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부코스키들의 엉뚱한 산책 혹은 느슨한 연대
한재호 장편소설 『부코스키가 간다』
소영현 蘇榮炫
문학평론가. 저서로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등이 있음. yhso70@hanmail.net
취업재수생의 엉뚱한‘부코스키’미행담인 한재호(韓在浩) 장편 『부코스키가 간다』(창비 2009)는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의 중핵에 관한 한편의 충실한 보고서라 불릴 만하다. 미래의 불투명성을 감지하게 하는 우리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 청년백수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제도와 조직의 빈틈 혹은 그 주변이나 맴도는 올드보이인 『부코스키가 간다』의 주인공, 그는 타인들의 실없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고, 별반 특이할 것 없는 한 중년남자를 미행하기까지 한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일과처럼 구직공고를 훑고 그날의 지원할 곳을 결정하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완성하고 발표날짜를 체크한다.
이 소설의 일차적인 미덕은 바로 여기, 2000년대를 전후한 한국사회의 전환의 징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 백수 청년에 대한 가식 없는 보고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미지근한 냉수의 감각으로 작가는 감지할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가는 일상을 따라 제도와 조직에 속하지 못한 루저들에 대한 관찰일지를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역사적 문맥으로 보자면 IMF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에서 청년은 더이상 희망찬 미래의 다른 이름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간 청년세대를 자기희화화나 허세 없이 다루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청년이라는 이름이 불러올 미래에 대한 우리사회의 복합감정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이 소설은 과감하게 그러한 복합감정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실없는 미행과 결과 없는 구직행위로 이루어진 백수의 일상이 정체불명의 중년남자‘부코스키’가 비오는 날마다 떠나는 정처없는 산책-가령 “청계천을 건넌 뒤에 씨네코아를 지났고, 파고다학원 쪽 길을 따라 종로3가역으로 갔다”거나 “낙원상가를 거친 뒤에 피맛골 뒷골목으로 들어갔다는 식”(55면)이지만‘종합하자면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허비한 것’에 가까운 도시 산책-과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다는 점이다. 대개 시간과 비용, 목적과 방향을 산술적으로 예견할 수 있는 지하철 노선표를 중심으로 움직임이 이루어지는데도 (‘부코스키’의 내면 따위에는 무관심한 이 소설에 의하면)‘부코스키’의 외출은 특이점을 가진 반복적 행동이지만 표면적으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일과처럼 행하는 주인공의 구직행위가 순서나 목적에 무관하게 결국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의 미행이나 구직행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무의미를 넘어 그를 옥죄는 막연한 불안의 얼굴과 대면하는 공포체험이기도 하다. 그 산책, 미행 그리고 구직행위가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59면)라는 질문을 불러올 것임을, 그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쓸데없는 짓이란 걸”(59면) 깨닫게 될 것임을, 그리하여 “매일 쓰레기 같은 이력서를 쓰”(69면)는 자신 “역시 쓰레기”(67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될 것임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취업재수생을 포함한 부코스키 일행이‘아웃싸이더’라는 말에서 풍기는 자발적 저항의 냄새와는 관계없는‘남겨진’존재들, 이른바‘어딘가에 끼지 못한’존재들이라고 할 때,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의 미덕이 단지 청년백수에 대한 충실한 보고에 그치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다. 이유 없는 외출을 반복하는 중년남성, 미행하는 자를 미행하는 검은 우산의 사내, 놀이터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왕따 아이에 이르기까지, 주변부적 겉돌기 외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대사회의 주변부적 존재들을 통해, 이 소설은 오늘의 비극적 현실을 사는 이들이 청년세대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게 이 소설은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에서 일어난 전환적 변화,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정체구간과도 같은 현실의 일면을 날카롭게 스케치한다.
다른 누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지만, 그저 자신이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만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상황, 부코스키 일행이 경험하는 이러한 현실 변화는 우리사회가 더이상 목표 자체의 확실성과 타당성을 신뢰할 수 없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생산자중심의 사회에 대한 합의가 깨졌음을 말하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논의가 지적하듯, 이제 더이상 우리 사회는 미취업자 혹은 실업자를 언젠가는 현장에 투입될 잠재적 생산자로 고려하기 어렵게 되었다(『쓰레기가 되는 삶들』, 새물결 2008). 『부코스키가 간다』의 청년백수들뿐 아니라 특정 세대에 한정되지 않은 존재들이 목표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도시를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은 목표만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신뢰도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그들 배제된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가운데 잠정적인 배제의 불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는가. “씨스템이 좋고 싫고 간에” 거기에 결코 끼지 못하는 부코스키 일행을 보여줌으로써 이 소설이 말해주는 것은 실상 우리 모두가 배제의식을 나누어가지면서 동등해지고 있다는 비극적 역설이 아닐까. 가중되는 공포의 근원에는 씨스템 자체를‘자발적으로’뒤돌아볼 수 없다는 어정쩡하고도 미지근한 사실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문제의 복합적 지층은 이미 배제되었거나 언젠가는 배제되고야 말 우리들과 공포를 유포하는 씨스템 양자의 상관성에 놓여 있겠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쓸쓸하게 하는 것은 배제를 두려워하는 자들뿐 아니라 이미 씨스템이 폐기한 자들조차 결코 씨스템으로의 진입 열망을 버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아무런 해결 없이 그저 뜻없는 일상을 연장하게 되는 『부코스키가 간다』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당연하게도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이유 없는 외출과 미행을 멈추게 할 적절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 글을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우리가 직면한 전환적 변화의 의미와 대응법을 알지 못한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우리들 모두가 “각자 관찰하고 답을 내야”(63면)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생존법뿐이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으며 가도 가도 만나는 것은 막다른 골목뿐이다. 그러나 “뭐, 알아낸 게 없으니”(114면) 더구나 정체구간을 지난다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으니, 어떻게 정처없는 외출과 한심한 미행, 의미없는 구직행위마저 멈출 수 있겠는가.‘부코스키’를 뒤쫓는 자는 다른‘부코스키’가 될 뿐이지만, 그럼에도 부코스키 일행이 연출하는 단조로운 미행의 연대, 지루한 관찰의 연대라도 없다면 각자의 “씁쓸하고 뻔한”(103면) 권태의 끝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막다른 골목에 선 우리 모두가 직면한 쓸쓸한 한줌의 진실 혹은 위안이 그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