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 대안은 있다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국가와 생활정치
김현미 金賢美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저서로 『글로벌시대의 문화번역』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공저) 『“근대”, 여성이 가지 않은 길』(공저) 등이 있음. hmkim2@yonsei.ac.kr
1. 들어가며
우리는 2008년 여름의 촛불시위를 분석하는 많은 글들을 통해‘생활정치’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김호기는 촛불시위가 제도정치나 대의정치와는 달리 참여에 기반한 생활정치로의 이동을 보여준 사건이라 규정했고,1 홍성태는 온갖 문명의 위험에 포위된‘위험사회’상황에서 건강과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망이 분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2 촛불시위는 이러한 의미에서 생태위기와 이에 대한 불안을 표현했던 생활정치가 본격화된 것이고, 생태적 차원의 민주주의의 심화를 촉구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과 불안이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알게 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이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여기서 생활정치는 인간의 근원적 가치인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치를 의미한다. 정태석은 생활정치의 확산이 소비사회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3 소비, 문화, 여가생활이 점차 일상적 삶과 정체성이 형성되는 중심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생태환경 문제와 먹을거리의 불안이 심화되자 사람들은 삶의 질에 관심을 갖고 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태석은 이에 근거하여 생활정치가‘노동자-시민’보다‘소비자-시민’이 중심적 주체가 되는 정치라는 점을 지적한다.
한편 이기호에 따르면 생활정치는 지금까지 가족이나 개인이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요구되어온 사적 영역 내부의 미세한 지점들을 공동의 관심사로 복원시키는 것이다.4 즉 생활정치는 사적 공간에 갇혀 있는 개인들이 광장으로 나와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에 대화와 협력의 채널을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과 자기 삶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므로 기존의 민중·민주운동 같은 조직운동과 구별된다. 따라서 생활정치의 주요한 행위자는‘시민’이며, 이때 시민은 얼마간 삶의 안정성을 획득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또한 시민 개개인의‘헌신’과‘자발성’을 지향하는 과정적 운동이기 때문에 기존의 운동조직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
촛불시위를 분석한 많은 학자와 운동가들은 100만 이상의 시민이 참여한‘광장의 생활정치’를 한국 시민사회의 성장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후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무엇을 목격하고 있는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강화되어온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이명박정부 집권 이후 더욱 강력한 집행과 체현을 위한 다양한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와,‘강력한’집권자에 의존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결합된 현재의 통치체제는 엇갈린 시간대가 어정쩡한 상태로 겹쳐진 것 같다. “좌편향”이란 레토릭으로 근원을 알 수 없는 구시대적 편가르기를 강화하면서 시민사회의‘문화적 피로감’을 누적시키고 있다. 또한 정치적 의사표현이나 시위에 대한 소송이 급증하면서‘표현의 공포’가 일어나고 있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군사작전들을 통해 경제적 주변자들을 몰아내고 억압하는 물리적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투쟁하여 만들어낸 탈냉전, 민주주의, 인권, 시민사회의 공동체적 아젠다를 위협하면서 우리의 일상을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물리적, 경제적, 문화적, 상징적 폭력들 앞에서 생활정치의 상상력을 갖기란 힘든 일이다. 국가가 휘두르는 공포감 조성전술이 활발하면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거나 위축된 개인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생활정치는 공공적 이익을 함께 만들어낸다는 신념을 가진 민주적이고 소통지향적인 개인의 자발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시대적 맥락은 생활정치의 발현에 매우 위협적인 환경이다. 또한‘생존권을 넘어선’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생활정치의 신(新)중산층적 계급성도 점차‘허위적인 신화’가 되고 있다. 삶 자체가‘투기’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계층적‘몰락’을 경험하고 있다. 고용 불안정과 예측 불가능한 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일상생활이 곧 삶의 지속과 멈춤이라는‘죽고 사는’문제로 환원되기 쉽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라 불리는 이러한 새로운 통치질서하에서 생활정치를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가? 이 글은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논리와 권위주의적 가부장제의 문화논리가 결합된 통치질서하에서 생활정치의 한계와 가능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활정치는 중산층 중심의 시민운동이라는 편협한 정의에서 벗어나‘인간의 삶 능력’을 증진하는 운동이라는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생활정치의 가능성과 그 구현을 위협하는 조건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문화적 상상력은 무엇인지 탐색하고자 한다.
2. 정치적 자유와 지불능력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장공관 앞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시위를 벌이던 상가 철거민 등을 상대로 낸 가처분신청에서 1회 위반당 50만원을 배상하라는 결정을 받아냈다. 법원 결정이 내려진 이후 시장공관 앞 철거민 시위는 사라졌다. (조선일보 2008.8.25)
소위‘불법’시위자들에게‘배상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간접강제제도가 급증하고 있다. 경찰은 촛불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광우병국민대책위 등을 상대로 3억 3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시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집단소송법’도 추진되고 있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1800여개 시민단체는‘불법폭력시위에 참여한 관련단체’로 규정되었고, 이들에 대한 정부 보조금의 지급을 제한하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금년에 보조금을 받은 단체들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각서’를 써야 했다.
이런 변화들은 재력에 따라 정치적 권한이 부여되는‘금권정치적’지배가 한국에서 현실화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예전에도 금권정치라는 말은 심심찮게 사용되었다. 정경유착이나 재벌비리, 부패정치를 비판할 때 쓰던 용어였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자리잡게 된 노무현정부 이후 이명박정부에 이르기까지 기업친화적, 시장중심적 공기업 민영화 정책과 사교육을 부추기는 정책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왔지만, 최근 등장하고 있는 금권정치는 정치적 의사표현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르다. 비판세력을 제압하는 새로운 통치방식으로 등장한 금권정치는 모든 정치적 이견과 대립을 소송으로 해결한다. 촛불시위 관련 소송의 당사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공공기관과 상가 주인들이 원고이고, 시위참여 시민과 시민단체들이 피고이다. 이명박정부 집권 이후 강화된‘법치’라는 이름의 통치성의 핵심은 정치적 자유와 지불능력의 유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재력에 따라 국민을 분리하여 위계적으로 범주화하고 그에 맞게 정치적 자유의 허용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한국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세계자본주의의 중심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부와 정치적 자유를 효과적으로 연결해왔다. 하비(D. Harvey)는 신자유주의가 대중적 동의를 얻게 된 것은‘개인의 자유’라는 슬로건이 관료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개인들에게 매력적인 언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5 신자유주의의 문화이데올로기는 이처럼 선택의 자유, 정부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자유,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추구할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역사상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개인’의 자유를 역설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호명되는 개인은 보편적인 휴머니즘에 근거하여‘인격’을 가지는 개인이 아니라, 사유재산을 통해 시장경제에서 적극적인 행위자로 활동하는 개인이다.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많은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이를 지키고 증대하고자 하는 경제엘리뜨와 자산가들의 권력을 확장해왔다. 이를 위해 시장논리의 결과적 불평등을 줄이려는 복지국가의 간섭에 제동을 걸고‘작은 국가’를 역설해왔다. 프리드먼(M. Friedman)이 주장하는‘경쟁적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경제적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지불능력이 없는 자는‘정치적’자유를 가질 수 없다는 역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통해‘소통’을 요구함으로써 정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민주사회의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금권적 권위주의체제에서 소통은‘지불능력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리’일 뿐이다. 지불능력이 없는 자는 정치적 지위도 가질 수 없는 절대적 타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어느 20대 남성의 사례는 그의 정치성이 소송에 의해 어떻게 희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시위참가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500만원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벌금을 지불할 수 없는 그의 경제적 상황은 심리적으로 그를 매우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소송이라는 기나긴 돈 싸움에서 이미 패배가 자명한 것임을 알려주었다. 다행히 그는 무료변론을 해주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현재 불복종을 위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소송과정에서의 촛불시위자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수행한‘시위자’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요구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채자이며 파산자일 뿐이다. 마치 신호위반으로 범칙금을 내야 하는 운전자처럼 촛불시위자가 담지하는 정치성과 사회적‘지위’는 삭제되고 마는 것이다. 개별화된 소송은 동질적인 정치적 의사표현을 한 집단에서‘개인’을 분리시켜 책임의 주체로 환원하는 과정이다.‘연대’와‘소속감’이라는 집단화된 운동에서 분리된 개인은 외롭고 지난한‘싸움’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이제 정치적 표현방식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고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여 배상과 벌금의 액수를 낮추는 것이 피고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상이 된다. 이처럼 개별화된 소송을 통한 지배방식은 개인에게 심리적 위축감을 갖게 하는 것은 물론, 지불능력이 없는 개인을‘정치영역’밖으로 몰아내는 효율적인 수단이다. 정치적 의사표현과 지불능력의 유무가 깊이 연관됨으로써 경제적 약자들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영역에서 배제된다. 이에 대해 홍성태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으로서 이는 경제적 피해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제기하는 것은 위헌적이며,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돈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홍성태, 앞의 글 28면)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소송이 이명박정부의 집권 이래 등장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대통령선거 당선 무효소송’‘대통령 탄핵소추’‘행정수도이전 위헌소송’등 한나라당 측에 의해 많은 소송들이 제기되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노무현정부의 청와대는 당시 “한나라당의 이명박 대통령후보가 권력의 중심세력에서 야당후보의 뒷조사를 시켰다”라는 발언을 문제 삼으며 이명박 후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한겨레21』 2007.9.13). 이 기사는 “정치가 법정으로 가면 정치의 영역이 초라해진다. 소송으로 흥한 자는 소송으로 망할 수도 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정부의 출범 이후 정부 관련 소송들은 오히려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불능력이 큰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시위 당시 오마이뉴스 기사에 대해 정정보도와 손해배상 청구를 했고, 연이은 반촛불소송 또한 그 규모가 대단하다. 비판세력을 누르는 방법으로 소송이 남발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언론인들이 쓴 글에 대한 정부측 소송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개인 블로거들도 명예훼손 및 모욕죄와 관련한 소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PD저널』 2009.7.8). 예전에 시위에 참여하거나 비판적인 글을 생산한 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명예를 얻을 수 있었지만, 정치적인 영역이‘경제적 영역’으로 환원되면서 신념에 따른 행위나 논쟁, 담론의 생산은 잠재적인‘소송감’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개인의‘정치적 의사표현’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불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불능력이 없는 개인은 이제‘말할 수 없는’것이다. 최근 논란중인 미디어법도 지불능력이 있는 대형언론사가 사회여론을 전보다 더 지배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것이다. 개별화된 힘 겨루기를 조장하고 이것을‘정의’나‘법치’의 이름으로 옹호하는 소송은 소통과 협상을 통해 더디더라도‘공동체적 해결’을 모색해왔던 인간의 능력을 우습게 만든다. 소송의 증가로 정치적 표현은 위축되고 있고, 이는 누가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규율을 만들어내고 있다.
3. ‘국가 없음’과 국가폭력
올해초 용산참사에서 숨진 철거민들은 6개월이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에‘책임’을 질 사람이 없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2007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2008년 경기도 이천 지하냉동창고 화재, 2008년 논현동 고시촌 방화 및 살인, 그리고 2009년 용산 철거민 참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애도되지 못하는 죽음들을 연이어 목격하고 있다. 이미 사라졌다고 여겼던 제3세계적 발전국가의 강압적 폭력과 죽음의 현장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이로 인한‘향수적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엄기호가 “포위, 점거, 파괴라는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행정이 국방화된 것”6 같다고 묘사한 용산참사가 벌어지던 그 시간에, 이명박정부는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건설, 에너지, 무역 등의 분야에 대해 유럽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은 나라들과 경제협정을 맺었다. 전세계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한국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정말‘잘나가는’나라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G8 확대정상회의와 아프리카 순방 중에‘왜 한국처럼 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어찌 보면 한국사회의 경제침체와 민생문제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한국이라는 국가 내부에는‘국민’이라는 동일한 범주로 묶어낼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처럼 국가엘리뜨들 간에 맺어지는 협정이 어떤 이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기이지만, 또다른 이에게는 대박신화를 낳는 희망의 징조이다. 2009년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한, 용산참사에 대한 무응답과 적극적인 자원외교라는 두 사건은 국가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국가가 특정 국민이 가져야 할 삶의 권리를 경제활성화라는 추상적 가치를 앞세워 박탈하거나, 특정 국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혹은 아예 말을 걸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하에서 급변하는‘국가’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진보적 사회학자 쎄넷(R. Sennett)은 미국 신경제체제 아래 국가의 성격을‘컨썰팅 국가’로 명명한다. 국가도 기업의 컨썰턴트처럼 “사람들의 구체적 경험에는 관심이 없고 개혁이나 변화란 이름으로 통제는 강화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자”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7더이상 국가는 사람들의 삶의 위기를 공공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복지정책이나 긴급구조에는 관심이 없고, “여기저기 집적거릴 뿐 한가지에 몰두하지 않는” 성격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틀러(J. Butler)와 스피박(G. Spivak)의 대담에서 개념화된‘국가 없음’의 의미를 떠올려보자.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한 전지구적‘관리국가’는 국민국가 내의 재분배, 복지, 그리고 헌법주의에는 관여하지 않고 자본의 세계적 유통을 위한 관리자 역할만을 수행하려고 한다. 이는 국민국가 내에서 국가가 국가의 기능을 하지 않는‘국가 없음’의 상태를 만들어낸다.8‘국가 없음’이란 민족이나 국민 같은 호명에 의존하면서 특정 주체들은 국가에 적법한 주체로 묶어내지만, 이주자 같은 다른 주체들은 적극적인 권력행사를 통해 국가 밖으로 내치고 추방하여 권리를 박탈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법이‘예외적인 존재’로 만들어놓은 사람들에 대한‘폭력’은 정당하다고 간주된다. 조주현은 아감벤(G. Agamben)의‘예외 상태’개념을 이용하여 2007년 2월 여수 외국인보호소 참사에서 죽어간‘이주자’들이 한국사회의‘텅 빈 생명’임을 주장한다.9 이들 이주자들 가운데 “화재로 의식을 잃었던 부상자들은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수갑을 채워 누워 있는 침대의 난간에 묶였다. 화재참사로 죽은 시체를 부검할 때에는 유가족의 동의는커녕 통지조차 하지 않았다”(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대위 2007.3.7, 조주현 앞의 글 79면에서 재인용).‘텅 빈 생명’은 국가폭력의 희생자지만 그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부여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국가 없음’은 국가가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재분배와 복지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이라는 호명을 받은 주체들마저 마찬가지의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국민 중 일부분이 국가 내의 협상을 위한 파트너가 아니라 비가시화된‘잉여적 존재’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국가에서는 국민 내부에 배제의 공간이 확장되고 그로부터‘찬탈’을 위한 폭력이 활성화된다. 2009년 1월 도심 한복판에서 철거민들에게 행사된 국가폭력은‘국가 없음’의 상황을 잘 보여준 예이다. 도시의 잉여적 존재로 규정된 빈민이나 성노동자는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밀려나고, 그 삶의 역사성이 사라진 자리에 신중산층의 화려한 소비 및 주거지가 무심하게 위용을 드러낸다. 이처럼 국가는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과는‘투기’를 통한 부자 되기의 탐욕을 거래하며‘국가 있음’을 증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정부는 최근‘서민’을 정치의 대상으로 환기하며‘서민정치’를 앞세우고 있다. 용산참사로 대표되는 실제 서민들의 생존권에는 무심한 정부가 서민을 살리고, 서민형 생계 범죄자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하고, 서민의 교육비 부담을 줄이는 획기적인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한국사회의‘골칫거리’로 취급되는 도시빈민, 노동자, 경제적 주변자, 청년 실업자 같은 현존하는‘서민’과 국가정책의 보호대상으로 등장하는‘서민’들은 서로 다른 존재인가?
한국은 이러한 점에서 여전히‘부권적 권위주의’의 성격을 지닌다. 개인화된 자유를 낭만화하고 작은 국가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모델과 달리, 강하고 보호주의적인 국가를 상정하는 것이다. 통치자는 항상‘서민’을 걱정하고,‘서민’을 먹여 살리는 문제를 고민하는 가부장의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한다. 그 속에 숨은 성별 이데올로기는 대통령을 생계부양자로 설정하고, 대통령의‘능력’여하에 따라 집안살림이 일어나듯 국가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전근대적 믿음 체계와 결합한다. 이 모델은 서민이라는 지배의 대상이 실제로 겪는 실존적 위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국민을‘서민’이라는 동일한 범주에 종속시켜 낮은 수준의 사회적 써비스를 공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모델의 부권적인 성격은 시민을‘서민’이라는 비-정치화된 범주로 규정하고 시혜적인 방식으로 호명한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담지자인‘시민’이 아니라 서민으로 호명된 자들은 이제 무력하고 수동적인 써비스 수혜자로 동질화된다. 시민이 누려야 할 노동권·주거권·사회권 등의‘권리’를 낮은 수준의 써비스로 대치시킴으로써 국가재정은 지불능력이 있는 개인들의 부의 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낮은 수준의‘서민용’써비스는‘퇴출의 공포와 추락’에 시달리는 불완전고용이나 반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지 못한다. 또한‘서민’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적 표현을 하는 순간 곧‘서민’이 아니라 불순하고 불법적인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1970년대의 유교적 부권주의의 문화적 모델과 신자유주의 모델을 결합시킴으로써, 시민들의 적극적인 생존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은 제공하지 않은 채 이들을 단지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4. ‘삶 능력’으로서의 생활정치와 촛불의 유산
이명박정부는‘국민성공시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등장했다. 국민들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자리잡아가는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질서하에서 많은 이들은 고용될 능력과 지불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무력화되고 있다. 동시에‘서민’으로 호명되어 지도자의 온정을 기다리는 비정치적 주체로 규정되고 있다. 이명박정부는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훼손해 많은 시민들의 정치적 반감 또한 증폭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촛불시위가 보여줬던 생활정치의 유산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또한 의미있게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고급지성, 고기술, 고정보와 세련된 문화표현으로 100만명을 규합해냈던 촛불이 우리에게 준‘자존감’과‘자부심’의 유산은 무엇일까? 소통과 스타일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세련된 정치성을 발휘했던 촛불참여자들은 그후 국가폭력의 일상적 현장들을 목격하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우리가 후진적인 것으로 폄하했던 계급적 대립의 현장과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이를 이미 사라져버린 것으로 여기고 외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생활정치는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되어야 할까?
촛불이 놀라운 정치적 발전을 이뤄낸 것은 시위의 작은 현장들마다‘감정’이 흐르는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생활정치는 이해관계가 다른 주체들의 정치행위가 지닌 미학적·도덕적·경제적 가치를 경합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정치적 영역 밖에 있던 것들이 새롭게 가치를 부여받아 정치적인 것들의 위계 안으로 들어온다. 촛불이 생활정치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건조하고’‘위계적인’정치의 과정에서 참여자들이 감각적 즐거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율적인 소통능력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촛불의 성공은 바로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감정 있는 개인’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촛불에서 보여준 생활정치는 도시적 세련미와 유머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결코 차갑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참여자들은 준비해온 음식을 서로 건네고 미소를 주고받는 등의 행위를 통해 호혜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들뢰즈가 정동(情動, affect)이라 불렀던 감정, 지식, 정보, 소통에 의한 정서의 흐름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이, 근대 이성이 억눌렀던 감정과 몸을 복원하고 합리적 지성과 열정과 느낌을 개입시키면서 촛불이라는 광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동은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 주변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힘과 주변세계에 의해 영향받게 되는 힘의 인과관계를 의미한다.10 영향을 받는 우리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행동할 힘도 커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촛불이 정동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최첨단 미디어 씨스템을 탑재한 노트북과 캠코더를 소유한 개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실시간으로 실어나른 정보와 주석들, 해제들, 그리고 그것에 연쇄효과를 일으키며 따라붙는 토론과 전략들은 생활정치의 사례로 등장한 촛불시위가 매우 값비싼 기술소비의 스펙터클로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생존의 문제를 뛰어넘은‘신중산층’과 그 자녀들이 가세한 시민운동으로서‘문화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한다. 정치의 주체는 정부도 시민운동단체도 아닌 바로‘주권을 가진 개별화된 시민’임을 확인했던 촛불시위 이후, 사람들은 자신이 물건을 고르는 소비자처럼 정치참여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새 정부의 변화된 통치양식은 개별화된 소비주체로서의 개인이나 자발적 참여라는 이름으로 낭만화된 시민운동으로 해결하기에는 벅찬 것처럼 보인다. 촛불의 계층성과 소비성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만들어낸 생활정치는 이질적인 사람들을 비시장경제의 회로 안으로 규합해낼 수 있었던‘동감’의 능력이었다. 지불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과 발언권이 부여되는 금권정치가 생겨나는 상황에서 촛불소녀, 유모차 부대, 경제적 비주류자, 이주자, 시민활동가, 신중산층 등이 각자가 가진 문화자본과 경제자본, 사회자본을 시장논리로 위계화하지 않고 정동의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촛불을 이어받아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내야 할 생활정치는 아젠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노동운동이든, 지역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아젠다로 생활정치가 규정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생활정치는 삶의 불안정성과 피폐함과 싸우기 위해 위계화·범주화된 인간의 삶들 사이에서‘공감’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는 버틀러의 개념을 빌려 생활정치를 “생존 가능한 삶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하는” 정치적 행위로 규정한다.11 쎄넷의 지적처럼 자본주의만 살아남고‘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죽어버린 시대에 불평등은 점점 더 소외의 문제로 이어진다(쎄넷, 앞의 책 100면). 소외에 대한 항거는 일본의 히끼꼬모리(은둔형 외톨이)처럼 매우 개별화되고 사회와 철저히 격리된 형태로 표현될 수도, 때로는 폭력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생활정치를‘삶 능력’(Biopower)을 회복하는 운동이라 정의할 때, 모든 개인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구상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를 들어 폭력을 생각해보자. 대항폭력을 사용했던 노동자나 도시빈민을 한국사회의 문화적 수준에 못 미치는‘비문명화된’존재로 비하하고 쉽게 비판하는 것을 잠시 멈추어보자. 모든 인간은 폭력의 위험이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과 일터를 원한다. 경찰의 물대포에 저항하며 대항폭력을 행사했던 촛불시민도, 철거될 빌딩의 망루에서 화염병을 투척했던 용산 철거민도, 그들을 진압했던 경찰도, 쌍용자동차 직원들도,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철거민들의 죽음을‘시청했던’나도, 폭력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문제는 각자의‘실존적 조건’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이 일상적 삶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고, 어떤 사람은 폭력의 발생과 무관하게 안전한 장소에 자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강압적 이행으로‘죽고 사는’생명정치의 위급성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무심한 시선으로 철거의 현장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도시빈민에 대한 국가폭력의 발현을 나와는 상관없는‘저기 밖에 있는 자’들의 현장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들의 저항 또한 의미없는 또다른 폭력이 될 뿐이다. 누군가 또한 그 위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체제하의 생활정치는, 중산층으로서 가지는 시민의 위치와‘잉여인간’으로 취급되는 시민의 위치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각자 서로 다른 위치로 언제든 이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결국 타자의 삶과 나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공감의 능력이 촛불의 유산이며 지켜야 할 정치적 가치인 것이다.
5. ‘비경제적 상호공존의 회로’ 만들기
신자유주의시대가 배출하는 사회적 위험, 불예측성, 개인의 고립으로 삶의 식민화가 가속되는 반면, 우리 생활세계를 새롭게 변형시키려는 의지를 지닌 개인들도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시장논리과 경쟁논리에 지배되는 생활세계의 이데올로기와 가치들을 변화시켜내기 위해 마을 만들기, 경제공동체, 공동작업장 운동 등에 참여한다. 건강한 노동, 안정된 삶, 지속가능한 생존, 연대의 가치들을 새롭게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운동들이 신선하다.
이제까지‘범주’나‘정체성’에 의해 구분되던 노동운동, 생태운동, 지역운동 등이 새롭게 혼합되어 새로운 가치들이 창출된다. 이러한 새로운 운동들은 산업사회적 불안과 포스트-산업사회적 불안에 동시적으로 대처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맥락에도 충실하다. 정태석은 한국사회의 국가복지제도가 제한적이고 취약할 뿐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미약하여 산업사회 또는 계급사회가 만들어내는 위험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소비-시민이 주도하는 후기근대적 불확실한 삶에 뒤따르는 위험사회의 위험에도 이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진단한다(정태석, 앞의 글). 시장은 화폐를 매개로 하여 몰인격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여기에는 공동체적 연대가 부재한다. 따라서 점차 많은 부분‘시장의 논리’에 의해 규정되어버리는 생활세계가 새로운 정치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생산자-노동자-소비자-시민’이라는 다중화된 개인의 위치에서 시장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중적 정체성은 어떤 개인도 노동할 또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 소비자 권리, 시민사회의 민주화 등 다양한 정치성을 표현하는 데 유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쎄넷은 불안정이라는 것이 신경제 속에 프로그래밍된 필연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경직된 관료제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불안정을 유발하는 제도에 맞서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존의 노동조합 중심의 노동운동도‘가치’를 전환하는 운동들과 결합하여 생활정치로 거듭나는 예를 보여준다. 영국과 미국에서 노동조합의 병렬조직을 설립하는 시도가 그것이다. 여기서 병렬조직은 일자리를 알선하는 일종의 고용 대행기구로 활동한다. 또한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연금 관리 및 의료보험 가입 등을 대행하거나 탁아소와 토론회, 사교모임 등을 주도하면서 일터에서 사라져가는 공동체를 보완한다. 이로써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경제적 이해만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다(쎄넷, 앞의 책 218면). 또한 대안적인 병렬조합은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취업을 알선하는 등 노동의 경험이 단절되지 않도록 돕는 것에 역점을 둔다.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바 있는‘일자리 나누기’는 일주일에 단 몇시간 일하는 것만으로도 실업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또다른 급진적 대안은 시민사회와 국가의 대타협에 의해 기초소득의 개념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는 “부자와 가난뱅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기초소득을 나눠주고 그것을 제대로 쓰든 낭비하든 개인에게 맡기자는 지극히 단순한 제도이다”(쎄넷, 앞의 책 220면). 이 제도의 재원은 세금이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받기 때문에,‘의존하는 자’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며, 동시에 장기적으로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수단도 갖게 된다는 것이다.
IMF구제금융기 이전에는 한국사회의 취업자 가운데 81.2%가 정규직이었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예측가능한 삶’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동하는 자들의 정치적 표현 또한 생활정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버먼(P. Burman)은 실업의 상태를,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마치 낯선 곳에 와 있는‘여행객’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에 비유한다.12 이는 아무도 그가 무엇을 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으며, 그 또한‘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지역의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만을 기다리는 완벽한 무기력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일과 실업의 경계에 놓여 사회적 존재성을 상실해가는 사람들이 증가할수록, 생활세계는 식민화되기가 더 쉬워진다. 따라서 급진적인 생활정치는 일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다양한 운동들과 결합할 필요가 있다.
‘생산성’을 과시하며 생활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민주주의, 평등, 인권, 삶의 자율성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며, 역사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을‘시장가치’와‘지불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잉여인간으로 분류하고 폭력으로 다스리는 상황에서‘삶 능력’을 살리는 생활정치는 비시장주의적 공존의 회로를 많이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성, 돌봄, 지역사회, 먹고살기 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을‘양식 마련학’(study of provisioning)으로 재규정하자는 움직임은 매우 신선하다. 경제를 개인들간의 경쟁이나 생존투쟁에 기반을 둔 시장이 지배하는 영역이 아니라 기본 양식을 마련하는 일로 이해하면, 경제는 사람들간의 상호성이나 감정이입 같은 힘들이 작용하는 영역으로 바뀌어 보이게 된다(조주현, 앞의 글 68면). 촛불시위 당시 여성의 참여가 활발했다면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의 경험에 공감하는 능력을 유지하면서 일터, 집, 지역사회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유연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는 획일화된 지위경쟁 속에서 인정투쟁에 몰두하며 완고함과 편협성으로 무장해온 남성들의 경험과는 대비된다. 김영옥 또한 “정치적 영역과 살림의 영역 사이에 쳐진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무안하게 만들며 돌봄노동, 양육노동을 해왔던 여성들의 훈련된 생명감수성이 신자유주의 국가권력이 휘두르는 삶 권력을 무화시키고 삶을 생산해내는 삶 능력으로 활성화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3 내면화된 경쟁과 성과주의가 주는 문화적 피로, 경제적 불안정이 가져오는 공포가 가속되는 상황에서, 생활정치의 상상력은 한마디로 본원적 인간됨의 의미에 귀 기울이고 공감의 정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더 빨리, 더욱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누군가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불확실한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타인의 선의에 의존하면서, 또는 이를 되갚으면서 관계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본래 인간의 삶이다. 이는 환대(歡待)에 대한 데리다(J. Derrida)의 해석, 즉 다른 사람에게 선의를 베푸는 낭만적인 개인주의적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손님’이 될 수도 동시에‘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14 누구나 자신의 삶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를 하며, 이들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또 서로의 위치는 언제든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시장주의 논리에 의해 잠식되지 않은 생명정치의 상상력을 키워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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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기 「촛불집회, 거리의 정치, 제도의 정치」, 경향신문 외 주최‘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제1차 토론회 자료집, 2008.6.16.↩
- 홍성태 「촛불집회와 민주주의」, 『경제와사회』 2008년 겨울호 10~39면.↩
- 정태석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에서 사회구조적 변화 읽기」, 『경제와사회』 2009년 봄호 251~72면.↩
- 이기호 「생활정치의 관점에서 본 한일간 시민운동의 비교연구」, 『시민사회와 NGO』 2003년 상반기호 173~264면.↩
-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최병두 옮김, 한울 2007.↩
-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산 2009, 184면.↩
- 리처드 쎄넷 『뉴캐피탈리즘』, 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9.↩
-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해연 옮김, 산책자 2008, 87면.↩
- 조주현 「지구화, 텅 빈 생명, 페미니즘: 공공성의 변화와 여성운동의 대응」, 『시민사회와 NGO』 2007년 상반기호, 63~90면. 아감벤은‘호모 싸케르’란 개념으로 잠재적으로 법이 적용되지 않는‘예외’의 상태에 놓인 자들에 대해 설명했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채 자연 그대로의 정체성 혹은 동물적 정체성으로 격하되면서 오직‘생명뿐인 그런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텅 빈 생명으로 환원됨으로써, 국가권력은 아무런 책임 없이 인간을 죽일 수 있게 된다.↩
- 질 들뢰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김상운·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5.↩
-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양효실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8.↩
- Patrick Burman, Killing Time, Losing Ground: Experience of Unemployment, Toronto, Ontario: TEP Inc. 1988.↩
- 김영옥 「여성, 국가, 촛불」,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산책자 2009, 201~214면.↩
- 자끄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남수인 옮김, 동문선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