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일상이자 성찰인 글/쓰기
구효서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 창비 2005
소영현 蘇榮炫
문학평론가 yhso70@hanmail.net
우리는 모든 새로운 것의 가치가 화폐단위로 균질화되는 자본의 시대를 산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조건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제 새로운 것은 이전과 다른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전과 다르기만 하다면 그 이전과는 비슷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논리인 듯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유행, 멈추지 않는 흐름과 변화뿐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눈높이로 조감해보자면 방향 상실의 시대라는 이런 존재조건에 의해 문학 역시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일찍이 지향해야 할 이념과 포기할 수 없는 예술적 새로움의 불균형을 리얼리즘 문학의 이름으로 조율하고자 했던 김남천(金南天)은 1930년대 후반의 어지러운 문학상황을 이념과 사상이 폐기된 방향 상실의 시대이자 저널리즘(문단)과 출판자본에의 종속의 시대로 정리한 바 있다. 이때 그가 난국에 처한 문학의 구원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 곳은 고발정신이라는 이름의 성찰의 자리였다.(「고발의 정신과 작가」) 그의 전언에 따르면, 작가가 스스로를 철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좁게는 문학, 넓게는 세계의 구원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계가 걸렸던 자리』에는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구효서(具孝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에 대한 성찰이, 작가가 의도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공동체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로 드러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비평가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생을 반추하게 하는 자극이자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그의 소설은 방향 상실의 시대에 직면한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비평적 글쓰기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평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들을 떠올리게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질문은 ‘보잘것없는 생을 어떻게 추스를 것인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죽음은 타인에게, 타인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의 연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한 차원 추상되면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와 만나게 된다.
사실 보잘것없는 자들이 고통과 슬픔을 감내한 시간에 대한 쓸쓸한 보고에 가까운 이 소설집에는 뜨거운 열망이 펼쳐져 있거나 강렬한 메씨지가 담겨 있지 않다. 지나간 것, 사라진 것, 잊혀진 것,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것, 그것들에 대한 애잔한 시선이 오히려 도드라져 보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집이 공동체에 대한 사유라는 거창한 질문을 불러들이는 것은 여기에 ‘전업작가’구효서의 일상과 성찰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구효서는 ‘전업작가’라는 말이 어색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껏 ‘전업작가’로서의 순결성을 지키고 있는 드문 사례로, 등단(1987년) 이래 가시적인 시대이념과 지향이 사라지는 시간들, 문학이 점차 왜소해져간 시간들을 소설 쓰는 일과 함께 겪어왔다. 작가 스스로 여러번 밝힌 바 있듯이, 그에게 소설은 함께 살고 늙어가고 소멸해갈 동반자이자 그의 존재를 되비치는 거울 자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소설이 시대이념이나 문예이론을 세속화한 장소라거나 문학적 개성을 실험하는 자유공간이라는 의식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소설로 일상을 채우고 생계를 꾸리는 그에게 소설은 천박한 삶과 유리된 숭고한 어떤 것도, 문제적 세계와 만나는 통로도 아니며 한 개인의 감정의 배출구는 더더욱 아니다. 일상이자 작가 자신에 대한 성찰이 곧 그의 소설이며, 어쩌면 소설이 그의 삶을 쓰고 있다는 표현이 좀더 정확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구효서의 소설은 맑고 정갈한 차 한잔의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의 소설에는 삶의 갈피에서 풍겨나는 악취가 없는데, 이는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특이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대체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유형의 사람들이다. 「소금가마니」의 어머니나 「달빛 아래 외로이」의 ‘이천호’가 그렇듯 그들은 흘려야 할 눈물과 터뜨려야 할 분노를 따뜻하고 부드러운 두부를 만들면서 녹여내거나 가수 배호에 대한 사랑으로 비껴간다. 낯선 것, 무언지 모를 것에 끌리는 욕망의 시간을 채우고 또 흘려보내는 것(「밤이 지나다」), “부정하지 않기로 했지. 부정할 수 없었어. 부정되지도 않는 거니까. 인정하면 낯설 것도 고통스러울 것도 없고, 외려 정겨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발소 거울」), 이런 견딤의 시간들을 그들은 삶으로 명명한다. 이렇듯 구효서의 소설은 타인의 눈으로 볼 때 보잘것없고 대수롭지 않는 주변적 인생들에 시선을 모으고 그들 각자에게 소중하고 절실했던 시간들에 집중한다. 작가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녹여내는 정갈한 삶의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고통과 슬픔을 삭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아니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내맡기는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내 것이지만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죽음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면서 유한한 존재로서의 나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이는 방향 상실의 시대를 사는 산산이 흩어져버린 개인들을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 역할을 할 수 있음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비록 작가가 의식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타인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묶는 공통의 흔적을 정갈한 서정으로 그려내는 이러한 방식을, 자본이 세계를 잠식해버리고 소설이 왜소해진 시대에 대한 구효서식 발언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비록 “삶이란 살다보면 살아지는 거”라는 식의 소박하고 쓸쓸한 일종의 체념에 가까운 것을 의미할지라도 말이다. 더구나 생에 대한 책임이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이 시대에는 더이상 작가에게 갈피를 모르고 부유하는 우리의 삶을 명쾌한 논리로 해명해야 할 의무를 지울 수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혀야 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