지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도 있다. 화려하고 복잡하기보다 일견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는 이 시집이 어딘가 간절하고 때론 경이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끔의 정원」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누군가 그리다 만 그림 속”에 들어간 시인은 그곳에서 호기롭게 덜 그려진 그림을 채워 그린다. 시인의 상상력은 “벤치의 절반은 돛단배/구름의 절반은 파도 /그러면 벤치를 하늘에 띄울 수 있다 /하늘의 절반은 이미 바다가 되어 있다”라며 빈 부분을 활달하게 채운다. 그런데 활달한 상상 속에서 고양된 감정을 느끼던 이같은 작업이 돌연 막다른 곳에 이른다. “이곳에 나를 묻어줘”라는 쪽지를 건네는 (아직 얼굴이 없는) 소녀를 만나 “얼굴 없인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어요”라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나서의 일이다. 시 속 ‘나’의 작업은 정확히 거기서 멈춘다.
이는 “누군가가 그리다 만 그림”이 자유롭게 아무것이나 덧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다 멈춰진 그것을 세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한계 속에서 완수되어야 할 미완의 과제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이 덜 그려진 그림에는 여러 맥락이 스며 있을 것이다. 가령 종결 불가능한 애도라든가 회피 불가능한 전통이라든가 미해결된 공동의 역사적 과제 같은 것들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일도 가능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안희연의 시에는 미완의 과제로 남은 무언가를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로 떠맡고 받아들이려는 사람의 용기가 기록되어 있다. 다시 ‘사이’와 더불어 이야기하자면 안희연의 시 속에 그려지는 ‘사이’는 막연히 호혜로운 관계가 아니라 무거운 책임을 껴안고 있는 관계임을 강조해야겠다. 서로의 존엄을 책임처럼 껴안는 시민의 윤리가 시 안에 살아 숨 쉬는 덕에 안희연은 자신만의 개성에 함몰되지 않은 채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우리’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5. 착란 속의 전망
이정훈의 시는 힘차다. 시집 『쏘가리, 호랑이』(창비 2020)에 자리 잡은 활달한 힘에 의해 이 시집에는 몇가지가 들어설 틈이 없게 되었다. 우선 생의 벼랑에서 위축된 정신이 없다. 이정훈에게는 생의 벼랑도 생의 엄연한 부분인 데다가 그것은 말 그대로 부분일 뿐이다. 또한 시의 몸을 키우려는 과장된 이미지 역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사실에 근거한 시의 언어가 비유를 ‘꾸미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딛고 넘어서려는 ‘꿈꾸는 말’로 바꾸어낸다. 또 하나 이정훈 시에 없는 것은 억압적인 시선이다. 가령 「봄」에는 “봉두난발에 흙발로 샐쭉 깡통 내”미는, 구걸하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시인은 그 아이를 매개로 연민의 시선을 길어 올리거나 가난한 생의 고통 같은 것을 펼쳐내지 않는다. 소유를 통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활력을 예단해버리는 시선과는 무관하게, 아이는 가볍고 명랑하다. 또한 배가 고파 무언가를 빌어먹는 처지지만 봄의 기쁨을 누구 못지않게 능동적으로 표하며 자신의 처지에 사로잡힌 노예가 아니라 그에 지배당하지 않는 당당한 주인으로 제 모습을 시에 새긴다. 결국에는 시의 화자가 아이에게 “보리 싹 한줌”을 건네주고 그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생의 기쁨과 활기를 오히려 돌려받는 식이다. 이처럼 이정훈의 시에는 상투적 관념에 사로잡혀 시의 대상들을 관장하거나 지켜보는 억압적 시선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힘찬 시집에는 강렬함이 넘친 나머지 현실과 괴리된 형상으로 보이는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다. 때로 이 기묘한 모습은 시대성을 무시하고 몇몇 선배 시인들의 시세계를 탐닉하거나 현실과 부러 거리감을 둠으로써 시적 인상을 증폭시키려 한 신화적 상상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반대이다. 이정훈의 시는 현실의 공간과 신화의 공간을 중첩해 읽을 때 두 세계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이름 붙인다면 거기에는 꿈과 현실의 협업이라 부를 만한 작업이 펼쳐진다. 이정훈이 보여주는 신화적 공간은 신화에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시인의 꿈이 연출되는 무대 공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현실의 공간에서 어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지언정 시인은 그 골목 끝에 환상의 공간을 잇대어 현실에서의 좌절을 굴절시킨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현실의 영역에서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쾌감을 선사한다.
바람은 왜 먼 곳에 와
뿔을 치며 우나
붉은 사슴들이
장대한 머리를 세워 싸우는 북쪽
얽힌 뿔을 빼지 못한
바람은 왜 기를 쓰고 내게로 불어오나
사슴이 달린다
시호테알린과 싱안링, 함경산맥과 낭림산맥을 지나
태백산맥 중턱까지 내려온 바람 속
아득한
대지와 바다가 얽혀 뼈를 말리는 소리
죽은 자리로만 떠도는 저 소리
우우, 굶어 죽고
죽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의 울음을 끌며
내 고향은 뒷산보다 멀어
어머니 아버지보다 멀어
너무 가까이 온 게 아니었을까,
인가에서 멀어지려는 짐승이
가지를 분지르며 산등성이 넘어간다
—「사슴이 달린다」 전문
“사슴이 달”리는 “시호테알린과 싱안링, 함경산맥과 낭림산맥을 지나/태백산맥 중턱까지 내려온 바람 속”의 사실적 근거는 「일죽휴게소」라는 시와 함께 읽을 때 잘 드러난다. 주행거리 “삼백만 킬로미터”의 화물 트레일러 운전사에게 지구의 지명들은 그곳이 어디인들 그리 멀지 않다. 트레일러 운전석에 앉아 달리던 붉은 눈의 야간노동과 바람 속을 질주하는 붉은 사슴의 모습은 같은 사람의 두가지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죽휴게소」에서 화자의 꿈은 “평균연비와 평균속도와 짐의 톤수를” 적어야만 하는 현실의 속박 속에 놓여 있지만, 「사슴이 달린다」에서는 조금은 다른 상황이 그려진다. 이곳에서는 현실적 짐의 형상이 “바람”으로, 혹은 “뼈를 말리는 소리”로, 그도 아니면 “죽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의 울음”으로, 미적 생동성을 내포한 채 나타난다.
그런데 정말 다른 것은 그 형상의 외양이 아니라 속성이다. 바람과 울음은 사슴의 질주를 옭매기보다 그것을 더 힘차게 만든다. 절박한 이에게는 현실의 짐 역시 자기 삶의 동력으로 품어낼 수 있는 순간이 형성되는 것일까. 존재를 고양시키는 이 역동적 이미지는 자신을 사로잡는 족쇄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의 운동을 하나로 엮어 응축시켰다가 다시 창조적 활력으로 풀어낸다. “뿔을 치며 우”는 바람이 “얽힌 뿔을 빼지 못한/바람”으로 바뀌고, 죽음을 연상시키는 “ 뼈를 말리는 소리”의 배음이 스스로를 이끌고 가는 울음으로 변형되는 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역동 속에서 먼 것과 가까운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아니 착란처럼 먼 것이 돌연 가까운 것이 되기도 한다.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좀 무서운 데가 있다. 일순간 자신의 온 생명을 터뜨리고 소멸할 것 같은 에너지의 집중이 어떤 광증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없지 않다(「무릉(武陵)에서」 같은 작품을 보라). “인가에서 멀어지려는 짐승이” ‘분지르는 가지’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조금 여유롭게 생각하면 저 착란은 기대와 전망을 이야기 속에 녹여낸 우리의 문화적 관습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가령 시인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그 착란이 힘을 발휘하는 풍경이 있다. “병창을 울리는 얼음 트는 소리에” 놀라 “선잠 깬 아이에게/엄마는” 그 소리를 둘러싼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깜깜한 밤이면/하늘에서 흰말을 탄 장수가 내려와/장대 같은 칼로 강을 갈라 말에게 물을 먹이고/다시 하늘로 올라간단다”.(「겨울밤」) 지은이가 불분명한 이 설화적 이야기 안에는 억압받는 세계에서 해방을 꿈꾸던 다양한 사람들의 무수한 꿈이 녹아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와 이정훈 시의 신화적 세계는 그런 점에서 닮았다. 두 언어 속에서 우리는 지금은 바로 알아보기 힘들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어떤 전망과 기대가 녹아 있는 형상을, 혹은 그것을 빚어낼 수 있는 힘을 읽을 수 있다.
이렇듯 이정훈의 시에는 삶의 터전에서 발 딛고 일어서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힘들과 경합하는 당당한 주체의 모습이 그려진다. 시인은 그 주체의 활력 옆에 착란 속의 전망을 같이 세워둠으로써 시세계 안에 강력한 기둥 두개를 축조해냈다. 여기에 어떤 건물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우리는 시와 노동이 만나 어떤 진경을 펼쳐낼 수 있는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6. 사랑의 되풀이
다시 시인과 시민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앞서 본 두 시인의 시에서 우리는 지속되는 ‘사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안희연의 시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우고 학습하는 주체의 형상과 타자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책임감이 발견되고, 이정훈의 시에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 구속되지 않고 그 너머의 삶을 꿈꾸는 주체의 형상과 어떤 억압도 절대적이라고 여기지 않는 당당함이 드러난다. 이들을,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아가는 시민적 활력의 시적 결과물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조금 도식적일 수도 있지만, 백낙청이 김수영의 시에서 읽어낸 열기가 이정훈의 시로, 한용운의 시에서 감지한 정성이 안희연의 시로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열기는 주어진 삶에 대한 긍지와 지속되는 삶 속의 투쟁에서 발원하며, 정성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존재들에게도 아직 당도하지 못한 온전한 삶에 대한 갈망에서 기원한다. 촛불혁명 이후 조금 더 두드러지게 가시화된 불평등의 문제라든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연대와 협력이라는 가치가 더 절실해진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 저 열기와 정성을, 둘 모두를 함축하고 있는 ‘사랑’을 다시, 지속적으로, 발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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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엽 「촛불혁명에 대한 몇개의 단상」,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468면. ↩
- 이남주 역시 바디우의 사건과 충실성 개념을 빌려 촛불혁명을 통해 새로운 주체성을 수립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이남주 「3·1운동, 촛불혁명 그리고 ‘진리사건’」,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그는 바디우의 충실성과 진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며 사건 후 주체의 형성을 강조한다. “사건이 소환하는 주체가 사건적인 잉여적 부가물의 관점에서 상황에 관계하는 것을 ‘충실성’으로,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하는 것을 ‘진리’로 지칭한다.”(64면) 이러한 해석은 김종엽이 강조한 “참여 태세의 항상성”(앞의 책 464면)과도 상통한다. ↩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2014, 236면. ↩
-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8면. ↩
- 백영경 「면역이라는 커먼즈와 좋은 의료를 위한 투쟁」, 추지현 엮음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돌베개 2020, 207면. ↩
- 주디스 버틀러는 아렌트의 ‘선택하지 않은 공거’ 개념이 “동등한 권리에 대한 책임, 나아가 평등에 대한 책임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함께 살고자 분투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드넓은 사랑 때문도 아니고 평화에 대한 순전한 욕망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그와 같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에 대해 불평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선택하지 않은 사회적 세계의 궁극적 가치를 지지하기 위해 투쟁할 의무가 있다.”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167 및 178면. ↩
-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6면. ↩
- 이장욱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295~96면. ↩
- 김수영 「히프레스 문학론」,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08, 285면. ↩
- 백낙청의 「시민문학론」(1969)에 인용된 D. H. 로런스의 ‘함께 자유로움’(freedom together) 개념을 참고했다.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개정합본호 46면. ↩
- 가령 ‘시와 정치’ 논쟁 후반에 진은영이 제출한 다음과 같은 의견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예술가의 방언성은 그것이 하나의 표준어에 파열을 내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순간에는 미래적 문학의 도구이자 무기이지만, 그저 방언성에 머무는 순간 도래하는 문학의 덫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방언성에서 시작한 문학은 다시 방언성을 넘어서 어떤 공동성의 삶을 창안해야 하고 또다시 이 공동성의 삶 속에서 표준어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방언성을 발견하면서 또 다른 공동성의 삶의 형태를 창안하는 방식으로 미학적 두 극 사이의 진자 운동—하이데거라면 존재의 은폐와 탈은폐의 운동이라고 불렀을—을 지속해야만 한다.” 진은영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 『문학의 아토포스』 151~52면. ↩
- 백낙청, 앞의 책 27면. 이하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면수만 표기. ↩
- 백낙청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은 흥미롭게도 바디우가 진리의 공정 중 하나로 제시한 사랑에 대한 설명과 닿아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건 사랑일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조재룡 옮김, 길 2010, 43면. ↩
- 백영경은 커먼즈론의 주장을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추상화된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하며, 이때의 공동체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구성원들 사이에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보장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으로 소개하는바, 이러한 커먼즈론 역시 저 사랑의 현재적 모습이 아닐까 한다. 백영경 「분단 너머의 삶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5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