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광장의 목소리를 잇는 일상의 혁명
지난겨울 광화문 촛불광장에서 눈에 띈 표어 중의 하나는 ‘동물혐오 없는 박근혜 퇴진’이다. 이 표어는 스스로 피켓을 들고 광장에 나올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우리에게 호소하였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광장의 표어와 깃발들은 단순히 정권교체만을 위해서 시민들이 광장에 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일상 속에서 쉽게 차별되고 배제되는 타자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이번 촛불광장이 새롭게 깨닫게 한 민주주의의 주제이기도 하다. 모든 동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공존한다. 사랑과 존중을 받으며 살아가는 반려동물들도 있지만 일부 동물들은 손쉽게 학대당하고 버려진다. 일상의 삶에서 동물은 특정 대상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빗대는 언어적 수단으로 쉽게 소환되고, 먹거리와 상품으로 소비되다가 순식간에 살처분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처럼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다양한 태도는 몇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미국의 인류동물학자 할 헤어조그(Hal Herzog)는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대상’으로서의 동물에 대한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문화의 차이, 유전적 문제, 도덕적 난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다른 종의 생명을 이해하고 그와 관계를 맺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어렵고 섬세한 관계 맺기에 인간중심적인 관리와 돌봄의 방식이 투영되는 과정일 것이다. 한 예로 최근 경기도는 반려견 안전관리대책의 일환으로 ‘15kg 이상 반려견 입마개 의무화와 리드줄 2m 제한 조례’ 개정을 추진하여 논란을 야기했다. 이는 생명이 아닌 사유재산으로 등록되어 살고 있는 우리 사회 동물들의 법적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몸무게로 개의 공격 가능성을 단정하는 비합리적 추론도 그렇지만 개의 산책이 냄새를 맡고 탐색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명본능 자체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행정대책이라는 점에서 놀라울 따름이다. 동물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터져나오는 혐오와 적대의 발언들 역시 반려동물 천만 시대에 제기되는 다양한 갈등의 무게를 체감하게 한다. 삶 속에 공존하는 모든 존재들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고민과 사유 없이는 이러한 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애착과 돌봄에 얽힌 윤리적 성찰은 최근 문학에서도 예민한 쟁점이 되는 주제이다. 김애란의 소설 「노찬성과 에반」(2016)은 동물을 향한 애착과 죄의식, 소외와 결핍의 문제를 가족서사와 교직한다.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와 사는 열살 소년 찬성은 버려진 개를 집으로 데려와서 에반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사랑을 쏟는다. 어느날 에반이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찬성은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의사의 권유대로 안락사를 시키기로 결심한다. 찬성은 에반의 안락사 비용을 위해 고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 돈을 허물어 휴대폰과 게임 카드를 사고 만다. 소설은 그 자신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인 소년이 동물에게 애정을 구하고 또 그를 책임지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찬성과 에반의 서사는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 빈곤과 노동의 문제, 무책임한 의료행위와 안락사 문제, 생명윤리 등 무거운 주제들을 한꺼번에 제기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암시되는 에반의 죽음은 사실 어린 소년의 죄의식이나 개인적 책임감으로만 감당해야 할 몫은 아니다. 소외되고 버려지는 동물의 모습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우리가 마땅히 고민해야 할 윤리적 책임을 환기한다. 소년이 느끼는 ‘살얼음판’ 같은 현실의 고통스러움 역시 함께 나누어야 할 열린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지난 일년을 돌아볼 때 촛불광장은 일상의 삶을 새롭게 배치하고 바꾸어나가려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지와 동력을 보여준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월 28일 열린 ‘촛불 1주년 인권궐기대회’는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을 다음과 같은 선언문으로 압축한다. “우리는 성소수자이고 장애인이며 청소년이고 홈리스이자 여성이며 나중으로 밀려난 모든 사람이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다 말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우리의 삶이 그대로라면 세상도 그대로다. 민주주의는 혐오와 함께 갈 수 없으며 빈곤과 폭력의 철폐는 아직 약속되지 않았다.” ‘촛불 1년 인권궐기대회 참가자 일동’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선언은 촛불 이후의 삶이 실질적인 삶 속의 전환과 도약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여러 발언들 중에서도 탄핵은 같이했지만 선거에서는 배제되었다고 토로한 청소년 대표의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존중받고 싶고 인간답게 살고 싶고 시민으로 대우받고 싶”다고 말한 그는 “스무살이 넘어서야 인권을 누리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존중받고 행복하고 싶”다고 호소한다. 그의 발언은 ‘촛불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깊은 암시를 주는 듯하다.
2016년 10월 29일 시작해 올해 4월 29일까지 스물세차례 열린 촛불집회는 시민이 거둔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누적인원 1700만명이 참가하여 끝까지 평화적 집회를 유지한 광장에서는 수많은 논제들이 쏟아져나오고 토론되었다. 이제 그것을 실질적인 개혁으로 연결하는 것은 정부와 시민 공동의 몫이다. 정부는 시민의 요구가 정치권력의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거듭 상기할 필요가 있으며, 적폐청산에 머물지 않는 장기적인 개혁의 비전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광장에서 뜨겁게 타오른 촛불의 움직임이 일깨운 것은 일상에 잠겨 있는 관습적인 사유와 편견을 허물려는 전환의 시도들이다. 이웃과 타자를 향한 사랑과 책임 역시 자기연민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으로 나누고 공존하는 데서 확장될 수 있다. 광장의 목소리가 일상의 혁명으로 연결되는 작업은 이렇듯 나날의 삶 속에서 부딪치는 치열한 고민과 노력을 통해서 한걸음씩 진전될 수 있다.
이번호 특집의 주제는 ‘촛불의 눈으로 한국문학을 보다’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우리 문학이 맞게 된 전환적인 계기들과 잠재적 힘을 들여다봄으로써 새로운 세상 만들기의 실천적 가능성을 성찰하려는 기획이다. 문학의 시선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과 낡은 세상의 간극을 들여다보려는 작가들의 분투가 어떤 성취로 드러나는지를 살핀 심도있는 평문들이 주목을 요한다. 한기욱은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새로운 빛으로 우리 문학의 현재를 조명해보려는 시도로서 문학이 촛불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를 세심하게 성찰한다. 이 글은 낡은 세상과 새로운 세상, 살아 있는 삶과 죽어 있는 삶의 차이를 드러내는 문학적 실천 자체가 새세상 만들기의 핵심적 일부임을 강조한다. 촛불혁명의 변혁적 열망과 관점을 중심으로 젠더평등의 목소리에 주목하여 최근 페미니즘 소설들의 흐름을 진단하고, 이와 연결해 한강과 김려령의 소설이 거둔 촛불의 문학적 성취를 적극적으로 발굴한 글로서 주목된다. 심진경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및 페미니즘 논의가 문학의 상상력에 일으킨 새로운 변화의 지점을 살핀다. 김형경과 강화길의 소설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의 성정치가 보여주는 쟁점과 한계를 다각도로 성찰하는 글이다. ‘피해자중심주의’와 ‘페미니스트 신원조회’로 함몰되기 쉬운 사회운동의 한계 및 이와 연동된 문학의 관습적 재현 문제를 비판적으로 짚은 부분이 특히 주목된다. 황규관은 촛불민주주의의 흐름 속에 지난 시대의 지속에 대한 열망과 그것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이중나선의 구조를 읽어낸다. 정치시와 난해시, 서정시의 관습적 경향을 벗어나 새로운 몸(신체)을 가진 시를 잉태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며, 이동우 김선향 권선희의 시에서 이러한 가능성과 성취를 발견한다.
문학평론란에서 이성혁은 2010년대 시의 흐름과 연관된 시의 미학적 윤리 논의에 대한 비판적 점검을 이어간다. 타자-연대에의 흐름을 지향하는 많은 시들의 전략을 세대론이나 윤리적 책임감으로 협소화할 수 없다는 논지를 바탕으로, 삶의 위기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실존을 재창안하려는 최근 시의 성과를 임솔아 신철규 안태운 이설야의 작품을 통해 분석한다. 남상욱은 촛불 이후 한국문학의 미래를 생각하는 중요한 참조점으로 전후 일본의 문학장과 담론의 전개 양상을 고찰한다. 안보투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헌법질서의 위기가 문학의 위기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현재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글이다.
창작란의 성과도 풍성하다. 시란에는 김명기에서 허은실까지 12인 시인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담았다. 독자들의 성원과 관심 속에 연재되었던 김금희의 장편이 마지막회에 이르렀다. 일년 동안 공들여 작품을 집필해온 작가와 애정 어린 눈길로 함께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김봉곤 김세희 손원평 편혜영의 신작 단편도 함께 소개하게 되어 기쁘다.
문학초점에서는 김성중 소설가를 초대하여 대화를 펼친다. 박사랑 임현 김혜진의 소설과 김경후 권선희 장수진의 시집이 지닌 다양한 개성과 의미를 짚어나가는 유익한 읽을거리다. 두 계절 동안 좌담을 이끌어준 박소란 한영인 두분께 감사드린다. 작가조명에서는 신작시집 『하동』을 출간한 이시영 시인을 박준 시인이 만나 섬세하고 내밀한 시적 대화를 주고받았다. 시대와 개인의 역사를 오가는 진지하고 심도있는 질문과 응답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면서 짧은 ‘이야기 시’가 지니는 미학적 현재성의 의미도 자상하게 짚는다.
대화에서는 신작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를 출간한 페미니스트 저술가, 비평가인 리베카 솔닛을 본지 편집위원 백영경이 만나 흥미진진한 대담을 가졌다. 촛불혁명의 전개과정 속에서 새롭게 부각된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 반핵·환경 운동, 미국의 역사와 전통의 고찰, 미국과 한국의 현실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통과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방식으로서의 글쓰기를 역설하는 솔닛의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논단에서 이일영은 지난 가을호 특집인 ‘커먼즈와 공공성’을 검토하면서 커먼즈(commons) 논의가 시장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체제의 운영원리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는지를 세심히 살핀다. 동아시아·한반도 평화체제를 지향하는 국제적·국내적 노력과 새로운 지역분권화 발전의 추진력을 결집하는 프로젝트로서 ‘평화 커먼즈’의 필요성을 새롭게 주장하는바, 커먼즈와 관련된 이후 논의들이 더욱 활발하게 이어지기를 고대한다.
현장란에서는 숙의민주주의의 제도적 실험과 지역문학의 현황을 살피는 글을 소개한다. 하승수는 신고리5·6호기 공론화 결과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가 국가적 사안에 대해 본격적인 심의(숙의)민주주의 방식을 적용한 이 최초 사례의 공과를 균형적으로 살핀다. 이선욱은 대구 지역의 현장에서 실감하는 촛불 이후 문학의 역할과 지역문학의 미래에 대해 사려깊은 논의를 펼친다.
산문으로는 『소년이 온다』로 2017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문을 소개한다. 문학에 스며든 역사적 삶의 현장과, 인간의 참혹에서 존엄을 발견하려는 소설적 분투의 시간을 읽어낼 수 있는 글이다. 촌평란에서는 한 계절의 주목할 만한 책들에 대한 정성 어린 서평을 만날 수 있다. 올 한해 고정필자로 수고해주신 양효실 하대청 두분에게 감사드린다. 독자 리뷰는 윤홍배 변호사와 류진 시인이 지난호 창비를 세심히 읽고 독후감을 써주셨다.
올해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본상에 김정환 시인이, 특별상에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가 선정되었으며 백석문학상은 신용목 시인에게 돌아갔다. 견결한 시대정신과 고유한 문학적 기량으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삶의 문제를 심도있게 통찰한 수상자들에게 격려와 축하를 드린다.
본지에도 축하할 만한 소식이 있다. 신임 편집위원으로 시민운동가 이태호와 현대문학 연구자 이정숙, 문학평론가 정주아가 합류했다. 앞으로의 활약에 기대를 거는 바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설레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한권의 책을 내놓는다. 광장에 모인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일상의 실천 속에 하나하나 새겨지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초심으로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변함없는 성원과 관심, 엄정한 비평의 시선으로 함께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백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