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시인 김지하가 이룬 것과 남긴 것들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평론집 『살아 있는 과거』 『문학과 시대현실』 『모래 위의 시간』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민중시대의 문학』 ,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등이 있음.
mwyom@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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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8일 시인 김지하(金芝河)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강원도 원주 기독병원에 마련된 그의 장례식장은 너무도 썰렁했다. 비록 말년의 행보가 실망스러웠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민주화투쟁과 수난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자 가슴을 울렸던 독보적인 시인임이 분명한데, 그런 사람을 이렇게 보낸다면 이것은 끝내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으로 남을 거라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을 공유한 분들이 뜻을 모았고, 그의 오랜 동지였던 이부영(李富榮) 선생이 그 뜻을 대표하는 추진위원장을 맡아 49재가 되는 6월 25일 서울 천도교 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다행히 넓은 강당이 꽉 차도록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시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로하고 혼령의 천도에 함께했다.
다음의 글은 이 자리에서 발표한 추모사를 바탕으로 대폭 깁고 보탠 것이다. 추모의 취지를 잊지 않으려 하되, 김지하의 행적과 문장들 가운데 의문스럽게 느껴지는 점이 있으면 이에 대한 지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을 크게 결례라고 생각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그와 나의 생전의 허물없는 관계에 말미암는다. 지하는 나보다 1년 먼저 1959년 미술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다가 1961년 미학과가 문리대로 옮기는 바람에 한 캠퍼스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60년대 초반 동향의 소설가 김승옥(金承鈺)을 통해 인사를 텄지 싶고 그를 따라 처음부터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휴학을 거듭한 끝에 나보다 2년 반 늦게 졸업했고, 그뒤 반세기 넘도록 아주 밀착된 적은 없으나 아예 멀어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마음에 없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사이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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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이후 대학가는 유례없는 해방감과 신생의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과도정부를 거쳐 장면정부가 수립되는 동안의 사회적 자유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억눌려 있던 혁신계 중심의 민족운동이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러한 자유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1960년 9월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로서, 그 지도 아래 11월에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민통연)이 발족하고 이어서 1961년 5월에는 전국적 대학생 조직의 결성이 예고되면서 준비선언문을 통해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제출되었다.
이 구호는 놀라운 파급력으로 국민들의 선풍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인 것은 대학가의 ‘민통연’ 활동에 늘 냉소적으로 대응해오던 김지하가 “판문점 학생회담에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분야에서 (…) 남한 학생대표로 선정”된 데에 동의한 사실이었다. 이 일련의 작업을 주도한 것은 조동일(趙東一) 학형이었는데, 김지하로서는 아마 이것이 공적인 정치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최초의 결정이었을 것이다.(『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1』, 학고재 2003, 377면 참조. 이하 『회고록』)
그러나 독재 반대와 시민적 자유의 쟁취라는 경계를 넘어선 운동의 시도는 대한민국에서는 언제나 위험을 불러오곤 했다. 그 무렵 원주 기독회관의 강연에 오신 함석헌(咸錫憲) 선생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다. 역시 그 무렵 인사를 드리고 평생 스승으로 모신 장일순(張壹淳) 선생도, 또 6·25 전후에 좌익으로 활동했던 지하의 아버지도 다가오는 위험을 예고했다. 하지만 그는 ‘조직이 아닌 개인으로 참가하는 것’이기에 남북학생회담 참가를 승낙한 것이었다고,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서 말한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죽임의 자리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마지막에서의 참가였다.”(『회고록 1』 377면)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그 결과 닥칠 수난과 고통을 감수한다는 자의식, 이것은 김지하의 생애 전체를 두고 보더라도 여러번 되풀이된 선택의 패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무튼 그 연장선에서 지하는 1964년 봄 박정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시위에 앞장서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6·3항쟁이라 불리게 된 이 사건으로 그는 첫 감옥살이를 했다. 김지하의 삶에 대해 우리가 던지는 첫번째 질문은 어쩌다 그가 투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나 하는 것인데, 그는 자기 ‘행동’이 어떤 조직이나 이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필연성에 따른 개인적 열정의 산물이었다고 대답한다.(『회고록 2』 341면) 즉, “언제나 조직 밖의 활동가”(같은 책 42면)라는 자의식이 그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그는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순간에도 “역사와는 반대되면서, 그럼에도 역사로 돌아가는 (…) 내면적 카오스의 생성의 시간”을 막연하지만 생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회상한다.(같은 책 54면) 논리적 확신이 아닌 ‘내면적 카오스의 시간’이야말로 지하에게는 다름 아닌 ‘시의 시간’이었다. 평생에 걸쳐 그의 영혼을 지배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시에 대한 갈망이었다: “참다운 시는 가장 지혜롭고 최고로 과학적인 사상마저도 압도한다.”(같은 책 67면) 넉달에 불과했지만 이때의 감옥 체험으로부터 여러 편의 시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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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하고 올챙이 문학평론가로서 어느 출판사 편집사원으로 일하던 내가 막연한 지인으로 지내던 지하를 좀더 자세히 알게 된 계기가 왔다. 1964년 어느 철이던가, 을지로5가 뒷골목의 어느 술집에서 학우들의 시화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학내 게시판에서 보았다. 그 시화전에서 나는 처음으로 ‘金之夏’라고 서명된 그의 시를 보았다. 지하의 시뿐만 아니라 거기 걸린 다른 학우들의 시도 대부분은 그동안 내가 읽어오던 우리나라의 시적 관습과는 거리가 먼 매우 실험적인 것들이었다. 후일 영화감독이 된 지하의 고교 동창 하길종(河吉鍾)의 작품 「태(胎)를 위한 과거분사」는 특히 과격한 것이었는데, 얼마 뒤 그 제목으로 얄팍한 시집도 나와서 대학 구내서점에 진열되었다. 김지하 본인은 그 시절 자기가 슈르(초현실주의) 풍의 모더니즘 계열 시를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다가 얼마 뒤 나는 지하의 학술발표를 듣게 됐다. 박종홍(朴鍾鴻) 교수가 늘 철학개론을 강의하던 대형 강의실에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규 강의가 끝난 뒤의 어둑한 분위기와 칠판에 분필로 갈겨쓴 제목 ‘추(醜)의 미학’, 그리고 드문드문 앉아 있던 청중의 뒷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괴기·왜곡·과장·골계·해학·풍자 등 정통미학에서 저급한 것으로 취급해오던 미학적 요소들의 적극적 가치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는데, 역시 나에게는 낯설뿐더러 적잖은 충격이었다. 지하 자신에 의하면 그 발표는 헤겔의 제자인 19세기 독일 철학자 칼 로젠크란츠(Karl F. Rosenkranz, 1805~79)의 저서 『추의 미학』(Ästhetik des Häßlichen, 1853)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주목한 것은 그가 로젠크란츠라는 서구 학자의 이론을 수용하되 단순히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하는 로젠크란츠의 미학을 발판 삼아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에 새로운 미학적 생명을 불어넣을 이론적 전이(轉移)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의 미학’이라는 똑같은 이름 아래 로젠크란츠가 서구 근대미학의 변화의 양상들을 보고 있었다면 김지하는 잠들어 있던 한국 전통미학의 새로운 회생 가능성을 거기서 찾아내고 있었던 셈이다.
김지하는 일찍이 미학과 선배 김윤수(金潤洙)를 통해 루카치(G. Lukács)를 비롯한 사회주의 계통의 미학사상과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같은 전위시인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는 초현실주의 풍의 시를 습작 삼아 쓰면서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파격성과 천재성에 심취해 있었다. 이렇게 그는 서구 모더니즘의 다양한 경향에 여전히 한발 담그고 있으면서도 주로 조동일 학형과의 교류를 통해 탈춤이나 풍물 또는 민요나 판소리 같은 우리의 전통예술의 중요성에 차츰 눈을 떴고, 1960년대 후반 월간지 『아세아』에 연재되던 이용희(李用熙) 교수의 회화사 연구에 자극받아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 모든 학습을 김지하 방식으로 수렴한 ‘추의 미학’은 초현실주의 같은 모더니즘 서구 예술의 긍정적 측면을 우리 자신의 민족·민중미학 전통의 고유성 안에 흡수하려는 대담한 시도였던 셈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지하의 민중예술·민족전통에 대한 경사가 단지 이론의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의 경우 오히려 이론에 앞선 광범한 실험과 실천이 있었다. 이 방면에서도 선편을 잡은 것은 조동일이었다. 이미 6·3항쟁 무렵에 “조동일 형은 ‘원귀(怨鬼) 마당쇠’라는 마당굿을 시도하였고 그것은 단식반의 ‘박산군(朴山君)’을 거쳐 훗날 ‘호질(虎叱)’과 ‘야, 이놈 놀부야!’ 등의 탈춤이나 마당굿으로 발전했으며, 그 이후 풍물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의 꽃다운 남상(濫觴)이 되었다.”(『회고록 2』 38면) 여기서 무엇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이때 처음으로 김지하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당면한 정치투쟁과 민중적 문화운동의 결합이 ‘목적의식적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1968년 통혁당사건을 계기로 조동일이 운동의 현장을 떠난 뒤에는 김지하가 거의 혼자 대학가의 민족문화운동을 이끌게 되는데, 운동은 더 많은 후배들의 참여로 더 여러 분야로 확산되었다. 1970년대 지하가 감옥에 갇힌 뒤에도 채희완의 마당굿, 임진택의 판소리, 이애주의 춤, 김민기의 노래, 김영동의 국악 등 연행예술의 여러 장르들은 복고주의의 낡은 틀을 깨고 때로는 문학이나 미술보다 더 급진적인 정치성을 띠면서 대학가를 넘어 노동현장 및 농촌사회의 저변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혁명’이라 할 만한 측면을 지닌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1960년대 중반부터 지하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폐결핵 요양차 입원해 있던 역촌동 병원에도 몇차례 면회를 갔다. 지하의 삶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미술대 후배 오윤(吳潤)과의 친교인데, 부친인 소설가 오영수(吳永壽) 선생 댁으로 가는 길을 여러번 그와 동행했다. 갓 결혼한 나의 셋방이 오선생 댁 가까운 우이천 냇가였는데, 골목길 끄트머리에 있는 ‘초롱집’이라는 옛날식 주막에서 한잔하고 오선생 댁으로 향했던 것이다. 때로는 오선생 댁에서 윤이 누나 오숙희 선배가 주최하는 조촐한 국악이나 판소리 감상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지하가 오윤의 남다른 미술 재능에 깊이 매료된 것은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오윤의 미술대 친구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동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현실 동인’이었는데, 지하가 작성하여 김윤수 선생의 교열과 오윤 등의 독회를 거친 ‘현실 동인 선언’이 팸플릿으로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동인들 작품의 전시회도 계획되었으나, 미술대 교수들의 미움을 사서 작품은 압수되고 전시회는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그때 뿌려진 씨앗은 점점 자라나 10여년 뒤 ‘현실과 발언’ 동인의 결성으로 열매를 맺었고, 그 여파는 오늘날 한국미술의 새 역사를 쓰는 데까지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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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대학문화운동에 여러 방면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럼에도 그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시였다. 고교 시절의 선생님이 이화여대 출신으로 문학을 깊이 아는 정지용(鄭芝溶) 시인의 제자여서, 그녀의 문학 수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문학소년 시절의 지하는 정지용 이래의 한국시의 관습을 따르기보다 서구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에 매력을 느끼고 그런 투로 습작을 했다. 대학에 들어와 미학과 교수들에게 실망하고 난 다음인 1963년 3월 『목포문학』에 「저녁 이야기」라는 작품을 발표하고 또 그 무렵 서울과 원주의 다방에서 개인 시화전도 열었다고 하지만, 어떤 작품들이었는지 나는 찾아보지 못했다. 어떻든 우여곡절 끝에 그는 시인 조태일(趙泰一)이 주재하던 『시인』지 1969년 11월호에 「황톳길」 등 5편을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문단의 일원이 되었다.
작품 「황톳길」은 첫 줄부터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핏자욱 따라”의 강렬한 색채와 숨찬 리듬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비장하고 처절하게 제시되는 이미지들의 나열을 얼마간 정돈하면 어렴풋이 “그날의 만세”를 외치던 군중과 “두 손엔 철삿줄” 감겨 “총칼 아래 쓰러져간” “애비”의 영상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목격했던 ‘인민재판의 잔혹성’(『회고록 1』 212면)과 ‘좌익 혐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같은 책 221면)의 광경이 악몽과도 같은 검붉은 핏빛 환각으로 변하여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그 살벌한 장면들의 역사적 배경을 “척박한 식민지에서 태어나” “폭정의 뜨거운 여름” 같은 조금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암시하는 데 그친다. 어쩌면 서정시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고 또 충분할지 모른다. 그 핏빛 영상의 몸서리치는 환기만으로도 「황톳길」은 김지하 문학의 ‘출사표’로서 강한 인상을 주기에 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김지하 시의 출발점에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땅’이자 ‘반란과 형벌의 고장’으로서의 고향 전라도에 대한 운명적인 연대가 깊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목격했던 좌우대립의 참혹함뿐만 아니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일본제국 군대에 의한 동학군 학살과 남한대토벌의 역사도 그에게는 무심할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나의 영적 혈통의 핵심에 있는 동학의 기억은 단순히 어렸을 때의 집안의 전설이 아니라 스무살이 넘은 나에게 하나의 살아 있는 현실”(같은 책 387면)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오래 지나 광주 5월을 겪고 난 뒤에도 그는 “아직도 전라도는 ‘밤’인가? 아마도 이 ‘밤의 의식’이 내 시의 출발점일 게다. 이 ‘밤의 의식’ ‘슬픔’이 없었다면 나의 저항적 감성이 싹이 틀 수 없었을 테니…”(같은 책 267면)라고 탄식한다.
1970년은 김지하 개인에게나 한국시의 역사에서나 특별한 해였다. 5월에는 문제의 작품 「오적(五賊)」이 문단과 사회를 강타했고 연말에는 시집 『황토』가 출간되어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 읽어도 중요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론(詩論)이자 미학 논문인 「풍자냐 자살이냐」가 발표된 것도 그 무렵이다. 『농무』의 시인 신경림(申庚林)이 문단에 복귀한 것도 그해 가을이었고, 열악한 노동현실에 항의하여 젊은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것도 이때였다. 1960년대 말 김수영(金洙暎)·신동엽(申東曄)이 잇달아 세상을 떠난 데 이은 김지하의 눈부신 등장과 신경림·이성부(李盛夫)·조태일 등의 새로운 활약은 우리 사회와 문학 내부에서 거대한 전환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였다. 이 전환의 시대를 가장 치열한 언어로 대표한 것이 바로 김지하였는데, 이제 문학은 그를 통해 현실과 최전선에서 부딪치는 전장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문제작 「오적」을 쓰게 된 것은 우연이라면 우연이었다. 어느날 길에서 사 본 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서 ‘동빙고동의 도둑촌’ 기사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마침 월간지 『사상계』의 편집장으로부터 정치시 한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터라, 도둑촌 이야기를 “판소리 스타일의 풍자적 서사시 형식으로 쓰겠다는 결심”으로 “사흘 동안 밤낮으로 미아리 골방에 틀어박혀 내내 혼자 낄낄낄 웃어대면서 들입다 써 갈긴 것이 곧 「오적」이다.”(『회고록 2』 164~65면) 문자 그대로 믿기 어려울 정도인데, 하지만 같은 판소리 계열의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동광출판사 1988)도 서문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삶과 죽음을 한 호흡에 단필로 내리쳤다”고 호언한 것을 보면 지하의 놀라운 필력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당시 동아일보에 시 월평을 쓰던 나는 「오적」의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소심해져서 다음과 같이 소략하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이 작품을 단순한 현실풍자로만 보아넘기는 것은 피상적 판단에 그치기 쉽다. 도리어 그러한 생생한 풍자를 유기적으로 자기 내부에 용해시킨 시형식적 달성이야말로 한국시의 앞날을 밝게 한다.”(동아일보 1970.5.30.)
그야말로 단순한 암시에 불과한 촌평이다. 여기서 「오적」의 ‘시형식적 달성’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이 작품이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 등 당대 지배계층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강력한 풍자적 비판임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시의 드러난 부분이다. ‘담시(譚詩)’라는 낯선 용어로 자신의 형식을 규정했지만 다름 아닌 판소리의 수사법과 가락을 따르고 있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판소리라는 형식 자체도 (과거의 전통이라는)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양자의 생생하고도 유기적인 결합, 즉 박제품 상태의 판소리 형식을 현실비판의 살아 있는 무기로 힘차게 살려낸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김지하 고유의 진정한 성취이다. 이어서 그는 「비어(蜚語)」 「오행(五行)」 「앵적가(櫻賊歌)」 「똥바다」 등의 ‘판소리 시‘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후일 그는 담시 전집 『오적』(솔 1993)을 간행하면서 “판소리의 현대화와 동학혁명 서사시는 내 꿈”이라고 언명하기도 했다.(「비어」는 「소리 내력」 「고관(尻觀)」 「육혈포 숭배(六穴砲崇拜)」 등 사실상 별개인 세 작품을 하나로 묶어 붙인 제목이다. 나는 이 가운데 가장 문학성이 높은 작품이라 여겨진 「소리 내력」에 대해 조금 자세히 분석한 바 있다.(「서사시의 가능성과 문제점」, 김윤수 외 엮음, 『한국문학의 현단계 1』,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는 민요와 판소리 같은 전통적 시형식의 현재적 가치를 창작을 통해서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론으로도 적극 주장했다. 그 대표적 논문이 「풍자냐 자살이냐」이다. 전공자들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이 제목은 김수영의 시 「누이야 장하고나!」의 한 구절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를 오독한 데서 나온 것인데, 어떻든 이 논문은 지하가 선배 시인 김수영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자신의 ‘추의 미학’을 시론에 적용한 글이다. 정치적 억압과 폭력 아래에서는 민중적 비애의 감정이 발생하고 그것이 축적되어 한(恨)으로 발전하는데, 이 한은 민중적 반(反)폭력 즉 풍자를 통해서만 사회적 힘으로 전화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이 억압적 현실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은 옳았으며 이 비판정신은 마땅히 계승되어야 한다고 지하는 말한다. 그러나 “그(김수영)의 풍자가 모더니즘의 답답한 우리 안에 갇히어 민요 및 민예 속에 난파선의 보물들처럼 무진장 쌓여 있는 저 풍성한 형식가치들, 특히 해학과 풍자언어의 계승을 거절한 것은 올바르지 않다.”(『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선집』, 창작과비평사 1982, 152면)
한국 고유의 전통적 문예형식들에 대한 김지하의 고평가와 이의 현대적 계승 주장은 그러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수영 시인이 민요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시에 전통적 율격의 활용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 점이 김수영의 시에 어떤 결핍을 낳았는지, 아니면 반대로 그의 시적 사유에 특유의 치열성을 가져왔는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어쨌든 김소월부터 신경림까지 ‘김수영 바깥의’ 시인들이 민요적 발상과 리듬을 통해 우리 시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점이 많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에 판소리는 이와 다르다. 판소리는 김지하의 「오적」처럼 예외적으로 텍스트 자체가 널리 전파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는 청중 앞에서 고수(鼓手)의 북장단과 추임새에 맞추어 ‘소리’로 하는 것이다. 소리꾼 임진택의 훌륭한 사례가 보여주듯 그런 연행 장르로서의 판소리는 오늘날 위축된 상태로나마 여전히 살아 있는 예술이다. 하지만 문학 장르로서의 판소리는 김지하와 같은 특출한 재능이 출현하지 않는 한, 다시 부흥하기 어려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김지하는 담시보다 더 야심적인 기획으로 『대설(大說) 남(南)』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중도 포기로 미완에 그쳤음에도 세권이나 되는 대하 장시였다. 역시 판소리 형식이었는데,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뚜렷지 않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대설 남』은 민중들의 다채로운 생활양상을 구체적으로 전형화하기보다 단순히 양식상의 모델로 삼음으로써 일종의 형식주의에 기울어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즉, 그의 ‘대설’은 서구 합리주의 전통의 극복뿐 아니라 자신의 ‘남조선’ 사상의 서사적 구현이라는 야심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민중 없는 민중형식 내지 민중이 실감하기 어려운 형식실험으로 귀착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담시’의 집중적 예술효과조차 ‘닫힌’ 완결구조라 자기비판했던 김지하의 판단에 분명히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서구적 ‘근대’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 그에게 어떤 ’지나침’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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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황토』가 출간된 직후 1971년 4월에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민주진영으로서는 이 선거가 단지 대통령 뽑는 행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존폐를 결정하는 혈전과도 같았다. 지하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여하는 한편, 가톨릭 원주대교구 기획위원이 되어 지학순(池學淳) 주교와 장일순 선생의 지도 아래 활발하게 활동했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발행의 월간지 『창조』에 발표한 담시 「비어」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기도 했다. 1972년 10월 박 정권은 마침내 민주주의 폐지와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뜻하는 소위 ‘유신’이라는 것을 선포했는데, 지하는 살벌한 분위기를 감안한 어느 선배의 권유에 따라 설악산 백담사 계곡으로 몸을 숨겼다. 거기서 그는 만해 스님을 떠올리며 유명한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썼다. 얼마 뒤 상경한 그는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선생의 딸 김영주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안정된 생활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73년 연말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주도하는 개헌청원운동에 참여했고, 이듬해 연초에는 문인들의 ‘개헌청원 지지선언’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박 정권은 이 모든 민주회복 활동을 금지 처벌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고, 이에 김지하는 그날로 다시 내설악을 거쳐 강릉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외치는 활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박 정권은 소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수많은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이고 고문·조작·기소하는 만행을 감행했다. 지하도 민청학련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때 정보부 6국에서의 수사 체험에 바탕을 둔 시가 「불귀(不歸)」였다.
이상과 같은 일들이 숨 쉴 틈 없이 진행되던 1970년대 전반은 김지하의 생애에 있어 치열한 정치투쟁과 눈부신 시 창작이 서로를 전제하고 서로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절정에 이른 황금의 시기였다. 이때 나온 「타는 목마름으로」와 「1974년 1월」은 가장 통렬한 참여시이자 동시에 가장 투명한 서정시로서 김지하의 이름을 한국시사의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걸작일 것이다. 「빈 산」과 「불귀」도 가슴을 울리는 뛰어난 작품이지만, 가혹한 시대의 발톱에 긁힌 개인적 상처가 약간의 허무주의적 감상의 그림자를 여운처럼 남겨놓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하의 시들이 세월의 풍화작용을 이기고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실제 상황과 시인 개인의 극히 구체적인 접촉, 그리고 그 순간들에 대한 너무도 생생한 감각적 현전(現前)을 그의 언어가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관념이나 상투적 구호로 떨어질 수도 있는 정치적 메시지조차도 이 감각적 직접성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문턱을 넘어 시의 세계로 살아 들어온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1974년 1월」 첫 연
1974년 1월 8일의 서울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날 오후 5시 길거리 전파상에서 울리던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선포 뉴스는 얼음장 같은 차가움으로 등골을 쓸어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찬바람 속에 귀가를 서두르던 소시민들의 발걸음, 그들의 겁먹은 표정을 보는 시인의 눈이 이 시에는 벽화처럼 예리하게 찍혀 있다. 영장 없이 체포 수색하여 군법회의에서 재판한다는데, 어찌 겁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전날만 해도 신문 1면에는 “이희승, 이헌구, 김광섭, 안수길, 이호철, 백낙청씨 등 문인 61명이 7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명동1가 코스모폴리탄 지하다방에 모여 개헌서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기사가 3단으로 실려 있던 터였다. 문인들의 성명 발표는 얼어붙었던 피를 이제 막 따스하게 녹이기 시작하는 봄기운의 징조였고, 청춘의 고뇌를 안고 거리를 배회하던 가난한 청년에게는 비로소 찾아온 첫사랑의 예감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 위에 덮친 세찬 눈보라,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얼마 뒤 지하는 민청학련 배후로 수사를 받게 되는데, 그 수사받던 방을 「고행… 1974」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방들 속에서의 매순간 순간들은 한마디로 죽음이었다. 죽음과의 대면! 죽음과의 싸움! 그것을 이겨 끝끝내 투사의 내적 자유에 돌아가느냐? 아니면 굴복하여 수치에 덮여 덧없이 스러져 가느냐? 1974년은 한마디로 죽음이었고, 우리들 사건 전체의 이름은 이 죽음과의 싸움이었다.(『남녘땅 뱃노래: 김지하 이야기 모음』, 두레 1985,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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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불붙인 문화운동이 대학가를 거쳐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그 자신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가 방금 인용한 옥중수기 「고행… 1974」 때문에 다시 무기수가 되어 수감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유례없이 가혹한 옥중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시 속에 철저히 고립된 것은 물론이고, 거의 1년 반 동안 독서·접견·통방·운동이 금지된 지옥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온전한 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어느 날 대낮에 갑자기 네 벽이 좁혀들어오고 천장이 자꾸 내려오며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꽥 소리 지르고 싶은 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봐도 허벅지를 꼬집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몸부림, 몸부림을 치고 싶은 것이었다.”(『회고록 2』 430면) 지하처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그럴 만하지 않은가. 그의 정신질환 증세는 틀림없이 이때의 극한상황에서 발원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1977년부터 독서가 가능해졌다. 면벽참선과 함께 독선(讀禪)이라 불린 그의 집중적인 독서가 시작되었다. “진정한 내 공부의 시작이었다. 동서양의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 길고 긴 시간, 나는 그저 책 읽는 것밖에 한 일이 없는 듯싶다. 지금의 나의 지식은 거의가 그 무렵의 수많은 독서의 결과다.”(『회고록 2』 420면) 감옥에서 그가 힘을 다해 공부한 것은 첫째 생태학, 둘째 선불교, 셋째 떼야르 드샤르댕(P. Teilhard de Chardin, 1881~1955), 넷째가 동학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동학과 떼야르 공부는 감옥의 창턱에 날아와 싹튼 작은 풀잎에의 경외심과 동반되면서 지하에게 일종의 사상적 전회(轉回)를 가져왔다. 사회변혁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으로부터 그가 ‘생명사상’이라 부른 의식혁명으로 활동중심이 옮겨간 것인데, 이렇게 변모하여 출옥한 지하에 대해 일반인들이나 소위 운동권에서는 뜨악한 눈길을 보냈고 심지어 변절 혐의도 걸었다. 하지만 김지하 자신으로서는 어린 시절부터 방황과 고뇌 속에 찾아 헤매던 ‘인간구원’과 ‘자아해방’의 길에 마침내 들어선 것이었다.
1980년 12월 지하는 드디어 석방되었다. 하지만 집 앞의 감시는 계속되었고 가는 곳마다 정보원이 따라붙어 “앉은 곳이 바로 새로운 서대문감옥이었다.”(『회고록 3』 40면) 그러지 않아도 고문과 감금의 후유증이 심한 터에 이러한 상황은 질환을 더욱 악화시켰다. 술에 대한 의존도 심해졌다. 그는 원래부터 술을 좋아해서 안주 없이 깡소주를 마시기 일쑤였다. 1980년대에는 가끔 대구에 내려오는 길에 우리 집에서 잔 적도 있다. 나는 출근을 위해 잠을 자야 하는데, 그는 소주잔을 들고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다. 새벽에 깨보면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고백건대 당시에 나는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회고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번뇌가 그 무렵에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밤은 밤대로 끝없는 착종(錯綜)과 불면의 밤이었고, 낮은 낮대로 공연히 들뜨는 환상과 흥분의 나날이었다. 눈만 뜨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좌불안석, 오라는 곳도 많고 갈 곳도 많은 그런 날들이었다. 때론 소음이 음성으로 바뀌어 들리기도 하고, 때론 대낮 천장 위에서 핏빛 댓이파리들의 무서운 춤을 보기도 했다. 번뇌였다.”(『회고록 3』 55면)
오늘 나는 40여년 지난날을 돌아보며 한없이 아픈 마음으로 시집 『화개(花開)』(실천문학사 2002)에 실린 그의 시 「횔덜린」을 읽는다.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시인의 뇌 속에 내리는
내리는 비를 타고
거꾸로 오르며 두 손을 놓고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어둠을 어둠에 맡기고
두 손을 놓고 거꾸로 오르며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그리며 두 손을 놓고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횔덜린(F. Hölderlin, 1770~1843)이 누구던가. 그는 철학자 헤겔과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시인으로서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생애의 후반 37년을 정신착란자로 살았던 인물이다. 한세기 이상 잊혔다가 20세기 들어와 어느날 갑자기 ‘시인 중의 시인’으로 재발견된, ‘신이 사라지고 자연과의 조화가 무너진 자기 시대’를 탄식하며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고귀한 신성(神性)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소명’이라 보았던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어둠을 어둠에 맡기고/두 손을 놓고 거꾸로 오르며”—이런 구절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지하는 자신 안에 숨어 있는 횔덜린의 ‘어둠’을 보고 세상을 거슬러 살아온 것 같은 자기 일생이 “내리는 비를 타고/거꾸로 오르”는 도로(徒勞)가 아니었는지, 그 막막한 무력감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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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하는 석방 이후 30여년 동안 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고독에도 불구하고 횔덜린처럼 정신착란 속에서 지낸 것이 아니다. 횔덜린은 열아홉살에 이웃 프랑스의 대혁명을 목격한 세대로서, 젊은 날의 편지들에서는 민감한 정치상황을 끊임없이 언급하면서 혁명이념의 변질과 좌절을 예의 주시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신이 정치적 박해에 쫓긴 적은 없었다. 정신착란의 긴 세월 동안 낙서처럼 써놓았던 시구절이나 어머니에게 보낸 60여통의 편지를 보면 그의 신성 추구는 행동이 결여된 그의 정서적 온순함에 기반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횔덜린 서한집』, 장영태 옮김, 읻다 2022 참조)
그러나 김지하는 전혀 다르다.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며 영성이라는 개념으로 ‘고귀한 신성’을 추구한 것은 횔덜린과 비슷하다 하겠지만, 지하는 횔덜린과 달리 정치투쟁의 일선에서 네차례나 감옥을 경험하고 죽음의 위험을 통과한 뒤에야 영성과 생명이라는 화두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는 물론 가혹한 독방과 치열한 독서와 건곤일척의 사색이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 아니었다.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의 강렬한 이미지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1980년대 이후의 김지하는 점점 실망스러워 보이게 마련이었다. 대학생들의 노동현장 위장 취업이 하나의 대세를 이루던 1980~90년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가 1975년에 선정한 ‘로터스상 특별상’이 1981년 그에게 전달되었을 때 지하에게는 부산으로부터 ‘웬 사람’의 전보가 한장 날아왔다고 한다. “모두들 죽임 당하는데 너 혼자 상을 받다니 염치가 있느냐?” 광주의 참혹함을 겪고 난 직후임을 감안하더라도 이성을 잃은 반응인데, 어쨌든 그것은 김지하를 보는 사회적 시선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지하는 이렇게 썼다. “전보를 읽으며 나의 한도 깊이깊이 내면화되었다. 옳은 이야기였다.”(『회고록 3』 41면) 그러나 깊이 가라앉은 한은 그의 정신에 더욱 손상을 입혔다.
생애의 말년에 이를수록 그의 정치적 행보에 이상 조짐이 나타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1991년 ‘죽음의 굿판’ 운운하는 조선일보 기고문은 많은 사람들이 지하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지하는 “강경대 군 사건의 책임 추궁과 함께 무엇보다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예절을 찾아 챙기지 못했구나!”라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회고록 3』 221면) 하지만 그의 사과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김지하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용하고 돌아서는 것이 대형언론의 생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2010년대에 지하는 그야말로 이상한 언행을 선보였다. 당연히 비판이 따랐다. 하지만 우리는 병증이 깊어진 노년의 김지하가 타인의 비판 안에 들어 있는 합리적 핵심을 붙잡아 자신의 인간적 성숙을 위한 거름으로 삼을 힘을 이제는 잃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점 김지하를 사랑했던 동료와 후배들을 한없이 가슴 아프게 한다.
이처럼 점점 정신적 퇴행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1980년대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김지하에게 가장 생산적인 연대였다. 마그마가 분출하듯 시의 분야에서는 『대설 남 1, 2, 3』(1982, 84, 85)과 서정시집 『애린 1, 2』(1986), 『검은 산 하얀 방』(1986), 『별밭을 우러르며』(1989), 그리고 장시 『이 가문 날의 비구름』(1988) 등이 나왔고 논설문 내지 산문집으로는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84), 『밥』(1984), 『남녘땅 뱃노래』(1985), 『살림』(1987) 등이 잇따라 간행되었다. 이런 일종의 붐은 2000년대 초의 『흰 그늘의 길: 김지하 회고록 1~3』(2003)까지 이어져, 막연한 짐작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그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들 가운데 일부밖에 읽지 못했다. 시집은 그래도 대부분 구해서 대강 훑어보았지만, 산문집은 구경조차 하지 못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회고록 세권은 지하가 작고한 뒤에야 완독했는데, 김지하 저술의 결정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문집 가운데는 『남녘땅 뱃노래』가 정성 들여 만들었을뿐더러 내용이 가장 알차다. 그런데 『애린』 이후의 시들은 점점 긴장이 풀어지고 신세한탄에 가까운 맥 빠진 작품들이 많아져 실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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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무위당 장일순이다. 장일순은 일찍이 “몽양 여운형(呂運亨)의 제자요 추종자였고 몽양 사후 죽산 조봉암(曺奉岩)의 동조자였으며 윤길중(尹吉重)의 동지로서”(『회고록 2』 81면) 혁신계 정당활동을 하다가 5·16으로 3년간 옥살이, 출옥한 뒤 가톨릭에 입교하고 고향인 원주에 은거하면서 지학순 주교와 함께 가톨릭에 기반한 이른바 ‘원주 캠프’를 이끌었다. 장일순에 대해 지하는 “선생의 사상은 단적으로 말해 좌우의 통합이었고 영성과 과학의 통전이었으며 동서양과 남북의 통일이었다”(『회고록 2』 같은 곳)고 말한 바 있다. 지하는 깊은 존경심과 충실성을 가지고 평생 장일순의 노선을 따랐다. 그가 가톨릭 세례를 받고 난초 치는 것을 배운 것도 장일순의 모범을 따른 것이었다.
물론 김지하는 후일 사실상 가톨릭을 떠나 점점 더 동학의 수운(水雲)과 해월(海月)에 경도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과 강증산(姜甑山)의 ‘후천개벽’설도 깊이 공부했고 노자와 장자를 읽는가 하면 일부 무속신앙까지도 적극 받아들였다. 요컨대 김지하는 종교에서나 사상에서나 평생에 걸쳐 어떤 단일한 믿음에 고착되지 않았다. 끊임없는 방황 속의 모색이 형벌과도 같은 그의 삶이었다.
회고록 『흰 그늘의 길』 머리말에서 김지하는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는 분명한 고백 없이는 회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술회한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좌익 전력 때문에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그는 박정희정권으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겪어야 했다. 이때 그가 감옥 안에서 작성하여 비밀리에 유출한 문건이 유명한 「양심선언」인데, 이 글에서 그는 단호히 주장했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해서 지금껏 나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으며 현재에도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남녘땅 뱃노래』, 두레 1985, 44면)
이것은 그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부인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특정한 이념의 추종자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일관된 주장은 없었던가. 오랜 감옥 경험을 통해 그가 찾은 것이 ‘생명’의 절대성이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생명론을 근거로 김지하는 우리 시대의 생태적 위기와 이념적 혼돈의 심각성을 되풀이 지적하고 누구보다 큰소리로 문명전환을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서구 주도의 근대 자본주의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힘껏 경고했다. 다만 그는 아버지 세대의 사회주의 계급혁명으로는 오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확언한다.
“인간은 감성과 이성만으로는 완전히 정곡을 찌를 수 없고 거기에 제삼의 힘, 아니 근원적인 힘인 영성이 발동해야 무엇인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끝없는 감탄사와 함께 절감하였다.”(『회고록 2』 202~203면)
“이제 다가오고 있는 세계혁명은 정치경제의 하부구조적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새로운 정치경제 양식의 씨앗을 내부에 이미 간직하고 있는 문화의 대혁명인 것이다.”(같은 책 206면)
그는 진정한 혁명으로서의 문화대혁명의 씨앗이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한반도, 그중에서도 가장 핍박받고 헐벗은 남녘땅의 민중 속에, 그들의 고유정서와 전통사상 속에 잠재해 있을 거라고 되풀이 주장한다. 그 예언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일이 우리 세대의 과업이라는 생각을 남기고 그는 저세상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