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환멸의 경험과 잡종적 상상력
성석제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창작과비평사 2002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영남대 독문과 교수
한번 책을 펼치면 좀체 손에서 떼기 어려운 마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성석제(成碩濟)의 소설은 같은 종류에서 유사한 예를 찾자면 중국 무협지들과 흡사하다. 대본소에서 빌린 여러권짜리 무협소설에 정신없이 빠졌던 경험을 통해 나는 그것이 정상적인 생활리듬을 어지럽힐뿐더러 건강에도 해롭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성석제 소설이 모처럼 수십년 전의 그 젊은날을 다시 떠올려주었다. 다행히 성석제의 책은 두어 시간 안에 작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단편소설로 짜여져 있어 피해가 크지 않은 점이 자랑이다.
한동안 빠져들었던 대상을 뒷날 비난하듯 말하는 것이 떳떳하지 못한 처사이지만, 무협소설의 재미는 요컨대 그 황당무계한 사건진행이다. 여기서 황당무계하다는 것은 우리의 실제현실에 내재한 여러가지 제약과 한계를 마음껏 무시하고 일탈한다는 뜻이다. 뛰어난 자질과 무공을 갖춘 인물들이 아무리 놀라운 기상천외의 활극을 벌이더라도 그것의 현실성을 따지는 것은 아예 부질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작가의 붓끝이 현실의 제약성과 왜소성을 벗어날수록 무협소설 본연의 쾌감은 더욱 증대되는 것이다.
성석제 소설이 발휘하는 마술적인 흡인력에는 어딘가 무협소설을 연상케 하는 요소가 있다. 등장인물들의 비범성에 관한 그의 묘사는 범인들의 초라한 현실과 예리한 대조를 이루지만, 그러나 독자들은 그 때문에 자신의 초라함을 직시하고 우울해하기보다 자기와 경쟁상대가 안되는 우월한 존재의 초인적 능력에 도리어 만강(滿腔)의 경탄을 보낼 뿐이다. 가령 「천하제일 남가이」는 주인공의 설화적인 출생담, 수난으로 점철된 성장과정, 초능력의 실현, 그리고 몰락과 죽음이라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네 단계로 구성된 전형적인 영웅소설이다. 그런데 이 영웅은 힘겨운 노력 끝에 막강한 무공을 쌓든가 고결한 도덕적 품성을 닦아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는 스스로의 주체적인 결단 또는 불굴의 의지에 의해 탁월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천생의 초능력자이다. 씨앗처럼 지니고 있던 그의 어떤 성적(性的) 아름다움은 때가 되면 저절로 개화한다. “자연은 그에게 놀라운 잠재능력을 주었고 그는 그걸 자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조용히, 그러나 올바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력을 다해 계발하고 있었다.”(151면) 위대한 인물이 어느 나이에 이르러 필생의 사명을 자각하듯이 남가이도 사춘기에 이르자 때가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남가이는 자신에게 놀라운 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의식하지만, 그렇게 의식하는 만큼 자신의 인생을 의식적으로 운용하지는 못한다. 전체적으로 그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 인격적 수동성과 내재적 초능력이라는 극단적 대립 사이의 모순이 바로 남가이의 몰락의 원인이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와 「책」의 주인공을 초인이라든가 영웅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가이와 동일한 모순적 존재임은 분명하다. ‘황만근’은 한 인격 안에 바보와 성인을 동시에 구비한, 문학사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가 하는 짓이 바보스러울수록 세속의 영악함이라는 역광(逆光) 속에서 그는 더욱 거룩하게 빛난다. 그의 유일한 ‘비극적 결함’은 과도한 음주인데, 고전비극의 주인공들이 그 결함 때문에 파멸에 이르듯이 황만근도 술 때문에 죽는다. 어떤 점에서 황만근은 작가가 이 세계의 부조리에 대항하기 위해, 또 인간심성의 보편적 사악함을 폭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패러독스의 의인화이다.
그러고 보면 「천하제일 남가이」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나 일종의 전기소설이라는 점이 눈에 뜨인다. 이것은 물론 과거 봉건시대의 가장 정형화된 소설형식으로서, 근대적 산문의 세계에서는 주류적 지위를 잃어버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근년의 우리 문단에서만 하더라도 송기숙(宋基淑)의 「가남약전(略傳)」, 이문구(李文求)의 「유자소전(兪子小傳)」, 윤영수의 「착한 사람 문성현」 같은 비슷한 계열의 작품들이 주목받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서 주인공의 긍정성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직설적이고 순정적이었다. 그러나 성석제는 전기소설의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서술의 어조에서 역설과 아이러니를 감추지 못한다. 즉, 주인공들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송기숙·이문구와 달리 분열적이고 모순적이다.
「책」의 주인공인 ‘당숙’은 책을 사서 모으고 읽는 일에 넋이 나간 인물이고 「꽃의 피, 피의 꽃」의 주인공은 내기와 노름에 빠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들이 단순히 책과 도박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욕구에 따라, 불가항력의 힘에 굴복하듯이, 마치 감염된 병균이 잠복기를 지나 마침내 병의 증세를 일으키듯이 대상에 탐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기보다는 느끼려고 한다. 글자 하나하나의 생김과 책에 있는 낙서며 흠, 색깔을 기억한다. 마치 야생의 동물 수컷이 암컷에게 다가가 냄새맡고 살펴보고 노려보고 툭툭 건드리며 시험을 하는 것 같다.”(118면) “그러는 동안 수십년이 흘렀고 드디어 그는 도박으로 도를 터득하는 경지에 들어섰다. 인생의 허무를 알았고 모든 욕심을 버렸다. 그는 별볼일 없는 화투장을 통해 천하를 내다본다.”(249면) 무엇이 이 인물들을 어떤 대상에 대한 이와 같은 극단의 집착으로, 다시 말해 그 대상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맹목으로 끌고 가는가. 이 질문은 필경 왜 성석제가 그런 인간적 광기에 주목하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유발한다.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는 일은 어쩌면 이 작가의 문학세계 전체를 검토하기를 요구할지 모른다.
앞에서 성석제 소설의 기막힌 재미에 무협지적 측면이 한몫 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물론 그것은 그의 소설의 일면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 일차적으로 그의 문장에서 발원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번뜩이는 익살과 쉴새없이 쏟아지는 재치가 요술쟁이처럼 기발하게 펼쳐지는 상상력의 행진을 따라 때로는 요란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전개되어 숨돌릴 겨를을 주지 않는다. 자기만의 독특한 소설적 화법을 개척한 점에서 그는 가령 이문구 같은 선배작가와 비견될 만한데, 그러나 다양한 지적 수단들을 활용한 문장의 구사에서 그는 오히려 서정인(徐廷仁)과 비교될 수 있다. 서정인의 소설이 그러하듯 성석제의 소설에서도 문장은 독자를 대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독자가 대상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그들의 문장은 비유·역설·반어 등 각종 수사적 기법을 통해 사물과 관념을 뒤집고 해체하여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어하고자 한다. 그런데 서정인의 경우 그러한 지적 수단들은 판소리를 연상케 하는 문장의 호흡 안에 통합되어 어떤 고전적 견고함을 이룩한다. 반면에 성석제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인식의 통합과 표현의 견고성에 대한 불신의 심리학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90년대 소설계를 풍미한 감상주의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 문학의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한 은밀한 야유를 함축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짐작컨대 성석제의 문학적 무의식은 세계에 대한 환멸과 좌절의 경험에서 양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한 대결의 과정을 동반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소설은 한편으로 화사한 낙관주의의 채색을 결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분노의 격정에도 휩싸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성석제의 상상력은 그와 동년배의 과학사학자 홍성욱이 말한 바 잡종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잡종, 그 창조적 존재학」,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참조), 소설의 장르적 성격 또한 그 잡종성에 있는 것 아닌가. 그가 즐겨 다루는 인물들이 주변적 존재라는 사실도 그런 점에서 우연은 아니다. 왜냐하면 깡패·노름꾼·건달·책벌레 등 예외적 인물 내지 사회적 탈락자들, 보헤미안과 아웃싸이더들, 조선시대의 개념으로 방외인(方外人)들에 대한 작가의 줄기찬 관심은 그 자체가 이미 규범적 질서와 도덕적 관행에 대한 의문의 표시이며 해학과 풍자를 쉴새없이 쏟아내는 그의 ‘입심’ 또한 문법적 언어의 단아함에 대한 미학적 교란, 하나의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지금까지의 언급에서 유보되었던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과 「욕탕의 여인들」일 것이다. 전자는 해학과 풍자가 적절히 배합된 능란한 화술로 냇가에 소풍나온 소도시 친목계원들의 모임을 서술해나간다. 가족들까지 데리고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떠들썩하게 모여든 이들이 표면상 친목계라고 하지만 실은 건달집단임이 차츰 드러난다. 작품은 이 전과자들의 각기 특색있는 이력을 실감나게 소개하여 놀랍도록 다채롭고 생동하는 하나의 인생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연극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 즉 「욕탕의 여인들」은 일인칭 서술에 적합한 요소–자전적 요소–를 많이 지닌 작품이다. 이십대 젊은이의 방황과 고뇌, 간난과 시행착오가 네 여성들을 거치는 순례의 틀 안에 응축됨으로써, 또다시 비유를 들자면 옴니버스 영화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의 저변을 흐르는 자조(自嘲)와 자기연민의 감성적 혼합체가 작가 성석제의 개인적 상처를 미화되지 않는 날것 상태로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측면이 작품의 긴장을 그만큼 이완시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서술시점의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은 삼인칭 서술이다. 그러니까 화자는 은폐되어 있고 그 점에서도 연극적 구조에 근접한다. 「욕탕의 여인들」은 주인공이 곧 화자이므로 시점의 일관성이 저절로 보장된다. 그런데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나 「천하제일 남가이」 같은 작품은 결코 일인칭으로 서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들 자신이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자기모순을 통찰하고 복잡한 수사적 기법을 구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인칭 서술로 해야 하는데, 그것은 작품의 문학적 효과 전체를 처음부터 재구성하는 새로운 전략을 요구한다.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책이 서술자에 해당하는 인물을 작품 끝부분에 뒤늦게 등장시켜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형식적 고충뿐만 아니라 더 커다란 문학적 과제가 성석제의 뛰어난 재능을 기다리고 있다 하겠다.