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불안을 그리다
강영숙 소설집 『아령 하는 밤』
소영현 蘇榮炫
문학평론가. 저서로 『분열하는 감각들』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등이 있음.
yhso70@hanmail.net
한국문학에서 미메시스의 환상은 깨진 지 이미 오래다. 현실과 언어적 가공물 사이의 긴밀한 조응관계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현실은 원근법에 따라 제자리를 찾은 듯이 배치되지도, 그럴싸하게 꽉 짜인 이야기 안에 쉽게 담기지도 않는다. 사실상 현실과 언어적 가공물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한국문학이 처한 곤경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미메시스의 무능 탓이 아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범죄와 재난이 야기한 불확정적 삶 외엔 남은 게 없고, 불안과 공포가 에테르처럼 떠돌며 상시적 일상을 이루고 있다. 가출, 실직, 죽음으로 내몰리는 참혹한 삶을 살지만 어디에 대고 무엇을 호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다. 애초에 사회 전체를 부감하는 특권이 더이상 허용되지 않는 시대다. 개별 작가들의 분투에도 가시적인 비책의 마련이 쉽지 않은 이유다.
말하자면 『아령 하는 밤』(창비 2011)은 문학적 곤경에 대한 강영숙(姜英淑)의 고심의 결과물이다. 썩은내가 진동하고 황사로 뿌연, 불안하고 막막한 도시의 정조가 언어로 기록될 수 있는가. 회색빛 하늘 아래 떠도는 죽음의 기미와 삶의 흔적이 언어로 포착될 수 있는가. 불투명한 현실에 닿아 있는 촉수가 언어적 구현의 방책을 마련하는 곳, 강영숙의 소설세계가 가닿고자 하는 곳이 거기다. 이 소설집에서 미메시스의 오류를 예민하게 의식한 채로 현실에 닿고자 한 소설가적 촉수는 이야기로 번역되지 않는 불길한 정조들을 냄새 맡고 감촉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집적으로 삶의 불투명성에 가닿으며, 붙잡을 수 없는 불확정성에 눈을 둔 채 파편적으로만 존재하는 것과 에테르처럼 떠도는 분위기를 기록한다. 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의 덩어리 속에서는 사라지는 것들을,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공간과 존재를 압지에 새기듯 소설적 언어로 복원한다. ‘평온한 풍경 위로 불행한 장면들을 겹쳐놓거나’ ‘행복하고 느긋해 보이는 풍경 위로 황폐한 그림들을 겹쳐놓으면서’(「재해지역투어버스」), 듣는 이 없었던 절규와 나눌 수 없었던 공포를 언어화한다.
강영숙의 소설은 시각적 구체화가 놓치거나 망각한 ‘지나간’ 시간과 ‘빈’ 공간을 부조하면서 스스로 ‘재해지역투어버스’가 되고자 한다. 몸으로 재난의 시간을 매번 재현해야 하는 ‘재해지역투어버스’의 운전기사가 그러하듯이, 몸짱 노인이 야기했을지도 모를 불안과 공포에 맞서고자 한 오줌 지리는 할머니가 그러하듯이(「아령 하는 밤」), 도시가 품고 있는 불안과 고통, 공포와 우울의 전달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강영숙의 소설이 언어적 기록에 젠더적 인식을 새기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글쓰기에 젠더를 기입하는 일은, ‘쓰는 자’의 생물학적 성별이 글의 젠더를 결정하는 최종심급으로 작동한다는 오해를 여전히 떨치지 못한다. 지나치게 단선적인 이런 오해에서 벗어난다 해도, 젠더적 글쓰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억압당한/저항하는 여성 주인공의 유무로 이해되거나 여성적 수사학의 층위로 되돌려지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나 사실 글쓰기에 젠더적 질문을 기입하는 일은 현실을 기록하는 글쓰기 방식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현실을 불러오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일은 시선의 보편성을 의심하는 일이다. 시선에 부여된 특권을 상대화하고 나면 냄새, 소리, 감촉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다. 부감되지 않는 사회가 품고 있는 주변부적 존재에 대한 포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글쓰기에 젠더를 기입하는 일은 글쓰기가 잡아챌 수 있는 층위를 더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려는 분투가 발견한 방법론인 것이다. 강영숙의 분투는 시선의 보편성이 가시화하는 공간의 특수성을 소거하며, 그로부터 재난의 지구적 흔적을 감지한다. 재난이 야기하는 고통의 하중은 낮은 곳에서 더 커지게 마련이다. 한국의 변두리 공장지대에서 지방도시,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는 공간에서 비동시적으로 떠도는 재난이 동시적으로 현시된다. 공간이 품은 악몽이 시간의 주술에서 풀려나면서 고통받는 자들의 공간이 새로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재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가난하고 약한 자들, 노인과 여자, 어린이, 그리고 말 못하는 짐승들의 고통이 보고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공간이 품은 시간도 생명을 얻는다. 요컨대 『아령 하는 밤』은 새로운 보편성의 지평이라 할 고통의 공감대를 마련한다. 나이, 성별, 피부색을 관통하는 인류의 고통을 통각하게 한다. 물론 우리에게 전해진 공감의 영역이 고통 없는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공감의 순간마저 「불안한 도시」의 그녀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손아귀를 빠져나갈 뿐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아령 하는 밤』은 한국문학이 처한 곤경 앞에 선 우리가 발견한 하나의 비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