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 | 문명전환의 세계감각과 문학

 

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공동세계를 향한 시의 모험」 「살아 있는 역사와 좋은 시의 언어: 신동엽론」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지금은 돌봄 가치를 돌보아야 할 때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었으나 잘 보이지 않던 돌봄의 가치가 누구에게나 선명히 보이도록 전환된 데는 전지구적 팬데믹의 영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경험이 돌봄에 대한 올바른 감각과 인식을 형성했는지는 또다른 문제다. 여전히 돌봄을 환자나 노인을 위한 간호, 양육과 보호 같은 특정한 ‘신체적 돌봄활동’으로 제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할뿐더러, 돌봄을 사적인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일로 축소하면서 그것이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공적 가치의 면모가 깊이 고려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귀속된 상품으로 돌봄을 사유하고 그 가치를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체제전환을 이룰 가능성을 소거하는 문제가 상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봄의 가치에 대한 체감이 높아진 이때,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는 매개로 돌봄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보살핌(affection)과 물질노동으로 구성되며 종종 임금도 지급되지 않는 이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이 노동 없이는 문화도 경제도 정치구조도 있을 수 없다”1고 단언한다. 돌봄노동을 중심으로 문화·경제·정치가 재편될 수 있다는 의미일 텐데, 이와 관련해 프레이저는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사고실험을 제안해 보인 바 있다.2 돌봄의 의제화에 노력을 기울여온 백영경 역시 “돌봄을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고 현 사회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긴요한 실마리를”3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에 그는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재차 강조하며 ‘최일선 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기후위기 현장에서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민중이 지닌 변혁적 주체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주었다.4 이를 통해 보건대 돌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매개로 그동안 간과되어온 ‘사회적인 것’들을 다양하게 재발견하고 합당한 자리로 복원시키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사회적 질서를 상상하고 수행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 시대가 당면한 주요 과제, 불평등과 기후위기 문제를 고려하면 돌봄의 가치는 한층 더 분명해진다. 돌봄의 권리와 책임은 사회구성원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돌봄을 제공하는 주체는 특정 성별과 계급에 집중되어 있다. 돌봄명령자와 돌봄제공자, 그리고 돌봄수혜자의 자리에 누가 있는지를 따져보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가 확인된다. 나아가 다양한 생명 존재를 복잡한 의존망 내지는 관계망 속에서 살피는 돌봄의 시선은 기후위기와 관련해 우리가 자연생태와 어떻게 관계 맺어나가야 할지 유의미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5

 

 

서로 돌보는 사람들의 정치성

 

한국의 시사(詩史)에서 돌봄 논의를 촉발할 만한 현장은 의외의 자리에 있었다. 새로운 시적 경향의 출현과 그에 관한 비평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2000년대 중반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소위 ‘미래파’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담론장에서 ‘돌봄’이 화두가 된 적은 없지만, 당시 미래파 시인의 대표격으로 언급되며 주목받았던 한 시인의 작품에는 돌봄의 관점으로 포착할 만한 시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이 지닌 젠더적 성격에 무감했던 비평은 아쉽게도 이 부분을 간과했다.

 

우는 애들을 달랠 순 없어요. 난 머릿속이 출렁거릴 때까지 울죠. 애들이 날 달래지 않으면 애들이 …… 애들이 …… 익사할지도 몰라요.

 

애들은 정말 겁도 없어요. 물속에서 노래를 해요. 엄마 …… 엄마 …… 엄마 …… 저 뻐끔거리는 입들을 좀 보세요.

 

표면으로 올라온 물방울들이 잇달아 터지고 있어요. 공기가 가시처럼 찌르나 봐요. 애들이 너무 오래 물속에서 놀고 있어요.

—김행숙 「우는 아이」 전문6

 

아이의 울음과 엄마의 울음이 뒤바뀐 듯한 표현이 언뜻 낯설게 다가오지만, 아이 돌봄의 현장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전도는 너무나 사실적인 풍경이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같이 울고 싶은 엄­마, 그러한 엄마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노래처럼 “엄마 …… 엄마 ……”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 그리고 때로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을 홀로 유희하는 듯한 아이의 모습까지. ‘모성’과 ‘사랑’이라는 언어의 포장을 살짝 벗기면 거기에는 아이 돌봄의 실체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 현장에서 취약한 존재는 생존을 위해 양육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만이 아니라, 출산과 육아라는 생애주기를 통과하며 자신의 삶을 완전히 재편해야 하는 양육자이기도 하다. 아이의 울음만큼이나 그곳에서 정말로 ‘울고 있는’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특히나 양육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할당되었다면 더욱 그렇다(이 시만 하더라도 저 양육자의 자리에 남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저 엄마의 울음은 생각보다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비평은 ‘감각’ ‘탈주체’ ‘환상’ ‘난해’ ‘무의식’ ‘분열증’ 등의 용어로 김행숙 시를 분석하면서 시가 그려내고 있는 긴박한 사회적 현장으로부터 이탈했다. 사회가 여성의 자리를 구조화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불평등은 물론이거니와 돌봄의 주체로 거듭나는 행위에 깃든 고투와 갈등 혹은 그러한 경험에서 촉발된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을 더 깊이 파고들어 언어화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2000년대 중반 새로운 시적 경향에 덧붙여진 ‘난해성’이란 표지가 특정 경험에 대한 무지 혹은 간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따져볼 문제이다.

비평의 실책과는 무관하게 시인들의 작업은 계속되었으리라. 낯선 생명과 마주하고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감정의 부침과 생각을 경험한 여성 시인들은 그를 토대로 자신의 삶을 재감각하는 작업을 해나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모성신화의 반복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근래의 작업들을 되짚어보면 하재연의 『우주적인 안녕』(문학과지성사 2019)과 안미옥의 근작시7의 세계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재연의 시집이 생명에 대한 관찰을 우주에 대한 상상으로 확장하는 가운데 생명의 한 극단인 소멸에 집중하고 우주를 서정화해 탐색하는 작업이라면, 안미옥의 시는 미성숙한 아이로부터 미지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배워나가며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하는 상상을 드러내고, 아이와의 삶 속에 깃든 새로운 생성의 순간들을 예민하게 감각한다. 이들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이’와 ‘우주’ 사이에 다른 시적 경로는 더 없을까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또다른 경로는 시가 마주한 현실에서 먼저 감지해볼 수 있는 듯하다.

 

그동안 외딴섬처럼 존재하던 엄마들은 그렇게 ‘우리’로 거듭났습니다. 집 안에 갇혀 있던 ‘가정의 천사’들은 집 밖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 이 사회의 한 가운데에 서기로 했습니다.8

 

‘엄마’들이 집 밖으로 걸어 나온 이유는 돌봄제공자를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하고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양육을 비롯한 돌봄노동의 한복판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돌봄이 가족 내에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사회 전반의 구조와 인식이 바뀌어야 가능한 문제라는 점을 깨닫고 정치적 결사체를 형성하는 자리에 모였다. 돌봄을 수행하는 동안 인간의 주체성을 자율성·독립성이 아니라 상호의존성·취약성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야의 확장이 있었기에 이러한 움직임도 가능했으리라 짐작한다.9 ‘정치하는엄마들’의 모습은 돌봄노동의 수행 과정이 어떠한 사회적 행위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자발적 움직임들이 드러날 때 문학도 이에 감응하는 모습을 보일까? 다시 시로 눈을 돌려보자.

이근화의 최근 시집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창비 2021)에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쓰인 시편들이 적지 않다. 가령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에는 아이와 가정을 돌보던 여성이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로 병들어 침대 위에 누운 형상이 그려져 있다. 시의 제목은 자신과 같은 경험을 반복할지 모를, 딸의 자리에 선 이에게 발화하는 문장처럼 읽힌다. 병들어 누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이외에도 시집 여러 곳에 숨어 있다. 때로는 흙바닥에 누워 있는 물고기의 이미지로(「산갈치」), 때로는 낙상해 바닥에 누운 모습으로(「1918년」)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들은 어딘가 대체로 기진맥진한 모습을 하고 있고 조금씩 훼손된 모양새이다. 원인은 따로 적혀 있지 않지만 우리는 여성들의 과도한 돌봄노동과 어머니의 병고가 무관하지 않다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돌봄제공자의 자리에 있었던 이가 돌봄의 수혜자 자리로 이동해왔으나, 그를 돌보는 사람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집 전체가 돌봄을 둘러싼 음울한 형상들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동료 여성의 병고를 듣고 괴로운 마음을 기록한 「물방울처럼」에는 “명랑할 것, 기다림에 지치지 말 것”이란 단단한 다짐이 적혀 있고, 장삼이사들의 삶이 기원하는 단순하고 투명한 미래의 꿈이 생기있게 드러나기도 한다.10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화장실 바닥이었다

어리고 작은 새 한마리

파닥거리고 있었다

살려고 하는 것인지

죽으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을 흘려 보내는 내 손은

삶을 위한 것인지

죽음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새는 흘러가지 않고

내 발밑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투명한 울음소리가 따가웠다

씻어내도 손은 붉었다

나뭇가지 하나 잡지 못했다

엉뚱하고 잔인한 방향으로

물이 흘러갔다

살아서 혹은 죽어서

초록 손가락이 되어서

흔들리는 이끼가 되어서

산 새 꿈틀거렸고

죽은 새 속삭였다

괜찮다, 어서 가라

멈추지 않는 목소리로

몸을 바꾸었다

비린내가 진동했고

몹쓸 배고픔이 밀려왔다

숨은 내 얼굴이 나를 찾아올 때

삶 혹은 죽음의 방향으로

어리고 작은 새가 파닥거렸다

끝나지 않는 바닥이었다

멈추지 않는 울음이었다

—「산 새 죽은 새」 전문

 

화장실 바닥에서 파닥거리는 어린 새의 이미지에서 우리는 어떤 생명의 위급함 내지 위험을 본다. ‘붉은 것이 묻어난 손’을 볼 때, 저 어린 새는 여성(노동자)의 과로와 그로 인한 불길한 병세를 암시하는 듯하며, ‘새’는 ‘생’이 훼손된 표지로도 읽을 만하다. ‘누워 있는 어머니’의 삶이 젊은 여성(노동자)에게 유전된 것일까. 그런데 시가 중반부를 지나 다른 차원의 상상으로 번져갈 때, 우리는 이 시의 자리에 서서히 현실의 어떤 비극이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벌어진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현장과 이 시에 그려진 한 생명이 피 흘리는 화장실이 겹쳐지는 것이다. “엉뚱하고 잔인한 방향”이라는 표현에는 시가 그 현장을 소환해도 되는지를 주저하는 시인의 의식이 살짝 비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생동하는 현실이 개입하는 순간, 시는 자신의 자리를 개방한다. 여성혐오가 빚어낸 부당한 죽음과 그에 동반된 사건이 이제 시의 주인이 되어서 발화한다.

이 발화를 끝없이 애도하는 문학의 목소리로 의미화할 수도 있다. 세월호에서 시작하여 여전히 빈번한 산재사건까지, 사회적 참사라고 불릴 만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애도하는 문학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 시에서 가장 특별한 목소리, “괜찮다, 어서 가라”는 애도로 한정 짓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문맥상 죽은 새의 목소리처럼 보이지만 ‘목소리가 몸을 바꾸고’ “숨은 내 얼굴이 나를 찾아”온다는 표현은 저 발화가 누군가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누구’들의 ‘공동의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강남역 비극 이후 펼쳐진 일련의 흐름, 그러니까 공동의 일로서 이루어진 ‘자발적 말하기’ 과정의 목격 역시 저 발화가 만들어지는 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 애도의 자리에 등장한 ‘살女주세요, 살아男았다’는 메모11는 사건을 둘러싸고 생산되는 목소리가 개별자의 것이라기보다 집합적 주체의 것에 가깝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서 가라”는 표현에서 생략된 처소는 단지 피해자나 생존자의 자리는 아닐 것이며 슬픔과 공포를 넘어선 어딘가일 것이다. 우리는 그곳이 서로 돌봄을 통해 사회적 주체로 거듭나 고립을 넘어 확장된 세계를 사는 주인의 자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멈추지 않는 울음”이라는 표현도 중의적이다. 이는 애도에 끝이 없다는 말이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울음’이라는 뜻도 함께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애도의 노래이자 고장 난 세계를 회복시키려 애쓰는 자들의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투쟁가이다. 이를 근거로 최근 우리 시단에 여성들의 정치적 연대와 그를 통해 바닥을 새롭게 다지는 힘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또 한권의 시집, 박소란의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을 보자.

 

컵은 조용히 일러주었다 나를 찾아온 누군가

빈 식탁 앞에 한참을 앉았다 갔다고

말 못할 속내를 다독이듯 물을 따라 한모금 삼키고 갔다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나는

그를 알 것만 같고

타는 표정을 몸짓을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고

 

참으로 이상한 일

 

한번은 더 찾아오리라

그 누군가

공연히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 되어

 

끓는 자리에 누워

물을 생각한다 한 파리한 입술이 스민 물을,

고작 물을

한모금 마신다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내 집에 왔다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어느새 혼곤한 잠이 들었다

—「물을 마신다」 부분

 

시의 앞선 대목은 “긴긴밤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누군가의 흔적을 느끼며 물이 반쯤 줄어든 컵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식탁에 놓아둔 컵의 물이 반 줄었다. 아마도 그것은 자연스러운 증발 현상이었을 테지만, 화자는 누군가 자신의 집에 다녀갔고 목마른 그가 물을 마셨다는 상상에 빠져든다. 그러고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는 말을 더하고 골똘해진다. 자신의 상상이 어째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는지, 타인과 타인의 목마름을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지를 되짚게 된다. 시인은 그 이유를 따로 적지 않는다. 대신 타인에 대한 또 한번의 기다림과 화자의 들끓는 심정을 그릴 뿐이다.

누군가는 저 기다림과 들끓는 심정에서 깊은 외로움 내지 고독을 읽을 수도 있겠다. 시집의 해설을 쓴 장이지는 이 시집의 한 축으로 원룸에 기거하는 청춘의 이미지를 끌어낸다. “2000년대 이후를 대표하는 이 사회학적인 공간이 ‘나’를 지배한다. 그 비좁은 공간에 산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12고 설명하면서 비좁은 공간에서 자신의 타자성에 골몰하고 그것을 은폐하는 이중적 주체성을 읽는다. 박소란 시가 생성되는 구체적 삶의 공간을 지목한 점은 동의하지만, 여기서 ‘나’의 계급적이고 젠더적인 차원을 두루 포착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시에 그려진 원룸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하자면 ‘정상가족’에 합류하지 않은 1인가구 여성의 거주공간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며, 시집의 화자가 원룸에 기거하며 어떤 안정 또는 공포를 느끼는지 그 이중적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내면에 깃든 타자성만큼이나 원룸을 둘러싼 세계에 그늘져 있는 어떤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시집에 그 폭력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지 표면화되어 있지는 않다. 대신에 그것은 ‘기미’로 있다. 이 특성은 시집에 드리워진 어떤 폭력의 감각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묘한 실감을 부여한다. 그 기미는 「모델하우스」나 「전기장판」에서처럼 화려한 집과 가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의 곁을 맴도는 무엇인가로 드러나는가 하면, 「이 단단한」이나 「내일」의 던져진 “돌” 혹은 “벽돌”처럼 주변 이웃이나 친밀했던 상대가 벌인 횡포의 흔적으로 포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물을 마신다」에서 자신의 집을 예고도 없이 몰래 다녀간 누군가를 속 깊이 이해하고, 심지어 그를 기다리기까지 하는 개방된 마음의 상태는 화자 스스로에게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이처럼 참으로 이상한 일이 종종 일어난다. 가령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는다/잡았다 놓는다//그러다보면/문은 스르르 열리곤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아귀힘을 풀곤 하는 것이다”(「손잡이」)라며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문을 여는 장면을 그릴 때나, “누가 자꾸/손을 가져가요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요”(「누가 자꾸」)라며 그 손이 자신의 허기와 슬픔까지 거두어간다고 고백할 때처럼 말이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길어 올려지는 단어는 ‘누군가’와 ‘당신’이다. 시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나의 축으로 시집을 구축했다.13 ‘누군가’는 때로 정체불명의 상태로 공포를 자아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당신’ 쪽으로 기운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나의 삶을 원룸이라는 비좁은 사적 공간에서 구출하는 불특정 다수의 이미지를 품고도 있다. 모르는 누군가와 손을 맞잡는 일은 광장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다. 세월호와 촛불혁명 그리고 여성들이 손을 마주잡고 공동의 삶을 돌보았던 기억이 ‘누군가’를 향한 호출을 단 한번에 그치지 않게, 이 시집 전체를 통해 여러번 곡진히 나눠 부르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타인이라는 자리를 마련하는 데 극도로 조심스러웠던 박소란의 시에도 그사이 ‘누군가’의 친밀함이 조금씩 새겨지고 있는 것 같다.

이근화와 박소란의 시집은 재현의 윤리를 들어 누군가의 모습을 대신 그리는 일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서던 문학이 이제 누군가의 목소리를 함께 내는 일에 조심스럽게 동참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는 재현의 단위가 독립된 인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있음’의 상태로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를 되묻게 한다.

 

 

‘녹색 문법’을 받아 적는 일

 

라틴어로 돌봄(cūra)이라는 말에는 “자연과 함께 삶을 생산하는 일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14고 한다. 굳이 어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늘날 생태와 돌봄의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문학에서도 자연은 배경으로든 대상으로든 언제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지만, 특히 자연생태를 다루는 문제가 각별히 주목받은 시기가 있었던바, 이는 21세기로 넘어오기 직전의 일이고 21세기의 문턱에서 ‘생태시’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소멸했다.

김수이는 현실의 모순과 상처를 소거한 ‘자연의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통해 자연을 미학화하는 90년대의 시적 경향이 빠져들었던 문제점을 짚었다. “미학적으로 축소되고 재구성된 자연과,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시인들의 심리적이며 자의적인 현실”15의 영토는 생각보다 좁고 답답했다. 시 속에서 시적 주체(인간)와 대상(자연)의 행복한 동일성이 구성되고, 갈등과 균열이 없다는 진단은 특히 주목할 부분이다. 거기에 덧붙여진 “치열한 질문은 사라지고 안정된 대답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형국”16이라는 표현은 묘하게도 2020년대 한국문학이 증상처럼 앓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과거를 균형감 있게 되짚어보기 위해서는 김수이의 날카로운 진단과 더불어 나희덕의 어진 평가도 살펴야겠다. 나희덕은 “시에 ‘자연’이 호출되는 것은 낭만적 동일화의 욕망보다는 문명적 삶을 극복하려는 본능이나 의지와 관련이 깊다”고 진단한다. 조화로운 현실이 부재할 때 “시는 그러한 결핍을 ‘기억’과 ‘자연’을 통해 역상(逆像)으로나마 비추”며, 그러한 우회로를 통해 서정시의 영역이 두터워지고 다양해지는 중이라는 것이다.17

두 진단이 대립쌍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시가 자연을 어떻게 ‘문화화’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다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연생태의 언어가 대상화되기 쉬우며 그만큼 그 언어의 특이성이 포착되기 힘들다. 자연에 ‘대해서’ 혹은 자연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생태가 스스로 발신하는 언어를 좀더 깊이 고민하는 방법이 시에서도 그리고 비평의 영역에서도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기후변화를 생각하려면 생태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생태적으로 생각하려면 우리는 자신이 더 넓은 자연 세계에 묻어 들어가 있는 방식과 더불어 비인간 사물이 독자적인 역능과 효험을 갖추고 있는 방식도 생각해야 한다.18

 

인류세(人類世) 시대의 전지구적 팬데믹을 경험하며 자연생태를 더욱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우리들에게 브라이언트(L. R. Bryant)가 제시한 ‘존재의 지도학’19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많은 암시를 준다. “비인간 사물이 갖춘 독자적인 역능과 효험”이란 구절은 자연이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아니라, 자연에게 우리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하며, ‘자연과 연결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책임을 어떻게 분배하고 조직해야 하는지 특별한 시야를 확보해준다. 난해하고 추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 곁에는 이미 더 넓은 자연세계에 들어가 살면서 자연의 언어를 예민하게 듣고 자연과 동일한 위상에서 협력하며 살아온 존재들이 있다. 가령 농사는 하늘과 땅이 짓고 농사꾼은 거들 뿐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이때 농사꾼의 거듦은 단순히 미약한 힘을 보탠다는 차원이라기보다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단념할 줄 아는 섬세한 상호작용을 해나간다는 뜻일 테다.

최정은 많이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첫 시집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는 대도시에서 방황한 청춘의 기록이자 초년생 임금노동자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두번째 시집 『산골연가』(리토피아 2015)부터는 삶의 터전을 바꾸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노동의 일상을 시로 옮겨내는 중이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의 세번째 시집 『푸른 돌밭』(한티재 2019)이다. 누군가는 산골로 들어가 시를 쓰는 삶을 낭만적 도취처럼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상상 속에나 가능한 일이다. 자연과 농촌은 도피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해 몸을 바꾸고 의식까지도 갈아엎어야 하는 격렬한 훈련장이다. “허리 휘어져라 일할수록/손마디만 굵어지는 이상한 직업”(「산골농부」)이라는 표현처럼 자연과 온몸으로 마주하는 노동은 뼈마디를 바꿔야 할 정도로 고되다. 그런데 한편으로 농사는 생태의 문법을 배우고 그것의 가치를 경험하는 과정, 생명과 밀착하여 그것을 돌보고 키우는 일이 되기도 한다.

 

한 꺼풀

허물 벗는 데

산골 생활 다섯 해가 걸렸다

 

간질간질하던 매미 등이

허물을 벗으면 후련해서

첫울음이 저절로 터지는 줄 알았다

 

그 등이 아픈 줄은 여태 몰랐다

—「매미의 등」 전문

 

『푸른 돌밭』에는 시인이 다섯해 동안 벗으려 애를 썼다는 ‘허물’의 내용이 곳곳에 그려진다. “먹고 살겠다고/이 땅에 흘린 허물”(「돌탑」), “바람 빠진 타이어” 속 같은 자신을 속이고 대충 눈 감은 채 삶을 운행하며 살았던 일(「무섭지 않아?」), “계곡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생명”을 모르던 시절, 공사를 일삼는 “포클레인 삽날”과 다르지 않았을 자신의 삶(「시농제」)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허물을 벗은 뒤에 찾아온 것은 신생(新生)의 삶이 아니라 낯선 고통이다. 농사짓는 사람의 등은 한여름 모든 생명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폭염을 견뎌내야 하는 등이고(「긴 한낮」), 그의 육체는 힘든 가뭄이 계속되어도 “올 농사는 좀 힘들다”라고 적는 대신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적으며 자신의 등 뒤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있을 희망의 기미를 놓치지 않으려 긴장해야 한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쉽사리 적응하기 어려운 자연의 힘 앞에서 초보 농사꾼이자 시인이 애를 먹는 동안 다행히도 시의 등에는 힘이 붙어, 그가 시적인 순간을 들어 올리는 마디마디도 늘어난다. 대도시에서 생존을 위해 질주하던 동안 감지하지 못했던 것, 즉 자연의 운행과 목소리에 조금씩 눈을 뜨며 시인은 ‘생태문맹’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된다.

 

비가 내려 밭갈이가 늦어지자

씨감자는 삐죽하니 싹이 올라와

빨리 심어 달라 아우성이다

 

진달래 필 때 심으라는

어르신들 말씀 생각나 마음 급해진다

 

팔다리 쑤시는 것도 모르고

싹이 부러지거나 말거나

비 오기 전에 다 심겠다고 난리를 친다

 

그 사이 검은머리딱새는 첫 알을 낳았다

 

꼬박 삼 일 동안 감자만 심다

손톱에 낀 흙 때가 되어 방바닥에 누워버렸다

 

영 늦어버린 벚꽃이 피려는지

꽃망울은 탱탱하게 살이 오른다

—「감자 심기」 전문

 

화자가 급한 마음에 난리를 치르듯 처리한 일의 모습에는 어딘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다. 화자의 경작 행위에는 어떤 조급함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만 보일 뿐, 확정과 예측이 불가한 자연의 운행에 대한 감각이 없다. 반면 “진달래 필 때 심으라는” “어르신들”의 말은 어떤가. 여기에는 오랜 경험에 기초한 직관과 가변적인 상황에 유연한 어떤 감각이 실려 있다. 정확한 측정이 애매한 자연의 속도와 변화에 열려 있는, 조금은 느리면서도 여유가 풍기는 감각 말이다. 이를 개념적 용어로 표현하면 ‘토착지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특정한 환경이나 지역에 거주하며 오랜 시절 경험에 의해 체득한 지식체계를 의미한다. 토종씨앗이 생물다양성을 유지시켜주듯, 토착지식은 문화다양성을 유지시켜주며 생태계의 순환과 관련한 유용한 지혜를 보존한다.20 또한 토착지식은 그 지역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유지된다. 네트워크는 그 안에서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촉발함과 동시에 그러한 작동으로써 네트워크 자체를 유지해가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성을 지속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이 네트워크 안에는 지역의 삶과 이웃21이 함께 있다. 최정이 농사를 지으며 써나가는 시는 저 토착지식에 내재한 생태감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의 백미는 시의 운행에 갑자기 끼어들어 알을 낳는 검은머리딱새의 형상이다. 인간이 난리를 치르듯 노동을 한 사이, 자연도 자신의 일을 무연히 수행하고 있었다.22 시에서 검은머리딱새의 모습이 독립된 연으로 처리되었듯이 자연의 일은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게다가 딱새의 산란에서 개화 직전 벚꽃의 형상까지 그린 시의 후반부 전개를 살피면 인간 또한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 이때 산란과 개화는 화자의 노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나, 또한 그것이 전혀 무관한 사태라고 말하는 일도 주저된다. 인공의 길과 자연의 길이 느슨하게 연동 중인 이 형상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우리에게 묘한 자극을 준다. 이 연결성은 인간이 비인간의 영역인 자연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할 어떤 감각의 구체적인 면모처럼 읽히기도 하고, 생명을 돌보는 일을 수행하는 자가 오랜 경험 속에서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생명감수성’의 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시에서 또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상은 전쟁 같은 노동을 치르고 난 후 시인의 육체이다. 흙빛으로 물들어 방바닥에 누워 있는 시인의 몸은, 이 시가 우리에게 전하는 감각이 다름 아닌 흙을 만지는 노동 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알려준다. 당연하게도 생태적 감각을 배우고 그것을 체화하기 위해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소멸되어가는 농촌과 더불어 농사짓고 사는 삶을 그리는 문학을 돌보고 보존하는 일은 우리의 책임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이 곧 기후위기 시대 우리에게 특별한 지혜와 감각이 될 토착지식과 생태문해력을 전수받는 일과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23 앞서 언급한 브라이언트가 존재자들의 상호작용을 논하면서 이야기나 텍스트같이 담론적인 것 또한 공평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를 생산하기 위한 행위주체소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는 점을 살펴도 좋겠다.24 흥미롭게도 농부-시인 최정의 시에서도 저 돌봄의 형태가 발견된다.

 

조금씩 갈라지고 있다

 

씨감자 심고 덮어 준 흙이

가늘게 떨린다

 

흙을 밀어 올리느라

애쓰기를

 

사나흘

 

흙 틈으로

누르스름한 얼굴

가까스로 내밀고 하는 말

 

간신히 살아간다

 

무거운 말씀

감히 받아 적었다

 

따가운 볕 아래

감자 싹은 한나절 만에 푸르뎅뎅해진다

 

진초록 잎으로 부풀어 오른다

—「감자 싹」 전문

 

“권정생 선생의 글귀”라는 인용 표기가 더해진 “간신히 살아간다”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과 농부 시인 전우익 선생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말이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내는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전우익 선생이 꺼내자, 권정생 선생이 잘 사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소나무처럼 그렇게 간신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시인은 생명의 약동을 관찰한 자신의 경험 위에, 자연에 기대 인간이 지향할 삶의 태도를 살폈던 앞선 세대의 목소리를 겹쳐 놓으며 자연의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가지의 받아쓰기가 있는 셈이다. 녹색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애쓴 전 세대의 목소리를 받아 적은 일, 그리고 자연 내지 땅이 하는 말을 세밀한 관찰로 받아 적은 일. 이 둘 모두 우리 사회 속에 ‘간신히’ 살아남아 있는 목소리를 기록하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더불어 그 목소리들이 기후위기 시대에 자연생태계를 돌볼 지혜를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공유의 영역으로 퍼뜨려가야 할 지침인 점에서도 유사하다.

“간신히 살아간다”는 말의 울림은 자신의 권리를 자신만의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공존 속에서 빚어내고자 하는 지혜로운 생명의 감각처럼 들린다. 또한 저 말을 무겁게 받아 적는 모습에서는 자연의 권리를 순순히 인정하며 돌보는 인간의 감성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지구생태계를 이루는 모든 주체의 권리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지구법’의 이념을 떠올리게도 한다. 최정의 받아쓰기는 아직 우리 사회에 뚜렷하게 자리하지 못한 자연생태의 언어를 씨앗처럼 뿌려 우리에게 ‘녹색 문법’과 ‘생태적 문해력’을 공유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풀과 흙에게/세금”을 낸다는 말(「산골농부」)이나 자신이 쓴 시를 두고 “앞산에게 물어보고/뒷산에게 확인”받는다는 표현(「삼시 세 끼」)이 단지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하는 실천적 방법처럼 들리기도 한다.

 

 

돌보는 일과 문학하는 일

 

뼈 빠지게 착취당한 우리 엄마들을 위해 모두 같이 묵념하겠습니다.25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하나씩을 무등 태워 인류세를 건너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26

 

‘정치하는엄마들’의 창립총회는 앞의 첫번째 인용처럼 묵념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민중의례의 형식을 전유하는 저 묵념 가운데 ‘정치하는엄마들’에서 ‘엄마’의 자리는 역사의 지평에 새로운 관계의 망을 연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자신의 주변과 관계적 지평을 생성하는 구체적 행위가 돌봄이라면, 돌봄을 정치화하는 저 엄마들의 묵념에는 삶과 죽음의 구분을 무화시킴으로써 ‘살아 있음’의 지평을 한번 더 열어내는 힘, 나아가 ‘진정한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하고 있다. 당연히 이 질문은 사적 영역의 테두리에 갇혀서는 답을 구하기 어려우며 공동영역을 재구성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이들이 ‘우리 만납시다’라는 말에 정동적으로 접속하고 만남에 동참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저 ‘돌봄’의 자리에 ‘문학’을 넣어도 말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조효제는 인류세에 걸맞은 ‘지질학적 시간관념’을 강조하면서 생태위기를 돌보기 위한 선의의 행동이 즉각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내지 않더라도 그것을 꾸준히 지속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하며, 인용문과 같이 시적인 표현을 제시한다. 아니, 저것은 시적 표현이 아니라 인류세 시대에 우리 시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방향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 문학에서 작품의 깊이와 가치는 그 지향과 결코 무관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1. 낸시 프레이저 「자본과 돌봄의 모순」,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330면.
  2. 이 제안에 따르면 모든 일자리가 돌봄제공자이자 노동자인 사람들을 위한 방식으로 고안되고, 그에 따라 생계부양노동과 돌봄노동 사이의 성별 대립적 설정을 해체하여 젠더 정의가 증진된다. 또한 이러한 해체는 공적 환경과 사적 환경의 이분법을 제거하며 동등한 사회참여를 제고할 것으로 예측된다.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2017 참조.
  3.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4면.
  4. 백영경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참조.
  5. 서보경은 조안 C. 트론토(Joan C. Tronto)의 돌봄에 대한 정의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 고쳐나가는 모든 활동”을 인용하면서, 이때 돌봄의 대상에는 우리의 몸과 자아, 환경이 모두 포괄된다고 설명한다. 덧붙여 “삶/생명을 유지하는 복잡한 관계망을 엮어내고, 그 안에서 가능한 한 온전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돌봄”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자연생태에 연관된 돌봄 논의를 펼칠 때 참조할 만한 견해이다. 서보경 「서둘러 떠나지 않는다면: 코로나19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돌봄의 생명정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0년 가을호 39면 참조.
  6. 김행숙 『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
  7. 「사운드북」이라는 시가 대표적이다. “다음 페이지를 열고/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와요//(…)//그냥 배울 수는 없고요/보고 배워야 가능합니다//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와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유아용 사운드북을 소재로 해서 쓰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인터뷰 「안미옥×김나영 사랑을 쓰고 나서 생각하게 된 것은」, 김리윤 외 『시소 첫번째』, 자음과모음 2022 참조.
  8. 정치하는엄마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생각의힘 2018, 8면.
  9. 돌봄의 수행이 인간을 상호의존성과 취약성을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견해에 관해서는 에바 페더 커테이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나상원 옮김, 박영사 2016 참조.
  10. 미래를 위해 여유있는 마름질을 해두는 세탁소 아저씨의 모습을 그리거나(“시접을 넣는다,는 세탁소 아저씨의 말을 생각해본다”), 가게들의 상호에 담긴 희망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서술(“백광이나 거성, 이런 가게 이름을 중얼거려본다”)이 그렇다.
  11.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는 자리에 붙여진 포스트잇의 한 구절이다. 「2618건 강남역 추모 메모 모두 공유합니다」, 뉴스래빗 2016.6.16 참조.
  12. 장이지 해설 「바로 거기, 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닫힌 문』 160면.
  13. 실제로 『한 사람의 닫힌 문』에는 ‘누군가’를 그리거나,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듯 보이는 시들이 많이 등장한다.
  14. 채효정 「누가 이 세계를 돌보는가?」, 『오늘의 문예비평』 2020년 겨울호 49면.
  15. 김수이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 『서정은 진화한다』, 창비 2006, 18면.
  16. 김수이, 같은 글 22면.
  17. 나희덕 「기억과 자연, 그 지층 속으로」,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36면.
  18. 레비 R. 브라이언트 『존재의 지도』,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21~22면.
  19.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이나 상호작용들의 지도와 이들 관계가 존재자들의 움직임과 되기를 구축하는 방식의 지도”를 의미한다(같은 책 27면). 브라이언트는 ‘비인간 존재자’들과 인간 존재자들을 모두 기계로 보고 이들의 상호작용이 어떤 사건들을 형성하고 불러오는지를 해명한다.
  20. 토착지식과 토종씨앗에 관련한 내용은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창비 2022, 230~38면 참조.
  21. 한국 시단에서 토착지식과 관련한 네트워크 속 ‘이웃’의 형상을 잘 그려내는 대표적 시인이 김해자이다. 그의 최근 산문집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한티재 2022) 또한 같은 성격의 작업물이며, 흥미롭게도 이 책의 부제는 ‘땅과 이웃, 시 이야기’이기도 하다.
  22. 최원식은 「감자 싹」을 거론하며 최정의 시 쓰기를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노동 앞에 겸허해지는 최고의 순간을 ‘받아 적는’” “경건한 시작업”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푸른 돌밭』 뒤표지의 추천사 참조.
  23. 그러고 보면 90년대 말 ‘농업박물관’을 소재로 한 이문재의 시편들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살아 있는 농촌의 현장을 박물관의 자리로 옮겨놓음으로써 어떤 낙담을 너무 빨리 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24. 레비 R.브라이언트, 앞의 책 8장 참조.
  25. 정치하는엄마들, 앞의 책 50면.
  26. 조효제, 앞의 책 317면.

송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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