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오늘의 한국시, 이룬 것과 나아갈 길

 

되찾은 ‘님’의 시간

커먼즈로서의 한국시와 시비평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분열하는 감각 너머의 리얼리티」 「살아 있는 역사와 좋은 시의 언어: 신동엽론」 「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1. 의미의 위기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에서는 한국시의 타성을 문제 삼으면서 ‘다른 서정’에 대한 기미를 포착하는 기획을 다룬 바 있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당시 시가 고독하게 교신되는 “비밀의 상형문자”(17면)가 된 상황과 “‘나의 시’를 앞세우는 풍조”(18면)를 언급하며, 그로 말미암아 독자의 위기로까지 전이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했다.1 그리고 문제를 타개할 방안으로 시가 ‘님’을 회복할 필요를 말한다.

 

최고의 시들은 불멸의 음악으로 우리가 그것과 관계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존재 전체가 무로 환원되는 ‘님’ 앞에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세웠다. 그런데 최근 한국 시는 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잊었다. 아니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22면)

 

일반 독자들은 흔히 감동받은 작품을 말할 때 ‘나의 이야기 같다’고 표현한다. 예술작품이 다루는 내용이 자신의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즉 작품을 통해 어떤 날카로운 보편성을 마주했다는 뜻이다. 개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지닌 보편성은 독자가 그것을 체험하는 순간 삶의 의미를 떠올림과 동시에 그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전망을 감지하게도 한다. 이것이 독자들이 받은 감동의 정체이며 최원식이 말한 ‘님’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용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카로운 ‘님’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순간을 선사하며 삶다운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으로 우리를 이끈다.

최원식은 문학사에 나타난 ‘님의 상실’을 추적하며 그것이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시의 대중화’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엘리뜨주의에서 평등주의로 이행하면서 독자들과의 소통을 방기한 채 자기표출에 급급한 현상이 늘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을 시에서 비평으로 옮기면, 시 속의 ‘님’을 제대로 읽어내어 독자와 작품을 만나게 해주는 비평의 역할은 충분했던가도 따져볼 사안이다. 민주화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적 양식들로의 접속이 자유로워지면서 시의 언어에 영감을 줄 문화적 자원이 풍부해졌다.2 동시에 1987년 이후 사회적 합의의 실패를 문제 삼고 개인적인 것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 재현에 얽매이지 않는 가파른 개성적 표현에 몰입한 시가 ‘님’을 비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최원식의 지적대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시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기보다 시의 난해화를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과정은 비평의 책임을 무겁게 한다. 개성에의 몰두가 빚어낸 공과(功過)를 분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의미있는 개성이 빚은 난해함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중개하고 평가할 임무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비평이 충실한 중개 이전에 난해함을 풀어내지 못했고 그리하여 누적된 이 문제가 미래파 논쟁까지 불러온 측면이 없지 않다. 아쉽게도 미래파 논쟁은 이 난해함을 자폐적이라고 낙인찍는 쪽과 그 안에 담긴 새로운 감각을 강조했지만 복잡해진 표현에 감춰진 현실적 의미는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쪽으로 양분되었다.3 그렇다면 그 이후의 시비평은 어떤가.

미래파 논쟁 이후 시비평계를 다시 한번 뜨겁게 달궜던, 15년 전쯤의 ‘시와 정치’ 논쟁을 돌이켜보자. 시적인 것의 본질을 따져 묻는 일이 하나의 쟁점이었는데, 여기서 시와 정치의 공존을 긍정하지 않기 위해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격을 넓히는 방향의 주장을 펴는 논자들이 적지 않았다. 가령 당시 강동호는 심보선의 「슬픔의 진화」(『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를 분석하며 ‘세계 없는 언어’라는 언어의 한계를 주장했다.4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심보선 「슬픔의 진화」 부분

 

시의 이 도입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의 주인은 자신의 언어가 책상물림의 수준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성찰하고 있다. 책상에만 붙들린 언어에는 세계의 실감이 부재한다는 정직하면서도 오래된 시인의 고백을 강동호는 “과격한 고백을 통해 독자를 시 속으로 끌어당겨, 세계와 언어 간에 발생하는 불일치에 따르는 좌절을 지시하는 것 같”(297면)다고 오해한다. 그러고는 이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296면)인 절망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그 가면이 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대”(300면)로 우리를 이끈다는 논지를 이어가며, 결론에 가서는 “시의 언어는 삶을 직접적으로 쓸 수는 없으나 다만 삶이 처한 시공간, 즉 현실에 대한 잠재적인 부면으로서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쓴다”(312면)고 적는다. 형식이라는 말과 더불어 각종 개념적 장치들을 동반한 설명 과정에서 비평이 삶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서술은 지우거나 건너뛰고 전문화된 정보에 그치고 마는 분석이다. 이 시를 조금 빌리자면, 비평의 언어에 삶이 빠져 있고, 비평의 공간에 개념의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비단 강동호 글에서만 발견되는 문제는 아니다. 미래파 논쟁 이후 최근까지 시의 두터운 언어에 내포된 의미는 발굴하지 못한 채 방어적 개념들로 시에 깃든 우리 삶을 고립시킨 비평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최근의 상황은 어떤가. 우선 비인간담론과 접속하여 시의 의의를 찾는 비평들은 인간의 자리로부터 발생한 의미를 부러 지운다.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과도한 특권을 반성하는 것과 인간의 자리를 지워버리는 일은 당연히 다른데도 종종 혼동된다.5 가령 임승유의 시 「그 정도의 양말」(『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에 대한 인아영의 분석6을 보라.

 

양말이 가득했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잘 때 신으면 좋은 그런 양말 말이다. 이젠 거의 안 남았는데 나도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문 열고 나가면 와 있는 계절처럼

 

볼 때마다 네가 양말을 줘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그건 양말의 비밀이다. 발가락 사이에 하얗게 거품이 일도록 씻은 후 양말을 신어보는 것. 양손으로 두 발을 쥐고 코가 닿을 것처럼 양말을 보는 것. 나한테 양말은 그 정도였고

 

지금은 없어진 양말을

—임승유 「그 정도의 양말」 부분

 

인아영은 임승유의 시에서 “옷은 특유의 온도, 무게, 부피를 가지고 있는 비인간 신체로서 인체의 감각과 사고를 일깨운다”(379면)고 적으면서 저 시가 “양말의 의미를 예민하게 식별하고 그 물질적 세계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이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물에 대한 개념화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대상에 깃든 생기에 함께 머무는 미적 실천”(380면)이라고 서술한다. ‘사물의 생기’와 ‘미적 실천’이라는 수사가 활용되는 사이 그 양말을 화자에게 건네주어서 양말 자체를 의미있게 만들어준 사람의 자리는 소거된다. 사실 인아영이 언급한 감각의 증폭은 양말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시의 화자와 양말을 건네준 ‘너’의 관계에서 기원한다. 이 시의 핵심적인 사건은 누군가 챙겨준 양말과 그이의 돌연한 부재, 그리고 그 부재를 스스로 감당하는 행위 속에 있다. 여기서 상론하기 어렵지만 이 시는 돌봄과 성장의 이야기로 읽을 만하며 이 테마는 임승유 시에서 거듭 반복된다. 그러나 인간을 지우고 사물만을 이야기하는 순간, 이 시는 유행하는 담론의 어휘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 굴절되고 만다. 요즘 비평담론은 작품의 진실에 접근하는 매개로서가 아니라 작품을 새롭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면이 있다.

 

 

2. 꿈의 대화, 커머닝으로서의 시쓰(읽)기: 이수명과 박노해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멩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이수명 「꿈에 네가 나왔다」 전문

 

강동호는 이수명 시집 『도시가스』(문학과지성사 2022)를 해설하면서 이 시를 “이번 시집의 주요 테마와 더불어 시인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시간성을 형상화하는 원리를 파악”(강동호 해설 「무의 광장」, 122면)하는 근거로 다룬다. 무슨 말인가 하니, “누더기”의 형상을 “서로 다른 시간 조각들이 함께 기워져 동일한 시간성의 지평을 구성”(124면)하는 자리로 본다는 말이다. 이 말은 따로 기억해두자. 이수명의 시가 결과적으로 펼쳐 보인 세계의 모습과 방향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누더기”를 저러한 원리의 상징으로 보는 일은 납득되지 않는다. “누더기”를 입은 ‘너’가 소거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해설자가 ‘너’를 ‘시’라고 단정하기에 그렇다. 어떻게 그런 단정이 가능한 것인지, 상식적인 의문은 해명되지 않은 채 강동호는 이수명 시에서의 “옷은 ‘시인의 부재’ 또는 ‘부재하는 시인’이라는 이수명의 말라르메적 이념(주관성의 부재)을 표상하는 대상이자, 그가 직면하고 있는 당대성을 감각하는 외피(표면)의 역할을 수행한다”(123면)고 덧붙인다. 이쯤 되면 이수명의 옷은 평범한 삶과 결부된 옷의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시를 설명하는 데 복무하는 관념의 언어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 시가 접속하고 있는 독특한 역사성을 마주할 가능성이 소멸한다는 데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이수명은 언어적 측면에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 작가이다. 말라르메(S. Mallarmé)가 호명된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시인의 두번째 시집의 표제작이자 이수명다운 시로 거론되는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를 떠올려보라. 이 작품은 재현적 언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쓴 시에 가깝다. 두번째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세계사 1998)에는 이러한 정황이 다수 그려진다. ‘바다’는 ‘바닥’이 되어버리고(「물고기와 컴퍼스」), ‘왜가리’는 느닷없이 ‘테이블’이 되어버린다(「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누적된 의미들을 등지거나 숨긴 채 소리의 유사성이나 문자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독특한 연상에 갇힌 언어들은 무언가에 발목을 붙잡힌 포로처럼 보인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판단에 동의하느냐와는 무관하게 쇠파이프는 땅에 묻히고(「이야기를 나누는 포로들」), 어딘가를 오르던 발목들이 계단에서 화분이 된 모습은(「계단마다 두 발이」) 1990년대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의미심장하다. 첫번째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세계사 1995)의 「새벽안개」에 나오는 “했던 말을 철회한다”와 “목구멍에 걸리는 현실이 없다”는 구절 역시 1987년을 지나 1990년대에 진입한 시기를 이수명의 시세계가 어떻게 포착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비평은 이와 같이 작품의 언어와 연동된 역사적 정황을 탐색해야 하며, 이에 더해 그 조건에서 피어난 삶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누더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누더기”를 해석할 때 추가로 고려할 사항은 이수명 시의 변화이다. 시집의 제목만 보더라도 변화가 감지된다. 이전 시집들의 제목 ‘마치’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그리고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는 언어의 변형에 관계하거나 언어의 반복에 강조점을 둔다. 반면 근간 ‘물류창고’와 ‘도시가스’는 구체적 삶의 현장을 떠올리는 자리에서 언어가 증폭하며 여는 공간으로 쉽게 비약하지 않고 본래의 자리에 남아 있는 제목이다. ‘물류창고’라는 구체적 공간을 그대로 내세운 시어의 출현을 특이하게 여기며 이수명의 시에 언어적 맥락 너머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도 이에 대한 방증이다.7 물류창고는 우리에게 창고형 대형마트의 이미지를 쉽게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세월호의 공간까지도 가닿는다. 이수명은 세월호라는 구체적 공간과 세월호 바깥의 한국사회를 중첩시켜 현실의 병증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8 이런 정황은 “누더기”를 언어적 환각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 사회적 맥락으로 읽기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개도국에서 저임으로 대량생산된 값싼 의류가 쇼핑센터에 전시되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의 싼 가격을 볼 뿐, 자원 낭비, 에너지 낭비,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소비 습관을 줄이는 사람은 드물다.9

 

“누더기”를 해석하는 데 이런 서사를 더하는 일이 과할까. 이수명의 최근 두 시집을 보면 소비와 욕망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다루며 시간을 압착시킨 사회의 문제적 모습을 시인이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제목만 보더라도 ‘소비자본주의’와 ‘화력자본주의’를 겨냥한 의식의 방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여전히 ‘너’라는 주체가 남는다. 「꿈에 네가 나왔다」에서 화자가 꿈속에서 만난 ‘너’는 그냥 막연한 너일까. 꿈이라는 공유영역에서 만나는 ‘너’는 누구일까. “누더기”라는 말 자체에서 감지되는 시간성은 ‘너’가 어떤 시간의 흐름을 동반하며 나타났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누더기”와 유사한 계열에 놓인 “돌멩이”로 시선을 옮겨도 그렇다. 그 “돌멩이”들이 시간이 흐르며 빚어진 것이 “돌벽”일 텐데, “돌멩이”가 빛을 잃기 전에는 곧 ‘별’이었다고 해석할 만도 하다.

40년 전, 옷과 별이 등장하는 특별한 시 한편이 있었다. 한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삶의 현장을 시로 써내려간 일은 노동문학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는데, 바로 그 시인 박노해의 등단작 「시다의 꿈」(『노동의 새벽』, 풀빛 1984)에서 ‘시다’는 “새벽별”을 이마 위로 맞으며 “옷을 만들”면서 “찢겨진 살림을 깁고” 있었다.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박노해 「시다의 꿈」 부분

 

이수명의 「꿈에 네가 나왔다」와 박노해의 「시다의 꿈」을 겹쳐놓으면 문학작품이 얼마나 복잡하게 생성되는가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이 복잡함은 우리 시의 역사가 형성한 두께가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과 시 자체가 거대한 협동작업이라는 점을 떠올리게도 한다.10 한편으로는 같은 역사적 지평에 살며 구체적이고 감각적 경험에 예민하여 다른 시인의 작품도 깊이 체험하는 시인들이라면 이와 같은 작품의 연동이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11 주목할 것은 이 두 작품의 결속으로 인해 새롭게 펼쳐지는 인식과 실천이다. 박노해가 그린 ‘시다의 꿈’은 “왜소한 시다의 몸짓”이 암시하듯 그 꿈이 헛된 것이 되리라는 불안이 작동하고 있긴 하나, 어떠한 응답을 계기로 “장미빛” 미래를 그려볼 여지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수명의 시를 살펴보면 마치 노동자들이 품었던 꿈이 누더기가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듯하다. 박노해가 직시한 노동현장의 사회적 차별과 푸대접이 여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심각하기에, 이런 결론을 ‘시다의 꿈’이 누더기처럼 엉망으로 훼손되었다고 읽을 여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시 사이의 교신으로 그려진 결론이 지난 40여년의 노동현장이 완전히 황폐화되었다는 이야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수명의 시 속 ‘너’의 안위를 묻는 감각은 단순히 남을 생각하는 윤리적 태도의 강조가 아니다. 「꿈에 네가 나왔다」의 “꿈”은 ‘시다의 꿈’이 꿈꾸던 주인됨의 자리와 자신의 자리가 무관하지 않음을, 자신의 자리에서의 주인됨 역시 노동의 자리가 처한 처지와 연동되어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또한 둘의 연합이 너무 약해 고통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반성의 그림자도 깔려 있다. 어쩌면 이 두 자리 사이의 교신과 연합, 이것은 우리가 문학사에서 말했던 민중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두 시 사이에서 우리는 민중적 운동성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소비자의 자리로 자신을 이끄는 시대적 질서에 저항하며 최대한 민중의 자리에 가보려는 시인의 실험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긴 시간을 사이에 둔 작품들을 결합해서 읽는 일이 우리에게 늘 안도할 만한 내용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눈 오는 날」(『도시가스』)은 우리의 감수성이 지난 몇십년 사이 얼마나 파괴되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다.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을씨년스러운 책장에 책은 한권도 없고 눈뭉치만 뒹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앞부분을 생략하고 그다음부터 이어서 옮긴다.

 

남몰래 눈 뭉치를 던지는 자는 누구인가

 

그대로 내버려둔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든 저 분명치 않은 덩어리들을 건드리고 싶지가 않다.

 

(…)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거리의 크고 작은 창문들

모두들 밖으로만 내는 창문들

 

거리에는 구석으로 옮겨지는 눈 실려 가는 눈 도로 가득

 

녹지 않은 눈

위를 걷는 사람들

 

속에서

한 손에 책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았다.

—이수명 「눈 오는 날」 부분

 

녹지 않은 눈(雪) 위를 미끄러지며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차가운 눈(目)이 그려진 시이다. 여기서 또다른 시, 기형도의 「기억할 만한 지나침」(『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을 떠올린다. 기형도는 눈 내리는 거리에서 창문을 통해 사무실 안쪽을 바라보며 서류뭉치에 둘러싸여 남몰래 혼자 울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과, 잘 알지도 못하는 그이의 슬픔을 존중하고 동조해주던 인정(人情)을 기록한다. 하지만 이수명의 「눈 오는 날」에는 그런 눈빛과 동요가 없다. 이수명의 시는 타인의 사정에 대한 무관심과 더불어 익명적 삶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무차별적인 공격적 정동을 무심히 그려낸다. 몇십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두 시를 겹쳐 읽으며 우리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순간을 맞는다.

한국시는 여러 삶의 자리를 그리며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 세계에서 시인들은 각자의 꿈과 시 속에 그려진 꿈을 겹쳐놓고 사유할 영역을 얻었다. 같은 삶의 지평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알아보는 비평가들의 입체적이고 성실한 독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독해는 서로의 꿈과 기록으로 현실의 모습과 의미를 한층 선명하고 두텁게 하는 시인들의 작업에 비평 역시 민주적 대화의 공간을 열어 협업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별 작품을 축적하는 문학사가 아니라 축적된 작품들의 관계 맺음을 통해 시간을 품는 문학사일 것이다. 그로써 변화된 삶의 궤적이며 변화에 휩쓸리지 않은 우리의 본모습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울러 한국시와 관련한 지식을 축적하는 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꾸었던 꿈을 새롭게 활성화하는 실천적 장을 기대하게 만들 것이다. 이 실천적 장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님’을 맞이하거나 또는 어떤 ‘님’이 침묵에 이르렀는지를 되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3. 잃어버린 시의 커먼즈를 찾아서: 이세기

 

비평이 작품 속에서 ‘님’을 발견하는 데 곤란함을 겪는 이유 중에는 비평가들이 ‘님’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님’의 출현을 몰라보고 시선을 두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님’은 어디에 있는가. 당연하게도 ‘님’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있다. 이세기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갯티’ 같은 곳은 신랄하게 구체적인 삶의 풍경이다. 이세기에 따르면 갯티는 “섬 둘레에 형성된 갯바위 주변이나 갯바탕”, 즉 ‘갯벌이나 갯가’를 말한다.12

 

할멈 둘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

 

살얼음 갯바위 틈새

얼어죽은 한 마리 주꾸미라도 주우려

 

갯바위를 걸어서

굴바구니 들고 갯티에 가는

생계 줍는 아침

—이세기 「생계 줍는 아침」 전문13

 

이 풍경에 인간을 위한 편리와 안락은 없다. ‘생계’라는 단어 역시 그것들의 결핍을 가리킨다. 생계를 ‘살길’로 바꿔 읽으면 살길을 찾아 갯티를 걷는 이 노인들의 모습과 갯바위 틈새에서 얼어 죽은 주꾸미 한마리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유한한 신체성을 고스란히 수용하며 사는 듯하다. 이 상황이 묘하다. 인간을 위한 안락은 없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독단과 거만 또한 없기에 어떤 공존의 생태감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고통과 평화의 공존을 바라보는 듯한 이세기의 시선은 삶의 현장을 관망하는 자의 착시 내지 착각일까. 갯티가 등장하는 다른 시의 구절까지 살피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예컨대 「덕적군도」(『언 손』)에는 “갯티 얼굴에 찌든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한 동서 같다//햇굴이 나오는 갯티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가 고향 같다”라는 구절이 있다. “얼굴”과 “햇굴”의 비슷한 음성에서 우리는 둘의 존재론적 위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햇굴에게도, 그것을 채취하는 얼굴에게도 갯티는 고향이다.

앞선 시 「생계 줍는 아침」의 작은 풍경을 처연하게 보이지만은 않게 하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갯벌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서로를 책임져주는 삶의 규약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쯤 되니 머릿속에서 막연히 떠오르던 두 노인의 걸음걸이가 달리 상상된다. 구부정하고 힘없는 걸음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의연한 노동의 걸음. 동시에 우리가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특별한 약속의 공동체를 상상하게 된다. 첫 시집 『먹염바다』(실천문학사 2005)의 추천사를 쓴 박영근과 두번째 시집 『언 손』의 추천사를 쓴 정희성이 서술했듯 이세기의 시적 영토는 한국시사가 충분히 돌보지 못한 곳으로, 의미의 발굴이 필요한 지역이다.

우선 덕적군도의 가난에는 한국사회의 토건지향적 개발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다. 그곳은 애매한 입지나 북과 인접해 있다는 특성 그리고 몇몇 토건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험으로 인해 개발에서 벗어나 있었다.14 그러나 개발에서 멀어진 것이 가난의 유일한 원인이 되긴 힘들다. 이 지점을 역사적 관점에서 내실있게 설명한 이는 최원식이다. 최원식은 이세기의 첫 시집을 해설하며 이세기 시의 영토가 거느린 역사를 자세히 살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맥락을 유장하게 짚는다.

 

내륙지향적 조선왕조가 고려의 해양성을 봉쇄하는 강력한 해금(海禁)정책을 펴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유전되는 이 고루한 정치적 무의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바다와 그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은근히 괄호 친다. (…)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한 남로당의 이승엽이 영흥도, 진보당의 조봉암이 강화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섬의 근대정치학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 인천 앞바다 섬들은 해방에서 6·25에 이르는 격동기를 통과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임계점에 오른다. 먹염바다는 이 시가 덕적군도 일대에서 활동한 좌익을 수장(水葬)한 곳, 그 시체들이 문갑도로 떠내려왔다고 시인은 말한다. 반란의 땅, 섬들은 6·25 이후 서해 바다에 금 없는 금이 그어지면서 다시 아득한 변방으로 가라앉는다. 엄격한 반공체제 아래 접적(接敵) 지역의 섬 주민들은 잠재적 위반자로 간주되곤 했는데, 바다의 가난은 의연하였던 것이다.”(최원식 해설 「바다가 가난한 나라의 시」, 119~20면)

 

‘갯티’에 그려진 삶은 단지 운 좋게 개발에서 벗어난 보존구역의 풍경이 아니라, 현대사의 질곡과 무관하지 않으며 떳떳한 반란과 당당한 삶의 기운과도 닿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세기의 시에 누군가의 제사를 치르고 치성을 드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의례를 매개로 억울한 삶을 불러오고, 온전하기 어려웠던 삶을 재증명한다. 이 의식(儀式) 안에는 수장되고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기원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일면식도 없고 숨소리마저 그친 사람에게까지 가까이 다가가려는 제사와 굿은 튼튼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며 그 네트워크를 지속시킨다.15 직접적으로 관계 맺어본 적이 없는 존재들과도 관계의 책임이 있음을 배우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독자에게 누군가의 실현되지 못한 꿈에 대해서도 책임을 동반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실감을 제공한다. 나아가 즉각적으로가 아니라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무언가를 되새길 수 있는 의미의 공간을 감각할 수 있게 만든다. ‘님’과의 만남 비슷한 것이 제사와 치성의 행위 속에 있는 것이다.

덕적군도 혹은 북에 인접한 서해군도 문학으로서 이세기의 시는 한국문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국시사에서 왜소해진 서사인 분단 문제가 그의 시에서는 여전히 강한 현재성으로 작동한다. 이 말 하기가 조심스럽다. 마치 시인이 분단을 전면으로 내세운 시를 쓴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세기의 시에는 분단 문제가 드러난 순간들이 있다. 시의 화자가 “밤에도 집을 찾아 떠나는/새소리”(「조강에서」, 『언 손』)를 들으며 단절을 떠올릴 때, 산마루에 걸린 흰 구름을 바라보며 “황해도 연백에서 왔다는 할배가/배연신굿을 하는 애기무당 누이를”(「대청도를 지나며」, 『언 손』) 떠올리며 눈시울을 훔칠 때, 어느 사이엔가 한국시사에 사라진 영토인 북이 다시 호출되고 분단체제의 문제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슬며시’가 중요하겠다. 분단 문제가 다른 문제를 집어삼키며 등장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세기의 시에서 분단은 거창하고 관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존과 밀착된 현장의 문제이다. 누군가의 가계와 이주와 경제와 노동과 굿과 울음과 눈빛 속에 분단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세기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드리운 분단의 그림자를 알아보고 자신의 세계상을 수정할 것이며 갯티가 품은 동향의식이 갯티 안의 것만이 아님도 깨달을 수 있다. 「서쪽」(『먹염바다』) 같은 시를 살펴보자.

 

그해에는 삼월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

 

배를 타고 월북을 하였던 둘째 작은아버지는 반공법으로

월남에서 돌아온 매형은

목발을 한 채

이틀 밤을 묵고 섬을 떠났습니다

 

(…)

 

흙을 파먹다 부황이 들었다는 배를 타지 못한

흐냉이 삼촌은 끝내 죽었습니다

쉬쉬하는 소리와 함께 언 땅에 묻었습니다

 

배를 탈 수 없었던

털보 작은 아버지와 넙잭이 작은 아버지는

인천으로

아버지는 목포로 갔습니다

 

바닷가에 눈이 내리고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쟁쟁 꽹과리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 묻은 뱃사람이 거적을 뒤집어쓴 채

마을로 올 것만 같은

밤이 지나고

 

(…)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그해의 마지막 눈이 내리고

뒷산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엉엉 울음소리도 났습니다

 

그때마다 당집의 울타리 돌담에다가는

몇 개의 돌이 얹어졌습니다

—이세기 「서쪽」 부분

 

이 시에서는 부엉이의 울음과 사람의 울음이 공명하듯 모든 존재들의 사연이 연동되어 있다. 물론 이 연동에는 불합리한 제도가 압력을 가한 부분도 있다. 이 땅의 냉전체제나 분단 문제 등은 한 개인의 행적을 빌미 삼아 그 주위의 친밀한 존재들까지 구속한다. 인물들의 삶은 구속을 피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 구속의 압력이 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이 스스로를 운명공동체의 구성원처럼 여기는 관습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땅의 제도는 섬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압력과 상처를 주었고, 그들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지 못해 고향에서 먼 곳으로 이주해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고향이자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내쫓긴 자들과 남겨진 자의 곤경을 그리는 이 시는 우리 삶에 새겨진 역사의 상흔을 현재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시가 불러오는 것은 상흔만이 아니다. 당집 울타리에 돌 몇개를 올리고 가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이웃의 상처를 돌보는 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세기의 시세계에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염려하고 환대하는 모습이 종종 비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6 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섬을 지킨 뱀의 전설을 시화한 「이무기 이야기」(『언 손』)와 토건세력들과 싸워 굴업도를 보호한 목소리를 다룬 「굴업도」(『언 손』)가 폭력과 맞선 기억의 기록으로 자리한다. 이 시적 영토는 우리 시사에 좀더 깊숙이 들어올 필요가 있다. 분단과는 무관한 삶을 그리는 듯한 시세계에 우리가 처한 현실의 실감을 전달하는 것은 시의 공유영역과 현실의 영토 사이에 크나큰 이격이 생기는 허망함을 방비하는 일이며, 또한 아직 오지 않았지만 아예 오지 않은 것은 아닌 평화적 공동체의 꿈을 연습하는 길이다. 흥미롭게도 이세기의 시가 가장 아끼는 서술어가 ‘온다’이다. 그는 노동하고 이주하고 슬퍼하고 누군가와 잠시 구원처럼 삶을 나누는 과정 속에 아직 오지 않은 존재들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듯한 사람의 형상을 그려 넣는다.

 

 

4. 한국시의 성취를 생각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대상이 지금은 없다는 궁핍의 체험인가 하면, 기다릴 것조차 없는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충만의 체험이기도 하다. 모든 기다림에는 눈앞에 없는 지나간 어떤 것에 대한 기억과 앞으로 올 그 무엇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 고통을 느끼되 희망과 기억을 잃지 않고, 이 고통의 시간을 일순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희망과 기억의 시킴에 따라 그날그날의 할 일을 하고 싸움을 싸우는 것만이 올바른 기다림의 자세인 것이다.17

 

백낙청이 만해와 육사, 윤동주와 김수영을 불러 모아 기다림의 참뜻을 감각적이고 자상하게 살핀 이 글에는 자연스럽게 기다림의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님’의 자리도 그려진다. 기다림이 왜 생기고 어떻게 그 지난한 일을 회피하지 않고 지속하는지를 말하는 사이 문학의 자리에 새겨지는 ‘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각자의 고통 섞인 삶 속에 ‘님’의 빈자리가 있다는 점은 누구나 안다. 또한 자본주의가 빚은 착취와 불평등이 극복되는 자리, 분단이 만든 자주와 평화의 빈자리 역시 ‘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아마도 저 공간들을 구체성을 띤 문학의 언어를 통해 마주한 경험도 빈번할 것이다. 시인들은 시의 공동영역(커먼즈)과 현실을 오가며 서로의 꿈과 현실을 복잡하게 체험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로써 실험하고 창조한다. 이런 상황은 비평가들에게 시의 공동영역을 좀더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설명할 책무를 요구한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이는 시와 현실 사이에 놓인 다리를 언어화하는 일이며, 한 시인의 꿈과 다른 시인의 꿈 사이에 이어진 다리가 새롭게 개방한 길을 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평은 문학의 언어에 시를 가두는 일을 멈추고 저 다리와 길 위에 다시 서야 한다.

 

 

  1. 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2. 김종엽은 1987년 이후 사회문화적인 영역의 전환을 이야기하며 199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문화담론의 폭증”과 “다양한 정체성의 탐구, 상징적 투쟁들, 역사적 기억의 투쟁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134면 참조.
  3. 미래파 논쟁에서 미래파를 옹호하는 비평들이 작품의 현실적 의미를 얼마나 소홀히 해석했는가에 대해 다음에서 분석한 바 있다. 졸고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문장웹진』 2023년 11월~12월호 참조.
  4. 강동호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5. 이 문제에 대한 담론분석은 황정아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참조.
  6. 인아영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 『진창과 별』, 문학동네 2023.
  7. 시집 『물류창고』와 『도시가스』의 조재룡과 강동호의 해설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강동호 역시 『물류창고』에서부터 이수명 시의 변화가 감지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8. 물류창고라는 말 속에 ‘물이 흐르는 곳에 놓인 창고’의 연상이 담겨 있다. 또한 물류창고 시편들에 등장하는 ‘사진 찍기’ 장면이나 ‘캠프’라는 용어, ‘폭파’ 직전의 묘사나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변형으로서 정숙(靜肅)을 종용하는 관리자의 목소리 등은 세월호를 불러오는 연상들이다.
  9.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2020, 123면.
  10. 백낙청은 민중에 의해 쓰인 글만이 민중문학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문학의 생산은 집필행위라는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협동작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아요.” 백낙청 『민족문학의 현단계』, 창비 2022, 372면.
  11. 흥미롭게도 이수명은 한 시에서 꿈들의 교류를 표현한 적이 있다. “그의 꿈과 꿈 사이에 나는 나의 꿈을 놓았다. 나의 꿈과 꿈 사이에 그는 그의 꿈을 놓았다.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웠다.”(「꿈」 부분,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사 2005) 이 구절은 우연히 쓰인 구절이라기보다 이수명이 자신의 시가 가진 운동성을 감지하고 풀어낸 대목으로 읽을 만하며, 꼭 이수명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꿈에만 붙박여 문학을 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경험할 만한 문학적 행위에 관한 표현으로도 읽힐 구절이다.
  12. 이세기 「시어풀이」, 『서쪽이 빛난다』, 실천문학사 2020.
  13. 이세기 『언 손』, 창비 2010.
  14. 덕적군도와 관련한 내용은 이세기 산문집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 한겨레출판 2015 참조. 특히 토건세력과 싸웠던 기록은 이 책의 「굴업도에서 배우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5. 제사가 지닌 공적 가치에 대해서는 백민정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참조.
  16. 『언 손』에 실린, 이국에서 섬으로 이주해온 여성과 오랫동안 섬에 정착한 할머니들 사이의 교감을 시화한 「이작행」이나 사라진 이주노동자 가족의 행방을 염려하는 내용의 「다알리아와 칸나」가 대표적이다.
  17.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467면.

송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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